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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여동빈은 마치 기절하듯이 잔 후 점차 의식을 차렸고, 두 시진이 지났을 때 겨우 고수 특유의 반사신경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본디 여동빈의 경지는 아무리 잠을 자고 있어도 반사적으로 고수의 기습에 대응할 정도였으나 이번에 닥쳐왔던 피로도는 너무 엄청났기에 반응조차 못하고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점차 깊은 수면에서 얕은 수면으로 변하면서 여동빈은 무의식적으로 운기행공을 했고 피로가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세 시진이 지났을 때 여동빈은 더 할 나위 없이 최고의 몸 상태로 되 돌아온 것을 느꼈다. 물론 화룡진인이 회복시켜준 덕분이기도 했으나 자신이 무신을 만났을 때 얻었던 ‘무언가’의 영향도 있었다. 여동빈은 백련교 내에 마련된 휴식공간에 좌정한 채 생각했다.
‘대체 그건 뭐였지?’
나선에 손을 대자마자 엄청난 정보와 경험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정작 그게 뭔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 정체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여동빈은 자신이 심득을 얻었음에도 그걸 쓸 수가 없으며 뭔지조차 모른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때 바깥에서 백련교주 이군악과 제사장이라고 하는 여인이 함께 들어왔다.
“그대는 이제 회복되었군.”
“도움에 감사드리오.”
“궁금한 것도 있으니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않겠소?”
“알겠소.”
이윽고 여동빈은 그들과 함께 마련 된 오찬 자리로 향했다. 상은 화려 하지는 않았으나 하나같이 천하의 진귀한 식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린 여동빈이었다. 여동빈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젓가락을 들어서 음식을 먹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이군악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쉽게 먹는구려. 검선께서는 이 음식에 독이나 흉계가 깃들었다고 생각지 않소?”
여동빈은 그 질문에 냉막하게 대꾸했다.
“그대들이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죽였겠지. 나는 당신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라 생각지 않소.”
“하하!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알고 하는 소리요?”
이군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여동빈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를 도와줄 인간이지. 선사(仙師)께서 보증해주시는 한 내가 당신을 함부로 의심하는 일은 없소.”
“……!!”
그 말에 이군악은 흠칫 놀란 듯 했다. 그러더니 진심으로 뭔가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백련교 본단 내부에서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그 때의 소년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위인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검선 그대는 실로 천하의 영웅이오.”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군악은 진심으로 검선의 역량을 알아보고 인정한 것이었다. 같은 무림의 절대자로서 자신과 동급 이상의 존재라는 걸 몇 마디의 대화로 알아본 이군악이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지. 먼저 질문하시오.”
“알았소.”
이군악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질문했다.
“우리가 싸우게 될 종말의 거룡이란 대체 무슨 존재요? 팔선의 힘으로도 모자라 우리를 부를 정도라면 그 힘이 상상도 가지 않는군.”
“나도 사실은 그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오. 하지만… 선사께서는 그 존재가 팔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이미 인정하셨소. 그렇기에 지금 나와 당신이 이렇게 대담하고 있는 것이지.”
“선사라 함은 당신의 뒤에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 같군.”
“더 할 질문은 없으시오?”
“그 존재가 왜 나타나는지 알고 있으시오?”
여동빈은 이군악의 질문에 대답했다.
“측천무후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는 마도사 집단이 있소. 그 자들은 사악한 [지배자]를 섬기며 인신공양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비인외도 무리들. 그 자들이 종말의 거룡을 소환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알고 있소.”
“흐음… 그 자들 말이군.”
“알고 있소?”
이군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는 그 자들과 몇 번 접촉한 적이 있소. 허나 그 때마다 그들은 도저히 인간의 도리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손을 끊고 말았소. 본인도 선대 교주로부터 그 자들은 기필코 멸망시켜야 할 무리라는 유지를 들은 바 있소.”
“흠… 그대들은 마도사와 [지배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물론이오. 본교의 기원부터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지.”
이군악이 옆에 있는 제사장을 돌아보았다.
“나는 사실 천상무인인지라 이쪽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지 못하오. 지금부터는 본교의 제사장이 당신에게 질문할 것이오.”
“좋소.”
제사장이라고 불린 여인이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여동빈과 눈이 마주 친 그녀는 다시 보아도 고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절세미녀였다. 다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은연중에 감돌고 있어서 그녀가 백련교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동빈은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신비한 힘이 웬만한 팔선에 못지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여동빈이여. 사실 그대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점술로 그 존재가 강림할 시기를 알아냈습니다.”
