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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허차원이 우주공간처럼 숨쉬기도 힘든 공간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의문에 구천현녀가 곧장 대답했다.
[ 차원의 경계가 부숴지고 근원소를 제외한 모든 매질이 붕괴한 상태이기에 시공간이 무의미해지는 것이 허차원입니다. 생명이 생존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 곳에는 모든 상태가 혼돈에 휩싸입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존재확률이 무한히 변동한다는 뜻이죠.]
구천현녀는 내 몸을 웬 선녀의 옷자락같은 술법으로 움직여서 허차원을 유영하다가 뭔가를 가리켰다.
[ 저 구조물을 보십시오.]
[ 저건?]
[ 어느 시대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구조물은 줄곧 사각에 가까운 바위덩어리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원형으로 변하기도 하고, 철퍽하고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도 했다. 내 안력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변화하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속도가 아니라 시간이 불연속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듯 했다.
나는 그제서야 구천현녀의 말을 알아듣고 소름이 끼쳤다.
[ 존재확률이 변동한다는 건... 이 공간에 오래 있으면 뭘로 변할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 바로 그렇습니다. 허차원은 본디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확률이 무(無) 혹은 유(有)의 양자택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차원에서 흘러온 정보가 제멋대로 구현화되기도 하지요.]
[ ......!!]
무섭다!
이 공간은 언뜻 평화로운 무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이 공간에 있다가 난데없이 소멸되거나 이형(異形)의 무언가로 바뀌어버린다는 말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공간보다 더 극악한 장소였다. 나는 구천현녀에게 물었다.
[ 그럼 구천현녀께서는 어떻게 이 공간에서 버티고 있으신건지...]
[ 시해지술을 사용해서 상호작용의 리(理)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법칙을 끈으로 틀어막으면 아무리 허차원이라도 존재가 분해될 일은 없습니다. 다중차원의 파동이 간섭해 오는 것도 막을 수 있으니까요.]
[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구천현녀의 시해지술 덕분에 내가 이 장소에서 명줄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시해지술은 대단한 술법이라는 것 뿐이었다.
[ 구천현녀.]
그 때 구천현녀 옆에서 신공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으나 구천현녀는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 이 곳에서 탈출하려면 수요(水曜)의 힘을 빌려야 한다. 얼른 수요를 써라.]
[ 그 전에 말하고 싶은 게 있다.]
구천현녀는 내게 정중하게 말하던 것과는 달리 신공표를 다소 싸늘하게 평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구면이며 과거에 좋지 않은 관계였던 탓이었다. 그녀는 신공표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 넌 왜 봉신계획의 막바지에 삼청의 뜻에 따르지 않았지?]
이게 무슨 말인가?
구천현녀의 질문에 신공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 수천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서야 묻는 건가.]
[ 대답해라.]
[ ... 싫어.]
[ 뭐라고?]
신공표는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 그 일은 나와 그들의 비밀이다. 그리고 당사자들끼리는 이미 해결됐어. 네게 얘기해줄 이유가 없단 말이다.]
[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너를 이 허차원에서 꺼내줄 이유가 없겠군.]
[ 흥! 그렇게 협박한다고 먹힐 줄 아느냐? 나 혼자서도 술법을 써서 나갈 수 있다.]
[ 하지만 터무니없이 힘을 소모하겠지. 그리고 나가면 마신들이 드글거리는 암천향일테고.]
[ ......]
구천현녀가 수요를 꺼내들고 말했다.
[ 이건 너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천계 전체의 명운이 걸린 일이니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말고 말하는 게 좋을 거다.]
[ 천계 전체의 명운이라, 크크.]
[ 뭐가 우습느냐?]
[ 난 천계가 존속해야 할 이유 자체를 잘 모르겠는데.]
신공표가 염세적인 눈으로 말을 이었다.
[ 봉신전쟁이 끝났을 때 이미 인간은 끝장난 거나 다름없었어. 더 이상은 신적 존재에게 대항할 여력이 남지 않았고 벌레처럼 사육당하다가 종말을 마주치는 수밖에 없게 되었지. 그렇다고 해서 천계가 종말을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랫동안 인간을 돌봐줄 뿐... [옛 지배자]와 싸워서 생존할 권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천계가 무슨 의미가 있지?]
[ ......]
[ 나한테서 얘기를 듣고 싶다면 천계에 봉인된 인간의 힘과 재능을 먼저 해방시켜 줘. 그 약속을 한다면 말해 주지.]
신공표의 제안에 구천현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 불가(不可). 그걸 해방할 권리는 내게 없다.]
[ 무슨 소리지? 구천현녀 네가 아니면 누가 그 권리를 갖고있다는 거냐?]
