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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여동빈이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은 바로 거룡의 입이었다. 입에서 광선을 쏘아서 지상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으며, 일격에 용왕을 침몰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앞으로 두 번 만 더 쏘면 지상을 지키는 결계는 파괴될 것이다.
퓨웅
하지만 여동빈의 신형이 마치 불화살처럼 쏘아져서 용의 입 근처에 도달했을 때, 그는 거룡이 말도 안되게 거대하다는 걸 극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커…!!’
입을 향해서 고작 수십 리 날아오른 것에 불과했으나 그 시꺼먼 어둠은 어느새 하늘 전체를 뒤덮어, 어떤 게 본체고 어떤 게 입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확히는 입이 너무나 커서 수십 수백 리나 되었기 때문에 아예 분류하는 의미가 없었다. 여동빈은 자신이 마치 대륙에게 덤벼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과연 이런 어마어마한 상대에게 검격을 가한들 통할까?
이게 과연 무(武)로 없앨 수 있는 상대인가?
수백만 관의 폭탄을 써도 흠집도 안 나는 상대일터인데!
여동빈의 등줄기에 싸늘한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자신보다 거대한 상대를 베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크기가 산만한 놈을 베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눈앞의 거룡의 크기는 말 그대로 생명체로 서는 불가해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놈이 딱히 아무것도 안하고 바다에 엎어지기만 해도 대륙 전체에 홍수가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계를 집어삼킬 정도의 우주적 공포 - 그것이 바로 종말의 거룡!
‘크윽!’
하지만 여동빈은 이를 악물고 우주적인 공포심이 자신의 영혼을 옥죄는 걸 견뎌냈다. 대신에 이 년 반의 수행 동안에 얻어낸 성과를 있는 힘껏 펼쳤다.
천둔검법(天遁劍法)
육의성천도(六意聖天圖)
운결(雲決)
여동빈은 이제 육의성천도의 육의를 명확히 구분해서 자유자재로 전개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각각의 요결을 섞어서 더 강력하게 조합할 수도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본디 인간으로서는 최소한 오십 년의 수행이 필요했겠지만 여동빈은 그 짧은 기간에 나선의 도움을 받아서 빠르게 경지를 올린 것이다.
쿠콰쾅!!
운결에서 피어난 수십만 개의 검기가 구름처럼 흩어지며 종말의 거룡을 공격했다. 하나하나의 검기에는 여동빈이 펼쳐낸 필생의 힘이 담겨 있어서 삽시간에 산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보였고, 하늘 한 켠이 일순간 환해지는 것 같았다.
번쩍
찰나간에 화룡진인이 경고했고 여동빈은 재빨리 어검비행술로 거대한 번개를 피했다. 그 번개는 아무리 여동빈이 경지가 높아도 미리 예측 할 수 없는 종류로써, 범위도 엄청 나게 넓은데다가 효과가 순간적이었다. 여동빈은 아슬아슬하게 번개를 피한 후 턱의 땀을 닦았다.
“저 놈은 오행을 다룰 수 있는 걸까요?”
상대의 술법이나 특수능력에 대항 할 때 여동빈은 전적으로 화룡진인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었다. 화룡진인은 용왕이며 술수의 종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태껏 여동빈은 그녀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으리라.
[음… 뭔가 이상하다. 방금 놈은 오행을 움직인 게 아니라 마치 없는 걸 새로 만들어낸 것 같았다!]
“새로 만들어냈다….”
[방금 공격도 큰 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우선 신중하게 접근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동빈이 산 하나만큼의 질량을 깎아냈는데도 거룡에게는 발톱이 긁힌 수준의 영향인 듯, 여동빈에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광선을 막는데는 성공한 듯 추가로 용왕을 살해하는 광선이 발사되지 않았다.
‘견제하다가 놈의 약점을 살펴서 공격해야겠군.’
여동빈은 자신의 감지력이 점점 올라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거룡의 몸 주변에서 번개, 불꽃, 수류가 연속해서 터져 나오며 여동빈을 공격했으나 그는 투명한 눈으로 그 모든 공격을 살피며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마치 - 공격하기 전부터 다 알게 되는 느낌.