“……!! 정말인가?!”
여동빈은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종말의 거룡’에 대한 정보는 현재까지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상에서 활동하는 도인과 신선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술법실력을 지닌 팔선들도 온갖 방법으로 알아내려 했으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일개 종교의 제사장이 점술로 그 사실을 알아내다니?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저는 점술로 그 존재가 앞으로 삼 년 후에 여산에서 강림할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팔선도 술법과 점술을 사용할 수 있으나 당신 같은 정보를 알아낼 순 없었소. 가장 점술에 박식한 장과로 선배조차도….”
“제 점술은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제가 타고난 초상능력(超上能力)이기 때문입니다.”
“초상능력…?”
여동빈이 생소한 개념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이군악이 말했다.
“여동빈, 본교의 제사장의 혈맥 중에는 이따금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잠재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소. 그녀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은 미래예지능력이며 본교는 지금껏 그 능력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소.”
“뭐라고?”
“과거 그대와 여산에서 마주쳤던 것도 패왕의 검술이 여산에 있다는 그녀의 점괘에 따른 일이었소. 얻기 어려울 거라는 점괘 또한 맞았지만….”
이군악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동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초상능력이란 게 술법을 넘어선다는 말이오?”
“적어도 본교는 그리 파악하고 있소. 무공이나 술법과도 다른 제 3의 힘이라고 생각하오. 또한 그녀는 초상능력을 고도로 연마해서 술법 중에서 점술과 결합한 달인이지.”
“…….”
여동빈은 쉽게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술법이란 삼황오제 복희로부터 내려 받은 신의 선물이며 인간문명의 근간이었다. 인간만의 힘으로는 빠르게 문명을 건설하거나 자연재해로부터 버려낼 수 없었으리라. 더군다나 여태껏 여동빈은 탕마행을 천여 회 하면서 초상능력이라는 개념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여동빈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지극히 단편적이고 부족하다.’
무신이라는 존재의 영역을 접하면서 여동빈의 정신세계는 한층 넓고 유연해졌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게 존재한다고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더욱 발전하려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여동빈은 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하고는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그 존재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 또한 점쳐줄 수 있소?”
“안 그래도 점을 쳐 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땠소?”
“…….”
제사장은 크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함묵한 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군악이 여동빈에게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전멸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려.”
“으음.”
“종말의 거룡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는 절대굴강의 존재라고 파악했소.”
식사를 하러 들어왔을 때 그들 둘의 얼굴에 감돌고 있던 어두운 표정은 그래서였나.
여동빈은 상황을 파악했음에도 담담했다. 그들이 겁을 먹어서 도울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에 말했다.
“제사장이여. 그대는 내게 질문하고픈 게 있다 했소. 그 질문을 해 주기를 부탁드리오.”
“알겠습니다.”
제사장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여동빈이여. 종말의 거룡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실행할 수 있습니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여동빈은 제사장의 눈을 쳐다보았다. 엄청난 수련으로 단련된 여동빈의 안목은 그녀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대번에 꿰뚫어 보았다. 여동빈은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을 따를 것이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녀는 속을 한차례 쓸어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종말의 거룡과 싸우지 않는 법은 간단합니다. 그 거룡이 소환되는 인과는 바로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맞춰져 있으니, 지금 당장 본교의 호법사자와 교주와 힘을 합쳐서 황궁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측천무후를 죽인다면 반드시 거룡의 소환을 막을 수 있습니다.”
“…….”
백련교 제사장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측천무후의 암살!
하지만 그건 또한 여동빈이 상상할 수도 없는 난관을 돌파해야 함을 의미했다.
측천무후가 누구인가?
그녀는 현재 대당제국(大唐帝國)의 모든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존재였으며 그 자체로 현인신(現人神)으로까지 불렸다. 인간권력자에게는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현인신의 칭호였으나 당연한 일이었다. 선대 황제인 고종이 병석에 들었을 때부터 모든 권력을 거머 쥔 채 백만 대군을 손가락 하나로 움직이고 소국 정도는 그녀의 의지로 하루아침에 멸망했다. 수천 리 수만 리에 이르는 당 제국의 영토의 모든 인간이 그녀를 떠받들었다. 하물며 예종이 황위를 양도하여 천자의 위치에 오른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당 제국의 모든 지식인과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그녀가 중화역사상 최고최강의 권력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역사상 무수한 황제가 있었으나 그녀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예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황오제와 측천무후를 비교하며 찬양하는 학자마저 있었다.