[ 옥황상제가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
[ ... 웃기는군. 그럼 됐어.]
신공표가 비직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 수요를 쓰든말든 맘대로 하라고.]
슈욱!
신공표는 다시 허차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구천현녀에게 물었다.
[ 신공표가 허차원에서 나간 걸까요?]
[ 허차원은 차원이 붕괴해서 생겨나는 대우주의 악의입니다. 아무리 절교의 교주인 신공표라도 그리 쉽게는 나가지 못합니다. 제가 수요를 써서 나가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편승해서 함께 탈출하려는 거겠죠.]
[ 아.]
[ 저 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구천현녀가 한탄하다가 말했다.
[ 다행히도 신공표가 미리 수요를 해방시켜놓아서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건 문제가 없겠군요.]
[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됩니까?]
[ 그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됩니다. 아무리 전신의 힘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강신된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제 힘을 쓸 수가 없으니.]
[ 알겠습니다. 그럼 신공표는...]
구천현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그대가 기절했을 때 저는 화룡진인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신공표를 이대로 현실세계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 네?]
[ 완전히 부활해서 전력을 되찾은 신공표는 그 자체로 세계의 인과율을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입니다. 지금 제 힘이라면 신공표를 억누를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필멸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 삼청마저 소멸된 지금은 옥황상제나 서왕모 외에는 그 누구도 그녀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 ......]
[ 허차원에서 탈출하자마자 화룡진인과 힘을 합쳐서 그녀를 제압할 생각입니다.]
[ 네?! 싸운단 말입니까?]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묻자 구천현녀가 차분히 대답했다.
[ 그녀를 죽이던가 아니면 그녀에게 목줄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데...]
[ 어차피 신공표 또한 생각은 같을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현실세계에 데려다놓고 나서 즉시 제압할 꿍꿍이를 갖고 있겠죠. 그 전에 미리 결판을 내는 게 좋습니다.]
[ 음...]
구천현녀의 말이 옳긴 하다. 신공표에게 목줄을 채우지 않으면 향후 일이 너무나 꼬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말했다.
[ 팔부신중은요? 놈들은 확실히 죽은 게 맞습니까?]
[ 그게 변수입니다. 아마 영진포일술과 시해지술을 동시에 당했으니 죽었어야 정상이지만... 저 자들은 마왕이자 사도인데도 묘하게 인간의 성질을 지닌 기묘한 존재들. 생존해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 그럼 안 됩니다.]
나는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 신공표를 섣불리 제압하려 하지 말고 좀 더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팔부신중이 만일 살아있다면 일이 성가셔질테니 그녀와 아군으로 지내는 게 낫습니다.]
그러자 구천현녀가 약간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제가 부상을 입은 팔부신중을 못 이길거라 생각하는건가요?]
뭔가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전신의 힘을 되찾은 구천현녀의 심기를 건드린 기분이었기에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 전력을 되찾은 신공표조차 그 자들의 합공에 밀렸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주인인 창힐은 이 암천향의 달에 거주하고 있으니 암천향은 그 자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파앗
잠시 후 구천현녀는 수요를 휘둘러서 공간을 베었다. 공간을 베자 암천향의 검고 붉은 하늘이 나타났고, 구천현녀는 선녀옷을 휘둘러서 구멍을 더욱더 넓힌 후 바깥세계로 나왔다. 그리고 구천현녀가 지상에 착지하자 뒤이어 신공표가 사보검을 타고 어검비행술을 써서 뒤쪽에 내려앉았다.
타닷
신공표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 내 약속은 백웅을 현실로 되돌려보낼 때까지였지. 하지만 그 수요를 쓰면 지금 당장 약속을 지킬 수 있겠구나.]
[ ......]
[ 뭐해? 허차원을 베었을 때처럼 수요로 암천향에서 탈출하는 문을 만들어.]
구천현녀는 힐끔 신공표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 어수룩하구나. 왜 그리 들떠있느냐?]
[ 뭐?]
신공표의 얼굴이 구겨지자 구천현녀의 손가락이 신공표의 뒤편의 하늘을 가리켰다.
[ 백웅의 말대로 저 자들도 허차원에서 빠져나왔지 않은가.]
쿠구구구...
시허연 빛의 구름 속에서 팔부신중의 본체들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 놈들은 우리보다 빠르게 허차원에서 빠져나온 듯 했는데 가만히 멈춰있는 게 심상치 않았다.
' 힘을 회복하는건가?'
아무리 팔부신중이라도 선계 최강술법 2개를 동시에 맞고는 소멸하지 않은 게 용할 것이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본 신공표가 자신있게 사보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 죽여달랍시고 가만히 있는 걸 놔둘 이유가 없지! 끝장을 내러 가자.]
