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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망량은 극호에게서 들었던 소설가(小說家), 풍몽룡에 대해서 듣고는 말했다.
"그는 굉장히 시문(詩文)을 잘 짓고 경학에도 밝은 사람이오. 특히 통속소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인기도 많은 자이니 극호의 추천은 아주 좋다고 볼 수 있소."
"그럼 오현의 풍몽룡을 찾아가야겠군."
"하지만 잠깐 기다려 보시오."
비등을 써서 어떻게든 오현을 빨리 찾아가려는 나를 제지한 망량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당신은 글쓰기나 재담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다 생각하오?"
"응?"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 전문가한테 배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소."
"내가 스승이라면 당신같은 사람한테는 글쓰기를 가르치려 하지 않을 거요. 해봤자 늘지 않을 터이니."
"......"
내 성의없는 대답을 꼬집은 망량이 말을 이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밀접하고 공감가는 이야기일수록 쉽게 귀를 기울이는 특징이 있소. 예를 들자면, 지금 백웅 당신에게 무공이나 술법, 보패 이야기를 하면 아주 귀에 쏙쏙 들어올 테지만... 여인들의 궁중다툼이나 혼돈스러운 대명제국 정치사, 신언서판(身言書判)에 관련된 격언 얘기를 하면 그게 재밌겠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미없을 거요."
"왜 재미없소?"
"나랑 관련없는 얘기니까..."
"바로 그런 거지. 근래 50년 이내에 소설(小設)이나 야담(野談)이 새로운 이야기 유형이 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들은 이야기를 재밌게 만드는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오.즉 민중(民衆)에게 공감가는 친근한 이야기 양식이 필요한 거요. 또한 이 시대 자체가 소설이 흥할만한 환경이기도 하고."
"무슨 말이오?"
"현재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소설은 바로 수호전(水滸傳)이오. 읽어봤을테지."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주 재밌소!"
송강(宋江)이나 노지심, 무송, 이규 등 호걸의 이야기는 아주 다채로운 재미와 호연지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소설도 수호전이었다. 본격적인 무림의 이야기를 다루는 무협소설도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지만 무림이라는 세계가 그리 와닿지 않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수호전이 최대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수호전은 본디 전전대의 황제에 의해 금서(禁書)로 지정되었소. 허나 선제(先帝)가 소설 및 희극 야담에 걸려있던 제약을 풀고 금서지정도 해제했소. 뿐만 아니라 갈수록 농촌보다 도시의 경제가 발전한 덕에 소설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이오."
"응? 경제?"
"그렇소. 큰 도시에 사는 자일수록 부유하고 잘 살며 농촌에 있는 자는 못살게 되오. 그런 건 잘 알고 있지 않소? 명제국의 부(富)는 현재 통화체계가 안정되고 사회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에 더더욱 집약되었소. 그만큼 부자의 숫자도 많아졌고 농사를 짓지 않아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오. 또한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저술해서 의학을 민간에 널리 퍼뜨렸고 서광계(徐光啓)는 천문, 역산, 수리, 측량, 농잠, 물리 등 다방면의 지식을 한차례 상승시켰소. 오문의 심주나 문징명의 회화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회화도 발전했소."
"......"
"황제나 금의위가 포학한 짓만 안 한다면 지금은 명제국 역사상 가장 문화와 경제가 부흥한 시기이며 백성들이 행복하게 사는 안민(安民)을 달성한 시대요. 이는 모두 선제(先帝)가 혼돈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고 선정을 펼친 덕분이며, 직접 의식주와 관련없는 '소설'이라는 문화활동이 극히 발전할 수밖에 없지."
"흠, 그렇군."
"식량사정도 나쁘지 않소. 구휼을 위한 곡식도 대비책도 잘 마련되어 있고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잘 대응하는 편이오. 황궁은 썩었어도 밑의 중하급 관리들은 꽤 능력있는 편이니까. 일례로 50년 이내에는 대기근이나 대재앙때문에 인구가 크게 감소한 일이 전무하다시피하오."
내가 상당히 좋은 시절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당혹해하다가 망량에게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었으며... 태산이나 하남지역에는 빈민과 거지가 넘치고 있소. 당신이 말하는 밝고 아름다운 명 제국의 모습을 본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거늘."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잖소? 이 세상의 그 어떤 지도자나 지배자도 빈부격차가 없는 시대를 만들 수는 없소. 또한 당신은 원래부터 하류층이었으니 그들의 모습이 좀 더 쉽게 눈에 들어왔을 것이오. 그들은 대를 이어서 계속 가난하지."
