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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멀린의 영체를 잘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일반적인 분신술과는 달리 자신의 모습을 다른 차원에 투영시키는 고급술법처럼 보였고, 멀린이 만에 하나 내가 기습할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멀린을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소? 알려준 적 없는데."
그러자 멀린이 말했다.
[ 그대는 최근 마테오 리치라는 수도사를 방문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는 당신의 부하였던 거요?"
[ 그는 동방에 나가있는 서방길드의 눈이자 첨병일세. 나로서는 당연히 그에게 먼저 자네같은 인물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지.]
"......"
[ 운 좋게도 자네는 그를 방문했더군.]
그 말대로라면 아직까지 멀린이 알고 있는 건 내 이름이 백웅이며, 봉황조각을 거래했다는 사실 뿐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 멀린에게 말했다.
"낙양에 암천향으로 통하는 고대의 봉인이 있는데 현재 그 봉인은 임시로 막아놨을 뿐이오. 나는 그 봉인을 막을 수 있는 성유물이나 강력한 보패를 원하오."
[ 그런가... 암천향... 그대 또한 고대의 비밀에 접하고 있군.]
"[옛 지배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내 대답에 멀린이 말했다.
[ 어째서 그 봉인을 건드린 거지? 그리고 백웅 그대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그것까지 말해줄 필요가 있소?"
나는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미주알고주알 당신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줄 이유가 없소. 당신과 나는 현재 대등한 거래관계이고 당신은 내게 보물을 준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오."
멀린의 영체가 눈을 크게 떴다.
[ ... 그대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군.]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자 멀린의 영체가 쓴웃음을 지었다.
[ 신기한 일이군. [옛 지배자]와 같은 압도적인 존재에 저항하는 인간세력은 극히 드무니 우리끼리 서로 대립각을 세울 이유는 없음에도... 자네는 마치 그들의 힘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
멀린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나는 그가 뭔가 어이없어한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멀린이 입을 열었다.
[ 이 마검(魔劍) 흐룬팅을 바쳐 봉인을 닫을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
멀린의 왼쪽 손에 웬 시꺼먼 장검이 나타났고 그가 내게 장검을 건네주었다. 나는 흐룬팅이라 불린 마검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이걸로 안 닫히면 어떻게 하오?"
[ 그거야말로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않은가? 앞서 그대의 말대로라면 내가 할 일은 그대에게 보물을 주는 것 뿐일진대 봉인이 되는지 아닌지 내가 상관할 이유라도?]
"......"
뒤끝이 있는 놈이다. 내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멀린이 말했다.
[ 그럼 일을 잘 처리하길 바라겠네.]
멀린 또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인 듯 내가 불신의 기색을 드러내자 더 이상 말을 섞으려 들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멀린을 불러세웠다.
"잠깐!"
[ 무슨 일인가?]
"당신은 칠요(七曜)에 대해 알고 있지 않소? 그 중에서도 금요라고 불리는 새벽의 별과 같은 존재를 알고있지 않은가 말이오."
그러자 멀린이 이죽거렸다.
[ 허허. 내가 미주알고주알 당신에게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 거래관계, 그거 좋군. 내가 그 정보를 내놓을만한 보물을 내놔 보게. 그럼 생각 좀 해 보지.]
내 말을 써서 그대로 반박해오는 걸 보면 이 자식, 방금 내 말에 많이 삐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멀린과 대화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이 놈은 자기를 불신하는 놈한테는 털끝도 양보하거나 호의를 베풀지 않아!'
순수한 거래관계일지라도 그 동안은 내가 약간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추가정보를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눈 앞의 멀린은 그렇지 않다. 왜인지 모르지만 수틀리면 다 엎어버릴 것 같은 또라이같은 기질도 은근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 놈에게는 비교적 솔직히 털어놓고 협력을 요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이제 와서 설설 긴다고 해서 멀린이 나를 신뢰해줄 리는 만무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이 단기전이라고 생각해서 대화하는 방식을 서툴게 했던 모양이다.
' 제길. 그 용 놈이 멀린이 간교하다고 부추긴 바람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멀린에게 말했다.
"알았소. 그럼 이만..."
내가 비등을 발동해서 이 자리에서 빠져나오려 하자, 갑자기 발동이 되지 않았다.
"어?"
내가 당황해서 비등을 살펴보자 멀린이 말했다.
[ 그대는 마도사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군. 그들이 그대를 미행하여 이 장소를 결계로 봉쇄했다.]
"젠장."