[ 기다려라.]
[ 뭐가?]
[ 뭔가 이상하다. 저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빠져나온 게 확실한데 이 자리에서 바로 회복을 시작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 팔부신중이 바보멍청이도 아닌데.]
[ 음...]
신공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 내 감으로는 이 자리는 피해야 할 자리다. 아무리 그래도 저 부상을 쉽게 회복할 수는 없을테니 날 따라와라.]
파앗
구천현녀가 시해지술을 써서 그대로 시공간이동을 하자 뒤늦게 신공표가 뒤쫓아왔다. 신공표 또한 구천현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 듯 했다. 하지만 뒤끝이 남은 듯 신공표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 흥, 이 정도 힘을 가지고도 겁만 먹고 있다니.]
앞서가던 구천현녀가 잠시 후 멈춰서더니 웬 분지에 들어섰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 이 곳은 [옛 지배자]도 없고 안전해 보이는군. 그럼 계약을 마저 청산해라.]
[ 무슨 계약?]
[ 방금 전에 네가 해놓고 잊어버렸느냐? 술자 백웅에게 네가 가진 절교의 비술과 정보를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 윽...]
신공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그건 현실세계에 돌아가서 전해주겠다.]
[ 그럴 순 없지. 네 호위임무는 돌아갈 때까지이니 그 이후에 변심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지금 당장 백웅에게 정보를 전수해라.]
[ 명령이냐?]
[ 일일이 애같이 구는군. 절교의 교주씩이나 되어서 왜 이러느냐?]
구천현녀가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 ... 하아, 너무 봉신계획을 서둘러 진행했던 탓인가. 너는 고작 20년만에 태상노군과 원시천존의 모든 술수를 배웠으나 지도자에 어울리는 품성을 교육받지 못했구나.]
그 말에 신공표는 화가 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 어디서 잘난 척 하는 거냐? 예전부터 하고싶었던 말인데 네가 내 윗사람은 아니다. 언제까지고 내가 제자뻘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구천현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 그런가? 윗사람은 아니지만 몇 마디 해야겠구나. 너는 유사이래 곤륜산에 입문한 자들 중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최고의 신선은 아니었다. 절교 또한 네가 아니라 다른 자가 교주직을 맡았다면 금오도에 봉인당하는 신세까지 되진 않았으리라.]
[ 으윽, 이 개년이...]
[ 대선(大仙)의 몸가짐을 모르는가?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것도 내가 예전에 삼청 대신
너를 교육할 때 알려줬을텐데.]
신공표가 구천현녀의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딱히 답할 말이 생각 안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신공표가 곤륜산에 입문했던 시절에 그녀는 구천현녀의 제자뻘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짐작할 수 있었다.
' 논리적으로 반박할 생각이 안 나오고 욕설만 머릿속에 가득차있어서 어쩔줄을 모르는군...'
이상한 일이다.
왜 내가 절교교주 신공표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걸까?
내가 내심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구천현녀가 말했다.
[ 어째서 재능이 창창한 너를 절교에 간자로 잠입시키고, 태공망에게 봉신계획의 막중한 임무를 맡겼는지 아는가? 태공망은 비록 도사로서의 재능은 거의 없었으나 인간이 무엇인지 아주 잘 이해하는 명인(名人)이었다. 태공망이 지상의 일을 훌륭히 처리했기에 무탈하게 봉신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형 얘기를 왜 지금 꺼내지?]
[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기어린 정신에 휘둘려 제대로 쓰지 못하는 네가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 말에 신공표가 다소 냉정을 찾았는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흥! 사형보다 내가 심기나 정치적 재능이 떨어지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결국 그 봉신계획이라는 건 당시의 인간족을 씨몰살시키고 뒤집어엎는 계획이었잖은가? 그 계획을 충실히 잘 수행한 사형은 결국 천계의 개였을 뿐이고 진정으로 인간을 위해 활동한 건 나였지.]
[ ......]
[ 내가 절교의 교주가 되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인간의 문명을 지금처럼 세속적으로 방임하지 않았겠지. 내가 저항했기 때문에 그나마 최소한의 명맥이 남은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신선이 인간을 기르는 신정일치사회로 만들 계획이었잖아.]
이어진 신공표의 염세적인 말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 대라신선들이 인간의 모든 신화적 재능을 봉인하고, 은주 정권교체를 빌미로 혼돈의 재능을 보유한 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잡아죽였지 않은가. 인간의 종자를 뿌리에서부터 열등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작업... 황제에게서 받은 자치권을 무시한 채 인간을 훌륭한 천계의
가축으로 열화(劣化)시키는 그게 바로 봉신계획이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