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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여동빈은 신비스러운 공간 속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무한의 나선(羅線)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나선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는데, 여동빈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숫자로도 저 나선의 숫자와 규모를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나선 하나하나는 결코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윙윙 울면서 제 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을 뿐인데, 미묘하게 다른 진동이 울렸다.
또한 무한의 나선 사이에는 무수한 무기(武器)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광경인가?
여동빈은 당혹해하며 이 공간의 주인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럴듯한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동빈은 별 수 없이 몸을 움직여서 이 공간을 탐색해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제일 앞에 있던 나선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나선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풀려나더니 여동빈을 집어삼켰다.
그 나선에 옥죄어진 여동빈은 정신이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는 느낌에 거대한 공포를 느꼈고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 아아악.]
얼마나 나락과 천상이 반복되었을까?
여동빈은 그 절망의 끝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다.
[ 들리... 는... ]
소리가,
고동이,
점점 커져간다.
우주 한가운데에서 번져나오는 듯한 그 공명(空鳴)은 여동빈을 한참동안 혼란 속에서 뒤엉키게 만들었다.
새하얗고 거대한 거신(巨神)이 이쪽으로 손을 뻗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 다시... 만났... ]
그리고 여동빈은 의식을 잃었다.
[ ... 사실 첫 대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이름을 걸고, 진심으로 잘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흐릿하게 끝났다.]
여동빈의 말이 이어졌다.
[ 다만 이후의 만남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 그럼 어째서...]
[ 그건 연자 그대를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했듯 이 기억은 중대한 비밀과 직결된 열쇠이므로, 섣불리 공개할 수 없다.]
[ ......]
아무래도 여동빈이 지키고 있는 무신의 비밀은 생각보다 더 막중한 것인 듯 했다. 무신이라는 존재의 격이 [옛 지배자] 수준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여동빈 또한 내 비밀을 알지 못하면 그 비밀을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스르륵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장면이 크게 뒤바뀌었다.
"... 크윽."
여동빈은 사당의 한켠에 무릎을 꿇어앉아 있었다. 방금 전 무신과의 대면에서 커다란 돈오를 겪었기에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무(武)의 난관이 한차례 뚫린 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막중한 정신적인 피로감이 몰려왔기에 여동빈의 정신력으로도 당장 쓰러져서 기절하고 싶은 걸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현실로 귀환한 여동빈의 앞에 망량선사의 시꺼먼 화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화신은 아까처럼 냉막한 얼굴이었으나 이번에는 귀기나 혼돈을 내뿜지 않는 상태였다. 화신은 여동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를 만나본 감상은 어떻느냐?]
"... 말할 수 없습니다."
[ 역시 그렇군. 인과율이 성립했어.]
망량선사는 예상했다는 듯 대꾸하고는 사당에 놓여있던 도마뱀 꼬리를 집어들었다. 그 조그마한 꼬리는 고작해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는데 그 꼬리를 만지작거리던 망량선사가 문득 여동빈에게 질문했다.
[ 여동빈. 너는 만일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이무기를 죽일 것이냐?]
"아니요."
여동빈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통 인간이라면 수십번 기절하고도 남을 피로감이었으나 그는 절대지경의 고수답게 버티고 있었다.
"이무기를 살리고 망량선사의 곁을 떠날 것입니다."
[ 그래. 무신(武神)과 연결되었으니 이제 내 힘은 필요없는 거겠지?]
망량선사가 짖궂게 묻자 여동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 정말로?]
망량선사가 재차 반문하자 여동빈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망량선사께서 제게 신에게는 선악이 없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신을 쓰러뜨릴 인간에게는 선악을 초월한 뭔가가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인간을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그건 결국 광의(廣意)의 악(惡)이 되고 맙니다. 어차피 인간으로서는 이해불가한 존재일 터이니."
[ 흐음.]
"반(反)의 반(反)을 선택한 이가 역사상 한 명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제가 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걸 방금 깨달았습니다."
망량선사는 여동빈의 말을 되새기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말했다.
[ 훌륭하군. 너는 이제 깨달음을 얻었으니, 진정으로 검선(劍仙)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망량선사."
[ 귀면상을 타고나서 검귀(劍鬼)의 길을 걷게 되었을 자가 운명을 극복했구나.]
