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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근두운을 타고 가다가 제천대성이 문득 멈춰서는 걸 느꼈다. 허공에 멈춰 있던 제천대성은 뭔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만 있어라. 역시 순찰중인 놈이 있었군."
나는 그 말대로 호흡과 기척을 크게 숨기며 움직임을 줄였다. 내가 식물이나 다름없는 수준까지 기척을 없앴을 때 근두운의 옆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후우웅!
흑풍(黑風)이 파랑(派浪)을 끌며 겹쳐지듯 흘러갔다. 제천대성은 자신의 술수 중 하나를 발휘해서 모습을 감춘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뜻 흑풍 위에 '뭔가'가 타고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제관을 쓰고 있는 괴인이었다. 나는 그 괴인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흑풍이 완전히 사라진 후 제천대성이 지상으로 내려가서는 중얼거렸다.
"북두성군(北斗星君)이 직접 돌아다니다니 걸렸으면 큰일날 뻔 했군."
"......!!"
북두성군!
그는 남두성군과 함께 수명을 관장하는 하위신 중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위신임과 동시에 투선이라는 독특한 직책을 갖고 있는 북두성군은 인간의 죽음(死)을 주로 관장했다. 또한 반대로 남두성군은 인간의 삶을 관장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은 인간이 죽은 후 심판하여 명계의 거취를 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제천대성에게 질문했다.
"북두성군은 투선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워보이는데 왜 굳이 아랫일을 자처합니까?"
아무리 투선이 전투능력이 뛰어나고 대접이 좋은 신선이라고는 해도 신격에 비해서는 부족했다. 그런데 북두성군과 남두성군은 특이하게도 신으로써 가진 임무와 위계가 있음에도 투선의 직위까지 자처하고 있었고, 그건 알아서 궂은 일을 하려한다는 뜻이었다. 내 질문에 제천대성이 대꾸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저들은 명계의 수장인 염마(閻魔)와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원래 저놈들은 명계 출신이다. 천계와 명계 사이에 거래가 있었겠지."
"......"
명계 출신이라.
"하여간 나는 투선중에 그리 맘에 드는 놈이 없어. 하나같이 지만 잘난 놈들이라서 재수없어서 패주고싶다니까."
"그렇군요."
투덜거리는 제천대성이었다. 나는 적당히 말을 받아준 후 질문했다.
"북두성군이라 해도 제천대성님과 싸우면 지지 않습니까? 걸리면 큰일인 이유가..."
제천대성이 자신의 귀밑머리를 긁었다.
"뭐, 당연히 붙으면 내가 이기지. 남북두가 같이 덤벼도 패줄 자신 있어. 근데 저 놈들이 가진 권능이 까다로워서 사실 별로 싸우고 싶은 상대가 아니거든."
"권능요?"
내 반문에 제천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들은 삼관대제(三官大帝)의 힘을 빌려서 염마장의 힘으로 상대방을 즉사시킬 수 있어. 신선이라고 해도 즉살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뭐니뭐니해도 명계 출신이고 '죽음'의 영역을 다루는 성좌의 하위신이니까."
"......!!"
"나니까 저 놈들을 쉽게 패줄 수 있는거지 다른 놈들은 꽤 고전할걸. 죽음의 권능을 버텨내도 힘이 크게 깎일테니."
나는 제천대성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제천대성 혼자라면 북두성군을 마음껏 팰 수 있겠지만 나까지 보호하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북두성군이 외부에 소식을 알리는 걸 차단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 투선이란 자들은 하나같이 괴물이군...'
여동빈, 장삼봉, 후예 등등 모두가 한가락 하는 인물들이며 인간출신일 경우 다들 무림최강자 지위를 섭렵하고 등선한 자들이었다. 천계 최강의 투선은 제천대성이 분명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제천대성조차 만만히 볼 수 없는 자들이 투선으로 임명되어 있는 것이다.
스스스
근두운을 타고 얼마나 갔을까? 외부에 들킬까봐 술법으로 은폐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제천대성이 웬 커다란 산의 입구에 서서 말했다.
"다 왔다. 여기가 바로 항우가 칩거해 있는 구선산(九仙山)이다."
"혹시 항우가 이 산의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나도 몰라. 그 놈이 여기 어딘가에 궁(宮)을 짓고 혼자 틀어박혀서 누군가를 추모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어."
