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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측천무후가 생각보다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히 신공표는 시간정지술법을 쓰고 자신의 궁에 쳐들어온 괴한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넌지시 제안한 것이다. 저 말 자체가 기만이고 함정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그녀가 왕에 어울리는 존재인 건 확실했다.
신공표가 말했다.
[ 측천무후여. 토요 팔괘도는 어디 있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거 아니냐?!
나는 한순간에 정보를 캐낼 기회가 다 사라져버린 느낌에 황당했다. 이렇게 되면 전투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측천무후가 대꾸했다.
[ 역시 그걸 노리고 왔는가.]
[ 대답해라.]
[ 토요를 얻어서 어디에 쓸지 알고 싶구나.]
측천무후의 말에 신공표가 대답했다.
[ 돼지목의 진주를 가져가려 할 뿐이다. 어차피 너희는 토요 팔괘도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잖느냐.]
[ ......]
[ 오직 나만이 토요를 진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오만한 말투에 나는 내심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공표의 말은 하나같이 공격적이고 오만해서 애초부터 교섭이라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와 손을 잡거나 교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의외로 측천무후는 순순히 그 말을 인정했다.
[ 돼지목의 진주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 다시 묻겠다. 토요 팔괘도는 어디 있지?]
[ 지금은 없다.]
[ 뭐라고?]
측천무후는 거체를 천천히 움직여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얼마 전, 신에게 공양을 바친 인간술법사가 지상에서 토요 팔괘도를 소환해 갔다. 그가 대여해 갔기 때문에 지금은 토요 팔괘도가 이 궁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 ......!!]
이게 무슨 말인가?!
[ 뭣이...]
천하의 신공표도 적지 않게 당황한듯 얼굴에 동요한 기색이 드러났다. 하지만 같이 듣고 있던 나는 일이 어찌된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 주작 제갈유룡!'
틀림없다!
황궁 복마전의 실질적인 수장인 주작 제갈유룡, 그는 토요 팔괘도를 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17번째 죽음에서 황궁에 신이 강림했을 때 나는 천제단까지 쫓겨갔었다. 그 때 나는 제갈유룡이 토요 팔괘도의 힘을 사용해서 월요의 권능과 모든 술수를 봉쇄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것이다.
지금도 놈의 말이 기억난다.
[ 보다시피 팔괘의 힘이다. 선천팔괘의 힘이지. 바로 토요(土曜) 팔괘도(八卦圖)에서 빌려오는 힘이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칠요의 주인이면 좋겠지만 이건 그냥 복마전에서 대여한 힘이니까. 신을 모시는 댓가로 빌려쓰는 힘이라고 해 둘까?]
[ 팔괘는 천지의 근원. 또한 삼황 복희가 만들어낸 최고의 주술체계지. 토요 팔괘도로 팔진도를 펼칠 수 있으니 모든 술법을 봉인할 수 있다.]
그랬다.
놈은 본격적인 토요의 주인은 아니었으나 복마전 소속이며 제사장이었기에 그 힘을 빌려서 우리를 공격할 수가 있었다. 토요팔괘도의 권능은 선천팔괘였으며 모든 술법을 봉인하는 능력이 있었고 심지어는 같은 칠요인 월요, 그것도 해방된 칠요의 권능마저 봉인하는 게 가능했다.
아마도 주작 제갈유룡은 자신의 아들인 제갈부가 납치되고 오랫동안 지상의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비장의 한 수로 쓰기 위해서 신에게 공양물을 바치고 토요 팔괘도를 대여해 간 모양이었다.
' 황궁제사장인 제갈유룡이 대여를 하게 되면 암천향에 있던 토요가 통째로 지상으로 옮겨가는 거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동시에 귀찮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 제길! 그럼 주작 제갈유룡이 토요 팔괘도를 지상에 소환하기 전에 암천향까지 와서 빼앗던가 아니면 놈이 소환한 걸 빼앗든가... 쓸데없이 놈의 움직임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
더 귀찮은 건 지상에 대여된 팔괘도를 뺏을 경우 그걸 칠요획득으로 인정할 수 있냐는 문제였다. 뺏아봤자 지상에 대여된 물품일 뿐이라고 하면서 도로 측천무후의 궁궐으로 재소환될 가능성도 매우 컸다.
