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암천향(暗天鄕)
나는 동영의 아오키가하라 수해로 갔다.
' 아 맞다.'
하는 김에 뇌신류의 장로 청월부터 구할까 싶어서 그가 은신해 있던 입해의 비밀장소로 갔는데, 전생 이후 꽤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는 더욱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있는 걸 보면 그는 이 곳에서 살아남는데 이골이 난 듯 했다.
"크흑... 드디어...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있는건가."
그는 뇌신류의 무인답지 않게 눈물까지 보였다. 하긴 입해에 갇혀서 괴물들의 이목을 피해 살아남으려 하는 하루하루는 지옥같았으리라. 나는 청월에게서 이미 얻어낼 건 다 얻어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를 구해서 얻을 건 없었지만, 일단은 구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월에게 물었다.
"청월 장로. 혹시 이 입해의 끝... 멸해로 향하는 출구를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건 모르겠네. 이 곳의 괴물들은 너무나 막강해서 도저히 그런 걸 생각할 여지가 없었... 아."
청월 장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보니... 어떤 무사가 이 곳을 지나가는 걸 보긴 했어."
"네?"
"두 번 보았네."
나는 뜻밖의 말에 그를 뒤돌아보았다. 그는 입을 약간 우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전이야. 입해에 갓 들어와서 막 은신처를 찾았을 때쯤의 일이었네. 그 때 웬 사내가 괴물들을 피하면서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어. 동영무사 차림이었는데 그 사내는 들어갔다가 나왔어."
"몇 년 전의 일이군요."
"그 자는 엄청난 검기의 소유자였어. 중원에도 그런 고수가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청월은 내가 준 닭고기를 씹어먹다가 말했다.
"음... 그리고 또 한 번은 최근의 일인데, 한 달 전쯤에 삿갓을 쓴 놈이 거대괴물한테 덤벼들더군. 그런데 그 놈은 싸우다가 죽는 걸 봤으니 상관없을지도."
"죽었다고요... 어떻게요?"
"팔 여덟 개 달린 수십장 크기의 나찰같은 괴물한테 칼맞아서 난도질당해 죽었네."
"실력은 어땠습니까?"
"먼 발치에서 봐서 잘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결판난 듯 했네. 여기 괴물들은 너무 강하니까 무리도 아니지."
나는 청월의 목격담이 뭔가 어수선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하긴 매일같이 비몽사몽 생사의 경계를 맴돌았던 사람한테 그 이상을 바래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청월이 지금 말한 게 중요한 사실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후자의 삿갓 놈은... 아마 예전에 봤던 놈이겠지.'
지난번에도 괴물의 입김광선에 맞아서 죽었는데 이번에도 죽은 모양이었다. 뭐하는 놈인지 몰라도 입해까지 와서 투선급 괴물과 싸우고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아무튼 죽었다면 신경쓸 게 아니었고 중요한 건 전자의 인물이었다.
나는 청월에게 말했다.
"당장 저와 이 곳에서 탈출하지요. 그리고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저희 본거지에서 들려주십시오."
파앗
나는 일단 청월을 데리고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며 회복시켰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기력이 회복되자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월은 자신의 기억을 세밀하게 더듬으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 동영무사의 얼굴은 이런 느낌이었네."
나는 책사들과 함께 청월이 그린 그림의 윤곽과 특징을 잘 살폈다. 나는 그 그림을 잘 들여다보자 뭔가 감이 왔고, 그 감의 정체를 알아내곤 말했다.
"역시 그 자였군."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아니 매우 익숙하다.
"뻔한 일이긴 하지만 확인했다는 게 중요하오."
망량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를 만나는 건 나중에 해도 될 일 같소. 우선은 계획대로 합시다."
"알았소."
파앗
나는 망량, 천우진, 제갈사, 진소청 등과 함께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진입부에 들어갔다. 장소는 생해를 벗어나서 사해(死海)로 진입하는 어두운 동굴이었는데, 이 곳에는 이족의 유적과 함께 음양사 일족의 관리자가 있었다.
