소설리스트

전생검신-688화 (68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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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암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밤이 막 끝나가는 새벽의 하늘은 밤의 비명소리에 찢겨서 점차 빛의 흐름이 메아리치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다. 동쪽의 하늘은 이미 가공할 마력때문에 쉴새없이 들썩이고 있었으며 술법사들은 그 마력의 유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거대제단에서 결계를 유지하던 만하령문의 술법사 하나가 침음성을 흘렸다.

“ 이 울음소리는 무시무시하군...”

“ 대요괴를 상대할 때도 들어본 적 없다.”

신시의 결계를 유지하는 술법사 중 상급 술수를 익히지 못한 자 없었으나 그들 모두가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생각하며 격렬한 공포를 표출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음한지기와 마를 뿜어내는 대요괴라 하더라도 한계는 있었고, 그들은 퇴마행을 하면서 암묵적으로 인간과 요괴의 한계를 어림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강림하려 하는 존재는 그런 한계 따위를 무시해 버리는 절대적인 무언가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단 위에서 그들을 통솔하고 있던 십이율 문주, 해동밀천주가 술법사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 진정하라구. 마왕급 존재가 다수 등장할거란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잖아.”

“ 하지만 이런 게 마왕이라고 하면...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대요괴보다 수십 배 이상 강력한 존재입니다.”

상급술사 중 하나가 한숨을 토해내자 해동밀천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 나도 이런 괴물들은 처음이군. 하지만 뭐, 율주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난 그냥 여기를 지켜야할 것 같은데 그쪽은 어떠시오? 제갈사 선생.”

해동밀천주가 슬그머지 옆에 있던 제갈사를 쳐다봤다. 제갈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 내 의견도 같다. 요격할 수 없을 바에는 가만히 앉아있는게 낫지.”

“ 하하. 신기묘산따위는 없는 거요?”

제갈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제갈사를 보고 있던 해동밀천주가 속으로 혀를 찼다.

‘ 쳇.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제갈사의 심기를 읽을 셈으로 십이율주가 일부러 교활한 해동밀천주를 그에게 붙여놓았으나, 그는 여태까지 제갈사가 뭘 원하고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제갈사가 마음을 숨기는 수법이 뛰어난데다 그가 감지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동료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게 분명했다. 졸지에 율주에게 자신의 무능을 보이게 된 해동밀천주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해동밀천주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 달이 밝군...”

“ 흐음.”

제갈사는 되려 그 사소한 말에 관심을 보였다. 특이하게도 오늘은 새벽이 거의 다 저물고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는데도 새벽의 달이 지지 않고 휘황찬란하게 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다만 흔히 있을 법한 현상이었기에 해동밀천주는 그저 주의를 환기하려는 거였는데, 제갈사는 뜻밖에도 입을 열었다.

“ 문제군. 난 일단 막으러 나가보겠다.”

“ 뭐? 당신 멋대로 어딜 움직인다는 거요?”

“ 안 도와줄거면 여기 가만 있는 게 좋을걸.”

스읏

그 순간 해동밀천주와 옆에 있던 밀교 술법사 다섯 명이 동시에 속박의 주술과 우보법을 걸었다. 굉장히 빠른 술법발동인데다 그들 하나하나가 수준이 높았기에 이대로라면 제갈사가 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제갈사는 잠시 멈칫거리는 듯 하다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 엔두라.”

파직!

“ 으악.”

제갈사에게 속박술을 걸려고 하던 술법사들 모두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검은 뇌전이 튀기면서 강한 반발력으로 술법을 무효화시킨 것이다. 해동밀천주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갈사가 그의 금강저를 든 채로 해동밀천주의 인중을 겨누고 있었다. 해동밀천주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자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 너흰 동방 촌놈들이라 배화교 보고밀 파의 마법같은건 모르겠지. 영지주의 마법은 계파가 아예 다르니 방어주술도 잘 안 먹히거든.”

“ 제길. 네놈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으면 이렇게 쉽진 않았을거다.”

해동밀천주가 이를 갈았다. 그 또한 술법의 종사였기에 실력이 제갈사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제갈사를 죽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자신의 술법을 제한한 결과 제압당하고 만 것이다. 제갈사가 차갑게 웃더니 금강저에 힘을 불어넣었고, 해동밀천주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 뭐, 뭣 너 설마...”

퍼억

다음 순간 해동밀천주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그는 설마 십이율의 본산이자 신단수 바로 앞에서 마왕들을 앞두고 제갈사가 자신을 죽일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저항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제갈사가 십이율을 적대하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살해당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제갈사는 주변에 있던 술법사들까지 확실히 흑색 창을 소환해서 해치워버린 후 중얼거렸다.

“ 봉황소환까지 기다리면 늦겠지. 슬슬 움직여야겠다.”

제갈사는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나중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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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팔부신중의 강림을 느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신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백련교주는 팔짱을 낀 채 새하얗게 타오르는 새벽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곁에 있던 어둠의 용에게 말했다.

[ 신이시여. 감히 청하오니 저 팔부신중을 토벌해주십시오.]

어둠의 용은 힐끔 머나먼 빛 속에서 소환되고 있는 6체의 팔부신중을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 창힐의 화신을 잡아먹으면 그 건방진 놈에게 본보기가 되겠지. 기어오는 혼돈의 총애를 받는답시고 건방떠는 게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련교주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많은 지배자 중에서도 창힐에게 원한을 가진 존재를 소환했기에 소환조건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었고 적극적으로 토벌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부디 부탁드립니다.]

[ 크흐흐... 내가 저깟놈들을 못 없앨 것 같으냐.]

