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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제갈사와 일행들은 열의 인도를 받아 오거천문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예전에 백웅이 왔던 것과 같은 만귀전 내부의 궁궐이 드러났고, 그 궁은 무려 99개의 방을 지날 정도로 거대하고 넓었다.
[ 너희는 귀신과 눈을 마주치지 말 것이며, 그들을 보지 말 것이며,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백웅과 달리 열은 그들에게 특수한 경고를 했다. 하지만 제갈사는 백웅처럼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일일이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백웅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미 만귀전의 강대한 음신(陰神)의 힘을 통해 느꼈기 때문이다.
' 저 경고를 어기는 순간 그 자는 살해당하겠지. 또한 만귀전에 종속되어 영겁토록 노예가 된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나 이 장소 또한 마경(魔境), [옛 지배자]의 영토나 다름없다. 한낱 인간으로서는 백번 죽어도 당연한 장소였으며 이 자리에서 찰나라도 숨을 쉴 수 있는 건 오로지 열이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욱의 사도로써 환영받았던 백웅은 만귀전을 관광지처럼 둘러보아도 무방했으며 귀신과 잡담을 나눠도 되었을 테지만, 평범한 인간인 그들은 결코 백웅처럼은 할 수 없었다.
' 설마 열의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바보같은 놈이 있을까...'
제갈사는 비교적 난이도가 쉬운 경고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사건이 터졌다.
[ 킬킬킬킬! 이리 와라.]
얼굴이 길쭉한 귀신이 히쭉 웃으며 흉몽(凶夢)의 빛이 번득였다. 대라신선을 뛰어넘는 소귀신의 언령(言靈)이 힘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혼령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백련교주의 명으로 참전했던 원로원 고수 중 두 명이 사망했다. 그들은 멋모르고 근처에 앉아있는 귀신들 중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그 순간 귀신이 술수를 부려서 그들의 영혼을 먹어치운 것이다.
끄억
백련교 원로원 고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살상한 귀신은 영혼을 먹어치우고는 맛있다는 듯 트름을 했다.
"이런 제기랄..."
극호가 그 순간 귀신을 공격하려고 자신의 창을 붙잡았으나 옆에 있던 검마가 극호를 급히 제지하며 전음을 보냈다.
[ 관두게! 우리 힘으로는 저 귀신 한 마리도 이기기 힘들지 몰라. 여기서 싸우면 전멸밖에 되지 않네.]
[ 하지만 저거 보십시오. 저 자식들 지금...]
[ 알아. 하지만 참게!]
[ 큭, 빌어먹을.]
극호가 분노한 이유는 단순히 아군이 살상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로원 고수들의 영혼이 빨려들어가서 사망한 후 그들의 육체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는데, 그 육체에 슬금슬금 귀신들이 다가와서 말 그대로 분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기다!
고기!
우드드득 콰지직
왁자지껄 떠드는 귀신들이 인간의 살점과 뼈를 뜯어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눈알덩어리 하나가 극호의 발치까지 핏줄기와 함께 굴러왔다. 극호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잔혹함에 치를 떨었으나 검마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싸울 순 없었기에 참아야만 했다.
' 백웅... 너는 이런 극악한 광경을 수십 번이나 봐온 거냐?'
단순히 흑요석의 기억을 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참혹함이 피부로 와닿았다. 세계의 이면이란 들여다보는 순간 보통 인간을 미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극호는 지금까지 백웅이 그냥 멍청하고 근성 좋은 녀석인 줄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 전생록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의지와 정신력을 생각하니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들은 열을 뒤따라서 거대한 옥좌의 방의 앞에 당도했다. 열은 옥좌의 방 앞에서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 폐하의 방 앞이다. 그럼 문을 열겠다.]
제갈사가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 왜 그러는가?]
"저 혼자만 그 분을 알현하겠습니다. 부디 남은 일행을 보호해 주십시오."
[ 감히 네가 뭔데 그런 제안을 하느냐?]
열이 불쾌한 기색을 비쳤지만 제갈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삼황오제의 본체(本體)를 보는 순간 보통 인간은 그 존재감 때문에 미쳐버리고 맙니다. 단체 미치광이를 이끌고 나가는 것도 수고스러운 일인지라 저 혼자만 들어가는게 낫습니다."
[ 너는 안 미칠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마도사인지라."
[ ... 좋다. 수고스러운 일은 나도 싫으니.]
쿠구구구...
잠시 후 옥좌의 방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제갈사는 열을 따라 끝없는 어둠과 광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백웅이 들어가자마자 만귀가 도열한 알현의 방에 도달했던 일과는 달리, 이번에는 마치 만나는 자를 시험하려 하는 듯 섬뜩한 공포가 스며들었다. 제갈사는 아마도 전욱이 자신을 알현하려는 자의 역량을 알아보려 하는 거라는 추측을 했다.
