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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파앗
나는 천우진과 함께 황궁의 지하로 향했다. 그리고 천우진은 주문을 외워서 잠시 전국옥새를 지키고 있는 결계에 길을 뚫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전국옥새의 주인이 된 후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낙양에 봉인된 화룡신검을 복원하는 일 말인데..."
천우진이 힐끔 나를 바라보자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동빈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가 아는 한 네가 술법의 제 일인자니..."
"왜? 단말이 연결되어 있을테니 그냥 그의 도움을 받으면 될 텐데."
"향후 천계와 적대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여동빈에게만 의존하고 싶지 않아. 다른 방법이 있다면 좀 더 알고싶은데..."
천우진은 내 말을 이해한 듯 대꾸했다.
"여동빈을 통해서 천계에 정보가 새어나갈까봐 걱정하는군."
"그래."
"그렇다고 굳이 일부러 절연의 언령을 써서 내쫓기에는 여동빈의 도움이 아쉬워질때가 있을 것 같아서 싫은데다 봉인해제에는 무익한 거고."
"... 뭐 그렇다 치지."
여동빈의 도움을 받아서 낙양 지하의 봉인을 푸는 건 쉽다. 하지만 여동빈이 굳이 천계와의 인연을 선검술이라는 편법을 동원해서 끊으려 한 걸 보면, 대라신선이 천계의 소속으로 묶여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제약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 칠요의 해방 문제로 여동빈과 충돌한 적도 있었으니 너무 여동빈에게만 의존하고싶지 않았다.
여동빈이 쉽게 천계에 정보를 흘릴 자는 아니지만, 그와의 인연이 깊지 않다면 여동빈은 언제든 천계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그저 단말이 연결되어 있을 뿐인 연자에게는 그리 정이 크지 않다는 걸 지금까지의 전생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여동빈과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의 과정이 필요했다.
천우진이 문득 말했다.
"넌 결국 혼자 싸워나가는 길을 택하게 되겠군. 그런 선택을 무의식중에 고르고 있어..."
"뭐?"
"아니, 혼잣말이다."
천우진이 말을 얼버무리고는 설명했다.
"결국 조각난 화룡신검을 되살리고 봉인을 강화시키는 건, 화룡신검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화룡진인의 의식을 깨우고 그녀의 힘을 강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여동빈은 그녀를 불러서 깨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거고 나인성본전같은 마도서로 따로 이적을 일으키든가 할 수밖에 없지."
"흐음."
"본래라면 방법이 없겠지만 지금의 너라면 혼자서도 화룡신검에 잠재된 화룡진인의 의식을 깨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 정말?"
천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지난 생에 화룡신검을 일깨우면서 화룡진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 단말이 이어졌으니 단말을 통해서 말을 건다면 여동빈처럼 깨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말꼬리를 흐린 천우진이 말했다.
"화룡진인과 네 인연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가 중요하겠지."
"무슨 소리야?"
"여동빈이 그녀를 깊은 파멸에서 일깨우는 게 가능한 이유는 여동빈과 그녀 사이에 사제간의 인연이 무척이나 깊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년 전에 함께 목숨을 걸고 수천 번의 퇴마행을 했으며 결국 종말의 거룡까지 쓰러뜨려 세상을 구한 영웅이자 사제지간이니까. 하지만 너와 화룡진인 사이에 그 정도의 관계는 없지 않냐?"
"......"
그 말이 맞다. 기껏해야 화룡신검을 복원하고 되살렸으며 짧은 시간 함께 한 연자라는 정도였다. 나는 천우진의 말을 듣자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인연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인연의 힘이란 것도 술법인가?"
"흠... 인연의 힘은 술법에서 잘 설명되지 않으니 너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군."
천우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일단 봉인지에서 나가지.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들킬 거다."
"알았어."
파앗
나는 천우진과 함께 바깥세상의 한적한 장소로 나왔다. 천우진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연이라고 하는 건 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긴밀한 힘이지."
"실?"
"넌 이미 인과율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다. 인과율이란 신격조차 제약하는 법칙으로, 원인(因)이 있으니 결과(果)가 있다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강력한 법칙이지. 그 인과율을 초월할 수 있는 건 이 우주에서 미래영겁 딱 한 존재밖에 없다. 그나마도 너무 격이 높아서 논하는 게 의미가 없는 존재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법칙이야."
