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암천향(暗天鄕)
그 녀석이라면?
내가 궁금한 눈으로 제갈사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일단, 토요를 얻으려면 엄청나게 험난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고난은 당연히 실력만으로는 풀어나갈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럼 실력 말고 뭐가 필요하냐?"
나는 제갈사의 말에서 눈치를 채고 외쳤다.
"운이군!"
"그래. 태허천존의 축복을 받는거다."
그렇구나!
확실히 생면부지의 토요에 도전하려면 강운이 필수일 것이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문혜에 대해서 조사가 다 안되어서 즉시 축복을 받고 뛰어들긴 좀 그런데..."
제갈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누가 뭐랬냐? 천계에 공양의식을 딱 한번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잖아. 이쪽에는 현이도 천우진도 있으니 충분한 보물만 있으면 몇 번이고 가능해."
"음."
"당연히 두 개 이상의 축복을..."
제갈사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갑자기 옆에서 망량이 말을 꺼냈다.
"숙부.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현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하는 말이냐?"
"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죠. 하지만 저는 최선의 효율을 버리고 성장을 같이 노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오호."
제갈사는 망량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후생을 위해 인과율의 폭을 넓히자는 거군. 생각해둔 놈이 있냐?"
"그건 백웅의 취향에 맡기고자 합니다."
"전생자의 감에 맡긴다는 소리군. 하긴 그게 맞을지도."
지금 책사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그리고 제갈사는 내게 계책을 진언했다. 나는 그 계책을 듣고 나자, 방금 전 망량이 왜 끼어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략에 내심 탄복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암천향과 그 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볼 생각이다. 아마도 단기전이 될테니 다른 건 신경쓸 필요 없겠지? 천계 수기공양이 끝나고 나면 일단 모을 수 있는 보물을 최대한 모아와라."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망량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 궁금한 게 있소만."
"무엇이오?"
"당신은 23번째 삶에서 여동빈의 선검(仙劍)을 얻었소. 그건 지금도 발현 가능한 것이오?"
그러고보니 이번 생을 시작하고 나서 선검술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말이 나오자마자 정신을 집중해서 오른손 위에 선검을 띄우려고 했다.
스스스스 -
"크윽!"
하지만 나는 갑자기 심장이 지끈거리는 고통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놀란 망량이 내게 물었다.
"백웅, 어찌된 거요?"
"......"
나는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선검을 소환하려 했으나 역시 되지 않았고 대신에 내부의 장기를 장침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내 술법력은 소모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혹시나 인과율의 문제인지 생각해봤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꽤나 직접적인 고통과 영향이었으므로 나는 생각에 잠겼다.
' 왜 이러는 거지?'
선검이 소환될 기색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선검을 다룰 때 특유의 꽉 찬 느낌이 느껴졌다. 아예 펼칠 수 없는 게 아니라 삼중사중으로 꽉꽉 막혀있는 느낌에 가까운 것이다. 내가 느낀 체감을 망량과 제갈사에게 이야기하자, 망량은 신중하게 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이제 됐으니 더 시도하지 마시오."
"혹시 짐작가는 게 있소?"
"여동빈이 선검으로 변신했었으나, 정작 선검술 자체는 여동빈이 아니라 구천현녀의 술법이오. 즉 당신은 선검술을 체득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정확한 술식, 주문, 요소를 아예 모르는 탓에 구현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오."
"그렇다면 이 찌르는 고통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 그걸 잘 모르겠구려. 원래 주문이 애초부터 시전되지 않는 경우라면 당신처럼 고통이 느껴질 일이 없소. 술력만 허망하게 소모될 뿐. 하지만 당신은 술력의 소모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소."
"생각할 수 있는 건... 선검술이 통상적인 술법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지금 당신이 선검술을 시도할 때마다 구천현녀와 여동빈에게 반응이 가고있을지도 모르오."
"......!!"
나는 깜짝 놀랐다. 그냥 술법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천계의 대라신선을 자극하게 되었단 말인가? 내가 당황할 때 망량이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사제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소. 그리고 수기의 재액이 닥쳐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갑시다."
파앗
나는 망량과 함께 망량선사의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늘 하던대로 천암비서를 묻어두고 천우진을 만났다. 천우진은 언제나와 같이 귀찮기 짝이 없는 기색으로 우리를 쫓으려 했으나 망량이 대충 설득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쿠르르릉...
천우진이 힐끔 하늘을 보더니 말했다.
