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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팔부신중이 온다고?!
나는 그 말에 놀랐으나 이내 그럴만 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팔부신중 아수라가 암천향까지 나를 잡겠다고 찾아온 상황에서 다른 놈들이 이 세계로 건너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놀랄만한 건 측천무후를 경호하기 위해서 팔부신중이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측천무후는 창힐에게도 보호받는 몸이란 말인가?
' 아냐... 그렇지 않다면... 팔부신중 야차의 도움을 받은 건...'
뭔가 모든 일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복잡한 사정을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나는 재빨리 판단한 후 차분하게 측천무후에게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째서 제게 그 사실을...?"
[ ... 지쳤기 때문이다.]
"네?"
내가 반문하자 측천무후는 느릿하게 자신의 팔을 내려서 옥좌 위에 얹었다. 그녀는 고개를 허공으로 향했다.
[ 오랜 세월이었지. 허나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또한 들고 있다...]
"......?"
[ 백웅이여. 그대가 보기에 여는 인간인가?]
나는 측천무후의 질문을 받자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해졌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측천무후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만일 지혜와 지식이 뛰어난 망량이나 제갈사였다면 그녀의 의중을 한번에 알아차렸겠지만 나는 그 정도의 머리가 되지 못했다.
나는 별 수 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현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께서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일 것입니다."
움찔
측천무후는 뜻밖의 대답을 들은 듯 놀랐다.
[ 그런가? 그대는 인간이라 보는가?]
"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군... 그 관점도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과연 여기까지 온 영웅...]
측천무후는 뭔가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 응? 내 대답이 그렇게 이상한가?'
나는 내 대답을 돌아보았지만 이 대답이 그렇게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동안에 측천무후가 말했다.
[ 그대는 몰라도 여는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이족의 땅에서 영겁의 삶을 손에 넣고... 생전의 규율에 따라 이족이 된 백성들을 통치해 왔다. 새로운 치세(治世)를 겪으면서 처음 삼백여 년 동안은 아주 즐겁고 행복했노라. 하지만...]
"이후에는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 스스로가 인간임을 거부하고 암천향의 험난한 대지로 떠나버린 백성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지...]
"......?"
이게 무슨 소리일까?
측천무후의 말이 이어졌다.
[ 그들은 이족의 삶에 적응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리고자 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열등하고 추하기 짝이 없기에, 이족으로 진화한 자신을 열등한 인간에게 맞출 수 없다는 논리였지. 여는 초기에는 그 자들을 숙청했으나 나중에는 포기하고 떠나게 해 주었다.]
"인간을 버렸단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 물론 그 자들이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상당한 숫자였지.]
그녀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 후우,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는 당연히 모습이 달라져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여 영생을 누리는 게 최선의 삶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 왕국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 여는 수백 년 동안 이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때때로 인간세계의 뛰어난 철현(哲賢)을 소환하여 그들과 대화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슬슬 지쳐가고 있던 중이다.]
"... 하지만."
나는 측천무후에게 말했다.
"아직까지 종말의 시기까지는 오백여 년은 남았습니다. 벌써부터 그 정도의 고민을 하신다면 버틸 수 없으신거 아닙니까?"
[ 그게 문제지. 천 년을 지샜으나 남은 오백 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구나.]
"으음..."
뜻밖의 일이었다. 나는 측천무후가 자신만의 천년왕국을 잘 운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족과 인간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니? 나는 측천무후의 고민을 생각하다가 문득 그녀의 의중을 깨닫고 말했다.
"무후께서는 제가 그 고민을 해결할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군요."
[ 바로 그렇다.]
쿠구구구구...
그 때 장중한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순환하는 마력이 무형의 흐름이 되어서 장내를 흐르는 게 느껴졌다. 또한 천공에 거대한 석비가 치솟아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측천무후가 말했다.
[ 여(余)가 기거하는 이 마천루(魔天樓)의 1차 봉인이 발동되었다.]
"봉인이라니요?"
[ 팔부신중은 당장이라도 이 곳에 넘어오고 싶어하지만 여가 차원문을 보다 강고하게 닫았다는 소리다.]
"......!!"
그렇다면 팔부신중은 아까 전부터 진작에 소환할 수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만일 신공표의 뜻대로 측천무후와 전투를 벌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천루가 활짝 열려서 팔부신중이 우르르 몰려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측천무후가 마천루의 마력을 발동시켜서 일부러 그들이 차원을 넘는 걸 막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어째서 측천무후가 내게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것인가?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측천무후가 시선을 마주쳤다. 이족이자 천상에 오른 소신격답게 인간의 흔적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녀의 눈빛에서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 방금 그대와 대화하면서 확신했다. 그대는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죽어도 될 자가 아니다... 또한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무후여."
[ 오늘은 길을 열어줄테니 도망가거라. 토요 팔괘도는 평상시에는 이 마천루의 제일 꼭대기층에 존재한다. 그대가 다음에 이 궐을 찾아온다면 그 때 대여가 풀릴테니 넘겨주겠다.]
토요의 위치는 마천루의 꼭대기!
내가 그 사실을 머릿속에 넣고 있을 때 측천무후가 말했다.
[ 팔부신중이 힘을 쓰는군... 2단계로 올려야겠다.]
쿠궁!!
마천루 근처에 또 하나의 거대한 비석이 치솟아 올랐다. 아무래도 바깥쪽 차원에서 팔부신중이 힘을 퍼부어서 억지로 차원문을 뚫으려는 듯 했다. 측천무후는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지 광석으로 된 몸뚱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전 이만 도망치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 ... 백웅이여. 한 가지 약속해줄 수 있겠는가.]
"말해주십시오."