게다가 암살의 성공가능성조차도 점칠 수가 없다. 팔선이 힘을 합치고 백련교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황제의 목을 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었다. 현 당 제국의 수도인 낙양에는 천하의 무림고수들이 몰려 있었으며 내로라하는 명문대파의 가주들이 측천무후의 개인호위처럼 붙어 다녔다. 그녀를 호위하는 초고수들을 가리켜 육걸(六傑)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들 모두가 현 무림의 십대 고수였다.
측천무후를 죽인다는 건 당 제국의 대뇌를 파괴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동시에 백성을 위해 활약하는 영웅인 팔선(八仙)이 인간사에 개입해서 역사를 뒤틀어버린다는 뜻이다. 만에 하나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그 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모로 너무나 큰 무리수였기에 여동빈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왜 거룡을 막기 위해서 측천무후를 죽여야 하는 것이오?”
“그건….”
“단순히 점술 결과라는 말로는 납득할 수 없소. 우리 팔선은 천계의 지령을 받아서 지상을 평정하는 자들이기에 인간계의 정치사에 관여할 경우 중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오.”
여동빈의 말에 제사장이 말했다.
“…그럼 안 되겠군요.”
그러자 되려 여동빈이 황당해했다.
“정말로 당신의 초상능력 외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
점술가가 측천무후를 죽이라고 해서 팔선이 다 같이 암살에 나섰다하면 지나가던 어린애도 납득하지 못할 일이었다. 속된 말로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여동빈이 황당해하고 있을 때 듣고 있던 이군악이 말했다.
“제사장의 의견일 뿐 본교 전체의 의견은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백련교주 이군악.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 하오?”
“나 또한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제사장의 말을 듣고 그리 납득할 수 없었소. 허나 당신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 그러므로 되려 우리 쪽에서 부탁하고 싶소.”
이군악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 팔선이 측천무후를 조사해 주시오. 그녀가 혹여 어둠의 세력과 연관되어 있다면 당신들 또한 그녀를 토벌할 명분이 설 것 아니오? 그때 우리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대들을 돕겠소.”
“으음!”
여동빈은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 공이 돌고 돌아서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세상 최대의 권력자인 측천무후를 조사하는 게 천계의 계율에 어긋나지는 않는가?’
여동빈은 그 사실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혼자라면 몰라도 자신의 행동에는 늘 화룡진인의 책임까지 따라다닌다. 자신이 섣불리 천계의 계율을 어기게 되면 스승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것이다.
화룡진인은 여동빈의 고민을 읽었는지 그에게 정신으로 말을 걸었다.
[동빈아! 걱정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스승님.]
[어차피 나는 본질적으로 천계에서 외인(外人)이나 다름없다. 내 처지 때문에 정의로운 일을 하려는 제자의 발목을 잡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나는 천계에서 추방당해도 그저 만신전으로 되돌아갈 뿐이니 걱정 말거라.]
여동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화룡진인이 만신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 화신이 사라져서 본체인 응룡에게 흡수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때 응룡이 자신의 화신이었던 용왕 화룡진인의 자아와 기억을 남겨둘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을 뜻할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여동빈은 스승의 뜻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스승의 그런 정의로운 모습에 반해서 지금까지 한 자루 검을 들고 풍진강호를 헤쳐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동빈에게 있어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부모보다 화룡진인이 더 위대한 존재였다. 그녀를 실망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여동빈은 떠나기 전에 이군악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검선. 한 가지 말해드릴 게 있소….”
“무엇이오?”
“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던 공손세가(公孫世家)가 멸문한 후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이오.”
무림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소. 한씨세가(韓氏世家)였던가.”