역시 대영제국에 진입한 순간부터 나는 그들에게 존재를 드러낸 셈이었던가? 아무래도 놈들은 내가 캄란까지 오는 걸 기다렸다가 생쥐를 몰아잡듯이 결계를 쳐 버린 모양이었다. 멀린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 이상하군. 굉장히 많은 신비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겨우 마도구 하나 봉쇄당했다고 그리 당황하는가?]
"날 도와줄 수 있소?"
[ 흐음... 앞으로는 말하는 꼬락서니를 조심하게. 못생긴 놈이 마음씨라도 좋아야하지 않겠는가.]
"응?"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뜬금없는 독설에 당황하자 멀린이 손을 휘저었다.
파앗!
나는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농촌 인근에 도착한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여기가 어딘가 싶어서 둘러보았는데 건축양식이나 주변 분위기를 보자 여기가 중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있던 농민들이 사투리를 쓰는 걸 보자 이 곳이 광동 근처라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굉장한 능력이었다. 나를 순식간에 대영제국에서 중원 광동 시골까지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니? 하지만 멀린의 능력과는 별개로 나는 놈이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에 찝찝했다.
' 뭐야. 대마법사면서 고대의 장로라는데 왜 저렇게 성격이 더러워?'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저렇게 나올 정도면 멀린과 원수를 지면 큰일날 수준이었다. 나는 어째 여태껏 만났던 고위술법사들이 하나같이 성격이 더럽기 그지없다는 걸 생각하자 왠지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곧장 천우진을 찾아갔다. 그리고 부탁했다.
"도와줘!"
내가 전후사정을 설명하자 천우진은 엄청나게 짜증을 내는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그 마검이라는 걸 내게 줘 봐라."
"여기 있어."
마검 흐룬팅을 받아든 천우진은 잠시 기척을 살피다가 말했다.
"확실히 강력한 보검이군. 낙양의 봉인을 막기에는 충분할 거다."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천우진과 함께 낙양의 지하로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 응?'
지하에는 상관혁 대신 처음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절세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쩐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외모였다. 내가 대면하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 할 때 그 여인이 말했다.
"혁아가 말했던 놈이군. 무슨 목적으로 이 통로를 건드린 거지?"
혁아?
나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상대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 아!'
순간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과 싸우려 온 게 아니오. 이 마검을 공양물로 바쳐 봉인을 확실히 닫기 위해서 왔소."
그러자 여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 그럼 화룡신검은 어디 있지?"
"......"
화룡신검의 행적을 대뜸 묻는다는 건,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암천향의 통로와 봉인이 어떤 이유로 생겼는지 확실히 전후사정을 알고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
나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혁아에게 들었던 대로군. 일세의 패도를 추구할만한 자야.]
[ 야차(夜叉).]
[ 경계하지 마라. 싸우러 온 게 아니니.]
[ 우리는 인간세상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더러는 간섭하기도 했고 더러는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창힐의 뜻대로 종말의 때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 원래라면 우리가 500여년 후까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을 터였다...]
[ 하지만 흉신의 사도로 예비된 존재가 각성을 거부하고 네게 이름을 받으면서 엄청나게 예정이 뒤틀렸지. 흉신은 완전히 인과율을 얻어버렸고 지금 당장이라도 삼황오제와 전쟁을 벌일 기세다. 우리에게도 큰일이기 때문에 이 혼란의 장본인인 네게 찾아오게 된 것이다.]
발해 대인선 왕의 말도 기억난다.
[ 우리 발해가 멸망한 원인은... 신보(神寶) 토요 팔괘도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거란이 강했다 하나 결코 그들의 힘으로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었다.]
[ 누군가가 팔괘도를 훔쳐서였다.]
[ 그 자는 스스로를 상관완아(上官婉兒)라고 밝힌 여인이었다... 그 마녀가 팔괘도를 훔치고 용맥이 자극받아 화산이 터지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를 포기했고... 이어진 거란의 습격에 멸망했지...]
[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그 마녀만 없었어도... 저주받을 상관완아...]
팔부신중(八部神衆) 야차(夜叉)!
동시에 그녀는 당나라 시절에 측천무후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발해를 멸망으로 몰아갔던 마녀인 상관완아(上官婉兒)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관완아가 혁아라고 부른 것은 상관혁, 현 천하오대의원이자 의성이며 마도사인 그 자인 건가? 아호(兒號)를 부른다는 것은 상관완아가 상관혁의 조상이자 시조뻘 되는 존재라서일 가능성이 컸다.
난데없이 큰 일이 벌어진 셈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개개인이 마왕이나 사도급의 강함을 지니고 있는 팔부신중의 일좌와 충돌하게 되다니!