망량이 말을 이었다.
"당신도 느끼지 않았소? 번화한 낙양이나 각지의 대도시는 꽤 잘먹고 잘살고 있소. 굶어죽는 천민이나 빈민의 일이 남일인 양 안빈낙도의 시기로 여기는 사람도 많지. 그저 자신이 어떤 계층에 속해서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의 차이일 뿐."
나는 망량의 말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인식하고 있던 걸 새삼 말로 들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불합리하군."
"후후. 백웅 당신이 설령 [옛 지배자]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한다 해도 세상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 거요.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늘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으니."
망량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소. 단지 모든 게 파멸하는 미래만 막고 나면 나머지는 누군가가 알아서 해 주겠지."
"그게 정답이오. 우리가 해야할 일만 하면 되는 거요."
망량은 왠지 흡족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이렇게 소설이 발달하기 쉬운 환경이니만큼 당신이 소설가(小設家)로 자처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오. 다만 제천대성을 만족시킬만한 인기와 필력을 가진 작품을 쓰는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
"어떻게 하면 필력을 올릴 수 있소?"
"잘 들어두시오. 글을 잘 쓰기 위한 3대요소가 있으니, 이를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오. 이걸 먼저 인지해야 기초를 쌓을 수 있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그렇소."
"정말 이렇게 하면 잘 쓸 수 있는 거요?"
"딱히 그렇지는 않소. 글도 재능인지라 재능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가 심하게 나는 편이오. 아무리 열심히 써도 대가(大家)가 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오."
"......"
망량이 바로 부정하자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아니 그럼 3대요소라는 건 왜 말한 거요?"
"재능이 없어도 인간은 노력해서 일정수준까지 글쓰는 수준을 높일 수가 있소. 그래서 3대요소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지."
"난 아직 글을 안 써봤으니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잖소."
내가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망량이 빙긋 웃었다.
"해보면 알겠지. 그러니 오늘부터 나와 글쓰기 연습을 좀 해 봅시다."
"응? 오현의 풍몽룡이나 소설가들을 찾아가는 건..."
"기초도 안 되어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찾아가봐야 욕만 배부르게 먹을 뿐이오. 그들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임에 동시에 경학과 재담, 논문의 달인들이오. 그들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기초는 되어 있어야지."
"알았소."
나는 망량과 함께 황산에서 식토를 이용해서 영약을 재배하는 한편, 그와 함께 오두막에서 글짓기 연습을 했다. 매일같이 군담이나 야화, 소설 등을 갖고와서 이혼대법의 양의효과까지 발휘하며 열심히 읽었고 매일매일 글을 썼다.
하지만 망량은 내가 글쓰는 걸 보자 문제를 지적했다.
"역시 아직 독서경험이 부족해서 어휘가 빈약하고 글이 개연성있게 연결되지 못하는군... 책은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니 제한된 양에 충분한 뜻을 담아야 하오."
"어렵군..."
"다행히 근래 제지기술이 발달했고 활자도 쉽게 찍는 편이니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거요."
나는 대략 한 달 동안 망량의 밑에서 글쓰기 연습을 했다. 그러자 예전보다는 훨씬 글을 어떻게 쓰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 때 순어구에서 제갈사의 연락이 왔다.
[ 잠깐 와 봐라. 일이 거의 다 됐으니까.]
[ 다 됐다니?]
[ 제갈부의 인격을 다 날렸다.]
[ ......!!]
[ 써먹을 때가 왔어.]
나는 잠시 경직되었다. 드디어 제갈부의 인격을 날려버리고 기억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서 노예처럼 부려먹을 때가 온 것이다. 제갈부를 어떻게 해야 무명제사서 값어치만큼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파앗!
나는 제갈사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제갈부로 보이는 놈이 바닥에 꿇어앉아있는 게 보였다. 제갈사가 말했다.
"정신의 일부분이 남았지만 시간문제다. 저항반응이 사라지면 그때 저 놈은 완전히 기억이 소멸된다. 그 때 이혼대법을 걸어서 완전한 꼭두각시로 만드는 거지."
비틀
잠시 후 제갈부가 앞으로 쓰러졌다. 제갈사는 제갈부의 머리에 대고 이혼대법을 시전했고, 내게 말했다.
"이제 이 놈은 너를 주인으로 인식할 거다."
나는 제갈부의 눈이 흐리멍텅할 때 놈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 주인?"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라라."
"알겠... 습니다."