후발선제(後發先制)를 언제나 취할 수 있는 느낌.
‘설마… 이건 새로운 초월기인가?’
여동빈은 자신이 절대지경에 이른 후 육의성천도만이 자신의 무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쩐지 지금 자신은 새로운 가능성이 발아하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억지로 다른 절대지경의 묘의를 익히는 것과는 다르게, 마치 나뭇가지에 또다른 나뭇가지가 피어나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른바 파생절기인 것이다.
여동빈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한의 나선!
그걸 흡수한 덕분에 자신은 본디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깨야하는 강고한 벽을 빠르게 무너뜨린 것이다. 절대고수만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기연이었지만 여동빈은 그 부작용 또한 알고 있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도달해야 해… 이 싸움에서 저 거룡을 벨 수 있을 정도의 영역에 도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콰과광
여동빈은 계속해서 어검을 날리는 한편 거룡이 광선을 쏘려고 할때마다 적극적으로 육의성천도로 거룡을 견제했다. 그 와중에 여동빈은 엄청난 기를 소모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화룡진인이 자신의 힘을 나눠주었다.
그 때였다.
종말의 거룡은 계속 방해하는 여동빈에게 귀찮음을 느꼈는지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여동빈은 놈이 엄청난 공격을 해올 거라고 예상해서 크게 긴장했지만, 다음 순간 놈이 보인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그저 - 거룡은 자신의 몸을 크게 차원문에서 뻗어서 앞으로 밀어버렸을 뿐이었다. 딱히 공격이나 방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여동빈은 놈의 덩치가 태산처럼 떨어지는 걸 느끼고는 어검비행술로 피해야만 했다.
콰과과과
여동빈의 어검이 구름을 가르며 무섭게 지상으로 낙하했으나 놈이 접근하는 속도도 빨랐다. 여동빈은 오리를 더 아래로 직하한 후에야 거룡이 내려오는 기색이 없는 걸 깨닫고 멈추었다.
그는 황망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뭐, 뭐 이런….’
거룡은 그저 자신의 몸을 밀어서 땅에 몸통박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정 안 될 경우에는 그냥 천천히 자신의 몸을 비비듯이 중원대륙에 내려앉기만 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저 놈의 입 크기를 볼 때 중원대륙에서 수만 명 규모의 사상자가 나오는 건 눈 깜짝할 사이일 것이리라.
답이 없다.
저 대륙만한 엄청난 거체를 토벌하지 않는 한 여동빈이 광선을 방해해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최강의 한 수로 저걸 벨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한 번의 베기로 거룡의 몸을 절단 해야 하는데, 저 놈의 몸길이만 해도 수천 리가 훨씬 넘었다. 게다가 겉표면은 잘 베어지지만 피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며 뚫기 힘들어졌기에 여동빈의 공격이 잘 먹히지 않았다.
여동빈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저 타고난 몸집의 차이일 뿐일진대 - 저 놈은 여동빈의 모든 절대지경의 무술과 검예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적으로 인식되기는커녕 개미취급 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여동빈이 멍하니 있을 때였다.
파아앗
“여동빈!”
어디선가 네 명의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떠서 여동빈에게 다가오는 그 자들은 익숙한 얼굴이었기에 여동빈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백련교주! 그리고 호법사자들인
가. 어떻게 여기에….”
“팔선이 우리를 여기까지 빠르게 보내 주었소.”
백련교주 이군악과 그를 포함한 백련교 사대무류의 호법사자들이 허공에 뜬 채 찾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남채화의 전이술법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군악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천공에 떠 있는 종말의 거룡을 보더니 말했다.
“당신이 거룡 얘기를 할 때… 나도 그렇고 모두가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소. 오직 본교의 제사장인 신녀만이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나머지는 꿈꾸는 소리 한다 여겼지. 헌데 오늘 저걸 실제로 보니, 더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 몸을 엄습하는구려.”