그는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과율은 무형의 실, 즉 인연을 생성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물과 무생물, 신격과 비신격을 막론하고 결국 상호작용으로 형성되지. 인과율의 결과로 생겨나는 게 인연이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그 어떤 신격도 함부로 건드리거나 끊을 수가 없어. 시공간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어도 인연은 함부로 못 건드린단 소리야."
"호오..."
"이 실은 뭉치고 뭉쳐서 모든 술법과 마법의 근원이 되며, 계약을 형성하는 가장 귀중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크게 보자면 [옛 지배자]도 인연의 고리 내부에 존재하지. 그들 또한 탄생한 [원인]이 존재하지 않겠냐?"
"흠... 그렇군."
그 말이 맞다. 그 말대로라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완벽한 무(無)에서 시공간을 무시하고 성립된 존재가 아닌 이상 인과율에서 자유로울 순 없으리라.
"원래 술법사는 인연에 대해서 그리 깊게 배우지 않아. 왜냐하면 이렇게 기본 정도만 알고 넘어가도 별로 상관이 없거든. 본격적으로 인연을 다루는 술법은 하잘것없던가 너무 수준이 높던가 둘 중 하나라서 건드리기가 마땅치 않기도 하고. 하지만 인연에는 또 다른 성질이 있다는 걸 알아두는 편이 좋다."
"또 다른 성질?"
천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은 또한 운명(運命)이며 술법의 범주를 넘어선 순수한 [힘]이라는 성질이지."
"......!!"
"강력한 인연은 굳이 술법적인 요소, 그러니까 주문이나 영창 수인 제물 같은 게 없어도 그 자체로 초현실적인 힘을 지니게 된다. 여동빈이 술법을 잘 쓰는 신선이 아닌데도 그저 부름만으로 화룡진인을 일깨울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나는 천우진의 설명을 알아듣고는 조심스레 반문했다.
"강력한 인연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리냐?"
"그렇게 표현해도 좋다. 너도 몇 번 겪어봤을텐데?"
"뭐?"
"네가 전생을 하면서 엄청나게 일이 꼬인 상황에서도 난데없이 네 주변인물과의 인연 덕분에 일이 호전되거나 기적적으로 역전한 일이 몇 번 있었지. 말도 안 되는 깽판이 먹히기도 했고. 내 생각으로는 그것도 인연의 '힘'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
"다만 이건 술법의 근본이론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술법계에서는 논하지 않아. 술법이 삼황오제 복희에게서 내려받은 체계라는 약점도 한 몫 하지만... 인간의 역량으로 논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영역이야."
"흐음..."
나는 천우진의 설명에 화룡진인과 어떻게 깊은 인연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자 천우진이 피식 웃었다.
"턱도 안되는 생각은 하지 마라. 인연의 힘이란 건 필요에 의해 이용하거나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가짜인연을 쌓아봐야 금세 무의미해 질 거다. 환신이라 불리는 나조차도 진정한 인연을 인위적으로 조종하는건 엄두를 못 내. 세계의 운명을 조종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그런가..."
"인연의 순수한 '힘'을 조종할 수 있는 주법(呪法)이나 편법은 내가 알기로 없어. 그런 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만들 수도 없고."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인 건가...
천우진이 말했다.
"굳이 그녀와 인연을 쌓으려 한다면 인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해서 친해지려는 것보다는, 그녀가 품고 있는 숙업을 해결해주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화룡진인이 화룡신검에 봉인된 것도 나름대로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일 테니까."
"그렇군!"
천우진의 조언은 그럴듯했다. 확실히 대라신선이자 만신전 응룡의 화신인 그녀에게 일개 인간이 친해지려고 접근해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나는 천우진의 설명에 큰 도움을 받은 느낌이 들자 묘한 기분이 들어서 놈을 쳐다봤다.
"뭘 빤히 보냐?"
"웬일로 이렇게 친절한 거냐? 평소엔 안 그러면서..."
천우진이 코웃음쳤다.
"후! 말 안하면 안하는대로 사람 갈굴거면서 새삼스럽게 뭔 소리냐? 양심없는 새끼가."
"......"
"아무튼 더 할 게 없으면 나는 이만..."
"아 잠깐만!!"
나는 급히 천우진을 붙잡았다. 그러자 천우진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또 왜?"
"그게 사실은..."
나는 천우진에게 내가 갖고있는 고민인 [기억력의 누수]를 이야기했다. 나는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천우진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기억이 계속 흘러서 한 백 년 후에는 감당이 안 될 거 같은데 기억을 명확히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천우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흠... 모르겠군.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뇌정경보다 뛰어난 기억력 향상 술법은 꽤 있지만, 그것도 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순 없겠군. 뇌정경 자체도 기억력을 크게 향상시켜주는지라 질적으로 큰 차이도 안 날테고, 네 전생이 수천 년 단위가 되면 네 녀석은 기억력상실 환자처럼 변하겠군."