"궁을 찾아야겠군요."
나는 전국옥새의 전시안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두었다. 전국옥새를 제천대성이 모를 리가 없을 뿐더러 내가 그 주인이란 걸 알게 되면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천대성이 말했다.
"뭐 괜찮아. 멍청할 정도로 힘만 쎈 놈이니까 가다보면 기운이 느껴질걸."
제천대성의 말대로였다. 구선산에 약 오 리 정도 들어가자 갑자기 강대한 패기(覇氣)가 몸을 휩쓰는 기분이 들었고, 산 전체가 강대한 기운으로 채워져 있는 듯 싶었다. 호법사자의 무한의 내공을 대했을 때도 이런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제천대성이 먼 곳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했다.
"호오. 저기 있군."
"항우가 있습니까?"
"그리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는데? 넌 알아서 목숨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알았습니다."
솔직히 항우가 날 죽이려 하면 살아날 자신이 없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항우의 본거지까지 올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감수할 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천대성이 함께 있으니 여차하면 도망칠 기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구선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큰 궁궐이 보였고, 그 궁궐은 고대 초나라의 양식으로 보였다. 그리고 궁궐의 입구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장한은 팔짱을 낀 채 제천대성에게 말했다.
"제천대성. 내 영지에는 무슨 일이냐?"
서초패왕 항우!
그가 다소 지루한 듯, 언짢은 표정으로 제천대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항우도 제천대성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제천대성이 내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여기 이 친구가 널 보고싶어 하더라고. 난 데려온 것 뿐이야."
"인간이잖나."
"인간이 천계에 올 수도 있는거지 뭘. 너도 죽었는지 아닌지 불분명한 상태면서."
"......"
항우는 제천대성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쿠궁
' 컥...!!'
나는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엄청난 무력감에 휩싸이는 걸 느꼈다.
전대미문의 패기(覇氣)!
절대고수가 지니고 있는 무(武)의 영향력과는 다른, 순수하면서도 파괴적인 '힘' 그 자체! 전신의 털 하나하나가 곧추세워지며 상대의 엄청난 힘에 전율하고 있었다. 딱히 고매한 위상을 담은 고차원적인 압박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자연재해를 눈 앞에 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무력감이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부들거리면서도 어떻게든 항우의 패기를 버텨내고 있자 항우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인간 치고는 꽤 강한 놈이군. 적룡왕 그놈보다 훨씬 강해."
"애 좀 그만 괴롭혀라. 이 녀석 좋은 녀석이라고."
제천대성이 다소 성난 목소리로 말하자 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님이라면 꽤 각별한 존재군. 손님을 세워두기도 그러니 안으로 들어와라."
"먹을 거 있냐?"
"없다."
우리는 잠시 후 항우의 궁궐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런 인기척없이 을씨년스러운 궁궐 내부에 어둠이 깔리고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걸 느꼈다. 시비나 하인이 하나도 없으니 마치 적막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촛불 몇 개가 밝혀지고, 항우는 커다란 탁자의 상석에 거만하게 앉았다. 그는 귀찮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이름이 뭐지? 나를 왜 찾아왔나?"
"어... 그게... 전 백웅이라 하고..."
"시덥지 않은 용건이면 바로 나가다오."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이 정도면 꽤 온화한 태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상서롭지 못한 죽음을 맞이한데다 천계를 한바탕 뒤집어엎어서 따돌림당한 채 유폐나 다름없이 지내는 게 항우였다. 게다가 본인의 생전 성격도 그리 좋지 않은지라 원래라면 나 혼자 왔으면 다짜고짜 맞아죽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항우에게 말했다.
"두 가지 여쭐 게 있어서 감히 서초패왕을 찾아왔습니다."
"한 개도 무례한데 두 개라니 건방지구나."
"죄송합니다."
항우는 살짝 노한 듯 이마에 핏줄이 섰지만 힐끔 제천대성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 말해봐라."
아무래도 제천대성과 싸우게 될 게 귀찮게 느껴져서 봐준 듯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계로 올라오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뻔한 질문이군."
항우는 시시하다는 듯 옆에 있던 술잔을 한모금 마신 후 대꾸했다.