' 이길 수... 있을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상관완아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도 그녀가 인간을 초월한 신령스러운 존재라는 기척은 전혀 없고 그 흔한 마기(魔氣)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공고수 특유의 강대한 기력도 없었다. 그저 여염집 여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범상한 기운이기에 내가 그녀를 마주치자마자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과거 뇌음사의 주지인 요르한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창힐의 화신은... 당신이 쓰러뜨린 해신처럼 전면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소... 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부터 가장 밝은 곳까지...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이해하면서... 모든 걸 조작할 수 있지...]
[ 창힐은 결코 힘을 힘으로 상대하려는 자가 아니오... 그는 천하에서 가장 교활한 존재... 영웅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그대 또한 창힐의 마수에 걸려서 통제되고 있을지도 모르오...]
[ 우리 뇌음사의 서적에 전해지기를, 팔부중은 모두 변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화(神化)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오.]
[ 앞서 말했듯 팔부중은 온갖 모습으로 변신하여 인간세상의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소... 그 자는 평범한 행인일수도 있고, 요염한 여인일수도 있고, 관리일수도 있고, 승려나 도사일수도 있고, 무림인일 수도 있소... 그들은 그렇게 수천 년동안 인간세상에서 암약하면서 인간을 관찰하여 창힐에게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하오.]
요르한의 말대로였다. 팔부신중의 한 사람이 눈 앞에 떡하니 나타났는데도 전생경험을 동원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변신능력이었다. 다행히도 천우진은 내 흑요석을 받아들였으므로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 아니, 생각해보니 걸선 때도 그랬어.'
정파 삼대기인 중 한 명인 걸선 또한 팔부신중 건달파였는데도 본인이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가 팔부신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들은 보통 이족이나 요괴들이 지닌 변신술과는 차원이 다른 위장이 가능한 듯 했다.
나는 힐끔 천우진을 쳐다보았다. 지금의 천우진과 내가 합공한다면 설령 백련교주를 상대한다고 해도 수세로나마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팔부신중은 백련교주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마왕급 존재들이었기에 도저히 승산을 논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대답하지 않자 상관완아는 권태로운 말투로 말했다.
"화룡신검을 갖고있나 보군. 너희가 봉인을 유지시키려는 진심은 알았으니, 화룡신검을 내놓는다면 순순히 보내주겠다."
원래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존재가 팔부신중 야차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저 말은 굉장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도망치는 게 제일 낫겠지만, 야차가 어떤 능력을 갖고있는지 미지수인 이상 섣불리 도주하려고 등 뒤를 보이다가 더 큰 실책을 범할 수도 있다. 도망치려고 등을 보일 때가 가장 약할 때이기 때문에 도주는 그리 쉽게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섣불리 비등이나 축지법을 썼는데도 따라잡히면 그때는 진짜 죽는다. 상대는 팔부신중, 비등이나 축지법 정도는 쉽게 따라잡을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 제길... 화룡신검처럼 귀중한 걸 넘겨줄 순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 있다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로 했다.
후와아악
엄청난 힘과 영혼이 내게 깃든다. 이윽고 내게 강림하던 그 존재는 상관완아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 그대, 인외이긴 하나 사악한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자리에서 물러나라!]
그러자 상관완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동빈인가? 오랜만이구나."
[ 뭐라고.]
상관완아가 훗하고 웃었다.
휘리리릭...
그녀의 한쪽 손에 커다란 낫이 소환되어서 잡혔다. 상관완아 - 팔부신중 야차는 마치 옛 친구를 만나듯 친근하게 여동빈에게 말을 걸었다.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황소가 자결할 때 목숨걸고 전쟁터를 구르던 고아가 어느 새 검선이 되었구나."
[ ......]
여동빈의 복잡한 감정이 순식간에 빙의당해있는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여동빈은 그 한 마디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챈 듯 했다. 그러나 곧장 대꾸하지 않고 감정을 다스리듯 침묵했는데 팔부신중 야차가 말했다.
"패왕의 검법은 충분히 익혔느냐? 그 때부터 천 년이 흘렀으니 이제 내 상대가 될 수 있을까?"
스스스스
그 어느때보다도 삼엄하게 검선 여동빈이 자신의 검과 기세를 합일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현재 떠도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집중력이었고, 상대가 강적인 만큼 만전의 상태에서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에 가까웠다.
[ 천둔검법은 더 이상 패왕의 검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여동빈이 노호성을 지르며 개전(開戰)을 알렸다.
[ 지금부터 보여주겠다, 마녀 상관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