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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백련교주의 주변에서 심천무량의 광채가 한 번 번득이는 순간이었다.
"크헉."
"우웃."
신승은 권압(拳壓)에 튕겨서 훨훨 날아갔고, 명룡자는 검면으로 공격을 채 막기도 전에 갈비뼈가 부러져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광은 초식을 펼치려다가 너무나 흉험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회피에 전력을 다해서 공격권을 피했다.
따당
진소청과 검마에게 각각 일격씩 가해졌는지 그들은 어떻게든 막아냈으나 경직된 틈에 교주가 벽공장을 날렸고, 그들은 크게 태세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절기의 응용을 이용해서 막아내긴 했지만 순수한 거력(巨力)을 흘려내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궁
백련교주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서 있는 자가 없었다.
고작해야 일 초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으나 백련교주가 단 한 번 심천무량을 발동시킨 것만으로도 과반수가 제압당한 것이다! 심지어 진소청이나 검마조차 그에게 반격할 수 없었으니 실력차이가 역력했다.
' 어?'
그런데 이상하게 내게는 백련교주가 공격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의아하게 여기고 백련교주를 보자, 백련교주와 눈이 마주쳤다. 백련교주가 말했다.
[ 너같은 소년이 나설 곳이 아니니 물러나라. 아이를 해치고싶지는 않다.]
"......"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내공을 일부러 억눌러놓은 상태였다. 나는 백련교주가 나를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으나 그에게 말했다.
"교주. 궁금한 게 있소."
[ 흠.]
후웅
그는 얘기를 나눌 가치가 없다고 느낀 듯 가볍게 손을 저어서 나를 날려보내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항거하기 힘든 거력(巨力)이 깃들어 있어서 단번에 궁궐을 날려버릴만한 와풍(渦風)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는 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꾸웅!
[ ......!!]
교주의 기운은 허공에서 내가 뿜어낸 내공과 부딪히자 상쇄되어 버렸다. 그 모습에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백련교 고수들이 술렁였고, 호법사자들도 움찔거리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백련교주의 한 수를 내공만으로 상쇄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내 내공이 신승보다 훨씬 앞서니까.'
나는 백련교주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에게 질문했다.
[ 넌 반로환동한 건가?]
"상상에 맡기겠소."
[ 좋아, 이 자리에 낄 자격은 있다 해 주지...]
나는 곧이어 백련교주가 재공격해 올거라는 걸 깨닫고 긴장했다. 이번에는 교주가 심천무량을 살짝 소개해 준 수준이었으나 다음 공격은 흉험하기 그지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고싶은 질문을 입에서 먼저 꺼냈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3만 명을 희생하여 100억 명을 구한다면... 그 희생은 과연 해야하는 것이오?"
이 질문을 다시 하고 싶었다.
여동빈의 과거회상에서 나왔던 망량선사의 이야기 - 그건 왠지 내가 겪었던 19회차에서 백련교주의 행적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맥락없이 뜬금없는 질문이라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백련교주만은 달랐다. 그는 자신을 포위한 6명의 초절정고수들이 몸을 추스려서 합공해 올 것을 걱정도 하지 않는지 무면탈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맥락없군. 넌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 거지?]
"그저 알고싶을 뿐이오."
[ 기인(奇人)인가.]
훗하고 웃던 백련교주가 질문에 답했다.
[ 3만으로 100억을 구한다... 그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
"어찌 당연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소? 3만 명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오?"
내가 반문하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넌 아무래도 특이한 존재같군. 무공이 만만치 않구나.]
"......"
[ 너희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나를 찾아온 거라는 느낌이 든다... 일단 그 질문에 대답해 주지.]
백련교주의 무감정한 시선이 내게 닿였다.
[ 그럼 100억 명이 죽는 재액을 내버려두면 3만 명이 살 수 있을거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건... 아니지만, 3만 명을 함께 살릴 방법이 있지 않겠소?"
[ 100억이 죽는 재액을 막을 방법이 없기에 3만을 희생시킨다는 얘기가 함께 나온 게 아니었던가? 본말이 전도되었군.]
"가능성은 낮겠으나 낮다고 하여 포기하는 게 옳은 일인지 묻고 싶었소."
[ 왠지 그대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군...]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내게 그런 상황이 닥쳐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3만을 희생시킬 것이다. 모든 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 3만이 당신네 교단의 인간이라 해도 말인가?"
[ 그렇다.]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백련교주였다.
하지만 그 순간 - 백련교주의 뒤편에 서서 관전하고 있던 호법사자들의 기세가 일순간 크게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아주 찰나간의 변화였지만 내게는 느껴졌다. 한백령과 용비천에게서 상당히 큰 감정의 동요가 파장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 흔들어 본 보람이 있는 건가?'