이군악이 솔직하게 두려움을 토로 하는 걸 본 여동빈이 힐끔 주변의 호법사자들을 보았다. 그들 또한 두려운 건 마찬가지인지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고수들인데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 정도의 본능적인 공포라는 뜻이었다.
아니 -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지 않을까?
저건 도저히 인간이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자연 그 자체와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동빈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도우러 와 줬구려.”
백련교주 이군악이 히죽 웃었다.
“신녀가 약속해줬기 때문이오.”
“신녀?”
“그녀는 예언했소. 우리가 당신을 도운다면 저 거룡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인과율이 바낄 것이라고. 그리고 바뀐 인과율에서는 우리 백련교의 목표인 진공가향(眞空家鄕)이 이루어질 것이고, 미륵(彌勒)께서도 나타나실 거라고 예언했단 말이오.”
그의 눈빛이 의지로 불타올라서 공포를 잊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우린 목숨을 바칠 수 있소. 위대한 백련교의 천년 왕국을 위하여!”
진공가향.
미륵.
여동빈은 그 말을 내심 되뇌었다. 여동빈 또한 백련교의 교리와 이념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원하는 진공가향과 미륵이란 게 뭔지는 대충 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실체 없는 신앙이라 생각 했는데 이렇게까지 열렬한 반응을 보일 줄이야?
‘…어쩌면 저들의 신앙이, 아무것도 믿을 게 없는 나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
여동빈은 가타부타 더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이다.
“잘 부탁하오.”
그들은 눈빛으로 서로 신뢰를 교환 했고 완전히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군악이 여동빈에게 질문했다.
“지금 무엇이 문제요?”
여동빈은 지금 문제가 되는 상황을 설명했다. 이군악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는 저 괴물이 밀고 내려오기만 하면 끝장이란 말이군.”
“그렇소. 저 놈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필요하오. 그래야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걸 노려볼 수 있는데 나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되오.”
“힘이라! 그렇다면 단순하지.”
그러자 이군악이 주변에 있던 호법 사자들에게 말했다.
“모두 신기(神器)를 꺼내라.”
“존명!”
파바밧
말이 끝나자마자 호법사자들은 저마다 법구 같은 걸 들어서 손에 들었다. 이군악 또한 예전처럼 금강저를 드는 모습에 여동빈이 질문했다.
“그것은?”
이군악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여동빈이여.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저 괴물은 일정수준 이상의 힘을 발견하면 바로 광선을 쏘아서 요격 하려는 성질이 있는 것 같소. 우리는 당신처럼 예리한 감각과 초월기를 갖고 있지 못하니 아마 그 광선을 못 피할 거요. 용왕도 없애는 광선 같은 걸 맞으면 버틸 수가 없소. 그러니 놈이 광선을 쏘지 못하게 견제해 주시오.”
“알았소.”
“하아아아아”
“오오오오오!!”
“백련교의 신이시여!!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오오오!!”
이군악과 호법사자들이 동시에 신기를 들어서 하늘로 치켜들었다.
파지직!
그와 동시에 이군악의 몸에는 뇌전이 치솟았고, 수신류 호법사자의 몸은 물처럼 변했으며, 화신류 호법사자의 몸은 화염으로 변했다. 또한 풍신류 호법사자의 몸도 완전히 바람으로 된 인간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오행(五行)으로 변하다니?!
저런 건 술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여동빈이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쳐다보자 이군악이 완전히 번개로 변한 상태에서 자신의 팔을 내뻗어서 거룡을 향해 공격했다.
[받아라! 뇌신권!]
쿠콰콰콰쾅!!
뇌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대포가 발사되는 듯 했다. 여동빈은 그 일격의 파괴력이 자신의 육의성천도에 못지않다는 걸 알아차렸고, 곧이어 그 공격에 반응해서 거룡이 오행지력 공격을 하자 이군악의 몸이 곧장 뇌전처럼 움직여서 회피하고 말았다.
파지직
심지어 돌풍과 어둠이 몰아치며 와류가 흐르는데도 그 충격을 뇌전의 몸뚱이로 흡수하기까지 했다. 일반적인 물리력은 현재의 이군악에게 먹히지 않는 듯 했다.