[ 만일 그대가 인간을 구해낼 수 있다면... 여와 백성들 또한 구해줄 수 있겠지?]
나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 ... 고맙다. 이 마천루에는 수많은 통로가 있으니 위에 있는 천원(天元)의 방으로 가면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있]
쩌적
그 순간이었다.
측천무후의 등 뒤에서 꽂힌 낫의 칼날이 그녀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 크으으... 야차...]
거대낫이 꽂힌 측천무후는 고통을 느끼는 듯 잠시 허우적대었으나 이윽고 낫의 칼날이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몸이 쩍하고 갈라졌다.
푸콱
측천무후의 동체가 잘려나가면서 그녀가 마핵에 품고 있던 마력이 허공에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스스스스
그리고 뒤편에 마치 유리가 깨지듯 나타난 차원문 뒤에서 흉측한 마수(魔獸)의 눈빛이 형형한 안광을 흘리며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신화(神化)를 끝낸 듯 팔부신중 야차는 차원문 뒤편에서 거대한 마수의 발톱을 내밀며 음울한 파동을 내뿜었다.
[ 꼭두각시 인형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가, 측천무후...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 곳을 관리할 수밖에 없겠군.]
"......!!"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측천무후가 경호대상이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치워버렸는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그녀를 꼭두각시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측천무후의 죽음에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여의봉에 있는 신공표에게 외쳤다.
"신공표! 저 놈을 공격해줘!!"
[ 문을 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뜻밖에 냉정하게 대꾸한 신공표의 영체가 허공에 팔괘도형의 진을 소환하더니 강대한 술법을 시전했다.
약식(略式)
영진포일술(營鎭抱一術)
파지직
신공표의 술법이 발동하자마자 야차가 억지로 뚫어놓았던 차원문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야차는 급히 자신의 발톱을 뒤로 뺐다. 억지로 힘으로 버틸 생각을 못할 만큼 신공표의 술법이 고명하다는 증거였다.
[ 큭... 좀 있다 보자.]
야차가 흉측한 괴소를 흘리며 사라졌다.
"......"
나는 허망한 눈으로 측천무후의 시체를 보았다. 아무리 소신격이며 불로불사라 하더라도 팔부신중이 신화해서 기습하면 도리가 없단 말인가? 물론 신이므로 아직까지 죽은 건 아닐테지만 이렇게 위중한 상처를 입었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팔부신중이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면 앞으로도 살 방법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측천무후쯤 되는 존재를 이리도 쉽게 팽하다니!
내심 팔부신중에 대해서 화가 치솟고 있을 때 신공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측천무후의 명이 끊어질 때까지는 시간이 있고 그 때까지는 마천루의 봉인이 유지될 것이다. 넋놓지 말고 천원의 방으로 가라.]
"알았어!"
타닷
나는 천원의 방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방이 온통 거울이었으며 내 모습이 무한히 비치는 듯 했다. 이 곳 어디에 통로가 있다는지 알 수가 없어서 두리번거리자 신공표가 말했다.
[ 그냥 걸어가라. 이 거울통로 자체가 차원의 문이군.]
"어디로 향하는거지?"
[ 측천무후가 최후의 경우를 대비해놓은 비밀통로이니 위험한 곳은 아니지 않겠나?]
그 말이 맞다. 측천무후가 내게 천원의 방을 알려준 것은 그런 뜻이리라. 나는 천천히 거울통로를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한참을 걷자 알 수 없는 어두운 장소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이 혹시 우주공간인가 싶어서 두리번거렸지만 그런 곳은 아닌 듯 했다. 우주공간이라고 착각한 이유는 주변에 별빛이 강렬하게 흐르고 있었고 여기저기에 유성우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공표가 말했다.
[ 아무래도 도망치기는 글렀군.]
"뭐?"
[ 여긴 마천루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기껏해야 삼사십리 정도인 것 같군.]
쿠콰콰쾅
신공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뒤편에서 거대한 폭염의 구름이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가공할 폭발과 함께 구름이 버섯처럼 피어오르며 광활한 천공을 뒤덮었고, 그 폭발이 일어난 곳은 다름아닌 측천무후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 도시 위에는 신화(神化)한 팔부신중의 본체들이 떠 있었다.
놈들이 진짜 힘을 발휘해서 차원문을 뚫어버린 것이다.
일거에 도시 하나를 일소시킨 팔부신중의 위력!
신공표가 말했다.
[ 여섯 놈인가.]
"... 빌어먹을!!"
여섯 명이라면 싹 다 몰려온 것이다! 용은 여동빈에게 죽었고 아수라는 신공표에게 죽었으니 나머지 놈들이 전부 다 온 셈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팔부신중 중에서도 힘으로 손꼽히는 아수라가 당하자 방심하지 않고 다같이 온 듯 했다.
팔부신중 여섯 명, 그것도 본체라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저 놈들이 힘을 합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저런 신적인 존재들이 나를 대놓고 쫓아온다면 언제까지 도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놈들이 추적술을 써서 쫓아온다면 과연 멸혼보나 술법으로 어디까지 피할 수 있을까? 내가 크게 고민하고 있을 때 신공표가 은근하게 말했다.
[ ... 너, 이 자리에서 살고싶지 않으냐?]
"또 무슨 꿍꿍이냐?"
[ 네가 태상노군의 봉인을 풀었을 때 사용했던 음신지력이 아직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어진 신공표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 그걸 써서 태상노군이 이 여의봉에 걸어둔 최후의 봉인을 풀어라. 그럼 나는 전성기의 육체와 힘을 모두 되찾아서 부활할 수 있으니, 팔부신중이라는 놈들을 물리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