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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혼절한 제갈부를 목갑에 집어넣은 후 나머지 기연을 챙기기 시작했다. 먼저 화신류의 한진성이 과거에 가르쳐주었던 용문석굴의 빈양남동으로 가서 뒤쪽 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백금을 가득 목갑에 쓸어넣고 언월도와 백변신투의 비급을 손에 넣었다.
' 여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나중에 오게 되네.'
하긴 내가 중요하게 여길 정도의 기연이라면 이걸 이미 알고 있던 한진성이 애저녁에 써먹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
나는 갑자기 왼손에 들고 있던 언월도에서 강한 빛이 흐르는 걸 느꼈다. 동시에 언월도에서 강력한 영기가 치솟아 올랐고, 나는 난데없이 내게 투지가 깃듬을 느꼈다.
' 이건...?'
언월도에 깃들어 있는 영령이 내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 현상인가?
지난번에도 한 번 느꼈던 현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더 심했다. 잠시 후 웬 기다란 수염을 한, 대추처럼 붉은 얼굴의 키 큰 무장이 환영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내게 말을 걸어왔다.
[ 광세절무(廣世絶武)을 지닌 무인이여! 그대에게 부탁이 있다.]
"어... 나 말입니까?"
무장의 영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 나는 내 후손에게 복택을 내리고자 지상에 남았으나 찾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석굴은 강한 영적 봉인지이기에 인연을 찾아가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석굴을 제작한 자는 미친 괴승이라 들었다.]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무장이 말했다.
[ 부탁건대 이 언월도를 내 후손에게 전달해줄 수 있겠는가?]
"......"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뭐 전해드릴 순 있지만... 굳이 제 앞에 나타나신 이유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이 곳에 출입할 수 있는 게 저뿐인것도 아니고 다른 이도 언월도를 만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무장의 영혼이 껄껄 웃었다.
[ 허허허. 이 석굴에 오기까지 언월도를 제대로 든 자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나와 접촉할 정도의 신기(神氣)와 용맹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그대는 필시 범상치 않은 절무(絶武)의 소유자일 터. 나는 그대만큼 강한 무사를 근 수백년간 보지 못했다.]
"......?"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 신기라... 내가 음신지력을 또 한번 흡수했기 때문인가?'
예전에는 언월도를 들었는데도 무장의 영혼이 직접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지난번과 이번의 차이라면 음신지력을 내가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의 차이였다. 아무래도 음신지력을 추가로 흡수하면서 영적인 존재와의 친화도가 크게 올라서 언월도에 깃든 무장의 영혼과 직접 대화가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귀하의 목적은 언월도를 후손에게 전달해서 혈족을 흥성시키는 겁니까? 해드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일단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야겠군요."
[ 그러고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았는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나는 현재 천계에서 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의 직위를 맡고 있다. 그리고 생전 지상에 있을 때의 이름은 관우(關羽)였으며 호는 운장(雲長)이었으니, 현재 내 후손은 관씨(關氏)이다.]
"으음..."
관우 운장?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뭐였더라?
' 어 뭐였지... 분명 들어봤는데..'
나는 기억이 약간 가물가물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책을 읽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후손을 찾아서 이 언월도를 주면 되는 거겠죠?"
[ 부탁하겠다. 나는 그 숙업을 가지고 지상에 왔으므로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천계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약간 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대에게 큰 축복을 내리리라.]
나름대로 대가를 제시한 걸까?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스스스스
잠시 후 그의 영혼은 언월도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나는 뜻밖에 새로운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지만, 어차피 이번 생이 아니라도 다음번이라도 설렁설렁 해내면 되는 일일 듯 했다.
' 관씨의 후손을 찾으면 되는건가...'
나는 용문석굴 빈양남동의 기연을 수습한 후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심처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반쯤 죽어가는 청월을 발견해서 일단 구출했다. 이 또한 꼭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으나 하는 김에 깔끔하게 일을 끝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후 나는 제갈사가 있는 장소로 돌아가려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멈칫거렸다. 그리고 목갑 안에서 요도 무라마사를 꺼냈다.
