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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제갈사는 백련교주가 비록 팔부신중의 습격에 한쪽 팔을 잃었지만, 원영신을 이용한 공격으로 그들에게도 심상치 않은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므로 교주를 경계해서 팔부신중의 다음 습격은 보다 철저하게 이뤄질 것이고, 본체인 창힐의 신중함에서 유추해볼 때 그 시간은 꽤 오래 걸릴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최소한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한 달 이내에 남쪽대륙에서 백련교까지 이동해서 십이율과의 동맹, 그리고 대비책까지 마련한 것은 전적으로 제갈사의 능력이었다. 제갈사는 십이율주와 대면한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율주. 봉래도의 위치를 알고 있소만 그곳을 지금 당장 칠 수 있겠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천계의 지부인 봉래도가 현재 해신에게 침략당해 있소. 그 곳을 칠 수 있다면 전욱의 만귀전으로 통하는 오거천문의 통로를 확보할 수 있고, 보패를 손에 넣을 수 있소. 보패를 얻어서 전력강화를 꾀하는 것이오."
"... 호오!"
십이율주는 제갈사에게 정보를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묻지는 않겠어. 그런데 지금 네 말대로라면 봉래도는 강력한 해신의 마력(魔力)으로 보호되고 있을텐데 어떻게 들어갈 생각이지?"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다 쓸어버릴 수는 있겠소?"
"어렵지 않을걸."
"탐라국의 칠성단(七星檀)으로 가서 강한 영력을 불어넣으면 열릴 거요."
"......!!"
십이율주가 그 말을 듣자 꽤 놀란 듯 했다. 이윽고 제갈사에게서 칠성단의 위치를 들은 그는 팔짱을 낀 채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뒤에 서 있던 삼사를 불렀다.
"가 보자."
"알겠습니다."
우우우웅 -
잠시 후 십이율주는 삼사가 삼재(三才)의 형상으로 둘러싼 가운데에 들어가서 자신의 은하구절편을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갈사는 힐끔 진소청에게 시선을 보내며 전음을 보냈다.
[ 진소청. 지금 십이율주를 벨 수 있겠나?]
제갈사는 어떻게든 십이율주를 제압해서 해방목요를 빼앗고 싶었다. 사실 대술법은 해방목요만 빼앗으면 천우진 등의 도움을 빌어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중요한 것은 목의 가시같은 십이율주를 한 번이라도 제압하는 것이다. 기습을 해서 비겁하다는 생각 따위는 제갈사의 머릿속에 없었다.
하지만 진소청에게서 들린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 불가(不可).]
[ 어째서? 이만큼이나 큰 틈을 만들었는데도 안되는 건가?]
[ 미야모토 무사시가 공간의 틈 속에서 십이율주를 호위하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지오. 처음부터 그가 여기에 있었소.]
진소청은 아직까지 무사시의 은신절기를 완벽히 간파할 정도는 되지 않았으나 처음부터 무사시가 있을거라고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를 감지하는 게 가능했다.
[ 쳇...]
제갈사는 내심 혀를 찼다. 이 자리에 천우진도 같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그렇게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십이율주는 그 정도의 위험이 있다면 애초에 주문을 외우지 않으리라.
파앗
잠시 후 십이율주가 들고 있던 은하구절편이 명동하며 푸른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십이율주의 몸이 초록빛과 함께 사라졌고, 그들은 다같이 공간을 이동한 듯 했다. 제갈사는 잠시동안 기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십이율주는 삼사와 함께 다시 그들 앞으로 이동해 왔다.
"문이 열렸어."
"해신족 토벌에 우리 도움을 받으시려고? 보패를 혼자 드실 수 있는 기회인데."
"에이 서운하게 그러지 마. 동맹관계잖아?"
자못 십이율주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제갈사와 십이율주 사이에는 흉험스러운 심계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십이율주는 제갈사의 정보가 사실인걸 확인했지만 자신의 전력만 쓰는 게 싫은데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몰랐기에 조력을 받고 싶었고, 제갈사는 처음부터 십이율주가 다시 돌아올 걸 예상한 것이다.
' 그리고 지금 우리끼리 가서 봉래도를 토벌하긴 위험하니까 저 율주놈을 방패막이로 내세워야지...'
백웅 일행끼리만 가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의 정보를 일부러 흘린데는 이유가 있다. 제갈사가 말했다.
"좋소. 대신 가서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주셔야 겠소."
"뭔데?"
"가서 말씀드리지요."
"불길한걸~"
파앗
그들은 칠성단에 열린 문을 통해서 봉래도로 진입했다. 전력은 십이율주와 미야모토 무사시, 삼사는 물론이고 백련교 측에서 호법사자인 한백령과 원로원 고수 몇 명이 가세했다.
