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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죽은 자들의 영혼 중에서 인쇄기를 발명했다는 발명가의 혼을 찾았다. 천신경의 술법과 이혼대법을 사용하자 어느 정도 추려낼 수 있었고, 이윽고 그 혼이 내 앞에 섰는데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 크악... 아아악...]
영체가 뜯겨 있다.
'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옛 지배자]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면 찾을 수 없었겠지만 건성건성 영체를 씹어먹은 덕에 일단 영혼이 남긴 남은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통째로 영체의 절반 이상을 뜯어먹힌 탓에 정상적인 영체의 유지가 불가능한 듯 했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공손벽 때처럼 음신지력을 놈에게 불어넣어 보았다.
우우우 -
잠시 후 놈의 영체가 안정을 되찾으며 사라졌던 부분이 되돌아왔다. 음신지력이 영체를 수복하면서 이성도 되찾아준 듯 멀쩡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놈은 공포에 떨면서 벌벌 떨며 왔다갔다하며 불안해했다.
[ 으아아아... 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주긴 뭘 살려줘?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
[ 죽어? 내가... 으악! 크아아악.]
그는 방금 전 [옛 지배자]에게 포식당할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다시 발광했다. 나는 다시 음신지력을 써서 그를 안정시켰는데 힘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체에게 힘을 불어넣을 때마다 내 힘은 소모되는데 이럴 때마다 음신지력을 대성하는 시간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겨우 안정을 찾고는 말했다.
[ 고맙소... 그 괴물한테 내가 잡아먹힌 거군... 이런 끔찍한 일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그 괴물들은 신(神)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소."
[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말로만 듣던 마술사요? 동양인 같은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군.]
"나는 동방 명 제국에서 온 백웅이라 하오. 당신이 그 양면 윤전 인쇄기라는 걸 발명한 사람이오?"
[ 음... 그거때문에 날 찾아왔나 보군. 맞소. 내가 그걸 발명해 낸 리처드 호라고 하오.]
"서방대륙 사람 같은데 뭐하러 이 신대륙까지 온 거요? 당신은 군인도 아닌 것 같은데."
[ 난 신성로마제국에 고용되어서 이 신대륙에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임무를 받았소. 내 발명품과 기술이 도움이 될 거라고 인정을 받았던 거요. 그런데...]
리처드 호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신대륙에 와서 난데없이 [옛 지배자]한테 잡아먹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 자는 [옛 지배자]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으리라. 나는 그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난 당신이 알고 있는 양면윤전인쇄기의 지식이 필요하오. 그 도면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던가 인쇄기나 제작법을 가르쳐 주시오."
[ 그... 그건 어렵지 않으나 물어볼 게 있소.]
"뭐요?"
[ 난 어떻게 되는 거요? 죽은 다음에는 신의 곁으로 가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건가? 난 앞으로 어떻게...]
"아마 명계로 가겠지. 사실 나도 잘 모르오. 죽은 다음의 일은."
정말로 모른다. 죽어본 적은 많지만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는 건 세상에서 나 뿐일 것이다. 리처드 호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알았소. 아는대로 다 가르쳐 드리겠소. 장인이자 발명가로써 내 지식이 끊기는 건 원하지 않으니.]
그는 잠시 후 도면과 인쇄기가 있는 장소를 가르쳐 주었고, 또한 내게 양면윤전인쇄기의 원리와 도면 읽는 법, 그리고 인쇄용어와 기술 등을 가르쳐 주었다.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웠기에 나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고 꽤 고생을 해야 했다. 나는 대략 한 시진 정도 설명을 듣고 있다가 머리가 지끈지끈해져서 말했다.
"젠장.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 또 [옛 지배자]가 올지도 모르는데... 이제 떠나야겠군."
[ 그... 그 괴물이 또 온다고? 제발 날 데려가든가 빨리 명계로 보내주시오. 또다시 잡아먹히긴 싫어!]
리처드 호의 영혼이 발작하면서 공포에 휩싸였다.
"당신들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습격당한 거요? 원주민같은 건 없었소?"