"혹시 이것도...?"
청룡언월도에는 강한 신기와 신선의 인연이 얽혀 있어서 내가 잡으니 영령이 불려나왔다. 그렇다면 이 요도(妖刀)에서도 뭔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나는 요도 무라마사를 붙잡은 채 고요히 힘을 집중하며 내공을 증폭시켰다.
오오오오오
나는 제갈부와 싸웠을 때처럼 내 정신력을 집중해서 내면의 음신지력을 끌어내었다. 음신지력은 요괴의 요력과 다루는 방식이 비슷했기에, 예전에 미호와 함께 훈련을 한 나는 음신지력을 다방면으로 응용하는 게 가능했다. 제갈부와 싸울 때도 음신지력을 크게 돋우기만 해도 술법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졌기에 손쉽게 싸워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쿠구구구
' 으윽... 이거 진품 맞군.'
엄청난 기세로 내 음신지력과 내공을 빨아들인다!
이걸 본격적으로 써본 적이 없었기에 잘 몰랐지만 역시 이건 특별한 병기인 듯 싶었다.
그리고 얼마나 요도가 음신지력과 내공을 집어삼켰을까?
갑자기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 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크헤헤헤헤헤!!]
기품없는 천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요도가 내 정신에 대고 광소를 터뜨렸다.
[ 푸헤헤헤헤헤! 으하하하하하! 으아아하아하아하아아아앍!!]
"......"
[ 꺄르르르하아하아하앍하앍!!]
이 자식 웃는 거야 우는거야?!
나는 요도 무라마사의 웃음소리가 너무 괴이해서 되려 황당함을 느꼈다. 이 놈도 자아가 있는 마병(魔兵)인 건 틀림없으나 어째 청룡언월도 때와는 달리 제대로 된 대화가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이... 잠깐..."
[ 하앍하앍!! 하앍!! 하앍!! 꺄아아아아아아아흐하하하하앍!!]
"......."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마치 미친놈이 내 머릿속에서 울고불면서 굴러다니는 듯한 괴팍한 느낌에 나는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놈이 얼마나 발광했을까? 한참 후에 요도 무라마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담은 분명한 외침을 내 정신에 내질렀다.
[ 주겨!! 주겨!! 피 줘!! 죽이자!! 죽이자고!!]
"끄응."
[ 이히히히히아하아하아하하하하아아앍!!]
우우웅
그러더니 갑자기 요도 무라마사를 잡고 있던 내 오른팔이 통제를 벗어나서 앞으로 쭉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놈이 내 오른팔을 장악해서 뭔가 죽이려고 강제로 움직이는 듯 했다. 나는 놈이 내 몸을 장악하려는 힘이 생각보다 매우 강한 걸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 제길... 웬만한 고수라고 해도 바로 정신을 잡아먹히겠군.'
나한테도 이렇게 짜증이 날 정도로 억척스럽게 들러붙는다면 다른 자들은 오죽할까? 나는 무라마사에게 몸의 통제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오른팔에 음신지력을 강하게 밀어넣었다. 그러자 음신지력의 기운에 움찔하면서 요도 무라마사가 화들짝 지배력을 포기해 버렸고, 놈이 처음으로 놀란 듯 외쳤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앙?!]
"작작 좀 해!"
[ 히이히이이잉... 이이읽... 꺄아하하하하하아아앍!! 주기자! 주기고싶다!!]
놈이 움츠러든 것도 잠시였고 놈은 다시 광분하면서 날뛰었다. 나는 별 수 없이 크게 호통을 쳤다.
"더 날뛰면 칼을 분질러버리겠다."
내가 크게 경고하면서 이번에는 대놓고 음신지력을 크게 밀어넣자 요도 무라마사가 화들짝 놀랐다.