‘세상에! 자연지기와 동화하다니!!’
이군악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호법사자들도 신기를 발동하자마자 오행인(五行人)이 되어서 저마다 오행의 힘을 사용해서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어랏!]
[보리달마시여!!]
[풍신류에 영광을!!]
콰과과광
여동빈의 네 배나 되는 화력이 한 꺼번에 거룡을 공격하자 거룡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기색이 역력했다. 산조차 박살내는 힘이 모이자 아무리 대륙만한 거룡이라지만 부상을 입은 것이다! 여동빈은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거룡이 일순간 힘을 모아서 광선을 발사하려 하자 빠르게 감지해서 견제했다.
쿠구구….
그리고 천천히 지상으로 다가오던 거룡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제야 ‘전투’라고 불릴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해볼만 해!!’
여동빈은 이 정도의 조력이라면 충분히 거룡에게 치명상을 입힐 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빈이 내심 기뻐하고 있을 때 그에게 이군악이 고통스러운 전음을 보냈다.
[크윽… 여동빈…. 한 식경 이내에 끝장내야 하오….]
[무슨?]
[우리는 사대무류의 종사로써 이 신기의 도움을 받아서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우리는 이 힘을 오래 유지할 그릇이 없소…. 섣불리 인간의 몸으로 신기의 힘을 받아들이면 후유증도 막심하고 죽을지도 모르오!]
[……!!]
[제발 한 식경 내에 놈에게 치명적인 한 방을….]
역시 저 신기의 힘을 빌리는 건 백련교주로서도 무모한 짓이며 목숨을 거는 행위인 듯 했다.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여동빈은 눈을 반개한 채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 했고, 눈앞의 거대한 용에게 어떤 약점이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여동빈은 한 순간 직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역린…?’
방금 전 사대무류의 종사들이 동시에 공격했을 때 하늘이 뻥 뚫렸고, 뻥 뚫린 자리에 뭔가 살아서 움직이는 피부가 꿈틀대는 걸 본 것 같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왠지 여동빈은 그게 용의 약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난한 일이다. 그 역린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저 어마어마한 크기의 용의 비늘 중에서 역린 부분만 찾아서 때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한 식경 이내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할 수밖에 없다!’
여동빈은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곧장 어검비행술을 써서 치솟아 올랐다. 그가 치솟아 오르자 그에게로 거룡의 공격이 집중되었으나 뒤에서 백련교 호법사자들이 그를 향한 공격을 막아 주었다. 여동빈이 온힘을 다해서 어검에 탄 채로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꾸웅!
여동빈의 돌진이 거룡의 피와 살을 가르며 맹진하던 중 두툼한 살집에 부딪혀서 막혔다. 마치 금강석과 같이 단단했으나, 여동빈은 이를 악문 채로 더욱 힘을 모아 용의 몸집을 꿰뚫었다.
푸콱
거룡의 몸뚱이 전면을 뚫어서 반대 편의 천공으로 치솟아 오른 여동빈은 잠시 후 허탈감에 잠겼다.
마치 대륙처럼 넓은 지평선 같은 몸뚱이!!
“으아아아아!!”
여동빈은 울부짖으며 화룡신검의 힘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화룡진인의 모든 힘이 검극에 집중된 상태로 거룡의 머리통 뒤편으로 향했다. 그는 이 넓은 등판에서 미세한 먼지 하나하나라도 감지하며 최대한 역린이 어딨는지를 알아보려 했다. 여동빈이 초조해하며 역린을 찾고 있을 때였다.
“거기냐!!”
역린으로 보이는 부분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여동빈은 최대의 힘을 발휘해서 찔러 들어갔다.
콰과광 광폭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거룡이 크게 휘청거렸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은 여동빈의 일격에 담긴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었다.
‘제발… 제발…!!’
여동빈은 자신의 검을 거룡의 몸뚱이에 꽂은 채 빌고 또 빌었다. 이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았기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면 더 이상은 희망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 여동빈은 천천히 거룡의 몸뚱이가 내려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거룡은 멀쩡하다.