보통 인간에게 들었다면 여동빈은 그 말을 설령 천하제일 고수가 했더라도 내심 비웃었을 것이다. 그 누가 감히 여동빈을 재단하고 그 명성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대당제국 황제도 불가한 일이다. 그러나 여동빈은 눈 앞에 있는 망량선사가 내린 인정에 크나큰 충만감이 채워지는 걸 느꼈다.
슈우우욱
그 때 망량선사의 화신의 손 위에 있던 도마뱀 꼬리가 빛을 내며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사당 바깥에서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쿠구궁...
여동빈은 뒤를 돌아보았다. 망량선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는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
이무기!
분명히 여동빈이 방금 전에 베었을 거대한 2천년 묵은 이무기가 사당 앞에 서 있었다. 목이 베였던 흔적따위는 없었고 아무리 봐도 환영이 아니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무기를 보게 되자 여동빈은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어찌 자신이 벤 이무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말인가?
놀라는 것도 잠시, 이무기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오오오
이무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며 하늘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붙어있던 거칠고 사나운 비늘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며 금세 새 비늘이 돋았다. 그 비늘은 매끈하고 아름다운 화룡의 비늘이었으며 마치 새로운 용(龍)이 태어나는 듯한 장면이었다.
동시에 하늘이 쩍하고 열렸다. 구름이 사라지고 광대한 천계의 관문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수많은 지선과 천장, 신선들이 새로운 용의 탄생을 축복하듯 몰려와서 이무기의 승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여동빈에게 이무기가 시선을 돌렸다.
[ 고맙소, 검선. 그대가 깨달은 덕분에 망량선사께서 나를 승천시켜주셨소.]
한없이 정중한 말투였다.
"...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동빈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고, 자신이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절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차라리 이무기가 화를 냈다면 이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천상의 음률이 마을 전체에 울려퍼졌다. 이무기는 이제 완전히 육신을 천룡으로 바꾸었으며 지금까지 품고 있던 사이한 요력을 모두 신력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듯 했다. 완전한 천룡을 육안으로 보게 된 여동빈은, 설령 저 존재와 싸운다 해도 자신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한 용과 이무기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 검선이여! 부디 뜻을 이루시오. 나도 천상에서 응원하고 있으리라.]
파아앗!
잠시 후 등룡(登龍)의 의식이 끝나고 천계의 문이 닫혔다. 여동빈은 허탈감과 격정에 동시에 휩싸여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그런 여동빈의 곁에 망량선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 나는 인과율을 읽어서 네가 방문할 거라는 미래를 예지했다.]
"그렇다면..."
[ 저 이무기와 내기를 했었다. 아무리 저 놈이 수련을 해도 이대로라면 승천이 요원한 게 뻔했기에, 놈은 내기에 응했지. 내기의 내용은 네가 놈을 방문한 후 과연 어떤 답을 내놓는지에 따라서 승천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
[ 저 녀석은 운이 좋았구나. 놈이 내기에 이겼기에, 서왕모의 기준으로는 절대 용이 될 수 없는 놈인데도 내가 서왕모를 압박해서 용이 되도록 만들었다.]
여동빈은 미친듯이 망량선사에게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베는 게 정답이었는가? 베지 않는 게 정답이었는가?
왜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 되었는가?
' ... 아니, 물을 필요도 없구나.'
여동빈은 동시에 깨달았다. 그 선택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었으며 결국 대의와 희생에 대해서 자신만의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만일 여동빈이 무신을 대면하고도 대의를 위해서 사소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면, 그게 바로 실패였을 것이다. 망량선사가 말하는 것에서 뻔히 드러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여동빈은 정신적인 피로감을 잊고 망량선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사께서는 제가 생각을 바꿀 거라고 여기지 않으셨군요."
그렇다.
내기라는 건 서로 반대되는 선택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이무기가 이득을 보는 승천의 선택은 당연히 이무기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무기의 반대편에 선 망량선사는 당연히 여동빈의 실패에 걸 수밖에 없다.
여동빈의 말에 망량선사는 그저 미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으나 여동빈은 오싹함을 느꼈다. 눈 앞의 존재가 진정으로 선악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이 세상을 그저 관조하며 한없이 냉정할 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망량선사는 인간에 아무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여동빈은 문득 이상한 걸 느끼고 말했다.
