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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뜻밖의 사실이었다.
봉신계획이란 건 착한 천교의 선인들이 사악한 주왕과 절교의 마인들을 몰아낸 전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실상은 인간을 학살하고 선별하는 과정일 뿐이었다고?!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내가 흥미진진해서 눈을 빛내고 있을 때 구천현녀가 말했다.
[ 그래, 그런 계획이었지. 하지만 삼청께서는 또다른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있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절교교주로서 그 계획에 응하지 않았다.]
[ 흥! 어설퍼.]
신공표가 비웃으며 말했다.
[ 천교와 절교의 힘을 합해서 삼황오제에게 자비를 청하자니... 나는 그런 계획에 동조하느니 절교의 힘으로 천교를 눌러서 나 스스로가 인간의 패주(覇主)가 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 어찌되었든 너는 삼청의 계획을 도중에 망가뜨린 장본인이다. 삼청은 유화책을 써서 봉신계획의 여파를 최소화시키려 했지만 너 혼자 맘대로 날뛴바람에 불가능해졌어.]
구천현녀가 한층 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너는 인간을 위해 나섰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천계에서 더욱 엄혹하게 인간을 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네가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삼황오제가 직접 자신의 사도를 내려보내기도 했다는 걸 봉신대전 중에 느꼈을 텐데?]
[ 아니 그건...]
[ 신선끼리만 처리할 수 있었던 일을 굳이 확장시켜서 삼청조차 손쓰기 어렵게 한건 바로 너란 말이다, 신공표. 절교를 제압하고자 삼황오제가 직접 손을 쓰게 만든 건 너야.]
신공표가 주춤거렸다. 구천현녀가 하는 말이 왠지 그녀의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공표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홱하고 돌렸다.
[ ... 몰라. 그래서 어쩌잔 거야? 내가 반성하면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나?]
[ 장본인의 입으로 그런 소릴 하다니 뻔뻔하군. 네 반성문 따위는 필요없으니 약속이나 지키라는 말이다.]
구천현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 명색이 절교의 교주인 자가 자기 입으로 한 말도 못 지키느냐?]
[ 윽... 알았어.]
신공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했다.
[ 손 내밀어.]
구천현녀가 손을 내밀자 신공표가 주문을 읊었다.
만선휘황(萬仙輝黃)
지지징
' 허엇...!!'
그 순간 황금빛 실선이 내 머리를 꿰뚫는 듯한 기분과 함께 절교의 비술에 관한 정보가 내 머릿속으로 새어들어오는 걸 느꼈다. 마치 모래가 천천히 바늘구멍으로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윽고 전송속도가 가속하면서 뇌가 뚫릴 정도의 상승감을 느꼈다. 또한 절교의 비술은 물론이고 금오십천군이 지닌 각각의 술법과 그걸 익히는 법, 그리고 십천군의 술법에 존재하는 약점까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역량의 한계인 걸까?
마치 지선 망량의 기억을 받아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드문드문 끊기고 헤집혀서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볼 수는 있어도 해석하지는 못하는 느낌이 강했다. 내가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으고 있을 때 구천현녀가 말했다.
[ 최고급 기억전송 선술을 주문 한 번으로 쓸 정도의 실력인데도 왜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느냐? 네가 봉인된 후 절교는 네 뒤를 이을만한 실력자가 없어서 일패도지했다.]
신공표는 훗하고 웃었다.
[ 흥... 내가 질 줄은 몰랐으니까.]
[ ......]
자못 멋있게 말하는 신공표였으나 왠지 바보같아보였다. 어이없다는 듯 신공표를 바라본 구천현녀가 말했다.
[ 그럼 이제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구나.]
[ 수요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 말이 되는 소리를... 수요로 차원의 벽을 넘는 건 최소조건일 뿐이다. 너와 내가 힘을 합쳐야만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다. 네 술력과 여의봉, 사보검의 힘을 모두 합해라.]
[ 쳇...]
