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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화룡진인은 곧장 광소를 터뜨리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순식간에 수십 장을 압축해서 날듯이 전투장소로 뛰쳐들었고, 장과로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공손벽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까강!!
공손벽은 자신의 공격을 가로막은 자가 방금 전까지 장과로 곁에 있던 힘없는 소년이라는 걸 알아채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윽고 화룡신검과 마주친 자신의 검을 휘어감으며 강대한 화염이 몸에 옮겨붙자 기겁했다.
"크으윽!!"
그는 급히 자신의 장검에서 손을 떼며 화염을 몰아내고자 내공을 운용했지만 손가락 끝에 들러붙은 화염은 꺼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공손벽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수도(手刀)로 잘라내었고 그제서야 화염이 떨어져 나갔다. 공손벽이 자해하자 옆에 있던 이군악이 깜짝 놀랐다.
"공손가주!!"
"크으으... 넌 누구냐?"
공손벽이 분노하며 외치자 화룡진인이 여동빈의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 너희, 비열한 자들이여! 이 여산(麗山)에서 생을 다하거라!]
그녀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번에는 이군악을 습격했다. 이군악은 화룡진인이 검세를 펼치자 침착하게 자신의 창을 들어서 방어자세를 취했는데,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공격범위가 펼쳐지며 견제와 간합의 긴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군악은 이내 자신의 묘수(妙手)가 화룡진인에게 읽혔다는 걸 깨닫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꽈광!!
겨우 삼 초를 마주쳤을 뿐인데 화룡진인이 토해낸 강기가 이군악의 몸을 멀리 하늘로 날려버렸다. 이군악은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었으나 전력을 다한 대결에서 밀린 여파가 큰지 입가에서 피를 흘렸다.
"크흑."
화룡진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춤을 추듯 유려하게 공손벽을 마저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공손벽은 자신의 내공을 고도로 집중시켜 허리춤에 있던 연검을 뽑아들며 화룡진인의 검세를 마주했다. 이번에는 완벽히 정기신이 합일되어서인지 공손벽의 검에 화염이 옮겨붙지 않았고 그들은 정상적으로 초식을 마주쳤다.
까강
까가강
공손벽은 이군악과 달리 고도로 정제된 초식을 사용하며 화룡진인의 절초에도 잘 밀리지 않았다. 그가 전개하는 공손검법을 살펴보던 나는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 그래 맞아... 저건 제갈유룡이 펼치던 공손검법과 달라!'
이론상으로는 제갈유룡과 공손벽이 펼치는 공손검법은 똑같아야 한다. 세월이 다르다고 해도 어쨌든 같은 공손검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르다.
굳이 내 눈이 아니라 고수의 눈으로 보면 누구든 느낄 정도로 다르다.
제갈유룡이 펼치던 공손검법 또한 완벽에 가까운 절세검법이었지만 지금 공손벽이 펼치는 절초는 그것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아보려고 생각했지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건 사실인데 왜 다른 걸까? 이런 데서 새삼 재능부족을 느끼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퍼벙!!
하지만 공손벽 또한 화룡진인의 손에서 그리 오래 버티진 못했다. 고작해야 이십여 초를 나누자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였고, 화룡진인은 한 번의 종베기로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다.
촤악
선혈이 흩뿌려지며 공손벽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믿기지 않는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쿨럭거렸다.
"크헉... 허억... 말도 안돼... 내 무공은 당금무림... 천하제일이거늘..."
그 말에 화룡진인이 비웃었다.
[ 절대지경에도 이르지 못한 자가 감히 천하제일을 논하는가? 절세검법의 현묘함으로 무공이 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으나 네 실력은 저 이군악보다 훨씬 못하다.]
"... 크헉... 이럴... 수는..."
풀썩
공손벽은 울화가 치밀었는지 피를 토해내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직 죽은 건 아니었지만 아마 곧 죽을 게 분명했다. 화룡진인이 스윽 이군악을 쳐다보자 그는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공손벽을 내려다보았다.
"공손가주의 계획은 실패했군..."
[ 무슨 남 일 말하듯 하느냐? 너도 해치워 주마.]
"그만 합시다."
[ 뭐?]
이군악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교주의 명으로 공손가주를 최대한 지원하라는 명을 듣고 호법사자로서 파견되었을 뿐... 개인적으로는 더 끼어들 이유가 없으며, 더 싸울 필요는 없소."
[ 누구 맘대로?]
스윽
이군악이 갑자기 자신의 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조그마한 법구를 보자 바로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 금강저(金剛杵)?'
파지지직
"안 놔줄 생각이라면 나 이군악도 뇌신류의 종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금강저에서 갑자기 엄청난 뇌전이 치솟아 올랐다. 화룡진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 엄청난 힘이 잠재되어 있군. 그건 보패인가?]
"아니오. 이것은 사대무류의 근원... 그리고 우리 뇌신류에서 뇌신의 힘을 숭앙하는 증거인 바즈라."
