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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수요를 바친다고 말하자 신공표는 적지 않게 당황한 듯 했다.
[ 뭐? 칠요를...]
"네가 안 도와준다고 하면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이것 뿐이잖아."
[ 잠깐...]
나는 신공표가 뭐라 하기도 전에 화룡진인에게 말을 걸었다.
"화룡진인. 이 근처에 강력한 사기가 느껴지는 곳이 있습니까?"
[ 사방천지가 강렬한 마기(魔氣)덩어리라서 딱히 감지할 수 없구나. 허나 이미 주목을 끌었으니 조금만 움직여도 아무하고나 마주칠 게 뻔하지.]
"그렇군요. 그럼 아무데나 가 볼까요."
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신공표가 크게 외쳤다.
[ 잠깐! 진심이냐?]
"그걸 왜 묻는거야? 진심이면 어떻게 하게."
[ 한번 지배자의 손에 들어간 칠요를 되찾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네놈의 목표는 앞으로 육요를 모아서 황제를 알현하는 거라고 했는데 앞뒤가 안맞지 않느냐?]
나는 피식 웃었다.
"여기서 죽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지. 그럴 바에야 나는 살아서 다음 기회를 노리겠어."
[ 이 놈...]
"안 도와줄거면 방해나 하지 마."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공표가 말했다.
[ 정말 이럴거냐? 네가 정 그렇다면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다.]
"진작에 죽이지 그랬어."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할거면 해봐. 보아하니 날 죽이면 너도 더 이상 이 자리에서 못 움직일거같은데 같이 죽고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 ......]
신공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대로 그녀가 힘을 발휘해서 날 죽이거나 해치는 건 가능한 듯 했으나 그렇게 되면 자신을 움직여줄 인물이 사라져서 곤란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암천향에 있는 지배자나 이족에게 여의봉이 손에 들어갈 경우, 그녀에게는 악몽같은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으므로 섣불리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신공표가 나를 향해서 악의를 있는대로 표출해준 덕분에 이런 제반상황을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신공표가 다른 노회한 인물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면 심리전이 벌어져서 내가 휘둘릴수도 있었는데, 그녀가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하는데 어쩔수없이 놔둔다는 티가 나서 알아챈 것이다.
안 죽이는 게 아니라 못 죽이는 것.
그걸 알아챈 순간부터 주도권은 내게 온 것이다.
내가 산 하나를 휙하고 넘자 거대한 장어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괴이한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백 마리의 비행장어가 날아다니는 어둠의 협곡 밑에서는 강대한 마력이 눈에 띄게 느껴졌다.
' 아마 저기에 뭔가 있겠군.'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옛 지배자]가 보이다니 이 암천향은 정말 막장이다. 나는 [옛 지배자]와 교섭할 각오를 하고 협곡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 기다려!]
그 때 신공표가 강하게 외쳤다. 그녀는 영체를 드러내서 내 앞을 가로막더니 말했다.
[ 지배자의 손에 칠요를 넘겨주느니 널 도와주마. 그러니 어리석은 선택하지 마라.]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널 믿을 수 없어. 이 상황에서 무슨 얘기를 한다고 해도 무의미해."
[ 진정으로 칠요같은 신기를 내놓을 셈이냐? 네놈의 역량이 딸려서 못 쓰는 것 뿐이지 수요 하나만 있어도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두세 개만 더 얻는다면 천계조차 뒤집어엎을 수 있는데 그 위력을 전혀 모르고 이런 선택을 하려는 거냐!]
"알아. 네가 아까 수요의 잠재력을 보여줬잖아."
나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우선순위가 있어. 그리고 그건 너와 달라."
[ ......!!]
"도와준다면 어떤 식으로 도와줄 생각이지?"
내가 주도권을 잡은 채 신공표에게 따져묻자 그녀는 수치심을 느끼는 듯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하지만 잠시 후 표정을 원상복구시키고는 말했다.
[ 내 이름을 걸고 계약해 주겠다.]
"어떤 계약?"
[ 네가 내 봉인을 풀어준다면 네가 현실세계로 돌아갈 때까지 전적으로 널 지켜주고 도와준다는 계약. 내 이름을 걸고 한다면 너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흐음..."
이름을 건 계약.
그것은 고위존재들에게 있어서 압도적인 공신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공표가 방금 전에 내게 제안할 때와는 천지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은 생각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서 잠시 고민했다.
' 어쩌지?'
이대로 수요를 지배자한테 바치고 되돌아가도 좋겠지만 신공표에게서 당분간 안전을 보장받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배자가 현실세계로 돌려보내 준다면 굳이 신공표와 그런 계약을 맺을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다.
"......"
나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혹시 달기를 알고 있는가?"