제갈부는 멍하니 내 말에 대답했다. 세뇌가 끝나자 제갈사가 말했다.
"하는 김에 이 놈한테 무공과 술법을 더 주입시켜 보자. 유사시에 이 놈이 제갈유룡을 죽일 수 있으면 최고지."
"......"
제갈사가 노리는 계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조카를 세뇌시켜서 자신의 친형의 목을 따려는 건 아무리 큰 원한이 있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한 줌의 정도 없는 말에 새삼 제갈사의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백치 상태의 제갈부에게 뇌신류의 무공을 가르치는 일은 극호가 담당했고 술법을 가르치는 건 천우진이 하기로 했다. 제갈부와 관련된 일이 거의 끝나가자 나는 천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천우진. 그러고보니 [세계의 기록]이란 거에 접촉하는 일은 잘 되가냐?"
"흠... 잘 안 된다."
"응?"
"존재는 알고 있지만 접할 방법을 모르겠어. 네가 무신을 만날 방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망량선사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빌어먹을, 생각 좀 하고 말해. 알려주실 상황이 아니잖아."
천우진이 짜증을 내더니 말했다.
"새로운 수호자가 필요할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내게 그렇게 거대한 비밀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뭐야? 그러면 기껏 알려줘도 의미가 없는거야?"
"그건 아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네게 도움을 받은 건 인정하지."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보니 들를 데가 있었군. 난 한동안 자리를 비우니 그렇게 알아라."
"어디 가는데?"
"알아볼 게 있다."
천우진은 그 말을 끝으로 축지법을 써서 사라졌다. 놈이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잘나빠진 놈이니까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 뭐, 저 녀석이라면 때되면 알아서 오겠지.'
파앗
나는 망량에게 돌아가서 다시 글공부를 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넘게 수련하고 나자 그때서야 망량이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기초가 되었구려. 풍몽룡을 만나러 갑시다."
나와 망량은 오현에 사는 소설가 풍몽룡에게 찾아갔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학자 특유의 카랑카랑한 눈빛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풍몽룡의 집에 방문한 망량이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오! 자네는 제갈현이 아닌가!! 이게 얼마만인가...!!"
"오 년 쯤 된 것 같습니다."
"허허, 들어와 들어와."
풍몽룡이 굉장히 망량을 반기며 말했다.
"자네의 부친은 천하제일의 책사이자 재사였고 그 아들들도 굉장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제갈세가의 쌍룡(雙龍)이라 불렸지. 자네는 한때 낙양의 모든 문사들의 우상이었지 아니한가."
"예전 일입니다. 지금은 망량선사라는 이름으로 은거하고 있습니다."
"저런... 뭔가 사연이 있었나 보군."
"제 옆에 있는 이 백웅을 제 주군으로 삼아서 돕고 있는 중입니다."
"허어?"
풍몽룡이 묘한 표정을 짓자 망량이 말했다.
"그에게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음... 나라고 해서 딱히 잘 가르치는 건 아니네만."
"낙양은 물론 세상에 널리 퍼질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말에 풍몽룡이 난처해했다.
"흐음... 어디 한 번 해보긴 하겠지만 소설같은 오락거리를 가지고 이토록 진지해질 줄은 몰랐군. 세간에서 소설이 유행이라지만 낮은 취급을 받는데다 경학연구가 주된 학문이라는 걸 모르는 자네가 아닐 터인데."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내 최선을 다해 보지."
나는 풍몽룡 밑에서 소설을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쓰게 될 작품과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풍몽룡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원숭이 신선이 서쪽 천축으로 여행을 가는 이야기란 말인가? 당나라 때의 삼장법사와 함께?"
"네. 그렇습니다."
"재밌겠구먼... 좀 자세한 이야기를 아는 건 없는가."
"구상만 잡아두었습니다."
"흠흠. 한 번 대충 써 보게."
나는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긁어서 창작했다. 한참동안 오천여 자로 이루어진 소설줄거리를 읽던 풍몽룡이 말했다.
"어째 글솜씨가 많이 서투르군... 자네는 본디 학자가 아니었나 보군."
"네."
"... 단기간에 유명해져야 한댔지?"
"네."
풍몽룡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 다같이 낙양으로 가세."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돈은 좀 있는가?"
"많이 있습니다만..."
"이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재밌고 유명한 작품은 못 쓰니..."
풍몽룡이 떫은 목소리로 말했다.
"낙양의 재사들을 수소문해서 소설을 대필(代筆)하세나. 그리고 입소문을 내면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