화룡진인의 질문에 대답한 이군악이 말했다.
"내가 이 바즈라를 쓰면 뇌신의 힘을 불러올 수 있으니 결코 둘 다 무사하진 못할 것이오. 서로 물러나기를 원하오."
[ 흥, 그러지.]
의외로 당장이라도 이군악을 쳐죽일 생각으로 보였던 화룡진인은 순순히 물러섰다. 화룡진인이 판단하기에는 저 바즈라의 힘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군악이 공손벽을 데려가려고 손을 뻗자 화룡진인이 검강을 쏘아보냈고, 이군악이 물러서며 곤혹스럽게 말했다.
"공손가주를 치료해야 하오만."
[ 죽게 놔둬라.]
"... 알았소."
이군악은 별 수 없이 혼자서 공동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화룡진인은 쓰러져 있는 장과로와 종리권을 치료했고, 그들은 화룡진인을 만나자 깜짝 놀란 듯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대번에 큰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진인을 뵙습니다!"
"진인을 뵙습니다!"
[ 일어나라.]
장과로는 크게 당황했는지 말했다.
"천계에서 이 임무가 중대하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화룡진인께서 신검과 함께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장과로는 명백히 화룡진인을 존대하는 기색이었다. 화룡진인은 장과로의 말에 싸늘하게 대꾸했다.
[ 천계는 여전하군. 장과로 그대는 지선(地仙)임에도 한마디 설명없이 부려먹다니.]
"진인께서 천계에서 지상으로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 ......]
화룡진인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 이제 이 여동빈이란 아이를 어쩔 생각인가?]
"잘 사는 양민의 집안에 입양시켜서 평안하고 행복한 일생을 누리게 해줄 생각입니다. 그 아이는 고아로써 너무 오랫동안 상처받았으니..."
[ 허튼 소리 하지 말라.]
"네?"
장과로가 반문하자 화룡진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이 아이는 이미 전장에서 무수한 살상을 겪으며 귀면상(鬼面像)이 영혼에 새겨졌다. 무인(武人)으로서 최고의 소양이 갖춰졌으나 이는 양날의 검. 양민의 집안에 맡길 경우 스스로 버티지 못해 패악한 행위를 하거나 사도(邪道)에 물들어 버릴 것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운명이 아닌 것이다. 네 행동은 더 세상을 망치게 될 뿐.]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 이 아이, 여동빈을 내 제자로 키우겠다.]
"......!!"
장과로와 종리권은 깜짝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종리권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천계에서 화룡진인님의 실질적 서열은 최상위나 다름없는데 대라신선을 제자삼는 것도 아니고 일개 인간소년을 제자로 삼다니."
[ 후후! 최상위는 무슨 최상위냐? 삼청과 서왕모를 포함해서 모두가 응룡의 화신인 나를 경원시할 뿐이거늘.]
"어 그게..."
화룡진인의 냉소에 종리권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옆에 있던 장과로가 침착하게 말했다.
"종리권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진인의 제자가 된다면 그의 항렬은 금세 지선급 이상이 될 것이고 무수한 천계의 강대한 주술을 제약없이 배울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엄청난 질투를 받게 될 것입니다."
[ 질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등선을 하고자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하는 도인들이 중원대륙에 엄청나게 많은데 그들이 진인의 제자를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또한 천상의 대라신선들도 여동빈을 질시하겠지요. 진인께서는 보통 대라신선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니까요."
[ 음...]
"그건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화룡진인은 장과로의 말이 일리있다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종리권이 말했다.
"이건 어떻겠습니까? 일단 여동빈을 제 제자로 들여서 당분간 도맥 기초수행을 시키는 겁니다."
[ 무슨 뜻이냐?]
"일이 년 정도 이 아이의 근본심성과 재능을 살피면서 진인의 제자가 될 준비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제가 소상히 여동빈을 관찰한 결과를 천계에 보고한다면 천계에서도 진인의 제자가 됨을 인정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응? 네가 뭔데?]
단박에 화룡진인이 찌르듯이 물어오자 종리권은 우거지상이 되었다.
"으으... 제가 이래뵈도 곤륜십이대선 중 도행천존(道行天尊)의 수석 문하생입니다. 그리고 아직 등선은 안 했지만 보패도 받았습니다. 제가 도행천존께 고하면 충분히 들어주실 겁니다."
[ 흐음... 알았다.]
그렇게 상황은 일단 마무리되었고, 이윽고 화룡진인은 종리권에게 여동빈을 떠나보내기 전에 잠시 공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화룡진인이 여동빈 앞에 영체로 나타나서 말했다.
[ 여동빈. 저 모질이한테만 너를 맡겨두기는 왠지 불안하구나. 보통 시대라면 상관없겠지만 이 만당시대는 천기가 어그러지고 만마(萬魔)가 날뛰는 혼돈의 시대다. 네 몸은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러므로 지금 네게 천둔검법을 전수하겠다.]