[ 뭐? 그 녀석 얘기는 왜 하는거지?]
"어떤 관계인지 말해 줘. 그럼 네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게."
내 질문에 신공표가 대답했다.
[ 놈은 서왕모의 음(陰)의 기운이 지상에 떨어져서 생겨난 대요괴이자 마왕. 그리고 처음에는 서왕모의 충실한 종복이었다가 그녀를 배신해서 우리 절교와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절교의 동지였지.]
"......!!"
[ 지금은 금오도에 봉인되어 있는 모양이던데.]
서왕모의 음의 기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강적으로 맞부딪힌 달기였으나 그 정확한 정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달기의 출신지가 명확해진 것이다.
' 서왕모... 설마...'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질문했다.
"달기는 서왕모의 화신이란 말이냐?"
[ 그건 아니다. 화신이었다면 진작에 서왕모가 회수했을 것이다. 달기는 서왕모의 실패작에 가까웠다.]
"실패작? 무슨 뜻이지?"
[ 서왕모가 자신의 태극(太極)의 균형을 맞추지 못해서 음의 기운이 폭발해서 만들어져 버린 게 달기라고 알고 있다.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 때문에 달기는 서왕모에게 큰 애증을 갖고 있지.]
"흠... 그런가."
[ 본인의 입으로는 사육당하기 전에 도망쳤다고 했다. 그런데 놈에 대해서 왜 묻는 거지?]
나는 잠시 후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후 신공표의 말에 대답했다.
"신공표. 달기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쓰는 주술방어막이나 절교의 비술은 너도 알고 있는 거겠지?"
[ ... 그거 말이군. 물론이다. 그건 내가 놈에게 가르쳐준 거니까.]
"가르쳐줘? 원래는 달기가 그걸 몰랐다는 말인가?"
[ 그렇다. 타고난 요력은 강대했으나 제대로 쓸 줄 몰랐기에 우리 절교의 선인들이 달기에게 술법을 가르쳤다. 네가 말하는 주술방어막같은 건 모두 절교본산의 비학(秘學)이다.]
역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팔짱을 꼈다.
"절교의 비술을 나한테 가르쳐주던가 아니면 그 비술을 쉽게 깨부술 수 있는 해주법을 가르쳐 줘. 덤으로 금오십천군의 약점에 대해서도 내게 알려 줘."
[ 뭐라고? 너 미쳤냐?]
"왜? 너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잖아."
신공표가 크게 분노했는지 으르렁거리듯 영체를 일렁였다.
[ 감히 절교교주에게 네놈 따위가...!!]
화르륵!!
신공표의 기세가 강대해지자 화룡진인이 영체를 드러내서 가로막았다. 신공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비켜! 아무리 용왕이라도 내 사보검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화룡진인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 허세 부리지 마라. 네가 이래봤자 남는 건 파멸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 이놈들...!!]
신공표는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하는지 부들부들거렸다.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듯 기세를 멈추고 어깨를 약간 늘어뜨린 채 말했다.
[ ... 좋다. 그렇게 하마.]
"알았어. 교섭 성립이다. 서로 약속을 하자고."
우웅
나는 곧이어 신공표와 '이름'을 걸고 약속하게 되었다. 일종의 주술의식이었고 화룡진인이 중간에서 살펴보았으므로 기만할 여지는 없었다. 나는 신공표의 봉인을 풀어주는 대신 신공표는 내가 현실에 되돌아갈 때까지 지켜주는데다가 절교의 비술과 달기의 비밀을 알려주는 조건이 된 것이다.
나는 빛 속에서 계약이 이뤄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
' 이 정도면 음신지력을 소모할 만 하지.'
그저 신공표만 풀어주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다.
달기의 주술방어막!
그건 인간계 최강전력이 모여서 합공해도 달기를 잡기 어렵게 만드는 최악의 기술이었다. 설령 백련교주나 십이율주라 해도 결코 혼자서는 달기를 때려잡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절대적인 요력을 바탕으로 방어막을 펼치는 달기는 그 자체로 천재지변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전생하면서 달기가 소환되는지 눈치보면서 전전긍긍해야 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절교의 교주가 직접 주술방어막의 파해법을 알려준다면 - 앞으로 내 전생과정은 크게 단축된다. 왜냐하면 달기를 쓰러뜨리는 난이도가 현격히 낮아지므로 황궁을 제압하기가 한결 쉬워지는 것이다.
나는 신공표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디 숨을 데는 없을까? 팔부신중 놈들이 곧 쫓아올 거 같은데..."