[ 있었소. 야만족처럼 사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어서 지휘관은 섣불리 싸우지 않고 이 해안가에 주둔하던 중이었소.]
"엥? 제국?"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게 뭔 소리야?'
이 신대륙이 넓다고는 알고 있지만 제국이라니? 평소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방금 전에 [옛 지배자]들이 야생동물처럼 돌아다니는 걸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인간은 결코 이런 대지에서 문명을 만들 수가 없다! 하지만 눈 앞의 리처드 호가 죽은 상태에서 내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 원주민인지 뭔지가 어딨는지 알려주시오. 당신의 혼을 이혼대법으로 끌어서 그곳으로 이동시켜 놓으면 또 잡아먹히지는 않겠지."
[ 부탁하오.]
타다닷
나는 리처드 호가 말한대로 지휘관의 시체를 뒤져서 지도와 나침반을 찾아낸 후 그걸 가지고 원주민의 제국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면서 이혼대법으로 백을 끌었고, 백의 흡인력에 따라서 리처드 호의 영혼이 끌려왔다.
' 이혼대법 수련이 되는군.'
나는 충분히 그의 영혼을 끌었다 싶자 적당한 오지에 그의 영혼을 놔두고는 말했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이혼대법도 계속 사용하면 많은 체력과 기력을 소모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영혼을 수백 리 씩이나 끌고갈 수는 없었다.
[ 아아... 신이시여... 부디 저를 천국에 보내주소서.]
리처드 호는 영체의 상태로 절벽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신이라고 하면 [옛 지배자]잖아? 저 바보는 대체 누구한테 비는 거야?'
대체 누가 구원해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천국이란 건 또 뭐하는 차원이지?
나는 측은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 후 좀 더 달려갔다. 이 신대륙에서 원주민들이 어떻게 살고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나는 숲이 울창한 녹림을 지나서 험난한 지형을 몇 번 지나자 인간이 사는 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으로 보이는 자들이 반쯤 헐벗은 채 문명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곳곳에 도로가 정비되어 있고 말을 몰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좀 더 도로를 따라가면 큰 도시가 나오겠군.'
놀라운 일이다. [옛 지배자]가 돌아다니는 곳인데도 인간의 숫자가 최소한 수천 명은 되어보였다. 그렇다고 저 인간들이 딱히 대단한 힘을 지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도로를 쭉 따라서 가 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가자 거대한 분지 내부에 큰 도시가 있는 걸 발견했고, 그건 분명히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문명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 안쪽으로 들어가려다가 섬찟한 느낌이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
뭔가 있다.
' 제기랄...'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게 [옛 지배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저 거대한 촉수가 구름에서 휘적거리며 움직이는 것만 봐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
어마어마한 힘과 흉기(凶氣)를 머금은 채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뭔가'는 틀림없이 그런 존재였다. 정확한 이름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존재의 편린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 도대체 뭐야?'
이 곳은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옛 지배자]의 밀도가 높은 곳은 난생 처음 보는데다가 대놓고 인간들의 도시 근처에서 돌아다닌단 말인가? 그리고 저런 놈이 있는데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시가 마치 탑처럼 뾰족하게 생겼다는 점을 기억하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서 비등으로 중원으로 되돌아왔다.
파앗
나는 입수한 양면윤전인쇄기를 제갈사에게 내놓고 일단 리처드 호에게서 들어서 암기한 지식을 최대한 담아서 제갈사에게 은봉황으로 전송했다. 제갈사는 지식을 받아들이고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바로 작업에 들어가면 한 달 내로 중원의 인쇄술을 진화시킬 수 있겠군."
제갈사는 내가 못 알아들었던 리처드 호의 설명도 한꺼번에 다 알아들은 듯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제갈사."
"왜?"
"그 신대륙에 있던 [옛 지배자]는 대체 뭘까? 그리고 그런 놈들이 돌아다니는데도 멀쩡한 그 야만제국 놈들은..."
그러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고대의 삼황오제나 다름없는 거다."
"뭐?"
이어진 제갈사의 가설에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놈들은 [옛 지배자]에게 아마 정기적으로 인신공양 의식을 치르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에 [옛 지배자]들은 풍요를 내리고 놈들이 잘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번영시켜 주는거지."
