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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여동빈은 난데없이 이무기를 잡으라는 망량선사의 말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껏 싸웠던 마물이나 이족들 중에서도 그 정도 되는 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적인 존재가 자신에게 줄 만한 과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곧장 마을의 뒷산으로 가서 이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서 이무기의 소굴로 보이는 장소를 찾아냈고, 폭포수 뒤쪽에 있는 큰 동굴으로 들어갔다.
쿠구구...
동굴 내부에는 매우 거대한 공동이 있었고, 과연 몸 길이가 이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이무기가 누워 있었다. 보통 이무기가 이렇게까지 큰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과연 2천년을 묵은 이무기 답다고 여동빈은 생각했다.
이무기는 화룡(火龍)이 되려다 만듯 몸 여기저기에 시뻘건 비늘이 돋아 있었다. 특유의 뱀같은 시선이 흘러나와서 여동빈을 주시했다.
이무기가 여동빈에게 말을 걸었다. 인간의 말은 아니었으나 그가 술법을 사용해서인지 여동빈에게 고스란히 의지가 전달되었다.
[ 천하에 이름높은 검선 여동빈인가?]
"나를 알고 있나?"
[ 팔선의 명성을 모르는 괴물이나 요괴는 중원에 한 마리도 없을테지...]
이무기는 잠시 화염으로 이뤄진 숨결을 흘리는 듯 했다. 여동빈은 곧 전투가 시작될까 싶어서 전신에 힘을 곧추세웠지만, 이내 이무기가 하는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살려다오.]
"......"
[ 나는 일천 년 전에 한 번 천상의 용이 되는데 실패했다. 그 후로 절치부심하여 천 년 동안 힘을 길렀고, 이제 좀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서왕모께서 허락해주시기만 하면...]
"...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여동빈은 자신을 기습하려는 수작인가 싶어서 그를 경계했지만 이무기는 숫제 전투를 포기한 듯 자신의 머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 제발... 한번만 더 도전할 수 있게 봐달란 말이다. 나는 용이 되고 싶어 이천 년 동안 수행했는데...]
"무슨 개수작인지 몰라도 나는 너를 죽여야 한다."
파칭!
여동빈의 검에 검강이 서렸는데도 이무기는 아직도 싸울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야성을 일깨워서 경계라도 해야할텐데 가만히 있었다. 이무기는 눈을 들어서 여동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나는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알고 있다.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도 결국 네가 이길 게 뻔하다. 그렇기에 나의 꿈을 위해서 네게 삶을 구걸하는 것이다.]
"너는 이천 년이나 묵은 대요괴다. 네 몸에 쌓인 요력을 신력으로 전환하는 건 지난한 일이지. 정말로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나도 모르지만...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이무기가 외쳤다.
[ 검선이여! 내가 꿈을 이룰 기회를 빼앗지 말아다오.]
"......"
여동빈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인간이 백 년을 걸고 등용문에 도전하지만 그 중에 통과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평범하게 생을 마치게 된다. 인간사의 락(樂)을 즐기지도 못하고 뼈를 깎는 수행을 거쳤는데도 아무런 보상없이 허망하게 죽는 삶 - 그런 도인들의 한(恨)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여동빈은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 수십 배의 세월동안 노력해 온 이무기가 얼마나 승천에 큰 집착을 지니고 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화룡진인도 본인이 화룡이며 용왕의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이무기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화룡진인이 더 온정적인 기색이었다. 여동빈은 화룡신검의 화염이 점차 무뎌지는 현상으로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여동빈은 이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검극을 곧추세웠다. 여동빈의 자세에서 이무기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여동빈이 기합을 질렀다.
"하앗!"
푸콱
그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고 이무기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거대한 몸뚱이만큼 이무기의 머리통도 바위만큼 무거웠고 땅에 큰 진동음이 울렸다. 여동빈은 내공과 의념을 끌어올려 그 머리통을 잡아서 망량선사에게로 돌아갔다.
여동빈이 되돌아가자 망량선사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 여동빈. 돌아왔느냐?]
"네. 이무기를 베어왔습니다."