휘오오

어둠의 바람이 몰아치더니 [옛 지배자], 카르파도크의 폭왕이 출진했다. 그는 마도사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머나먼 성좌의 이계에서 100개의 별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몰살시켜서 큰 왕국을 세웠으며 한 번의 숨결으로 별을 불태웠다는 전설을 지닌 존재였다. 본체의 크기는 행성 열 개를 합친 것만큼 거대했으며, 힘은 당연히 해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으나 물질계의 화신은 그 힘을 일부밖에 쓸 수 없다는 게 문제긴 했다. 하지만 - [옛 지배자]는 [옛 지배자]. 창힐의 화신이 곤욕을 치를 것은 뻔한 일이었다.

백련교주가 폭왕의 화신이 출진하는 걸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뒤에 서 있던 한백령이 말했다.

“ 교주는 정말 잔혹하시오.”

[ 한백령.]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 창힐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매일같이 무고한 교인을 10명씩 저 화신의 산제물로 바쳤소. 이건 인간으로써 용납될 수 없는 일이오.”

한백령이 직접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으나, 노회한 한백령마저도 항의할 정도로 그동안 잔혹한 인신공양이 이어졌다. 폭왕의 화신을 소환하는데만 무고한 백련교인이 3천명이나 제물로 바쳐졌으며, 계약에 성공한 후에도 소환유지를 위해서 매일 10명씩 산채로 잡아먹혔다. 아무리 한백령이 화신류의 보신을 원한다 해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의 폭거였다. 이래서야 광신에 빠진 마교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 제물로 바쳐진 이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산제물이 된 자들에게는 전신마취약을 먹여서 최대한 고통을 줄였다.]

“ 고작 그런 말로 끝날 말이오? 백련교의 초대교조인 달마께서 교주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어떤 말을 하시겠소?”

한백령이 한껏 비아냥거리자 옆에 서 있던 독고준이 불쾌한 듯 말했다.

[ 지금 교주님을 비난해서 어쩌자는 거요? 적은 눈 앞이건만.]

[ 준아. 가만 있어봐라.]

[ 네.]

백련교주가 한백령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 달마께선... 내 행동을 보면, 뭔가 말하고 싶겠지. 나는 그 분의 뜻을 따라가고 있을 뿐.]

“ 무슨 말이오?”

[ 호법사자 한백령. 모든 비판은 이 일이 끝난 후 듣겠소. 하지만 지금은 내 명령에 따르시오.]

교주의 눈에서 핏빛이 번득였다.

[ 지금 즉시 호법사자들은 신단수의 핵으로 향하시오. 그리고 결계의 주축을 유지하고 있는 십이율주를 죽이시오.]

“ ......!!”

한백령은 잠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독고준을 쳐다본 후 말했다.

“ 둘이선 힘들 것이오.”

[ 걱정 마시오. 지원군이 더 갈 것이니.]

스슥

근처에서 수신류의 고수 세 명이 걸어나오자 한백령은 제갈사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교주는 천령단의 고수를 수신류 내에 더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세 명 정도이지만 더 될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수신류 최상위 장로중엔 틀림없이 호법사자와 동급의 강자가 있다.]

한백령은 그 정보를 들었을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이렇게 두 눈으로 보자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한의 내공이 은연중에 느껴졌으며 심지어 감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백령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 호법사자급 다섯 명이면 율주라도 죽일 수 있겠지만...’

벌써부터 뒤를 치는 게 옳은 일인가?

그녀는 교주가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백련교주는 [옛 지배자]의 화신이 틀림없이 팔부신중을 물리칠 수 있다고 과신하고 있는 듯 했다. 점차 한백령은 제갈사의 편에 붙으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생각이 어쨌든 그녀는 포권을 했다.

“ 존명.”

일단 명령이 떨어진 이상 십이율주를 죽인다.

그는 백련교에 백해무익한 존재가 틀림없으니까.

한백령을 포함한 백련교 호법사자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 - 신시의 수련장에 있던 미야모토 무사시는 멈칫했다.

“ 왔군.”

그는 백웅 일행을 수련시켜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행이라고는 해도 현재 그의 앞에 서 있는 건 오직 검마 서문대룡 뿐이었다. 나머지는 도중에 수련에서 탈락해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극호마저도 최대한 버텼으나 나흘 전에 체력의 한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수련을 그만뒀다.

하지만 검마 서문대룡만큼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주장한 지옥훈련을 끝까지 버텨낸 것이다. 마치 바위처럼 함묵한 채 우뚝 서 있는 검마 서문대룡을 쳐다보던 무사시가 갑작스럽게 일섬을 날렸다.

절기

무쌍참

까앙!

수만 마리의 이족을 일거에 베어버렸던 절대지경의 일검이었으나 검마 서문대룡은 가볍게 튕겨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무사시가 히죽 웃었다.

“ 이제 내숭은 안 떨기로 한 건가?”

“ 고맙소.”

검마 서문대룡의 몸은 꾀죄죄하게 땀과 멍으로 가득했으나 그의 눈빛은 한없이 맑았다. 그가 포권했다.

“ 당신 덕에 백웅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소.”

“ 이해가 안 가는군...”

미야모토 무사시가 의혹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 또한 천재다. 그리고 영웅이며 간웅의 기질이 있지... 당신만한 자가 그저 한 사내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 누구나 목숨은 한 개요.”

“ ......?”

“ 하지만 수십 개의 목숨을 버리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하는 이가 있소. 나는 그처럼 할 수 없기에 이 한 목숨으로 도울 수밖에.”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 곧 알게 될 거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 살아남으면 그 때는 나와 검을 겨뤄보지. 지금의 당신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죽일 수 있어.”

파앗

미야모토 무사시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검마 서문대룡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부디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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