"천기가 좋지 않군. 세 시진만 늦게 왔어도 수기의 재액이 바로 덮쳐왔을 거요."
"음, 공양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지 않겠소?"
"딱히 그렇지도 않소. 약식으로 하면 그만이니."
천우진은 원래 꽂아야 하는 깃발의 갯수에서 9할을 제거하고 1할만을 방위대로 꽂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담은 자신의 술수능력으로 감당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의식준비를 하는 천우진에게 흑요석을 줄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의식에 집중해야 하니 놔두기로 했다.
잠시 후 수기공양의식이 시작되고 맨 처음으로 태허천존이 나타났다.
[ 수기는 잘 먹었다. 인간들이여.]
지금까지는 저 말을 얌전히 듣고 있거나, 이리저리 비꼬거나 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어느 쪽도 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23번째 삶 막바지에 보여줬던 태허천존의 모습이 너무나 수상쩍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공공을 혼돈 속으로 끌어들이는 엄청난 술법, 그리고 스스로 서왕모의 관찰자라고 칭하는 모습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청이 서왕모에 의해 소멸당했는데도 영보천존의 화신인 태허천존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사실! 태허천존이 결코 삼청의 화신 따위가 아니라 또다른 흑막이라는 완벽한 증거였다.
나는 바로 태허천존에게 온갖걸 캐묻고 싶었지만 근질근질한 입을 참았다. 정말로 저 놈이 흑막이라면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물어봤자 절대 대답해줄 리가 없고 경계심만 살 뿐이다.
대신에 슬며시 말했다.
"태허천존이여. 나는 다른 대라신선의 축복을 수기의 댓가로 받고 싶습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태허천존이 흥미로운 듯 말했다.
[ 호오? 누구의 축복을 받고 싶은가.]
"그건 바로... 제천대성(齊天大聖)입니다."
[ ......]
태허천존이 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제천대성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 제, 제천대성은 딱히 줄 수 있는 축복이 없을지도 모른다만...]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일단 불러 주십시오."
[ 아니 미후왕은 천계의 공무에 바쁜 몸이라...]
나는 찌질거리는 태허천존이 짜증이 나서 버럭 외쳤다.
"불러 달라니까아아!!"
[ 끄응. 알았다...]
태허천존은 찔끔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연기로 사라지며 다음으로 차례를 넘겼다.
그리고 잠시 후, 태허천존이 강신해 있던 천우진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강신이 풀린 기색이었으므로 나와 망량이 깜짝 놀랐고, 천우진 또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앗... 설마 제천대성은."
그 때였다.
슈아아악!!
장내에 오색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는 광경이 펼쳐졌고, 그 정신사나운 짓이 약 일 각 동안 계속된 후 우리 앞에 웬 원숭이 선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랏차차차!"
영문모를 기합을 내지른 그는 근두운에 올라탄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푸하하하!! 어떤 맹랑한 녀석들이 날 부른거냐?"
"......!!"
제천대성 미후왕!
나는 그가 직접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락없이 천우진에게 정신체만 강신할 줄 알았는데 설마 본체째로 근두운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오다니? 우리가 깜짝 놀라자 제천대성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냐? 난 반신반마(半神半魔)라서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게 더 귀찮아. 어차피 근두운도 빠르겠다 천계 외곽에서 직접 날아오는 게 더 편하지."
그랬구나!
보통의 대라신선들은 강력한 고위정신체라서 강신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제천대성은 예외적으로 반신반마의 육체를 가진 상태로 대라신선에 임명되었다. 그렇기에 직접 몸을 갖고 움직이는 게 더 편할 것이리라.
' 이런 경우는 생각 못했는데...'
당황하긴 했지만 아무튼 크게 계획이 달라지진 않는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고는 제천대성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저 백웅은 수기공양의 댓가로 제천대성님의 가호를 원합니다!"
"으음... 그렇구만..."
제천대성은 뭐가 쑥쓰러운지 자신의 뺨을 긁다가 말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는 민간에는 별로 잘 안알려진 신선이거든? 나는 신선들 사이에서나 유명하지 보통 사람들은 날 몰라. 근데 굳이 내게 축복을 받고싶은 이유가 있는거냐?"
"......"
그가 우리를 놀리듯 히죽거렸다.