나는 생각하고 있던 중에 기이한 음향이 울려퍼지는 걸 느꼈다.
위이이잉 -
신공표는 당황하다가 더 이상 말을 섞고싶지 않은지 사보검을 분화시키고 있었다. 네 개의 절검이 공격을 개시하면 이 궁궐은 쑥대밭이 될 게 분명했다. 나는 급히 신공표에게 말을 걸어서 말렸다.
[ 잠깐, 잠깐!! 너무 서두르지 마.]
[ 왜지? 토요가 없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딴 곳에는 볼 일 없다. 빨리 해치워버리고 지상으로 가겠다.]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 기다려보라고!! 좌충우돌 그만하고 나한테 다시 몸을 넘겨 줘.]
[ 뭐라고?]
[ 장담컨대 네가 얻지 못할 정보까지 측천무후한테서 얻을 수 있어. 그러니까 줘 봐.]
내가 호언장담을 하자 신공표는 갑자기 침묵했다.
그녀는 갑자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건지 모르겠구나. 정말로 자신 있느냐?]
나는 그녀의 살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다시 자신감을 내비쳤다.
[ 물론! 내가 그 정도 능력도 없을까봐?]
[ ... 지켜보겠다.]
우웅
나는 신공표의 영혼이 다시 여의봉으로 돌아가며 몸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정지 술법도 풀리면서 주변의 이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측천무후를 쳐다보았는데, 측천무후가 나를 쳐다보더니 눈에 기이한 광채를 흘렸다.
[ 그대가 그 몸의 진짜 주인인가?]
역시 신은 신이라는 건가? 몸의 통제권을 교체하게 된 정황을 한순간에 파악한 듯 했다.
나는 측천무후에게 부복하며 말했다.
"측천무후여. 저는 백웅이라 합니다. 왕국의 주인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측천무후가 쓴웃음을 흘렸다.
[ 후후후... 그대가 지닌 잠재력으로 볼 때 여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을 터인데 정중하군. 인사는 고맙게 받겠다.]
"폐하께서 먼저 편히 있다 가라 말씀해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 굳이 통천교주와 몸을 바꾼 이유가 있겠지. 할 말이 있다면 해도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측천무후에게 말했다.
"이 곳의 백성들은 폐하께서 신이 되신 후 거두신 대당제국의 신민들이 맞습니까?"
[ 그대는 내 사정을 꽤 잘 알고 있군... 어찌 아는가?]
나는 측천무후의 반문에 슬며시 화룡신검을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화룡진인의 영체가 화룡신검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강대한 화염의 힘이 흘러나왔다.
화르륵
그 모습을 본 측천무후가 놀란듯 말했다.
[ 설마 그 검은 검선 여동빈의...!!]
화룡진인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 본녀가 화룡진인이다. 여동빈은 내 제자지.]
[ 으음...]
[ 천 년 만이구나, 무후여.]
그들은 구면(舊面)이었다. 비록 지금처럼 영체를 직접 마주본 적은 없었으나 화룡신검은 늘 여동빈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다. 측천무후는 화룡신검에 목을 베인 일이 있었으므로 약간 불편한 기색이 되었고 그녀의 언짢음 때문에 궁궐이 한 차례 진동했다.
쿠웅...
나는 측천무후의 마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소신격이라지만 계약을 맺은 존재가 상당히 격이 높기에 그녀 또한 투선 이상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 아무리 신공표라도 그녀와 싸우면 힘을 꽤 소모하거나 부상을 당할수도 있었겠지... 하물며 이 곳은 그녀의 본거지인데.'
싸움을 피한 건 잘한 선택이다.
나는 측천무후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며 말했다.
"저는 검선 여동빈과 화룡진인의 연자입니다. 그들과 인연을 맺고 칠요를 찾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 검선 여동빈의 연자이기도 하다고...?]
측천무후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자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연자인 까닭에 여동빈의 기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팔부신중 야차와 손을 잡게 된 까닭, 이족의 난이 일어난 배경, 또한 봉선의식을 치르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폐하와 여동빈과의 마지막 대화를 보았으니까요."
[ ... 그랬군.]
"상관완아가 사실 야차였으며 일부러 폐하에게 접근해 당제국의 혼란을 부추겼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 ......]
측천무후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곁에 있던 이족들에게 명령했다.