잠시 침묵하던 화룡진인이 말을 이었다.
[ 나는 천계가 지겨워서 지상에 나들이할 겸 탕마행(蕩魔行)을 하기 위해 화룡신검을 만들어서 함께 내려왔다. 그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요괴들을 잡던 중에 패왕 항우의 무덤을 찾아냈고, 항우가 쓰던 가전검술을 손에 얻었다.]
"초패왕!"
[ 그 검술은 내가 보았던 중 가장 훌륭했다. 아마 초나라 왕가의 비전검예이기 때문이었겠지. 다만 항우 본인이 타고난 힘이 너무 강해서 검술을 더 발전시키지 않아서 미완성인 상태였다.]
여동빈이 말의 문맥을 알아챈 듯 말했다.
"화룡진인께서 항우의 가전검술을 발전시키셨군요."
[ 그렇다. 천둔검법이란 이름으로 정리하기까지 대략 백 년 정도 걸렸지.]
약간 뽐내듯 대꾸한 화룡진인이 말했다.
[ 그런데 검술이 완성단계에 이르기 전에 나는 엄청나게 강대한 요괴를 만나버렸고, 놈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영체가 부상을 입어서 신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 강호에 천둔검법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 버린 것 같구나.]
"그랬군요."
[ 내가 지금부터 전수할 천둔검법은 총 96초. 이는 하늘 전체를 위압하는 천지멸절(天地滅絶)의 검(劍)이며 패왕의 검! 네가 이걸 익힌다면 강호에서 네 상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화룡진인은 사흘 동안 여동빈에게 천둔검법을 전수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화룡신검에 깃들어서 잠들기 시작했고, 여동빈은 종리권을 따라서 여산을 떠났다.
여동빈은 그 후 이 년 동안 종리권 밑에서 법술을 수양하려 했으나 법술에는 거의 재능이 없었으며, 이상할 정도로 주변에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 년 동안 요괴와 목숨걸고 싸운 게 20번이 넘었고 무림단체와 생사결전을 벌이기를 다섯 차례, 그리고 인질이나 민가를 구출한 게 수십 번이나 되었으니 도저히 수련할 시간이 없어보였다.
종리권이 하루는 한탄하며 비명을 질렀다.
"동빈아, 너는 무슨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느냐? 무슨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냐. 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아직 대라신선의 문하생일 뿐이고 등선도 안한 도인일 뿐이란 말이야. 나 이러다가 죽어!"
"그래도 스승님은 늘 저를 도와주시는군요."
"옘병..."
그러나 여동빈은 그 엄청나게 치열한 시기에 천둔검법을 실전에서 연마하면서 타고난 재질과 귀면상의 반사신경으로 살아남았다. 결국 기가 질린 종리권이 무사태평만사평안일념일로용맹정진(無事太平萬事平安一念一路勇猛精盡)의 술법을 개발하면서 그는 겨우 여유를 찾는 듯 했다.
나는 여동빈의 기억을 살펴보면서 기가 질렸다.
' 세상에... 고작 이 년 동안에 무공실력이 전무(全無)에서 상위 절정고수 수준으로 향상되었단 말인가?'
상식을 초월하는 성장이었다. 심지어 여동빈은 싸우는 도중에 스스로 천둔검법을 발전시켜서 진화하기를 열 차례가 넘었다.
내가 이런 수준의 성장을 본 것은 오로지 진소청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동빈이 타고난 재능이 진소청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는 엄청난 검귀(劍鬼)였다. 비록 수련기간이 짧아서 내공은 부족하지만 천둔검법이 워낙 우월해서 강적과의 전투에서도 매번 승리했으며 엄청난 투쟁본능으로 생각지도 못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약속했던 기간이 끝나자 여동빈은 정식으로 화룡진인의 제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는 화룡진인에게서 정식으로 천둔검법을 배우며 제대로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동빈의 실력은 이전보다 더욱 성장이 가속했으며 종래에는 하루 잤다가 일어날 때마다 강해진다는 실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여동빈은 삼 년 후, 자신의 실력이 무림의 최절정고수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요괴들을 잡기 위해 퇴마행에 나섰다. 퇴마행을 떠나기 전날 밤, 여동빈은 화룡진인에게 밝혔다.
"스승님의 부탁으로 퇴마행을 떠나겠지만 제 목표는 입신양명입니다. 큰 요괴를 몇 마리 잡아서 세상을 평탄하게 만들고 나면 그때부터는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 네 뜻대로? 어떻게 살고 싶으냐.]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을 만들어서 무림 최강자가 되고 천하제일의 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그랬다.
여동빈은 무수한 고난을 거치면서도 딱히 자신의 목표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실력을 무기로 풍진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하는 야망넘치는 사내였다. 너무나 자신감 넘치고 담담하게 말해서인지 화룡진인은 되려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 하하하. 맘대로 하거라. 너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화룡진인은 조그맣게 덧붙였다.
[ 하지만... 마음이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