신공표는 입맛을 다시는 듯 했다. 아무래도 구천현녀에게만 힘을 쓰게 하고 자신의 힘을 온존시키려 했지만 구천현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 것이다. 잠시 후 신공표와 구천현녀가 마주본 채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들이 외우는 고대의 주문이 글자로 변해서 사방에 떠다니는 걸 보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현대의 말은 아니고 고어일텐데 지금 내게는 무슨 뜻인지 주언(呪言) 하나하나의 의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아마 신공표에게서 절교비술의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앞으로 고대주문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던 중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 어? 그러고보니 한자(漢字)가 아니군...'
그랬다.
구천현녀가 쓰는 주문이든 신공표가 쓰는 주문이든 구현화되어서 허공에 떠다니는 백색의 주언들 모두가 한자가 아니었다. 고대의 상형자나 갑골문도 아닌,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술법전용의 언어로 보였다. 나는 왜 한자를 안 쓰고 굳이 독립언어를 쓰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파아앗
푸른 빛이 새어나오며 허공에 삼 장 크기의 원이 생겨났다. 구천현녀는 그 원을 향해 수요를 던지며 외쳤다.
[ 수요여, 돌아가는 길을 열어다오!]
키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수요가 원 중앙을 돌파하자 시꺼먼 원 내부에 푸른 하늘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푸른 하늘은 현실세계와 연결이 되었다는 증거인 듯 했다. 구천현녀는 문이 열렸다는 걸 확신하듯 바로 그 내부로 뛰어들려 했다.
쿠웅!
[ 앗, 저 놈...]
구천현녀가 경호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설 때 맞은편에서 천인 삼장법사가 인간의 형태로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전 술법을 날려서 구천현녀를 공격한 건 저 놈이 분명했다. 삼장법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딜 가시려고."
[ 본체로 와도 힘들터인데 인간형이라니 죽고싶어서 환장했구나!]
"뭐, 회복력이 제일 좋은 나로서도 급하게 오려고 좀 무리했지.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
그런데 하나 까먹은 거 없소?"
삼장법사가 자신의 등 뒤쪽을 슬며시 가리켰다.
"당신들에게 열받은 높으신 분들이 달려오고 있잖소."
쿠구구구...
그 말대로였다. 평야 저편에서 혼돈의 촉수덩어리, 음산한 마령(魔靈), 날개달린 암석거인 같은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저것들 하나하나는 틀림없이 [옛 지배자]인 게 분명했다. 구천현녀는 위기상황인 걸 직감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신공표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공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저 [옛 지배자]들이 여기까지 오면 네놈도 무사할 수 없을 텐데? 무슨 배짱으로 저들을 불러들였느냐. 네놈이 술법을 좀 쓴다고 해도 저 자들에게서 공간전이술 따위로 오래 도망칠 수는 없다.]
"후후후... 내 주인이신 창힐의 본거지가 바로 이 암천향의 달. 그리고 달의 거주자는 위대한 혼돈의 보호를 받으므로 암천향 내에서는 귀족(貴族)의 신분이라 할 수 있소. 게다가 창힐 님은 특별하고도 특별한 존재..."
삼장법사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후하하하!! 이 암천향 내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웬만한 [옛 지배자]는 우리를 건들지도 못한단 말이오! 왜냐하면 우리는 창힐의 화신이니까!"
[ ......!! 뭣이?]
신공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옛 지배자]라 함은 모든 인과율의 정점에 서 있는 신격으로써 그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창힐의 부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공격에서 안전할 수가 있다니!
구천현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 주인의 권세를 업고 종놈이 호통을 치는구나. 그럼 죽어라.]
퍼엉!
구천현녀가 시해지술으로 한 번의 언령(言靈)을 발하자마자 삼장법사의 몸뚱이가 찢겨나갔다. 삼장법사는 즉사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도 주춤거리면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중에야 쓰러졌다. 어차피 저것도 분신일 뿐일테니 아직 삼장법사를 쓰러뜨린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그, 그렇다면 수요를 [옛 지배자]에게 공양했어도 팔부신중에게 뺏길 위험이 있었다는 거 아닌가?'
