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634화 (633/1,615)

634====================

암천향(暗天鄕)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여동빈은 무신의 공간에 다시 발을 들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예전처럼 무한의 나선이 펼쳐진 공간에 진입했다는 걸 확인 했다.

“무신이여. 내 말이 들립니까?”

공허한 메아리가 흩어진다.

여동빈은 필사적으로 무신이라는 존재를 찾아서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나 여동빈 그대와 거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동빈이 이 시공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 하염없이 무신을 찾았음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현실의 시간이라면 무려 두세 달 이상 무신을 찾아서 불렀는데도 대답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여동빈은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찾을 근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소비한 시간이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몰랐기에, 그는 별 수 없이 근처에 있던 나선 하나에 손을 뻗으려 했다. 지금은 종말의 거룡이 언제 부활할지 모르는 위급 상황이라서 시간을 낭비하고만 있을 수 없다.

나선을 흡수하면 엄청난 격통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밀려들지만 - 동시에 무공의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 강렬한 마력 같은 경험은 여동빈이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나선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응?”

여동빈은 갑자기 자신의 손이 멈칫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의아하게 느꼈으나, 이내 손끝이 나선을 만지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동빈이 신체에 억지로 의지를 불어넣어도 손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본능에 새겨진 숙명적인 두려움!

여동빈은 이내 그 공포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미 여동빈은 고통과 고난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강철의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데 왜 이게 두렵단 말인가? 나선을 흡수하면 괴로움을 겪는 건 사실이지만 못 버틸 정도도 아닌 것이다.

“큭, 이 정도 쯤….”

여동빈은 육체를 억지로 의념으로 통제해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선을 잡았다.

그 때 여동빈의 눈앞에 글자가 떠 올랐다.

소화를 시켜

“……!!”

여동빈이 그 글자로 손을 뻗었지만 허우적댈 뿐 글자가 만져지지 않았다.  여동빈은 글자 자체가 무신의 의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소화를 시키라고?’

무엇을 소화시키란 말인가?

내가 무엇을 먹기라도 했단 말인가?

‘먹었다…?’

그 순간, 여동빈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앗, 설마….”

여동빈은 급히 주변에 늘어서 있던 나선과 무기들을 잘 살펴보았다. 잘 보니 나선들은 제각각 크기도 모양도 달랐고, 나선 옆에 배치된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무기 중에는 도저히 병기로 쓸 수 없을 법한 여인의 빗이나 곡괭이도 있지 않은가?

여동빈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가설을 떠올리는 순간 - 지금까지 그가 ‘먹었던’ 것들이 풀려나오며 여동빈의 뇌수 속에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여동빈은 순식간에 자신의 이성과 의지가 침식당하며 몸이 통째로 녹아내리는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크악, 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여동빈은 비명을 지르면서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이걸로 4번째 나선을 받아들이려 했던 행위가 -얼마나 무모한 자살행위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는 결코 편리한 기연의 보물이 널려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수천 수만 번의 생사결전을 넘나든 여동빈의 몸뚱이는 여동빈의 행위가 생명을 위협한다고 여겼기에 방해했던 것이다.

“허억, 흑, 크허헉….”

과연 소화가 가능할까?

여동빈은 머릿속에 풀려나오는 무시무시한 경험과 지식을 받아들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작해야 4 번째 나선으로 이 정도의 부하가 걸린다면,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기 백년은 용맹정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리라. 여동빈은 마른 피를 뱉어 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여기는….”

무신은 왜 이런 장소를 만들었는가?

무신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 순간, 여동빈의 눈앞에 또 다른 글자가 떠올랐다.

문을 찾아

‘문… 이라고?’

여동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무한의 공간에서 지평선을 찾는 것조차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이토록 넓고 광활한 장소에서 나선과 무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문’을 찾으라니?

하지만 여동빈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나선이 머릿속으로 꿰뚫어 들어오며 전신을 찢어버리는 극악한 고통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쏴아아….

여동빈은 비가 내리는 태산에서 기절해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화룡진인이 그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정신차려라, 여동빈!]

“스승님… 제가 얼마나….”

[꼬박 한 시진은 기절해 있었다. 네 몸이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게 하려고 내 모든 영력을 소모한 것 같구나. 그 도둑놈은 진작 도망쳐 버렸다.]