"......!!"
그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서방제국에서 보낸 탐사대가 전멸한 게 우연이라 생각하나? 신대륙의 야만제국 놈들은 그 탐사대를 위협으로 생각하고 인신공양 의식을 치러서 자신들이 섬기던 [옛 지배자]에게 서방의 침입자를 죽여줄 것을 부탁한 거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겠지."
"그, 그런 말도 안되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옛 지배자]라는 놈들은 인간을 벌레로 보는 잔학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놈들 아니었냐? 그런 공존상태가 가능한 거야?"
"실제로 보고 왔잖냐. 네가 봤던 그 거대한 제국도시의 뾰족한 첨단에는 아마 인신공양 제단이 마련되어 있을 거다. 놈들은 수백... 아니 수천 년 전부터 그런 식으로 생존해 온 거야."
"......"
"그리고 네가 전생자로써 [옛 지배자]에게 직접 칼을 겨누는 입장이라서 까먹은 모양인데 원래 놈들은 인간 따위가 적대할 수 없는 상대야. 인간은 그들을 섬기던가 그 존재를 인지하고 미쳐죽던가 둘 중 하나지. [옛 지배자]들은 자신을 섬기는 벌레한테 상당히 후한 편이기도 하니까 야만제국 놈들이 너보다 훨씬 이성적인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한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중원과 신대륙이 다른 점은 딱 하나야. [지배자]가 역사의 뒷면에 물러나 있느냐, 아니면 겉에 나와있느냐. 아, 중간관리자인 천계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도 있겠군."
"무섭군. 신대륙은 더 이상 못 가겠어."
"신대륙 뿐일까?"
"뭐?"
"네가 아직 안 가본 [검은 대륙]이나 남극, 북극, 심지어 천축도 [옛 지배자]의 손길이 많이 닿아있을 확률이 높지.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난데없이 놈들과 마주쳐서 잡아먹힐테니까 긴장을 놓지 마."
"...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말에 대답하면서 새삼 내가 맞이한 난관이 얼마나 엿같이 어려운지를 되새겼다. 이 중원대륙이 그나마 살기좋은 곳이고 다른 대륙과 대양에는 [옛 지배자]들이 드글거리면서 종말과 계시를 기다리는 상황 - 이런 지옥같은 상황에서 죽고 나서의 처우도 보장이 되지 않는 게 바로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제갈사는 내게서 양면윤전인쇄기를 받아들고 단 사흘만에 똑같은 걸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탐탁치 않은 듯 복제본을 들여다보더니 좀 더 개량하기 시작했고, 열흘 후에는 훨씬 빠르고 안정적으로 자동인쇄를 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신기해서 내가 쳐다보자 제갈사가 말했다.
"금속의 질이나 양도 수정석비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도면도 마도서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야. 이제 슬슬 이걸 이용해 볼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수정석비로 질좋은 철을 창조하고, 연금술로 종이도 좀 만들거다. 제갈유룡 눈에 안띄게 하려면 조금 고생하겠군."
약 세 달이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갈사는 인쇄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한듯 했다. 정확히는 인쇄기를 많이 보급했을 뿐이지만 책을 많이 찍어내게 되자 자연히 산업 그 자체가 뒤바뀌는 듯 했다. 게다가 여기저기에서 증기로 된 기관같은 게 보였고 제갈사가 작정하고 명 제국의 문명판도를 바꾸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장령곡에 돌아온 제갈사에게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리면 제갈유룡한테 의심받을텐데."
"뭐가 문제야? 그때는 놈을 때려눕히면 되지. 자신없냐?"
제갈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궁 세력같은 건 때려잡으려면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이 있어. 네가 가진 방법 중에서 비인외도를 가리지 않는다면 차고 넘치지. 지금까지 이를 갈면서 약점을 찾고 때려잡아온 놈들인데 새삼 두려워? 어차피 암천향에 가서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이번 회차 아니었던가?"
"......"
"이제 오승은한테서 소설을 받으면 망량의 세력을 움직여서 빠르게 소설을 유행시킬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이쪽 계획은 마무리 될 거다."