거리를 수천 리도 넘게 벌렸지만 사실 신적 존재인 팔부신중에게는 그리 의미없는 도주였다. 엄청난 거리라서 쉽게 쫓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삼장법사가 남쪽 대륙까지 쫓아왔던 걸 보면 놈들에게 거리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다. 길어도 한 식경 이내에는 놈들에게서 숨거나 도망칠 장소를 알아내야 했다.
신공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숨을 데를 왜 찾는단 말이냐? 닥치고 내 봉인이나 풀어라.]
"뭐?"
[ 계약까지 했는데 날 못 믿는단 말이냐? 어서 풀어라. 시간이 없으니.]
"진심이야?"
[ 이 버러지같은 새끼! 한두번 말해서 못 알아먹는거냐?!]
신공표가 쩌렁쩌렁 분노를 터뜨리자 나는 찔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음신지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여의봉에 주입해서 태상노군의 마지막 봉인을 풀기로 했다.
' 정말 신공표가 팔부신중을 막아줄 수 있을까...'
가능할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정 안 되면 자살하기로 마음먹으며 나는 음신지력을 손끝에 모아서 여의봉에 전달했다. 내밀한 곳에 있던 가장 긴박한 매듭이 서서히 물에 녹듯이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곧 마지막 봉인이 풀린다.
우우웅 -
그 순간이었다.
내 눈 앞에 누군가의 환영이 나타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환영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인 것 같으면서도 얼굴이 아예 보이지 않는 무면의 신선이었다. 성스러운 기운이 주변을 가득 휩쓰는 것 같았고 그 청량함은 굉장했다.
나는 웬 대라신선이 나타났나 싶었지만 이내 그 환영이 내게 말을 걸었다.
[ 나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남긴 마지막 의지이자 분신. 그대가 나를 보고 있음은 아마도 누군가가 신의 힘을 이용해서 절교의 교주인 신공표의 봉인을 풀고 있음이리라.]
"......!!"
태상노군!
그렇다면 눈 앞에 있는 게 태상노군의 마지막 의지란 말인가?
나는 삼청을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게 처음이라서 눈이 동그래졌지만 화룡진인이나 신공표는 그를 못 보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만이 그를 인지하고 있는 듯 해서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태상노군의 분신이 말했다.
[ ... 그대가 선인지 악인지 내가 판별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신공표처럼 아까운 재목을 쉽사리 소멸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지닌 혼돈의 재능은 치우(蚩尤)의 시대에도 희귀한 것이었으니, 신(神)에게 대항하고자 그녀를 봉인이라는 형태로 보호하고싶었다.]
무슨 말이지?
[ 그대가 이걸 보고 있을 때쯤에는 아마도 나와 원시천존은 소멸해있을 것이다. 우리의 스승이신 복희의 가면을 벗겨 강제로 원형으로 돌아가게 만든 의문의 마(魔)가 시시각각 천계를 위협함이 느껴진다. 우리가 그 자의 암산을 막아낼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리라... 전대 통천교주 또한 그 자에게 소멸당했다.]
"....."
[ 실로 두렵다. 그 존재는 인류 전체를 그저 놀잇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 거대한 마신(魔神)을 봉인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없을까.]
한탄하던 태상노군의 분신은 나를 가리켰다.
[ 그대여. 홍균도인(鴻鈞道人)이라 자처한 그 혼돈의 존재... 영보천존이라 자처하며 천계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그 혼돈의 신을 해치울 수 있는 건 신공표의 사보검 혹은 칠요 뿐이다. 부디 그녀에게 대곤륜 후계자로써의 진정한 사명을 일깨워다오!]
쿠궁!
다음 순간 그 분신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환상이었나 싶었으나 들은 정보가 너무 선명해서 그런 착각은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태상노군이 미래를 예감하고 신공표의 봉인에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 것이리라.
' 홍균도인? 혼돈의 존재?'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는 이윽고 환한 빛이 터져나오면서 신공표의 육신이 세상에 구현화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아앗!!
신공표가 부활한 것이다.
그녀는 영체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육체를 가지고 여의봉에서 풀려난 듯 했다. 그녀는 여의봉을 손에 쥐고 있다가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네 녀석은 어디 숨어 있어라. 내가 그 팔부신중인지 뭔지를 다 죽여주겠다."
"뭐, 잠깐..."
나는 신공표에게 방금 들은 걸 이야기하려 했으나 그녀는 들을 생각도 없는 듯 했다.
통천의 포효!!
"거기냐!"
신공표가 쌍장에서 술법을 방출해서 정보를 알아낸 후, 그대로 하늘 어딘가로 사보검을 던져서 사라져 버렸다. 내가 황당해서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 잠시 후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꽈과광
' 미, 미친...'
아까부터 놈은 진심이었다.
부활한 신공표는 혼자서 팔부신중 여섯 명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