그리고 근처의 마수를 퇴치하며 봉래도의 중지(重地)로 향하자, 그들은 목불인견의 참상을 볼 수 있었다.
끼에에엑!
크아악!!
곳곳에서 어인과 상위 해신족들이 삼지창이나 흉기를 들고 달려들어왔다. 그 숫자는 무려 수천 마리나 되었는데 검기를 쓰지 않으면 비늘에 칼도 안 들어가는 괴물도 꽤 있었다. 일행은 해신족들을 처치하다가 점차 적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걸 느꼈다.
제갈사는 생각했다.
' 역시 해신이 죽었나 아니냐는 천지차이군. 해신이 죽은 후에는 백웅 혼자서도 느긋하게 다 쓸어버릴 정도로 약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기억과 비교하면 하나하나가 3배는 더 강해 보인다.'
이 자리에 와 있는 건 절대지경의 고수가 세 명이나 되는데다가 호법사자까지 함께 있는데도 마수와 해신족의 숫자가 마치 해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려 일천 마리 이상을 도살하는데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신족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십이율주가 짜증난다는 듯 툭 내뱉었다.
"제길. 귀찮군. 무사시!"
쉬익
한참 적을 베어넘기고 있던 무사시가 십이율주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귀찮은 듯 말했다.
"내게 얼마나 일을 시킬 생각이냐? 율주."
십이율주가 자신의 인형탈 머리부분을 벅벅 긁었다.
"난 이런데서 칠요의 힘을 쓸 수 없어. 아깝단 말이지. 네 녀석이 힘을 써 줘야겠어."
"싫다. 내 검은 이런 생선대가리나 베려고 연마한 게 아니다."
"어차피 시간낭비하면 생선대가리가 수만 마리나 불어날 텐데 무슨 똥고집이야? 정말 여기서 죽을 셈인가?"
십이율주는 무사시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며 으르렁거렸다.
"하라면 해. 원할 때 제대로 한번 붙어줄 테니까."
"그 약속 지켜라."
위잉
순간, 무사시의 도(刀)가 청월(靑月)처럼 빛나며 길다란 도신(刀身)을 늘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검강이나 도강같은 강기와는 달리 어딘가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고, 이윽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기세로 수십 장이나 길어졌다.
쿠구구구
엄청난 속도로 늘어난 무사시의 도는 갑자기 산조차 갈라버릴 것처럼 커졌고, 종래에는 하늘을 절반으로 나뉠 듯이 치솟아 올랐다. 그 위용을 보고 있던 진소청이 침음성을 흘렸다.
"굉장하군..."
무사시의 의념이 감지하는 범위가 점점 늘어났고, 그의 정신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무사시가 일섬을 가했다.
절기(絶技)
무쌍참(無?斬)
푸콰콰콱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산야를 가득 채워서 맞은편 산까지 우글거리고 있던 어인들의 진격이 - 갑자기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뜬금없는 정적은 숨을 세 번 쉴 정도의 간극이 지난 후, 피가 개울을 이루면서 처참한 광경으로 드러났다.
후두두둑
후두둑
순식간에 무사시의 무쌍참이 해신족 수만 마리의 목을 동시에 베어버린 것이다. 베인 자들의 목은 하나같이 피가 뒤늦게 배어나올 정도로 깔끔하게 베였고, 그 누구도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투두두둥
해신족들의 동체가 분리되면서 시체더미가 산의 등성이를 따라서 마치 눈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세상천지가 시체로 뒤덮인 듯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무사시는 상당한 기운을 소모한 듯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고, 옆에서 정적이 찾아온 전장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십이율주가 이죽거렸다.
"발도(拔刀)의 범위 내는 모두 벨 수 있는 의념절기... 볼 때마다 쓸만하다니까."
"잡졸을 얼마나 베어도 자랑거리는 못 된다. 네놈은 첫대면에 반격했잖나."
"뭐 그렇지."
제갈사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 발도의 범위? 그럼 저 무사시라는 놈은 수십리 밖도 벨 수 있다는 건가?'
그는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이내 포기해버렸다. 무(武)라는 방면에 있어서는 차라리 백웅이 자신보다 나았기에 도저히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절대지경의 고수는 초인(超人)이라는 것!
백웅의 전생이 하도 고위존재들을 적대하다보니 절대지경이 초라해보이는 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절대지경의 고수는 인간세상의 병력이나 권력이 무의미해지는 절대자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절대지경이 아니라면 얘기조차 될 수 없을 지경!
그들은 해신족을 전멸시킨 후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학대당하던 신선들을 구출하고 이흥패를 만날 수가 있었다. 이흥패가 쳐 두었던 방어결계는 삼사가 해제했다. 이흥패를 마주친 제갈사가 말했다.