[ 히이익! 이익!! 크아아아아악.]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반응이랄까? 요도 무라마사에 음신지력이 너무 강하게 깃들게 되자 놈의 정신이 피해를 입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무라마사가 크게 쫄아든 목소리로 낑낑대며 말했다.
[ 아조씨... 그러지 말아양...]
"응?"
[ 내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가... 어 인간적으로... 무라마사 아파양...]
"......"
무라마사의 칼집이 덜걱거렸다.
[ 무라마사 죽어양!! 무라마사 야캐양!]
형언할 수 없는 괴이스러운 말투였다. 나는 자연히 표정이 썩어들어감을 느꼈고, 이 놈의 자아가 굉장히 파멸적이고 뒤죽박죽이란 걸 알아차렸다. 나는 무라마사와 더 대화를 섞기 싫어서 일단 목갑에 집어넣었다.
' 써먹을 수가 없겠군...'
과거 요도 무라마사를 쓸 때는 멀쩡했던 이유는 아마 내공과 음신지력을 극치로 불어넣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내가 힘을 불어넣어서 요도 무라마사의 자아가 각성한 건 아닐까?
나는 대충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장령곡으로 돌아갔다. 전국옥새와 화룡신검을 얻는 문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그건 꽤 큰 일이기 때문에 잠시 정비했다가 차분하게 진행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국옥새의 경우는 천우진의 조력이 없으면 얻을 수 없으므로 놈에게 어떤 대가를 줄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제갈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흑요석으로 보여주었다. 제갈사는 기억을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명제사서를 고작 제갈부 하나 얻자고 쓴 거냐? 무명제사서를 잘 쓰면 일국의 왕이 되는 것쯤은 누워서 떡먹기인데."
"음..."
"뭐 그럴수도 있긴 하지... 그래서 제갈부는 어딨냐? 한 번 꺼내봐."
제갈사는 내 선택을 약간 한심하게 여기는 느낌이었지만 크게 따지지 않고 넘어가는 듯 했다. 나는 쑥쓰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며 목갑에서 제갈부를 꺼냈다. 제갈사는 곧 혼절해 있는 제갈부를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네 녀석 이 놈으로 무명제사서만큼의 효율을 뽑아내고 싶다고 그랬지?"
"응."
"정 그러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 진짜?!"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결투용으로 무명제사서를 바쳐놓고도 나 스스로 찜찜한 선택이었는데, 제갈사가 그걸 만회할 방법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윽고 제갈사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정말이다. 충분히 방법이 있지. 단 이 방법을 쓰고자 하면 네 녀석, 나한테 딴지걸거나 개소리 하지 마."
"......"
불길한 느낌이 든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방법인데?"
"잘 생각해 봐라. 이 제갈부란 놈은 초절정고수이자 최정상급 술법사지만, 이대로는 써먹을 데가 없어. 왜냐하면 뒤통수를 칠 염려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성장성이 진소청이나 천우진에 비하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지. 타고난 오만함이 자신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점도 있고."
제갈사가 차가운 눈으로 기절해있는 제갈부를 쳐다보았다.
"난 예전부터 이 놈이 대성할 수 없는 놈이고, 자기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부류란 걸 알고 있었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라서 굳이 음양천고를 집어넣고 쳐죽이려 했던 거다."
"... 제갈사 너도 남말할 건 아니잖아?"
"크크. 자기가 어떻든 대인관계는 자신만의 취향인 거라고. 이새끼는 어쨌든 짜증나는 새끼였어."
광소를 흘린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그럼 결론은 하나야. 이 놈이 인격과 인성을 가진 채로는 쓸모가 없단 소리지. 그럼 이 전제조건을 바꾸면 돼."
"......?"
"이건 네 노예잖아?"
제갈사는 제갈부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꽉 잡으며 빙긋 웃었다.
"이 병신같은 대가리에 들어있는 인격을 싹 다 날려버리고 새걸로 갈아치우자. 중고품을 새것처럼 쓰는 최고의 방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