"내가 죽을만큼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으니 명계의 사신들이 내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게 짜증나서 명계로 가려 했는데 천계로 와 버리더군. 온 김에 재수없는 신선이란 놈들을 신나게 때려잡던 중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
"방금 네가 했던 질문은 내가 천계에 온 이래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올라오셨을 때 서왕모(西王母)와 부딪히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항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제천대성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흥미로운 듯 자신의 턱을 약간 쓰다듬다가 말했다.
"...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궁금..."
"아니, 그냥이 아니야."
항우가 다소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유도 없이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지. 다른 강력한 존재도 많은데 하필 서왕모라? 넌 뭔가 특별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 같군. 하긴 그런 놈이 아니라면 일부러 제천대성을 데리고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겠지만."
"음..."
"이유를 똑바로 말해라. 그럼 나도 패왕의 명예를 걸고 솔직히 대답해 주겠다."
곤란하다.
일단 궁금한 걸 질문해서 반응을 얻어내긴 했는데 마치 심문당하는 듯한 분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큰 부담이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자칫했다가는 한 순간에 제천대성의 호의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느끼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어떻게 하지?'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 이 곳은 누구에게도 도청당하거나 감시당하지 않습니까?"
"물론. 내 성좌의 힘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이 궁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저는... 서왕모가 사실 삼황(三皇)의 일좌인 여와, 혹은 그 분신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
"타고난 성좌의 힘이 역사상 가장 강했다던 항우님께서 그 서왕모와 싸워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다 털어내 버렸다.
좀 더 숨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 이 기회는 살면서 몇 번 올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괜히 항우를 떠보고 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항우는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을 기만하려 하는 자에게 크게 반감을 느끼는 성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후폭풍은 굉장했다.
그 순간 제천대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말했기 때문이다.
"백웅 이 쨔샤! 너 대체 뭐냐?"
"제천대성님."
"뭔데 인간이면서 그런 걸 의심하고 있는거지?! 칠요 건도 그렇고 너 진짜 뭐하는 놈이냐고!!"
도리어 냉정한 것은 항우였다. 그는 제천대성을 힐끔 쳐다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대답부터 해 주지. 난 서왕모와 싸워본 적이 없다. 저 미친 놈은 모르지만."
미친놈이라 하는 건 아마 제천대성일 것이다. 제천대성이 서왕모에게도 덤벼들었다는 사실은 천계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내가 천계 대라신선들을 때려죽일 때 서왕모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옥황상제나 삼청도 마찬가지였지. 마지막에 뒤처리를 한답시고 나온 건 구천현녀였다."
역시 그랬던가.
사어의 실종을 확인한 후 구천현녀가 어쩔 수 없이 뒤처리를 위해서 항우와 교섭하러 나왔으리라.
"그녀가 상위 천선(天仙)들과 함께 대규모 시해지술을 시전하니 나로서도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녀와 협상해서 이 자리에 칩거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렇게 말한 항우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 하지만 정말 재밌군. 난 생각도 해본 적 없었어. 전설의 삼황오제 중 시원(始元)의 창조여신 여와가 서왕모라."
"쳇! 이게 재밌다로 끝날 일이냐? 하여간..."
제천대성이 툴툴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야 백웅! 그래서 넌 서왕모가 여와의 분신이면 어쩌려고 묻는 거냐? 그걸 캐내고 다니는 저의가 뭔데?"
"음... 그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서 망설이자 항우가 팔짱을 끼며 우묵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와를 죽이고싶은 거겠지."
"......!!"
"나는 천살성의 기운을 갖고 있어서 타인이 품고 있는 살기에 민감하다. 내게 터럭만큼의 살기를 품는 자라 해도 감지할 수 있고, 반대로 타인이 누구에게 어떤 살기를 품고 있는지도 즉시 알 수 있지."
항우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재밌는 인간이야... 방금 여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녀를 향한 진심어린 살기의 편린이 느껴졌다."
"......"
"삼황오제를 진심으로 증오할 수 있는 인간이라."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세상 온갖 사물에 증오를 품을 수 있다고 해도 굳이 삼황오제에게 증오를 품는 인간같은 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 너무나 높은 천상의 대신(大神)에게 뭐하러 증오를 품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실제로 증오를 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그렇기에 전생자(轉生者)이다.
"백웅, 본왕은 네게 흥미가 생겼다."
항우가 말을 이었다.
"너를 내 부하로 임명해 주마. 한가지 더 물어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