제갈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턱짓을 했다.
"검마가 말할 게 있다고 하더군. 이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찾아가 봐라."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검마에게 찾아갔다.
검마가 말했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네. 뭐부터 듣겠나?"
나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좋네. 나쁜 소식은 바로... 신의 무덤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것일세. 그 동안 꾸준하게 무영문의 고수들을 요동에 보내서 탐색했는데도 그런 건 찾을 수가 없었지. 비슷한 문헌이나 기록조차도..."
나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중에 십이율에게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군.'
검마는 내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좋은 소식은 내가 명룡자와 함께 꾸미던 일이 잘 되었다는 것일세."
"뭔가 하고 계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후후. 근래 진소청이 아예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가 꾸미는 계획에 필요하다고 해서 진소청을 아예 무영문으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그랬습니다만..."
"진소청, 이리 들어오게."
문을 열고 진소청이 무영문의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보이는 진소청이었으나 이어진 검마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어제까지 마도팔문의 팔마(八魔)와 겨루어 모두 패배시키고, 또한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비무를 해서 모두 승리했지. 그리하여 현재는 정사파를 통틀어 천하제일창(天下第一槍)이라는 별호가 붙여졌지."
"네에?!"
"자네는 그 동안 장령곡에 칩거해서 나오지 않았으니 잘 몰랐겠군."
"이게 무슨..."
그러자 옆에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백웅. 중원무림 정사파의 최고 간부들이 서로 짜고 빠른시간에 내 명성을 올려주려 한 거였소. 명룡자의 입김이 미치는 구파일방 장문인은 나와 겨루지도 않았는데도 패배했다고 자인했고, 마도팔문의 팔마도 마찬가지요. 내가 실제로 겨룬 문주는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소. 그들 모두는 철저하게 계획하고 비밀을 엄수하고 있지."
"어떻게 설득했소?"
"그들을 설득한 명분은 나를 백련교의 핵심에 심어놓아서 백련교주의 비밀을 알아낼 비수로 사용하려는 거요. 그들은 겉으로는 백련교에 굴종하면서도 백련교를 극복하고 싶어하니까."
"아..."
"지금 나는 천하제일고수를 노리는 최고의 야망을 지닌 사내로 강호에 알려져 있는 거요. 이른바 강호의 기린아를 노린 거지."
"설마 그게 백련교주의 제자로 들어가려는 포석이오?"
"그렇소."
진소청이 말했다.
"지금부터 5일 후, 나는 내 추종자랍시고 달라붙은 자들과 함께 백련교에 찾아가서, 백련교주에게 비무를 청할 것이오. 그리고 패배한 후 그의 무공에 감명받아 그의 제자가 될 것이오."
나는 이제야 계획의 전모를 알 것 같았다.
천하제일고수이자 뇌신류의 후계자인 진소청이 마침내 강호에 그 어금니를 드러냈으나, 신비의 천하제일인인 백련교주에게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신비막측한 무공에 경외심을 느낀 진소청은 자연스럽게 백련교주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게 된다는 흐름인 것이다.
백련교주가 이 흐름을 거부할 가능성은 낮았다. 왜냐하면 그는 진소청이 뇌신류 고수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진소청을 통해서 뇌신류 최종오의를 알아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하겠소? 만일의 경우 백련교주가 당신을 껄끄럽게 여겨서 그냥 심천무량으로 죽일 수도 있소."
"그건 내 운이라고 생각하오."
진소청이 훗하고 웃었다.
"그래서 그에게 죽지 않으면서 최대한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이오."
"......"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소청은 진심으로 현생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사문의 의무나 복수심을 다 버리고 오로지 내 전생여정에 맞춰서 싸우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그에게 의심을 품는 게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진정성이었다.
검마가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소청이 백련교주와 싸울 때 관중에 섞여서 지켜봐 주게. 혹시 그 대결에서 자네가 얻을 게 있을지도 모를 것일세."
그리고 5일 후.
백련교의 본단에서 약속된 진소청과 백련교주가 천하제일을 가리는 대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