우웅
제단 위에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이윽고 완전히 인간의 형상을 갖춘 '그것'은 제단 위에 구현화되었다. 그 자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특수하게 제작된 의관을 쓰고 있었다. 음양사 복장을 하고 있는 그 자는 우리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저는 수해의 관리자 일족인 아베노 요시히라(安倍吉平) 라고 합니다. 귀공들이 뉘신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왜 우리가 그걸 당신에게 알려줘야 하오?"
"마도구를 사용해서 입해에 출입하고 이 장소에 바로 나타나셨으니, 필시 큰 비밀을 지닌 귀인이라 생각해서입니다."
다 파악하고 있었군.
하긴 관리자 일족이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침묵하자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 일족의 수장인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를 만나고 싶소."
"곤란하군요. 저희 수장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인이 만나고싶다 해서 늘 모습을 비출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중원에서 왔고, 나는 망량선사의 제자인 망량이오. 그리고 이쪽은 의협 백웅, 진소청, 제갈사, 마지막으로 내 사제인 환신 천우진이오. 우리들은 마(魔)에 대적해서 싸우려 하고 있소."
"그래서요?"
"당신들의 결계를 유지보강하는데 도움을 주겠소. 대신에 아베노 세이메이와 대화하고 싶소."
"......"
아베노 요시히라는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검지손가락을 들어서 제갈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좋지만 그쪽의 당신은 안 됩니다. 당신처럼 강력한 마도사는 결코 들일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제갈사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꺼져달라는 말인가?"
"마도에 속한 자는 출입금지입니다."
"그럼 저 녀석은?"
제갈사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아베노 요시히라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했다.
"뭐가... 말입니까? 평범한 인간 같습니다만."
"큭크크. 그렇군."
제갈사는 뭔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럼 꺼져드리지."
휘익
그가 사법을 사용해서 사라지자 아베노 요시히라가 말했다.
"수장께서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그 말에 뭔가 기분이 나빠져서 말했다.
"방금 제갈사를 내쫓은 건 당신이 아니라 세이메이의 의지였단 말인가?"
"아니오. 그 분께서는 그저 당신들을 데려오라는 말밖에 안 하셨습니다."
"뭐? 당신이 뭔데 상관의 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단 말이오?"
내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자 아베노 요시히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이 곳은 마와 대척하는 최전선입니다. 마도사 따위를 어찌 들인단 말입니까."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항변하려 할때 망량이 순어구로 말을 걸었다.
[ 백웅. 그만두시오. 이 자들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음양사들이라서 마도에 대해 극히 민감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소. 더 말해봤자 인상만 나빠질 거요.]
[ 알았소.]
스스스
우리는 아베노 요시히라가 연 팔괘술법의 문을 여러 번 통과하자 이질적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팔괘문양과 온갖 신비술의 주법이 사방에 새겨져 있었으며 신목(神木)에 인간의 건물이 얹혀지듯 지어져 있었다. 꽤 거대한 마을이었으며 이 마을에 사는 자들은 모두 음양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하자, 그 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의 미동(美童)이 서 있었다. 미동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외모였고 마치 여우를 연상시키는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 미동을 본 아베노 요시히라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세이메이 님. 데려왔습니다."
"물러가게. 그리고 이 근처에 사람을 들이지 말게."
"네."
어린아이가 명령하는데도 아베노 요시히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아마 저 미동이야말로 우리가 찾던 아베노 세이메이라는 최고의 음양사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동이 마치 은구슬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들, 잘 왔어. 내가 아베노 세이메이다."
아베노 세이메이!
태산부군제를 최초로 성공시켰다는 전설의 술법사이자 음양사.
그리고 동영의 음양사일족을 이끄는 수장이자 아오키가하라 수해를 봉인하고 있는 주체가 바로 그인 것이다. 나는 아베노 세이메이에게 질문했다.
"나이가 수백 살이나 된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어린 외모인 거지?"
"귀엽잖아. 내 취향을 존중해 줘."