본래 공손세가가 천하제일의 위력을 자랑하는 공손검법을 바탕으로 천하제일가문으로 군림했으나, 공손세가의 가주인 공손벽이 패왕의 검법을 찾으려는 싸움에 휘말려서 사망해 버렸다. 문제는 공손벽이 공손 검법의 요결 중 많은 부분을 전승하지 않은 채 급작스럽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공손세가의 무공 자체가 약해져 버린 것이다. 초절정고수인 공손벽의 무력 자체가 공손세가를 떠 받치는 기둥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그 때문에 공손세가는 급히 세력을 축소시켜서 대비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절정고수가 많이 있었으나 갈수록 미래가 없기 때문에 자숙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너무 원한을 많이 샀기에 많은 무림세력의 합공을 받아서 멸문하고 말았고 10년도 되지 않아 무림사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서 천하무림의 중심지인 낙양에서 신흥강자로 떠오른 천하제일가문은 바로 한씨세가였다. 그들은 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의 직계후예로서 본디 문(文)을 익히는 가문이었으나, 꾸준히 상승무공을 대를 이어 발전시켜온 결과 강대한 무림세가로 거듭난 것이다. 한씨세가는 또한 재력도 엄청났으며 무림에서의 인망도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공손세가의 위치를 대체했다.
한씨세가의 이야기를 꺼낸 백련교주 이군악이 말을 이었다.
“만일 당신들 팔선이 측천무후에 대해 조사할 거라면 한씨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이오. 한씨세가의 가주는 본디 그녀의 측근에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고, 뭔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소.”
“고맙소.”
여동빈은 이군악의 조언을 들은 후 곧장 팔선 동료들이 있는 자리로 복귀해서 그들에게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측천무후를 조사할 것을 요청하자 종리권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여동빈! 단지 백련교 점술사의 추측만으로 그렇게 지고한 인간세상의 권력자를 섣불리 조사할 수는 없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지상 세계의 탕마에만 집중….”
쿠구구구
그 때 화룡진인의 환영이 불쑥 나타나서 종리권을 노려보자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하지 말지 말던가, 아니 어쨌든…”
[이노옴.]
“아니 왜 저만 갖고 그러십니까… 아우….”
종리권이 기가 죽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팔선 이철괴가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현재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자유자재로 고대의 법술을 사용가능한 것도 마물이 활개 치는 상황이기에 가능한 것이오. 섣불리 권력자를 건드렸다가 역사가 꼬이고 천기가 엉키면 그 인과율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그 말에 여동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망량선사께서 이 일을 돌봐주시니 걱정 마십시오.”
“헉! 그, 그건….”
“이대로 종말의 거룡이 강림하면 우리는 아마 반드시 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측천무후가 만일에 마(魔)의 배후에 있는 자라면 그건 얼마나 큰 재앙이겠습니까? 잡스러운 마물을 물리친다 한들 근본원인을 없애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이 무수히 반복될 것입니다.”
“으음….”
“절 믿어주십시오.”
여동빈은 꼿꼿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쉬지 않고 나머지 팔선을 설득했다.
“알았네.”
“한 번 해보지.”
결국 팔선들은 여동빈의 뜻에 따르기로 했고, 그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측천무후를 조사하기로 한 것이다.
측천무후의 조사가 시작된 지 약 열흘이 지났을까?
지상세계의 마(魔)가 크게 잠잠해졌을 즈음 측천무후를 감시하고 조사하던 팔선 중에서 장과로가 크게 경악해서 모두를 불렀다.
“세, 세상에 이럴 수가….”
“장과로 님. 무슨 일입니까?”
그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측천무후를 줄곧 천리안으로 감시하고 있었거늘… 내 보패가 오늘 새벽에 이렇게 되고 말았네.”
장과로가 자신의 보패인 통현봉(通玄棒)을 들었다. 통현봉의 끝에는 그의 술력을 증폭시켜주는 백은장식이 달려 있었는데, 그 장식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그 참상을 유심히 바라보던 팔선 한상자가 말했다.
“장과로 님의 천리안을 간파해서 술법의 진원지인 보패까지 부술 정도의 주력(呪力)이라면 대라신선급입니다.”
“허허… 측천무후를 호위하는 자는 대단한 존재로군. 어찌 이런 술력을 지닌 존재가.”
“이족(異族)일까요?”
“그럴 리는 없네. 대라신선급의 강함을 지닌 고위이족이 강림했다면 이미 인과율이 반응해서 투선(鬪仙)이 강림했을 터. 어찌된 일인가…!!”
팔선은 너나할 것 없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라신선급 주술을 쓰는 존재가 일개 인간세상의 황제를 호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인간 황제라고 하더라도 대라신선급 힘을 지닌 존재에게는 하찮을 뿐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동빈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더 이상 간접적으로 감시해도 무용지물이겠군.’
마음의 결정을 내린 여동빈이 나머지 팔선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낙양으로 가서 한씨세가 가주와 만나서 측천무후를 조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