이 흔들림이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될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교주의 진의를 확인시켜서 호법사자들의 심정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게 중요했다. 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 아무래도 그대는 이면의 세계에서 온 듯 하군.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생포해서 차근차근 알아봐야겠다.]
쿠구구구
쿠구구 -
백련교주의 몸 주변에 만다라가 떠올랐는데 마치 공간이 수면의 파장처럼 뒤흔들렸다. 만다라의 중심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빨려들며 시꺼먼 구멍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저게 심천무량을 공세로 돌리려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건 백련교주가 일순간 전력을 쏟아서 우리 모두를 쉽게 제압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었다.
' 해봐야 해.'
이 상황에서 비등을 써서 아군만 구해간다는 게 더 비현실적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백련교주의 역량에 어금니를 들이댈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 짧은 순간, 나와 진소청, 검마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신호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고수끼리만 공유하는 감각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우리의 공통점은 바로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비롯해 유사한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동문(同門)이었다.
심천무량의 특징은 공방이 일체가 되는 무적의 무공이라는 것이지만 그 무공에도 단점은 있었다. 약점이라고 부를 것까지는 않았으나 모든 무공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술을 짜기에 따라서는 그 위력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검마였다. 검마는 자신의 의념을 발휘해서 어검을 불러내었는데 그 갯수가 매우 많았다. 무려 수백 개나 되는 어검은 제각기 다른 무기의 형상을 하며 검마의 손짓에 따라 수어검(手御劍)이 되어서 날아갔다.
투둥
하지만 어검은 심천무량의 전면에 도달하자마자 마치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심천무량의 만다라가 품고있는 무한한 힘을 뚫기에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주의 원영신이 지닌 무한의 내공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저 만다라는 무한에 가까운 방어력을 지니게 되어 있었다.
다만 그건 검마와 우리가 암묵적으로 공유한 작전의 첫 발걸음에 불과했다. 교주가 심천무량에 약간 힘을 모아서 방어를 강화시키는 그 미묘한 순간에 진소청이 삼보절기의 묘리에 따라 움직였고, 소멸 직전의 어검에 따라붙듯 환상적인 속도로 돌격했다.
퓨웅
어검이 스러지기 직전 진소청의 창끝에서 신묘한 빛이 마치 화살처럼 튕겨나갔는데, 나는 그게 오행강기(五行?氣)와 역천보륜이 합쳐진 새로운 절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오행 중 어느 속성으로도 자유자재로 강기의 성질을 바꿀 수 있는 오행강기의 수법에 추적형 기술이 덧붙여지자 마치 기운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심천무량의 약점을 찾아서 삼 장 범위를
뒤덮었다.
파지직!!
' 내 차례다!'
사실 진소청이 움직이고 있을 때 거의 동시에 나도 같이 움직였다. 진소청이 어떤 기술을 쓸 지는 몰랐지만 분명히 검마와 연계해서 심천무량의 만다라에 빈틈을 만들어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뇌전의 기운이 만다라를 감싸며 교주를 멈칫하게 만들고 있을 때 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운을 발휘했다.
뇌신검무(雷神劍舞)
검뢰(劍雷)
전국옥새의 힘이 내가 품고있던 내공과 합쳐지며 빠르게 검뢰의 기운으로 전환되었고, 그 막강한 기운이 검극에 맺히더니 내 검을 시퍼런 빛으로 명동(鳴動)시켰다. 아주 조그마한 틈이었으나, 나는 그 미세한 틈을 충분히 찾아내고는 온힘을 다해 검뢰로 찔렀다.
스스스
내 검날이 만다라 사이로 밀려들어갔다. 교주 또한 그 사실을 느꼈는지 찰나의 순간에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검뢰에는 호신강기를 절삭하는 힘이 있어서 아무리 절대지경의 무학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주의 대응은 늦어있어서 다음 순간 내 검뢰가 그의 영역을 휘저으며 가슴팍을 찔러들어가고 있었다.
쿠구궁!!
교주의 우장(右掌)이 휘둘러지는 동시에 그가 벗어나며 수십 발의 강기를 내게 날려왔다. 나는 그의 반격을 빠르게 삼보절기로 피하면서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 완전히 불의의 일격이었을 텐데 그 상황에서 반격으로 전환하다니... 역시 심천무량은 대단해.'
심천무량의 약점아닌 약점은 공격이나 방어 어느 한쪽의 태세를 취할 때는 잠시 빈틈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한의 내공인 원영신을 지닌 교주의 일반적인 방어력조차 그 어떤 고수도 뚫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건 약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주를 알아왔던 나,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약점으로 노릴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 번 찔러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이게 충분히 교주를 상대로 통하는 전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사삿
우리 셋은 교주를 좁은 삼재진 형태로 포위하듯 따라붙었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승, 명룡자, 이광은 좀 더 거리를 두고 외부의 삼재를 점했다. 모두가 초고수답게 어떤 상황이 일어났는지 이해했고 가장 적합한 합격진의 형태를 짠 것이다.