"빌어먹을!! 남일 말하듯 하지 마.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라고."
천우진은 내 말에 이죽거렸다.
"남일이니까 남일처럼 말하는거지 바보냐?"
"......"
"뭣보다 네 전생이 어떤 원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기억을 어떻게 남길지 감도 안 잡히는군. 그런 문제는 제갈사와 일단 얘기해보고 다시 물어봐라."
파앗
이윽고 천우진은 귀찮다는 듯 축지법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더 이상 내 고민을 들어 줄 의리는 없는 듯 했다. 나는 아쉬웠지만 천우진도 없는 말을 지어낼 놈이 아니었으므로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 흠, 그럼 이번엔 진소청과 극호를 데려올까...'
파밧
나는 곧이어 청룡무관으로 이동해서 진소청에게 몰래 육합전성을 보내서 그를 유인했다. 이윽고 진소청이 뒷산으로 나오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진소청! 나는 당신에게 빚을 갚으러 왔소."
진소청은 의아한 듯 말했다.
"당신과 나는 생전 초면인데 무슨 소리요? 반로환동의 고수인 듯 한데 정체를 밝히시오."
"나는 백웅이라 하고, 과거 당신 덕분에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소."
나는 포권을 했다.
"그러니 제안하겠소. 나와 겨뤄서 승부를 내고, 내가 이기면 이 흑요석을 받아주지 않겠소? 이건 기억을 전송하는 술법이 담긴 보석이오."
"... 무슨 제안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순순히 놔줄 분위기는 아닌 듯 싶군. 그럼 해 봅시다."
나는 이윽고 진소청과 비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몇 초식을 겨루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진소청은 지금 미숙해. 하지만... 뇌신류의 요결을 무의식적으로 연마하고 있어!'
한두 번 싸워볼 때는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뇌신류의 무예를 오랜 기간 달인의 경지로 터득하며 이청운 종사 밑에서 묘예의 역을 터득하게 되자 알 수 있었다. 진소청은 지금 허우적대며 다음 경지가 뭔지 모르는 상태지만, 내가 인위적으로 수련해서 터득했던 묘예의 역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진소청이 묘예를 의식하고 자기자신을 다듬는 순간 급성장하게 되는 게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묘한 일이다.
나와 초기 진소청과의 무예격차는 더욱 벌어졌지만 - 그럴수록 그의 재능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더 깊게 깨닫게 되며 스스로 겸허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무술 그 자체의 지평이 나의 내면에서 넓혀지는 기분이었다.
타당
대략 백여 초가 지났을까? 진소청은 창으로 내 초식을 거두다 말고 창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고인께서는 나를 너무 놀리시는군."
"놀리다니."
"원한다면 십 초 내에 내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을텐데 지금 내게 지도대련을 해 주시는 겁니까? 지닌 공력의 일 할도 쓰지 않는 게 느껴지는구려."
알아본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소청에게 말했다.
"말했잖소? 나는 그대에게 은혜를 입었고 이 자리에 온 것도 그대를 해치려 함이 아니오."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진소청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흑요석이란 걸 줘 보시오. 나도 당신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싶소."
"좋소."
나는 진소청에게 흑요석을 넘기고는 기억을 전송했다.
잠시 후 진소청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자신이 얻은 기억을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경악한 표정을 멈추고는 말했다.
"... 세상에 이럴수가..."
나는 진소청을 찬찬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걸로 24번째 전생이오. 당신은 이전 생에 내게 신역절기라는 걸 보여주고 생을 마감했지."
"......"
"난 그 신역절기란 게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했소. 하지만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천계의 뒤에 숨어있는 흑막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나인교주에게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오. 당신 덕분에 내 목표를 향한 길이 크게 단축된 거지."
진소청은 혼란스러운 듯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백웅 당신은 곧 이번 생에도 자살하듯 암천향에 가서 죽을 생각이오?"
"그럴 생각이오."
"그럼 굳이 내게 찾아올 필요는 없지 않았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필요하든 하지 않든, 고마운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그런 이유를 따질 순 없잖소."
"... 그대는 의인(義人)이구려."
진소청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백웅,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이윽고 진소청이 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백련교주에게 데려다 주시오. 나는 그의 제자가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