자신이 역린을 찔렀지만 _ 그걸로는 씨알도 안 먹힐 정도로 거룡은 막대한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멀쩡하다면, 앞으로 수백 수천 번을 공격해도 허사에 불과하리라.
‘안 돼….’
여동빈의 표정이 절망에 물들었을 때였다.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동빈이여. 저는 백련교의 제사장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신녀라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동빈은 체력과 기력이 다 소진된 채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직 포기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
이 괴물은 천계의 모든 대라신선이 나서도 멈출까 말까한 괴물인데 - 하늘도 땅도 이 세상을 버렸다.
이제 와서 뭘 한단 말인가?
대륙을 통째로 쪼갤만한 힘이 없는 이상 도저히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여동빈. 우리 백련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려 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신녀가 말을 이었다.
[부디… 언젠가 이 땅에 하생하실 미륵의 시대에… 그대가 활약하길 바라며… 우리의 신기를 버리겠나이다.]
그리고 여동빈은 빛의 세계에 휩싸인 무한의 나선이 있는 무신의 세계.
여동빈은 갑작스럽게 자신이 이곳 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종말의 거룡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다 포기하려 하던 와중이었는데 왜 여기로 온 걸까? 그가 멍한 눈으로 무의 공간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소화를 시켜 무신이 쓴 듯한 그 글자를 희미한 눈으로 쳐다보던 여동빈은 그만 헛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지난 시간동안… 이 공간에 계속 드나들며 알게 된 게 있소…. 이 나선 하나하나는 인간의 가능성이자 인생…. 이 공간이 무한인 까닭도….”
그는 시꺼멓게 꺼진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하지만… 난 인간이오…. 한계가 있소…. 타인의 가능성을 열람해서 내 잠재력을 높인다 한들… 그걸 소화하는것도 한계가 있고… 이걸 계속한다 해서 이미 신에 도달한 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해.”
잠시 침묵한 여동빈이 말했다.
“무신…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 거요… 무엇을 위해 내게 이런 공간을 보여준 거요? 나는 이 세계를 지킬 만한 영웅이 아니었을진대….”
여동빈은 대답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무신이라고 하는 별개의 인격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수수께끼의 글자만 이따금씩 반복되었다. 그나마도 늘 소화를 시키라는 말 뿐이었다. 여동빈은 이 공간이 자신의 마지막 휴식공간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때 새로운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맞아
너 말고도 많이 있다
그 순간이었다.
후우응!
여동빈은 이 무한의 공간 속에서 무한의 시야를 얻은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세계를 관조하는 절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억겁의 공간 속에, 자신과 어마어마한 시공간의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자’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자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선에 손을 대며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있었다.
진짜 많이 있다.
여동빈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신에 접한 자는 더 있었다!
‘저 자들은 누구지?!’
여동빈이 경악하고 있을 때 무신의 말이 이어졌다.
곧 문이 열린다
100명이 함께 여는 거야
‘100명…?’
여동빈은 그 수수께끼의 말을 머릿 속에서 되짚었지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워 할 때 마지막 글자가 여동빈의 눈에 새겨졌다.
초심자여
무혼(武魂)의 세계에 입문한 것을 환영한다
여동빈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는 순간, 여동빈은 천천히 거룡의 등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거룡의 등을 뚫고 4개의 신기가 움직임을 봉쇄한 것을 발견했다. 거룡은 마치 쇠사슬에 갇힌 것처럼 발버둥치고 있었다.
쿠르르릉
틀림없다 - 백련교 사대무류의 종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신기를 꽂아서 거룡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여동빈은 기절한 사이에 죽지 않았던 것이리라. 다시 말하자면 거룡을 토벌할 기회는 바로 지금 뿐이었다.
‘가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인데도 여동빈의 마음은 한없이 평안했다. 거인에게 이쑤시개로 저항하는 수준인데도 그는 동요하거나 절망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것은 무신의 세계에서 느꼈던 위대함이 거룡의 공포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여동빈의 검은 더 이상 실재하는 검이 아니었다.