저벅.
약 이백 보 정도를 걷자 그제서야 알현의 방에 빛이 들어오며 수십 장에 이르는 어둠의 거인이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희미한 빛의 잔영 속에서 그 존재는 턱을 괴고 제갈사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그 어둠의 거인을 보는 순간 제갈사는 숨이 막혔다.
이것이, 삼황오제.
"으윽... 흐으으."
제갈사는 자신이 잠시동안 공포와 광기 때문에 기절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걸 완전히 알게 된 것이다! 마도서나 소환의식으로 간접적으로 느꼈을 때와는 천지차이로써 그동안 광기에 몸을 담고 살아왔던 제갈사는 진정으로 절망으로 세상이 붕괴하는 기분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관자놀이에 회전칼날을 빙글빙글 꽂아넣어서 뇌를 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저 존재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갈사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채 우주의 끝을 영겁토록 보고 있는 듯한 절망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크헉..."
제갈사는 또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 ... 이제 좀... 적응해야 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전에 없던 광기가 몸을 에워싸고 있었고, 마력(魔力)이 그의 몸을 최소한으로 보호해주었다. 최정상급의 마도사답게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어느 정도 광기와 절망에 저항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옛 지배자]와 계약을 맺어 강력한 마법으로 평상시에 정신을 보호하는 제어장치를 마련해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이 자리에 진소청이나 검마 등의 무인들이 왔다면 결코 제갈사처럼 정신을 회복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되려 히쭉 웃으며 광기에 절여진 채 이성을 되찾았고, 침착하게 일어서서 예를 갖추었다.
"왕이시여, 무례를 용서하소서."
그는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미천한 인간 제갈사가 삼황오제 전욱을 알현하니 크나큰 누대의 영광으로 여기겠나이다."
그렇다.
눈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삼황오제 전욱!
만귀전의 주인이자 하늘과 땅을 나눠버린 장본인이었다.
전욱은 지금까지 제갈사가 발광하며 꿈틀거리던 광경을 무감정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제갈사가 예를 갖춰오자 목소리에 이채를 띄었다.
[ 벌레치곤 괜찮은 놈이구나. 네가 창힐의 팔부신중에 대해 알고 있다고?]
주르륵
제갈사의 눈가에는 피눈물이 자국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마도사 특유의 정신보호력으로 버티고는 있으나 결코 전욱과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는 피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대답했다.
"청컨대 저희에게 은혜를 내려주신다면 반드시 그들중 몇을 붙잡아서 전욱께 바치겠나이다. 함정을 파서 창힐이 본체를 드러내게끔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 흐음...]
전욱은 뭔가 생각하듯 자신의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 생각같아서는 너희 중 하나에게 나의 사도로써 권위를 내려주고 싶으나, 너희는 모두 벌레처럼 약하구나. 그리고 주목할만한 요소도 없다. 아무리 창힐을 잡고싶다지만 너희가 내 위엄을 손상시킬 거라 생각하니 꺼려지는군.]
"지극히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백웅의 경우가 정말 특수했던 경우였다. 보통 삼황오제의 사도로 임명되는 건 최소한 대요괴나 대라신선을 뛰어넘는 존재로써, 타 신격의 사도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칠요도 없는 일개 인간에게 사도의 권능을 내려주는 건 전욱에게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갈사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러하시다면 저희에게 화신을 내려보내 창힐을 붙잡으심은..."
[ 인과율 때문에 내키지 않는다.]
전욱이 팔짱을 꼈다.
[ 내가 화신을 내려보내면 다른 삼황오제가 크게 언짢아할 것이다. 그리고 힘도 많이 소모된다.]
"......"
[ 허나 팔부신중의 힘을 생각하면 너희에게 어중간한 도움을 줘봤자 잡는다는 보장이 없겠군...]
"폐하께서는 저희의 정보를 반신반의하고 계십니까?"
[ 그렇다. 너희같은 벌레의 이야기만 듣고 내가 섣불리 나설 수는 없다. 네놈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게 창힐의 계략일 수도 있고.]
역시 그렇게 쉽게는 안 되는 건가?
제갈사가 내심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음신 열이 말했다.
[ 폐하. 그냥 돌려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헛소리에 장단맞춰줄 이유는...]
[ 너는 가만히 있거라, 열.]
[ 네.]
전욱은 침묵하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 려(黎)를 불러와라. 그와 의논하겠다.]
[ 불러오겠습니다.]
슈욱!