슈슈슉
여동빈이 대꾸하는 순간 사방의 풍경이 뒤바뀌었고, 주변의 마을은 사라지고 여동빈의 몸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에 떠올라 있었다. 온통 백색으로 물들어 있을 뿐 이 공(空)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어둠으로 이뤄진 거품덩어리가 흘러나오더니 천천히 인간처럼 생긴 형상을 갖추었다. 그 형상은 다소 마른 인간사내의 것으로 변했는데, 그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냉막하고 무감정해 보였다.
망량선사는 허무의 공간에 현신한 후 여동빈에게 말했다.
[ 너는 내 명령으로 이무기를 베었지. 그 행동에 후회는 없는가?]
"... 없지는 않습니다."
여동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망량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 네가 나를 찾아온 건 힘을 얻기 위해서겠지. 그리고 힘을 얻으려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하고.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힘을 얻으려는 이유는 뭐지?]
"곧 강림하게 될 종말의 거룡을 쓰러뜨려야 인간세상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게 너의 대의(大義)로군. 그럼 다시 묻지.]
망량선사의 무감정한 시선이 여동빈을 향했다.
[ 이무기는 대의 때문에 희생된 건가? 네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희생된 건가?]
"......"
여동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작스럽게 직접적으로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질문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망량선사께서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그를 굳이 베지 않았을 겁니다."
[ 하지만 넌 베었지. 힘을 얻고자 이무기의 소망을 짓밟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건 억지 아닙니까?"
[ 억지라니. 넌 왜 내 말을 거부하는 선택을 생각지 않는건가?]
"......"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어깨에 천하만민의 목숨과 대의가 깃들어 있는데!
여동빈이 내심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망량선사가 말했다.
[ 종말의 거룡이 뭔지도 모르고 그 놈이 강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강대한 힘만을 추구하는군. 지금의 네가 그 거룡과 뭐가 다른건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십니까. 다가올 재앙에 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거늘..."
[ 정말로 당연한 일인가? 결국 네가 내세우는 대의 때문에 이무기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너 또한 내 힘을 빌려서 위기를 타개하려는 약한 마음의 소유자일 뿐이다.]
"크윽."
스스스스
그 때 여동빈이 들고 있던 거대한 이무기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여동빈이 놀라서 자신의 옆을 쳐다보자 빛의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망량선사가 말했다.
[ 미래에... 누군가 강인한 의지를 지닌 이가 종말의 운명을 피하고자 한다. 그는 미래에 백억 명이 죽는 참극을 피하고자 의식을 치르는데, 그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무고한 인간 삼만 명이 죽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너는 그를 막겠는가?]
여동빈은 그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막겠습니다."
[ 왜? 삼만 명보다 백억 명이 훨씬 많지 않느냐?]
"인간의 생명은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에 망량선사가 가볍게 쏘아붙였다.
[ 과연 그렇군. 이천 년을 기다려 온 이무기의 소망보다 대당제국 만민의 존속이 딱히 중요할 이유는 없는 셈이야. 명쾌하기 그지없군.]
"......"
그대로 공박당한 여동빈의 말문이 막히자 망량선사는 훗하고 웃는 것처럼 보였다.
[ 방금 말한 것은 내가 실제로 관측했던 평행세계의 단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종말에 이르는 평행세계가 무한이라고는 하나 그게 실재할 가능성은 늘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아. 또한 종말 이후의 운명을 예지하는 게 불가능하며 시간이 닫혀있으니 신기한 일이지. 누군가가 일부러 막아놓은 것처럼.]
"......?"
[ 여동빈. 너는 무엇을 기대하고 내게 온 것이냐? 거룡이 불러올 참극을 막으려고 내 힘을 빌리려는 걸 알겠으나 네 진정한 목표가 그것 뿐이냐?]
여동빈은 혼란스러웠다.
망량선사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으며 - 그 원인이 이무기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망량선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화에서 읽어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는 차원이 너무 높아서 여동빈의 수준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여동빈은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저 솔직히 말하기로 작심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찾고 싶습니다. 무고하고 억울한 자들이 참혹하게 죽는 걸 보는 게 더는 싫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 자신이 수라가 되어 가시밭길을 걸을 각오도 되어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단 말입니다."