실재할 필요가 없다.
그가 생각한 순간, 그 검은 이미 삼라만상을 제패한다.
우주 끝에 도달해 있으리라.
무혼(武魂)
초식명도, 무공명도 달리 없었으나 여동빈은 자신이 거대한 세계의 일 부가 되어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선악도 고하도 없었으며 오로지 향상심과 열정밖에 없었다. 자신과 같은 자가, 타락한 신의 세계에서 종말에 쫓기면서도 무(武)를 연구하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무신(武神)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
그래,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을 끝내줄 상대겠지.
결말은 의미가 아니라 한 줌의 메아리에 불과하니까.
지금의 여동빈의 마음속에는 공포나 두려움, 환상, 그리고 세상을 구해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세계’를 들여다보며, 지금까지 자신이 절대지경이라고 생각했던 게 궁극이 아니라 도리어 시작에 불과 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렇다.
자신이 최강이라고 생각했던 초식,
최고라고 생각했던 초월기,
무적이라 생각했던 모든 건 갓난아이의 걸음마와 같은 것.
무(武)가 약한 게 아니다.
인간이 약할 뿐!
무량(無量)한 세상을 더욱 무애(無愛)하게 만들기만 하면 되리라.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마음을 모아서 벤다.
그저 일참(一斬)일 뿐이었다.
여동빈이 그저 한 번의 베기를 시전했을 뿐이지만 아무런 저항도 소리도 없이 다음 순간 세계가 둥글게 갈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 모든 물리적인 가불가(可不可) 따위를 논할 여지도 없이 거룡의 등이 척추를 보였다.
정적.
다음 순간 거룡의 눈에서 빛이 꺼지며 입에서 미세한 환염을 토해냈다.
거룡의 생명이 끊어지는 신호였다.
[우오오오오오오. 창힐 님!!]
처음으로 종말의 거룡이 울부짖었다.
그는 지금까지 반쯤 여동빈과 일행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일격이 통째로 자신을 멸하려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는 영혼 째로 자신에게 잠재된 모든 혼돈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경악했다.
[이럴 수가…. 나야말로 왕을 먹어 치우는 자이거늘…. 모든 혼돈의 가호를 가지고 세계를 먹어치울 수 있었거늘…. 더 강해져서 삼황오제도 먹어치우려 했거늘… 겨우 인간 따위에게!]
여동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내 혼돈의 정수(精髓)를 벨 수 있느냐? 너와 같은 힘을 가진 자는 본 적이 없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지금의 일참으로 모든 승부가 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패자의 유언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종말의 거룡이 지니고 있던 거대한 혼돈의 몸뚱이가 산산이 부스러지고 있었다. 영혼 째로 부정해버리는 베기가 그의 존재를 빠르게 소멸시키고 있었다.
후두둑….
어둠이 멈추며 대륙에 드리워지던 암운이 점차 멀어졌다.
부력(浮力이 강해지며 이 땅에 용납되지 않는 혼돈의 존재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거룡의 힘이 약해지자 인과율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우주에 빛나는 태양을 등진 거룡의 모습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잠시 후 거룡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듯 허탈하게 웃었다.
[흐하하하…. 그대… 혼돈에서 태어난 나를 벤 자여…. 이 세계의 종말을 유예해봤자 무슨 의미인가….]
혼돈의 용이여, 의미 따윈 없다.
내가 걸어가는 무혼(武魂)의 길일 뿐이다.
[…훌륭하다….]
여동빈이 영혼으로 대답하자 거룡은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검선 여동빈이 자신을 벨만한 숙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나를 벤 그것이 바로 무(武)…인 가….]
화르르륵
혼돈의 거체는 별빛이 되어 녹아 흐르듯 우주로 역행하기 시작했다. 성천(星天)이 타올랐고 무수한 별똥별이 그 날 중원대륙 전역에서 목격 되었다. 별을 먹어치우는 자가 소멸 하며 그 생명력이 피폐해진 땅에 쏟아져 내렸고, 일순간 지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 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구원 받은 것이다.