"봉래도주 이흥패 맞나?"
[ ... 너는... 사악한 마도사군...]
대라신선 이흥패가 노기를 띈 목소리로 말하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너는 그런 마도사에게 봉래도를 구원받은 형편없는 놈이지. 과거의 선계 영웅이여."
[ ... 원하는 게 뭐냐...]
"상급보패 반황주(拌黃珠)를 내놔라. 그럼 봉래도의 신선들을 구출해서 천계에 되돌려주마."
[ 응하지 않겠다면.]
"여기 내버려두고 가거나 뭐... 신선의 소체는 흔하지 않으니까 이족의 세포를 이식해서 배양해 볼까? 괜찮은 전투인형이 나올 것 같긴 해. 악신한테 제물로 바쳐도 되고."
이흥패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 악랄한 놈... 좋다. 가져가라.]
"세상엔 나보다 나쁜 놈이 많은데 말이지."
스르르륵
이흥패가 반황주를 제갈사에게 넘기고 소멸하자 그는 물끄러미 반황주를 쳐다보더니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십이율주. 이 반황주는 당신에게 드리겠소. 그럼 해방목요와 세계수의 힘을 빌린 대술법이 한층 쉽게 전개되겠지."
"고맙군."
십이율주가 손을 내밀었으나 제갈사는 반황주를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대신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겠소."
"뭐지?"
"즉시 오거천문을 열어야겠소. 도와주시오."
"......"
십이율주의 기세가 냉막해졌다. 그는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어."
"왜 말도 안 되지?"
"여기에 만귀전의 출입문인 오거천문이 있다 해도 거기에 출입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문지기에게 여기 있는 모두가 전멸당할 뿐. 헛소리 하지 말고 반황주나 내놔."
"정말이오?"
"우리는 그 문지기를 상대할 수 없어. 절대 못 이겨."
"후후후."
"왜 웃지?"
"그냥."
제갈사는 킬킬 웃었다. 왜냐하면 지금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 십이율주 저 놈은 오거천문을 지키는 게 음신(陰神) 열이라는 걸 알고 있군...'
그리고 만귀전에 대해서도 이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막연히 삼황오제와 만나는 문을 연다고 하는데 저렇게까지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열의 힘은
확실히 마왕급 이상이라서 여기에 있는 전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으나,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또한 제갈사는 십이율주가 삼황오제와 직접 대면하는 걸 지독하게 꺼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십이율주가 삼황오제를 피하는 이유.
그건 놈의 정체와 관련있을 것이다.
제갈사가 말했다.
"싫으면 그냥 가시오. 우리는 우리대로 오거천문을 열 거니까."
"제정신이냐?"
"다만 그 경우 반황주는 줄 수 없소."
"......"
십이율주가 이빨을 까득 깨물더니 말했다.
"맘대로 해. 우린 나간다."
파앗
십이율주는 이윽고 삼사와 무사시를 데리고 칠성단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해신족이 전멸해 있는 을씨년스러운 건물에 남아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그럼 가 볼까, 오거천문으로."
"정말 갈 생각이오? 열이라는 자의 힘이 백웅의 기억에 있었던 대로라면 절대 이길 수가 없소. 그 존재는 하위 마신격이오."
"상관없어. 되려 십이율주와 대술법을 펼치는 건 이 일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우리가 팔부신중을 막아내냐가 중요한게 아니야. 우리가 다 살아있냐도 사실 별로 안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하오?"
"깽판을 칠 여지를 마련해야하지."
그리고 제갈사는 일행을 데리고 봉래도의 북쪽에 있는 오거천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거천문의 앞에 서서 외쳤다.
"오거천문의 문지기여! 아주 중대한 정보를 가져왔으니 나와보십시오!"
스스스
그러자 일행의 앞에 오거천문을 가로막듯 마신 열의 형상이 떠올랐다. 열은 상당히 분노한듯 어둠의 힘을 숨기지 않고 방출했고, 그 위세는 진소청조차 다리를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는 음신지력을 뿜어내며 말했다.
[ 인간 마도사여... 다음 한 마디에 너희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흐흐. 당연하오."
제갈사가 눈빛에 요사스런 빛을 흘리며 말했다.
"창힐의 팔부신중이 곧 본체를 드러내서 우리를 공격하려 합니다. 그 위치와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부디 전욱께서 힘을 빌려주셔서 놈들을 때려잡았으면 합니다."
[ ......!!]
열의 어둠의 얼굴이 잠시 일렁였다.
그는 잠시 후 하늘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 따라오라. 주군께서 알현을 허락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