"난 지명도가 낮아서 좋은 축복을 못 줄지도 모른다고~ 잡선 수준일지도 모르는데에~"
제천대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도술계에 몸담은 숙련도사나 본격적인 신선이 아니라면 제천대성을 인지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지명도가 높을수록 도력과 능력도 강해지는 대라신선의 특성상 우리가 굳이 칠요 수기의 댓가로 제천대성의 가호를 지명한 것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했지만 이윽고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어... 정 그러시면 제가 활동하면서 제천대성님의 인지도를 높여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내 말에 제천대성이 호기심이 생겼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응?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뭐 원후의 춤이나 음악이나 음... 하다못해 소설(小說)같은 거라도 써서 제천대성님의 위광을 전파해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전파하게?"
"장차 수도 낙양에서 대유행하게 하겠습니다."
내가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말하고 나서 스스로 답답해졌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거둘 수가 없다.
"호오? 오오오?"
제천대성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원숭이 특유의 끽끽거리는 웃음을 내며 크게 웃었다.
"캬하하하!! 진짜지? 나를 위한 소설이라 그거 참 재밌겠는걸! 이왕이면 내가 천축으로 여행했던 이야기로 할까?"
"어..."
"재밌겠어! 이거 참 심심풀이로 왔는데 진짜 오늘 잘 왔구만~"
제천대성은 마치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좋아하며 외쳤다.
"좋아좋아!! 네게 나 제천대성 미후왕의 축복을 주겠다! 특별히 강하게 주겠다!"
파아아앗
갑자기 제천대성이 나를 향해서 손을 뻗자 푸른 빛이 내 몸을 뒤덮었다. 나는 강렬한 영기가 몸 내부에서 차오름과 동시에 확실한 이능력(異能力)이 내게 갖춰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들자 제천대성은 다시 근두운을 타고 떠났고, 그가 남긴 말이 장내에 메아리쳤다.
[ 소설 제목은 내가 나중에 생각해 오마!!]
"......"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무슨 능력인지 가르쳐주고 가야지!
나는 또 다시 능력설명을 듣지 못해서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놈의 대라신선들은 어찌 된 게 가호를 줘놓고는 어떤 능력인지 설명을 해주기 싫어한단 말인가? 내가 황당해하며 그 자리에 붙박혀 있자 천우진이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원숭이 신선의 여행기로 소설을 쓰겠다니 참 할짓없는 양반이군."
"응?"
"그딴 소재를 대체 누가 읽겠소? 대체 뭔 내용으로 할 셈이오?"
나는 예전에 제천대성에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대충 대꾸했다.
"어... 제천대성이 당나라의 고승 삼장법사랑 같이 천축에 간다던가..."
천우진이 코웃음쳤다.
"하하! 그게 뭐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내가 장담컨대 아무도 안 읽을거요. 그런걸 읽느니 차라리 도색잡설(桃色雜說)이나 읽겠소. 내가 써도 그 소설보단 나을거요. 제목은 금병매로 할까? 허참..."
"......"
이 녀석 농사만 짓는 줄 알았더니 소설도 나름 좋아하는 놈이었나?
혀를 끌끌차며 말하던 천우진이 말했다.
"아무튼 할일 다 했으면 이만 가 보시오."
천우진의 말대로 할일은 다 했다.
제갈사의 계책은 원래 항우의 축복을 이번에 받고, 암천향 도전 직전에 태허천존의 대운중첩을 하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토요를 거의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량은 그 계책에 딴지를 걸었다. 그렇게 한번에 효율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나와 '인과율'이 붙어있게 되는 신선의 수를 늘리자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내게 한 번이라도 축복이나 가호를 내린 존재는 나와 인과율이 연결된다. 그렇다면 향후 전생을 하면서 인과율이 강화된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전략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항우의 축복을 택하지 않고 일부러 내가 아는 한 가장 강력한 투선인 제천대성의 축복을 선택한 것이다. 강력한 투선인 제천대성이 어떤 축복을 될지 기대되는 게 그 이유였다.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나는 천우진을 붙잡은 후 그에게 흑요석을 넘겼다.
"이 수상한 보석은 뭐요?"
천우진은 처음에는 어물쩡 흑요석을 받기 싫어하는 듯 했지만 망량이 이내 그를 설득하자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우진은 흑요석의 기억을 받아들이자 정신이 번쩍 든 표정을 지었다.
"......!!"
그가 기억을 전승하자 나는 진중하게 질문했다.
"물어볼 게 있어."
기억을 찾았다면 굳이 말투를 어렵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선검술의 소환이 안 되고 고통이 덮쳐오는 현상에 대해서 천우진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천우진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런 현상?"
그는 잠시 후 탄식하듯 말했다.
"... 너, 구천현녀한테 찍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