아마 화룡진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몸이 마기에 녹아내렸을 것이리라.

[어서 빠져나가자. 더 이상은 위험하다.]

여동빈은 급히 어검비행술을 써서 태산을 빠져나왔다. 화룡진인은 태산에서 빠져나온 후 여동빈에게 물었다.

[여동빈. 너는 설마 봉선의식에 성공한 것이냐?]

“아니요. 전 무신과 접촉하려 했습니다.”

[무엇을 보았지?]

“…….”

여동빈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동빈은 ‘그 공간’에서 ‘문’이라는 걸 발견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기연의 도구라고 여겼던 나선은 사실 터무니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마 ‘문’을 발견한 자에게는 차원이 다른 권능이 주어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무신이 진정으로 신(神)이라고 칭할만한 존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망량선사에게 바칠 헌원검을 찾을 단서가 없구나….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목격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니.]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냐?]

여동빈이 이를 악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지금 제 힘으로는 헌원검의 소재를 안다고 해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간도 능력도 단서도 부족하니 끝까지 세상의 운명에 휘둘릴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더 이상 망량선사께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수행하여 거룡을 퇴치할 힘을 얻겠습니다.”

[진심이냐? 종말의 거룡이 얼마나 강한지 들었을 텐데.]

“진심입니다, 스승님.”

여동빈의 말에 화룡진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다. 네 의지가 그러하다면 나도 끝까지 너와 함께 하마!]

“감사합니다.”

여동빈의 선택을 보면 누구든 무모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여동빈은 왠지 지금의 자기 선택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격랑에 휩싸이고 있었다고 한다면, 나선의 정체를 깨달은 지금은 어쩐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흐름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여동빈은 자신의 마음을 정한 후 망량선사를 찾아가서 홀로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가장 어려운 미래의 나뭇가지를 골랐군.]

“각오한 바입니다.”

[이제 네 미래는 나로서도 관측하기 힘든 혼돈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너의 길을 지켜보겠노라.]

스으으….

망량선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동빈은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적한 공간으로 향했다. 동료인 팔선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스스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망량선사에게서 거룡이 출현할 일시는 전해 받지 못했지만 여동빈은 어림잡아서 일 년 이내에 모든 준비를 끝마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여동빈은 그로부터 이 년 하고도 반 동안 - 수십 번이나 무신(武神)을 만났다. 정확히는 그 무한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동빈은 여태껏 겪었던 그 어떤 탕마행보다도 고통스러운 매일을 겪어야만 했다.

얼마나 수련했을까?

약속의 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쿠궁….

지금까지 찾아왔던 지각변동보다 더욱 고요하지만 장중한 한 번의 울림이 절벽의 동굴에서 명상하고 있던 여동빈을 깨웠다. 여동빈은 그 순간, 이 년 반 동안 쌓아왔던 모든 집중력을 쏟으며 감각을 확장시켰다.

너는 어디 있는가!!

여동빈이 거룡으로 추정되는 기운을 찾아서 어검비행술로 하늘을 떠 올랐다. 본디 어검비행이라는 것은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막대한 기운을 소모하기에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었지만, 여동빈은 한 번 칼을 뽑자 무려 일천 리를 그대로 날았다.  지금의 여동빈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퓨우우웅

소리를 훨씬 초월한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던 여동빈은 문득 태양을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한 빛을 내뿜고 있던 태양의 내부에서 시꺼먼 점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는가.”

여동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운해(雲海) 위에서 허공을 쳐다보았다.  성천(星天) 너머에 시꺼먼 우주(宇宙)의 혼돈이 펼쳐져 있었고, 그 혼돈 속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강림하고 있었다.

아니, 점이 아니다.

저것은 - 용이다.

여동빈이 곧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종말의 거룡은 우주 바깥에서 차원을 넘어서 서서히 중원대륙의 대기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여동빈은 ‘용’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용은 아직 머리 일부분과 다리만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중원의 일개 주(州)보다 훨씬 거대해 보였다.

우오오오오-!!!

종말의 거룡의 주변에 있던 혼돈의 대기가 포효하며 재앙이 닥쳐왔음을 선포했다. 잠시 후 태양빛은 사라지고 지상은 서서히 우주의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차마 현재의 지상문명으로는 - 대항조차 할 수 없는 절망!