여동빈은 너무나 지쳐서 쉬고 싶었다. 무혼의 도움으로 일순간 자신에게 불가능한 경지에 발을 디뎠으나, 그 여파로 모든 육체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 때 망량선사의 환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여동빈. 정신차려라.]
“망량선사….”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네가 해치운 것은 놈이 혼돈 속에서 수천 년간 키웠던 몸뚱이며, 본체는 아직 중원세상에 봉인되어 있다. 고대에 봉인되었던 놈이 영혼체만 외부 세계로 빠져나갔던 거지.]
“크윽…
[혼돈의 거체가 여기까지 접근했으니 곧 용의 본체가 고대의 봉인에서 풀려날지도 모른다.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너 뿐이다.]
여동빈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 무고한 약자가 처참하게 고통 받는 세계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뼈와 살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움직여야 했다.
여동빈이 질문했다.
“선사…. 제게 조언을 해주는 건 인과율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부담이 되시지 않습니까?”
[어긋나지….]
“그럼 어째서….”
망량선사가 순간 웃는 것처럼 보였다.
[기적을 일으킨 네게 대한 보답이다. 조금 도와주마.]
우응
망량선사가 힘을 썼는지, 여동빈의 눈에는 지상에 있는 봉인의 위치가 점처럼 눈에 띄었다. 자세한 지형은 보이지 않지만 저 정도면 심장으로 보이는 위치를 꿰뚫을 수 있으리라!
파앗
여동빈은 하늘 위에서 검을 높게 치켜들어서 지상을 겨누었다. 이제 와서 지상까지 가서 일일이 봉인을 해제하기에는 체력도 기력도 시간도 없었다. 단 한 번의 어검으로 고대의 용의 심장을 꿰뚫어서 봉인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억…. 허억….”
풀썩
하지만 여동빈은 크게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아무리 그가 절대지경이며 엄청난 수양을 쌓았다 한들 모든 체력과 기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엄청난 거리의 어검을 성공시킬 수는 없었다. 거룡의 비늘 위에 올라 서 있는 여동빈은 반쯤 쓰러진 상태로 화룡신검에 겨우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때였다. 화룡신검이 갑자기 여동빈의 손을 빠져나갔다.
“아앗!”
여동빈이 경악하자 화룡진인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남은 건 내게 맡기거라, 제자.]
“스승님…!!”
[내 모든 힘을 쏟으면 고룡을 재봉인하는 게 가능할 거다. 대신 나도 오랫동안 잠들게 되겠지만.]
“안 돼…!! 스승님은… 천계로… 돌아가셔야….”
여동빈이 꺼지는 목소리로 말하자
화룡진인이 외쳤다.
[너라는 제자가 있어서 행복했노라! 또 만나자!]
“스승님!!”
쿠구구구
화룡신검이 엄청난 속도로 빛살처럼 땅으로 쏘아졌다. 이윽고 구름바다를 뚫은 화룡신검은 반짝이는 빛을 내며 지상으로 사라졌고, 일순간 고대 용의 봉인지에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솟아오르는 듯 했다. 화룡진인이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용의 심장을 찔러 재봉인한 것이다.
여동빈은 침묵했다.
‘난… 잘 한 걸까….’
모든 과업을 이루었으나, 불만이 남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써 지닌 한계였을 뿐이니까.
정적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동빈의 눈동자 속에 과거의 기억이 비쳤다.
[스승님. 새로운 경지의 이름을 육의성천도로 짓고 싶습니다.]
[육의… 그건 아주 딱 들어맞는구나. 그런데 별하늘을 그리는(星天圖) 무공인 이유가 있느냐?] 죽은 용의 거체에 발을 딛고 있던 여동빈은 천공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가 혼돈에 녹아서 천천히 바스라지고 있었다.
승리했으나 그는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 검이 세상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에 소원을 이룬 건가?
여동빈은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세계의 천 년을 구원한 검선(劍仙)이 생을 떠나 잠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