[ 너희는 물러가 있어라.]
측근들은 그 말에 모두 장내를 벗어났다. 거대한 대전이 적막에 휩싸이자 측천무후가 입을 열었다.
[ 그렇다. 이 곳의 백성들은 내가 봉선의식을 치를 때 맺은 계약조건에 따라 암천향에 거둬들인 대당제국의 백성들이다.]
"역시 그랬군요."
[ 신은 나를 새로운 신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내 백성을 암천향에 전생시켜주었지. 또한 인간의 혼을 유지시켜준다는 약속도 지켰다. 토요를 공양했다는 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제가 궁금한 건 그 범위입니다. 이 곳에 전생된 인간의 혼은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내 질문에 측천무후가 대답했다.
[ 내가 의식을 치르기 전후로 삼십 년 이내에 살던 자들이다.]
"네?"
[ 그들 모두는 죽고 나서 여기서 재생(再生)했나니.]
"서, 설마 삼십 년이라는 건 중화 전역을 말씀하신 겁니까?"
[ 그렇다.]
"......"
측천무후 생전을 전후로 삼십 년이라면 대체 이 궁궐에는 몇 명이 전생했다는 말인가?!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수십 만, 아니 백만을 넘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황당해서 입을 벌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 이 궁궐이 엄청난 넓이이고 수백 층 높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 정도의 영혼을 수용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 그렇다. 절반도 받아들이지 못했지.]
측천무후가 잠시 고개를 꺾더니 말을 이었다.
[ 그렇기에 그들 중 남은 영혼들은 연옥(煉獄)에 계류중이다.]
"연옥은 무엇입니까?"
[ 인간계와 암천향의 경계에 마련된 차원... 저승조차 간섭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이 있었군.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측천무후가 말했다.
[ 그대가 내게서 듣고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 한데 그 이유는 칠요를 모으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그렇습니다."
[ 칠요를 왜 모으려 하는가?]
"세상을 종말에서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나는 내가 칠요를 모으게 된 과정, 그리고 칠요를 모아서 황제의 만신전을 꾀하는 것에 대한 걸 측천무후에게 말했다. 측천무후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대꾸했다.
[ 굉장하구나. 그 어떤 인간이 그대처럼 종말에 밀접하게 접근해서 대안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대는 진정 뜻있는 자로구나.]
그러더니 말했다.
[ 허나 헛수고가 아닐까 싶군...]
"... 왜입니까?"
[ 여는 만신전이나 칠요에 대한건 사실 잘 모른다... 허나 그대의 이야기에는 중대한 요소가 빠져 있구나.]
중대한 요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측천무후가 등을 살짝 뒤로 뉘이며 말을 이었다.
[ 일요로 불려나온 황제 공손헌원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도 상당한 힘을 써야겠지. 허나 그에게 세계를 구할 이유를 어찌 설명하겠단 말인가? 모든 삼황오제의 의사와 [옛 지배자]와의 협정을 반하는 일일진대.]
"......!!"
[ 그는 삼황오제 중에서도 별격... 진정한 신 중의 신이라 꼽히는 존재... 인간의 지혜로는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적어도 여는 그 소원을 위해 황제에게 바쳐야 할 댓가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되지 않는구나...]
맞는 말이다. 지금 측천무후는 정치적인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다.
황제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제물과 공양이 필요한 걸까? 지금까지 막연히 잡아놨던 계획의 헛점이 드러나자 왠지 뼈아픈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모든 칠요를 바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 그런가?]
"또 하나 폐하께 여쭙고 싶은게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 말해보아라.]
"창힐, 그리고 팔부신중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측천무후가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 팔부신중... 그들은 나를 신으로 만드는데 협력해주었고, 또한... 이 궁궐은 두 명의 [옛 지배자]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들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 두 명의 지배자는 상호협정을 맺었다.]
"네?"
그녀는 쓴웃음을 짓는 듯 했다.
[ 본디 여는 대화하며 시간을 끌 생각이었으나 그대는 인간의 영웅일지니 기회를 줘야겠지...]
두 명이라니?
나는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진 측천무후의 말이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 창힐이 보낸 팔부신중이 곧 이 궁궐에 내 경호를 위해 도착할 것이다. 그대는 소환이 끝나기 전에 이 곳에서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