"어? 그, 그래... 넌 남자냐 여자냐?"
"중요치 않아."
"......"
워낙 담담한 말투라서 도리어 내가 당황했다.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망량에게 말했다.
"봉인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도와줄 생각이지?"
"우리가 가진 신기보물을 드리겠소. 당신 정도 되는 음양사라면 보물의 힘을 이용해서 결계의 강화를 꾀할 수 있을테지."
"좋아. 그럼 거기 앉아 봐."
세이메이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자 난데없이 공간이 크게 변화하더니 일행 모두가 앉을만한 의자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 몫의 의자를 생성해서 앉은 후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나한테 묻고싶은 게 있으면 말해 봐."
나는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건가? 나같으면 보물이 어떤 게 있는지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재어볼 텐데."
"뭐하러 의심하지?"
"뭐?"
"망량선사의 제자라면 그걸로 신원보증은 다 된 거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는데 귀찮게 심기를 굴릴 이유가 없다."
"......!!"
"마(魔)에 대항하는 인간은 무척 적어. 믿을 수 있으면 믿는 게 이득이야."
망량선사의 제자라는 것 하나만으로 저렇게까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보다 망량선사의 영향력은 더 엄청난 모양이었다. 수백 년동안 살아온 동영의 대술법사가 다짜고짜 믿을 수 있을 정도면 그를 절대적인 아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망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태산부군제를 지내서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손에 넣었다고 알고 있소. 그 태산부군제에서 남두성군과 북두성군이 나타났었소?"
"너희도 태산부군을 소환해봤나 보군."
"그렇소."
세이메이가 천천히 대꾸했다.
"맞아. 태산부군제라는 불사술법의 정체는 결국 남북두의 성군에게 빌어서 염라를 만나고, 염라의 생사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남북두가 명계와의 중계를 하는 동안 부정한 짓이나 비리를 저지른 정황이 있느냐는 것이오."
망량의 말에 세이메이가 손깍지를 살짝 풀었다.
"그런 건 딱히 없어.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저의는 알 것 같군."
"뭔가 알고 있소?"
"명계가 구린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야. 사기계약을 하는 사기꾼에 가깝기도 하고."
"사기계약이라 하면..."
"인간이 죽어서 명계에 가는 것 자체가 사기계약이지."
뭐?
옆에서 듣고 있던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세이메이가 말했다.
"어떤 일로 그들의 비리를 캐묻는지 자세한 연유를 듣고 싶군."
나는 망량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눈 앞의 세이메이는 믿을만한 아군이라는 생각에, 우리가 항우의 의뢰를 받아서 우희의 영혼을 찾으려 했고 그 와중에 명계의 비밀을 캐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메이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 놈들은 지금 염라대왕이 소멸했다는 걸 숨기고싶은가 보군. 너희처럼 수상쩍게 행동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여... 염라대왕이 소멸했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염라대왕이라 하면 인간의 선악을 판단해서 지옥과 천상행을 고르게 하는 저승의 지배자가 아닌가? 내가 놀라자 아베노 세이메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염라대왕은 지옥시왕 중 한 명에 불과해. 단지 유명할 뿐이지. 그리고 그 자는 내가 태산부군제를 치렀던 오백여 년 전에도 이미 소멸되어 있었어. 그래서 나는 남북두성군을 구슬려서 뇌물을 바치고 주인없는 염라의 생사부에서 내 이름을 지웠지."
"그게 정말이야? 염라대왕은 왜 죽었지..."
"나도 잘 모르겠다."
무심하게 대꾸한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또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인데."
"아 맞아. 혹시..."
나는 망설이며 질문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여기 수해에 온 적 있나?"
"있지."
역시!
청월의 초상화를 보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 미야모토 무사시는 과거에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입해까지 진입해 들어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럼... 그 자가 입해를 넘어서 멸해에 들어갔던 건가?"
"아니."
"못 들어갔다고?"
"그렇다."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수해(樹海)의 왕에게 패배했다. 그는 두 번 다시 수해에 도전해서 힘을 쌓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