교주는 기습을 맞은 상황에서도 즐거운 듯 말했다.
[ 오직 기(技)로서 절대적인 역량차이를 극복할 줄이야... 내 만다라의 약점을 통찰한 것인가?]
"피해!!"
나는 짧게 고함을 내질렀다. 왜냐하면 교주가 육합전성을 하는 와중에도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만다라를 소환하며 수십 발의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주 밑에서 제자로서 오랫동안 대련해왔던 나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직감이었다.
퍼펑
"커흑."
신승과 명룡자는 만다라에서 뿜어져나온 무형의 강기를 두 발까지는 막았으나 세 발째에 휘말려서 뒤쪽으로 날아가서 기절해 버렸다. 이광은 도리어 대충 버티면서 뒤쪽으로 빠르게 물러났는데, 저건 셋의 무공차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차이때문에 벌어진 현상같았다. 신승과 명룡자는 여차할 시 우리 셋과 함께 반격하려 생각하고 위험범위에 걸음을 들였지만 이광은 그런 생각이 없었기에 무사했던 것이다.
나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 역시 괴물이야...'
현 무림의 최절정고수조차 심천무량을 쓰면 두세 방만에 절명시킬 수 있는 백련교주가 어찌 괴물이 아니겠는가? 신승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내공의 고하는 무한의 원영신 앞에서 무의미한 지경이다. 심지어 전생하면서 그의 약점과 버릇, 특기를 대충 알고 있는 내가 동료들과 함께 삼재진을 짜고 있는데도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백련교주를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우리 셋 뿐이다. 암묵적으로 적아(敵我)가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냉엄한 살기가 찰나를 스치는 사이에 백련교주가 소환한 만다라가 울었다.
우오오오 -
만다라가 기운을 토하기 직전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술을 썼다.
무영탈혼(無影奪魂)
구십구합리귀(九十九合理歸)
검뢰(劍雷)
셋이 각각 장기인 기술을 펼쳐내며 만다라의 공격을 거둬내며 백련교주의 가공할 공격의 궤도를 읽었다. 순식간에 현란한 수천 개의 광선포가 허공을 수놓는 와중이었지만 우리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교주의 공격을 흘려내면서 차분하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심적권청의 찰나, 교주가 무(無)의 공간에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 지금 아주 즐겁다.]
무면탈 너머의 교주가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교주는 자신의 무공을 감당할만한 대적자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지금 전투의 쾌감에 몰입했다는 사실을.
쿠쾅!!
' 손이 저려.'
셋이서 합공하기 시작한지 이제 이백 오십 초 째였다. 딱히 셋이서 합공연습을 한 적이 없었지만 다들 진법과 합공의 정수를 깨닫고 있는지라 가장 기초적인 삼재진을 짠 상태에서 원거리 청경으로 움직임을 읽으며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주의 심천무량으로도 우리를 손쉽게 적중시키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
"오오오...!!"
"세상에 이런 대결이...!!"
하지만 관전하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 다들 경악하고 있었다. 대결의 수준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호풍환우와 섬광이 번쩍이는 걸로 보이고 있으리라. 정작 당사자들은 지지부진하다고 느끼는데도 말이다.
이대로 가면 진다.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 진소청과 검마도 느끼고 있으리라. 우리 셋은 모두 전생경험을 통해서 기술수준이 매우 높았으나, 그건 심천무량을 상대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로 그의 빈틈을 노려서 이기려면 더 큰 힘이 필요했고 아직은 수준미달이었다. 절대지경인 교주가 원영신을 지니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한의 내공과 체력을 갖고 있으니 장기전일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나 또한 엄청난 내공과 전국옥새의 힘을 끌어쓸 수 있으니 전면 힘싸움에서 최대한 버텨보겠으나 1천초를 넘어가면 그것마저 자신이 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스으으...
갑자기 백련교주가 기세를 낮추며 땅에 내려앉았다. 모든 공격과 반격을 그만둔 채 수비로만 일관하자 마치 철옹성과 같아서 더 이상은 우리도 공격하지 못하고 얌전히 둘러쌀 수밖에 없었다.
백련교주가 말했다.
[ 승패는 이미 뻔하다. 알고 있겠지.]
"......"
역시 그 또한 바보가 아니라서 장기적인 승산이 무조건 자기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하지만 그대들의 무공은 뻔하다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군.]
"교주! 무슨 말을 하고 싶소?"
이어진 교주의 말에 우리는 잠시 굳었다.
[ 이 자리에서 내게 복종한다면 모든 걸 용서해 주마. 그 무공을 나도 얻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