그가 울부짖듯 외치자 망량선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 똑같군. 이 세상을 구한답시고 대의를 위해 사소한 희생을 용납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꼴이, 아주 똑같아. 예전에도 너같은 놈들이 많이 있었지.]
"...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여동빈은 망량선사를 노려보았다.
"저를 이만큼 놀려먹으셨으면 만족하셨겠지요. 섣불리 힘을 빌려달라고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이었다.
파아앗
여동빈의 몸이 허무의 공간에서 현실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조그마한 사당에 누워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여기는...?'
이 사당은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전면에는 뭔가 제물이 바쳐져 있었다. 여동빈이 그 제물을 들여다보자 곧장 그게 도마뱀의 꼬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심히 조그마한 도마뱀 꼬리를 쳐다보고 있던 여동빈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 여동빈. 천계는 절대적인 정의가 아니다. 그건 신들이 인간세상을 관리하기 쉽도록 만들어놓은 관리자들일 뿐이며 결코 종말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네가 종말의 거룡을 막는다 하더라도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
[ 이 세상은 몇백년 후 멸망한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으며, 성좌가 강림하는 날 모든 것이 파괴되고 혼돈에 유린당해 범해질 것이다. 만마(萬魔)의 메아리가 피와 살을 집어삼켜 비탄 속에 세계가 멸망한다.]
여동빈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망량선사가 자신을 놀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만한 신격이 천계와 종말에 대해서 하는 말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봤자 미래는 절망밖에 남지 않을 것이리라. 여동빈이 굳어 있을 때 망량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 그리고 너는 지금 내게 인간의 영웅이 지닌 한계를 보여줘 버렸지. 대의와 희생... 현실에 직면했을 때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모순. 그 한계를 지니고 있는 이상 결코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으며 무수히 농락당해 굴복당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에게는 선악이 무의미하기 때문이지.]
"망량선사시여.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 너의 의지력이다.]
화르륵!
그 순간 백색의 창백한 얼굴같은 게 여동빈의 앞에 소환되었다. 그 섬뜩한 모습에서 일순간 우주적인 공포를 느낀 여동빈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 버렸고, 망량선사는 자신의 화신을 통해 의지를 전달했다.
[ 아주 머나먼 곳에 존재하는 자가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전하려 한다. 만일 네게 진심으로 모든 모순과 불합리를 이겨내어 세상을 구하고싶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자'와 접촉하는 길을 마련해 주겠다. 하지만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는 끝없는 절망과 고통에 시달리며 종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 다시 말하지만 불합리하며 고통스러운 길이다. 종말의 거룡을 파(破)하여 영웅으로 추앙받아 편하게 천계의 검선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수백배 힘들테지. 그래도 받아들이겠는가?]
여동빈은 망량선사의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전율했다.
' ... 우주적인 존재. 즉... [지배자]에 준하는 존재와 나를 연결시키려는 것인가!'
또한 그 존재와 연결되는 순간, 지금 중원의 마(魔)를 토벌하는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숙명적이고 고통스러운 과업이 여동빈의 영혼을 옥죌 게 분명했다. 망량선사가 직접 경고할 정도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여동빈은 일순간 고민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힘을 얻어야 하는가?
정말로 자신이 세상만민을 위해 그렇게까지 구고구난을 청해야 하는가?
그 순간, 여동빈의 머릿속에는 여자아이의 풀잎장식이 스쳐지나갔다.
"하겠습니다."
[ 좋다. 이제부터 너와 '그 존재'를 중계시켜 주겠다...]
여동빈은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강적과 대치했을 때보다 결연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 사실 나는 그 존재가 어떤 놈인지 잘 모른다. 그저 연결시켜줄 뿐이니 알아서 하도록.]
파아앗!!
엄청난 빛이 여동빈의 시야를 메웠다.
그리고 - 여동빈은 처음으로 무신(武神)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