잠시 후 열은 고대의 술수를 사용해서 거대한 음기를 보유한 마신(魔神)을 소환했다. 소환된 마신은 마치 정령(精靈)처럼 그 자리에서 형체없이 안개처럼 꿈틀거리다가 잠시 후 인간처럼 변해서 관복을 입은 모습이 되었다. 약간 수척한 안색의 문사(文士)처럼 형상화한 그 마신이 전욱에게 예를 갖추었다.
[ 부르셨습니까 주군.]
[ 잘 왔다, 려. 헌데 너는 아직도 인간의 형상에 익숙치 못한 듯 싶군.]
그러자 려가 쓴웃음을 지었다.
[ 황제 공손헌원의 악취미일 뿐입니다. 우리가 왜 가면을 써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황제의 명을 거절했다면...]
[ 그 일은 더 논하지 말라.]
전욱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려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갈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엄청난 고위존재다.'
전욱은 패도를 걷는 존재이자 냉혈한 폭군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성질에 못이겨서 부하를 살상하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지금 려는 대놓고 전욱의 심기를 거슬렀는데도 그저 경고에 그친 것이다. 려 또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지닌 마신인 게 틀림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 려는 삼황오제의 오른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사의 두뇌가 영활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열이 려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야기를 들은 려가 힐끔 제갈사를 쳐다본 후 전욱에게 말했다.
[ 주군. 정 그렇다면 저를 지상으로 파견하심이 어떻습니까?]
[ 네가 나서겠단 말이냐? 인과율이 두렵지 않으냐?]
[ 후후. 제가 축융족을 써먹으면 그런건 큰 문제가 아닙니다.]
[ 그렇겠군. 그럼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 물론입니다.]
[ 너도 손이 근질근질한가 보구나.]
탄식하던 전욱이 말했다.
[ 좋다, 잠시동안 너의 만귀전 소속을 해제하겠다.]
스으으으
전욱의 손가락이 려를 가리키자, 인간문사처럼 생긴 그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몸체가 급격히 커지더니 종래에는 몸 크기가 전욱에 맞먹는 거대한 불꽃의 거인이 되었고, 그의 몸에서 청염(靑炎)이 흐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 오오오... 얼마만에 이 모습이 되는가...]
려가 기쁜 듯이 중얼거리자 전욱이 말했다.
[ 팔부신중을 모두 죽이되 한 놈은 살려서 만귀전에 데려와라, 축융(祝融).]
[ 곧 다시 뵙겠습니다, 폐하.]
스아앗!!
축융의 모습이 사라졌다.
제갈사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전욱이 제갈사에게 말했다.
[ 마도사여. 축융의 소환술식을 주겠다.]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사의 머릿속에 갑자기 하나의 주문이 새겨졌다. 전욱은 신격답게 순식간에 주문을 전수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굉장한 고대의 주문이라서 신비(神秘)인 게 분명했고 인간의 문명으로는 수천 년이 지나도 구현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 팔부신중이 쳐들어오면 축융을 소환해라. 그가 너희를 도와서 팔부신중을 잡아죽이리라.]
"폐하의 은혜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 그럼 물러가라.]
파앗
제갈사는 잠시 후 열의 인도에 따라서 옥좌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제갈사를 걱정스럽게 맞이했다.
"제갈사!"
"괜찮은가?"
"뭐, 괜찮아. 그보다 일단 나가자."
사실 괜찮지 않았다. 제갈사는 짧은 시간동안 삼황오제와 마신을 대면한 댓가로 수명이 30년 이상 줄어버린 게 분명했다. 아무리 수명을 연장하려 해도 결코 3년 이상 살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제갈사는 자신의 목숨을 소모품이라 생각했으므로 그 사실에 딱히 감흥이 없었다.
쿠웅 - !!
그들은 오거천문을 나와서 봉래도의 출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때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전욱이 꼼수를 써서 우리를 도와줄 거다."
"꼼수라니 무슨 말인가?"
"사도를 임명하든 화신을 내려보내든 인과율에 정면으로 걸리는 일이라서 전욱은 함부로 시도하지 못해. 그래서 인과율의 제약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만귀전 소속의 마신인 려를 소속해제시켜서 일개 마신인 축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축융의 소환술식을 주었으니 전욱은 최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검마가 황당한 듯 말했다.
"그런 게 통하는가?"
"통하지. 이런 방법은 전욱 뿐만이 아니라 모든 [옛 지배자]가 암중에 영향력을 뻗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야. [부름]을 써서 타락시키는 방법을 같이 쓰기도 하지."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어."
"뭔가?"
"축융을 내가 소환해야 하는데 아마 축융을 소환하고 나면..."
제갈사가 히쭉 웃었다.
"난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