여동빈은 자신이 저 존재를 해치울 수 있을지 어떨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울든 웃든 마지막 결전이 다가온 것이다. 그가 모든 힘을 다해서 종말의 거룡에게 덤비려고 할 때였다.

쿠구구구….

갑자기 지상의 세계를 둘러싸는 거대한 결계가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여동빈이 밑을 내려다보자, 밑에서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사방 (四方)의 위치를 점한 채 서서히 부상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화룡진인이 그들을 보더니 말했다.

[사해용왕(四海龍王)이 나섰구나. 그들의 모든 힘을 발휘해서 중원을 보호할 결계를 만든 것 같다.]

사해용왕!

그들은 대라신선 이상가는 존재로서 신성한 천룡의 왕들이었다. 천계에서도 매우 위격이 높은 용왕들이 직접 지상을 보호하러 나서다니! 현재 천계의 태도나 삼황오제의 상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동빈은 침음성을 흘렸다.

“누가 용왕을 부른 것인가….”

[바로 우리다, 여동빈!!]

파앗

그 때 여동빈의 앞에 칠선(七仙)의 환영이 나타났다. 여동빈은 난데없이 자신 앞에 종리권, 한상자, 장과로 등 모든 동료들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종리권의 환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를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 사해용왕의 결계라면 저 거룡의 공격을 버틸 것이다. 걱정말고 싸워라!]

“모두들….”

여동빈은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겨우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떨궜다.

“…대라신선의 등선(登仙)을 포기하고 보패도 바친 것인가.”

그 방법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팔선이 사해용왕을 소환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푸하하! 왜 죽을상이냐 여동빈! 어쨌든 우리는 불로장수니까 한 100년만 더 수행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종리권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자 한상자가 핀잔을 줬다.

[스승님, 속지 마세요. 종리 선생님이 제일 보패를 아까워 하셨어요.]

[야 임마!]

여동빈은 팔선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마음속이 뜨겁게 달구어짐을 느꼈다. 말로는 기백년 더 수련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인들이 신선이 되는 길 - 그것도 대라신선이 되는 길을 확실한 길을 포기한 선택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용기는 팔선이 여동빈에게 갖고 있는 신뢰와 유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반드시 이긴다.

여동빈은 그 마음을 한층 견고하게 먹었다.

그 때 옆에 있던 남채화(藍采和)가 말했다.

[여동빈. 혹시 몰라서 널 도와줄 자들을 불렀다.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그럼 우린… 도력을 회복하러 가겠다. 아마 적어도 이십 년은 외부에 나올 수 없겠지…. 이겨라.]

꺼지는 듯한 남채화의 목소리는 그의 도력이 거의 고갈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파앗

그때였다.

팔선의 시선이 천공의 거룡의 입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 광선으로 향했다. 그 광선은 지상으로 향할수록 점점 커지더니, 잠시 후 사해용왕이 펼친 결계에 도달했다.

쿠콰콰쾅

[크허허어어어….]

비통한 소리와 함께 동해용왕(東海龍王) 광덕왕(廣德王) 오광(敖廣)이 전신의 비늘이 터져나가며 하늘에서 떨어졌다. 단지 한 번의 공격이었을 뿐인데도 용왕 중 하나가 재기가 힘들 정도의 중상을 입은 것이다. 한상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세, 세상에 저럴 수가….]

대라신선이 일격에 당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용왕쯤 되는 존재가 저렇게 쉽게 당할 줄은 몰랐던지라 팔선들 모두는 잠시 표정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쓔쾅

종말의 거룡이 다시 한 번 입에서 광선을 내뿜자, 이번에는 서방용왕 광순왕(廣順王) 오흠(敖欽)의 심장이 터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서방용왕 오흠은 절명했는지 고개를 떨군 채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팔선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런!!]

[안돼!!]

동해용왕은 평소부터 인망이 부덕해서 정이 가지 않았으나 서방용왕은 다른 문제였는지, 팔선들은 모두 없는 힘을 끌어 모아서 서방용왕을 구출하러 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여동빈은 각오를 다지며 천공의 거룡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광선을 쏘게 만들어서는 안 돼!!’

여동빈은 화룡신검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몸을 마치 화살처럼 발사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깨달음을 쏟아서 적을 처치해야만 했다.

이 세상을 위해…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그리고 훗날 중화역사에 남게 될 검선 여동빈과 거룡의 격전이 시작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