"허나 저 이무기는 제가 죽였을 터인데 어찌 되살아난 것입니까?"
[ ......]
"설마 명계에서 강제로 영혼을 가져오셔서 육체를 되살리신 겁니까?"
여동빈의 질문에 망량선사가 대꾸했다.
[ 그렇게 귀찮은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놈이 살아있다는 가능성을 갖고와서 구현화시킨 것 뿐.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라도 결국 관측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
"......?"
[ 놈과 나 사이에 내기로 인과율이 성립되어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내가 갖고온가능성에 우주의 인과율이 저절로 맞춰진다. 이 우주에서 영혼이나 육체는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허무한 어조로 대꾸한 망량선사가 말했다.
[ 피곤할 테니 슬슬 가 보아라. 네게 도움이 될 자에게로 보내 주겠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 네가 저 이무기를 등룡시킨 공적이 있으니 이 마을에 너의 사당이 세워질 것이다.]
파앗!
여동빈은 다음 순간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장소로 이동된 것을 알아챘다. 그는 사방을 경계했으나 잠시 후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그대는 검선 여동빈?"
여동빈이 나타난 장소에는 다섯 명의 괴인들이 서 있었다. 아니 - 이 경우는 여동빈이 그들의 공간에 함부로 걸음을 들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여동빈은 그들의 기운을 마주치는 순간 그들 중 넷이 자신조차 함부로 상대하는 게 불가능한 절세고수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한 명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강대한 기세를 풍기지 않았으나 대신에 술법을 사용하는 듯 법구를 지니고 있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여동빈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중 아는 얼굴을 하나 발견하고는 말했다.
"그대는 뇌신류의 호법사자구려."
여동빈과 시선이 마주친 그 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백련교주(白蓮敎主)가 되었소. 얼마 전에 교주를 정하는 대회에서 우승했지."
"여기는 백련교의 본단이오?"
"그렇소. 교주전에 난데없이 나타나다니 과연 검선이군. 나 이군악, 감탄했소."
난데없이 여동빈이 나타난 장소는 백련교의 교주전이었다. 그리고 과거 여산에서 마주쳤던 뇌신류의 호법사자 이군악은 세월이 흘러 교주가 되어 있었고 그의 옆에 도열한 자들은 뇌신류 사대무류의 호법사자였다.
' 망량선사께서는 나를 왜 여기로 보내신 걸까?'
평소였다면 아무리 백련교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무신과 만난 여파로 정신력과 체력이 크게 고갈되어 있어서 힘이 크게 딸린다. 자칫했다가는 백련교 고수들과 싸워서 죽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망량선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자들에게 보냈다 하니 그 심모원려를 함부로 짐작할 수도 없었다.
여동빈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교주 이군악이 옆에 있던 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사장. 그가 어떤 술법으로 여기에 찾아왔는지 알 수 있겠소?"
제사장이라고 불린 여인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방금 점을 쳐 봤는데, 아무래도 검선의 요청을 전적으로 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녀는 두려움을 느낀 듯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존재가 점의 결과를 계속해서 뒤집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앞에 나타난 자를 도우라고 합니다. 여동빈은 그 존재의 가호를 받고 있군요. 세상에 천기를 이렇게 쉽기 뒤집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줄은..."
"으음... 그런가!"
백련교주 이군악은 침음성을 흘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검선이여. 알고 왔는지 모르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전에 당신들 팔선이 본교에 조력을 요청했던 건을 거절했던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허나 당신이 엄청난 뒷배경을 업고 직접 우리를 압박하러 올 줄은 몰랐소. 악의는 없었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오."
"......."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여동빈은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오. 노여움은 없으니 부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종말의 거룡을 토벌하는 데 참전해주길 바라오."
"후... 어쩔 수 없지."
이군악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사장의 점술 실력은 절대적.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도울 수밖에..."
"오랜 여정에 피곤한데 쉴 곳을 줄 수 있소?"
"즉시 귀인을 모시리다."
대전(大戰)을 앞둔 여동빈을 위한 망량선사의 선물이었다.
거룡과 싸우기 위해서는 팔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현재 무림 최강의 세력인 백련교의 교주와 호법사자들의 힘을 빌릴 수 있게끔 - 망량선사가 직접적으로 압박을 넣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