창힐이 이 암천향 내에서 귀족이나 다름없이 군림한다면 팔부신중이 창힐의 권세를 내세워서 칠요를 뺏으려 들 수도 있었다. 물론 [옛 지배자]가 안 줄 수도 있지만 빼앗길 경우 내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최악의 경우였으리라!
구천현녀가 신공표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 더 망설일 여유가 없다. 누가 먼저 들어가서 문을 닫고 상대를 배신하느냐 따위의 계산을 할 때가 아니다.]
[ 난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신공표는 초조하게 대꾸했지만 그게 본심이 아닌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구천현녀가 말했다.
[ 동시에 들어가자.]
[ 알았다.]
타앗
둘은 동시에 수요로 열어놓은 차원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츄와아악
그리고 그들이 안에 뛰어들었을 때 갑작스레 뒤쪽에서 [옛 지배자]들의 마력이 꿀렁이면서 액체처럼 밀려들어왔다. 시공을 격하고 마법의 힘으로 둘을 붙잡으려 드는 저주인 게 분명했다.
구천현녀가 낭패한 듯 말했다.
[ 이런...!! 너무 강력한 저주...]
아무리 본신의 힘을 되찾은 구천현녀라 해도 수 개체나 되는 [옛 지배자]가 동시에 저주를 쏟아부은 걸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신공표 또한 마찬가지인지 더 이상은 답이 없다는 듯 안색이 새하얘져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 너흰 인(印)이 있으니 통과.]
무슨 소리였을까.
[ 나머지는 죽어라.]
음울한 목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날아오던 어마어마한 저주의 덩어리가 갑자기 멈췄다.
' 뭐지?'
내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강신해 있는 구천현녀가 내 의지를 거부하며 내게 말했다.
[ 뒤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 지금 무슨 일이...]
[ 암천향의 입구를 막는 지배자. 그 존재 또한 한없이 외신에 가까운 존재이니, 그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됩니다.]
츄와아악
끼에에엑!!
무언가 엄청난 규모의 거미줄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면서 뒤쪽에서 왠지 모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처절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윽고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비명소리의 정체를 짐작했지만 믿을 수가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등 뒤편에서 우리를 쫓아오던 [옛 지배자]들이 학살당하고 있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옛 지배자] 사이에도 큰 격차가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이다.
' 으으... 제기랄...'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입구를 막는 수문장이 같은 [옛 지배자]를 학살할 정도로 강하다면 암천향 정면돌파는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비등을 써서 또 그 지랄을 하거나 꿈의 세계를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온갖 생각에 휩싸여 있을 때 구천현녀의 말이 들려왔다.
[ 백웅이여. 곧 현실세계에 도착할진대, 어찌 하겠습니까?]
[ 뭘 말씀이십니까?]
[ 신공표는 제멋대로 행동하려 할 것입니다. 세계가 그녀의 뜻대로 파괴당하고 어지럽혀질 것이고, 반신 이하의 필멸자는 아예 신공표의 상대조차 되지 못합니다. 웬만한 대라신선이나 용왕이라 해도 사보검 한두 방에 소멸당할 것입니다. 그녀는 삼청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던 절교의 총수니까요.]
[ 윽... 그렇겠죠.]
새삼 신공표의 막강한 힘을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팔부신중 아수라가 본체를 드러냈는데도 어이없게 그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어떻게 인간출신으로써 저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 하지만 아무리 전신의 힘을 되찾은 저라고 해도 쉽게 그녀를 제압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녀가 싸우지 않고 그냥 도망쳐 버린다면 더더욱 방법이 없습니다.]
[ ......]
[ 그대는 뭔가 신공표를 제어할 방법이 있습니까?]
나는 구천현녀가 내게 조언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암천향까지 가서 모험을 한 데다가 태상노군의 유지를 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 아군으로 인정한 듯 했다. 나는 뜬금없이 다가온 문제 때문에 크게 고민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신공표를 제어할 수 있을까?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했다.
[ 이렇게 된거 녀석한테 좀 더 힘자랑을 시켜보는 게 낫겠죠.]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면충돌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