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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암천향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당연히 칠요 중 토요(土曜)를 회수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토요는 상관완아에게 강탈당한 후 측천무후의 봉선의식에 바쳐져, 암천향에 존재하는 상태였으며 측천무후는 황궁의 [옛 지배자] 소속의 하위신이 되었다. 게다가 암천향에 가는 방법도 매우 까다롭고 위험한데다 신격과 겨뤄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그 동안은 은인자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생에 암천향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지난 생의 [제갈사]가 진언한 계책 중 하나를 실행하는 건가. 하루살이처럼 죽어나가도 좋겠다는 마음을 굳힌 거군?"
"그래."
나는 다소 담담하게 대꾸했다.
"개인적인 무력을 더 쌓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건 시간낭비야. 차라리 몇 번을 더 죽더라도 직접 부딪혀서 생생한 정보를 내 손에 넣겠어."
"크크! 아주 재밌군. 네 놈이 전생자라는 게 실감나... 그 동안 '내'가 왜 네 녀석에게 전적으로 협력했는지 이해가 가는군. 나보다 더한 광기의 길을 걷는 놈이 있다니!"
광소를 터뜨린 제갈사가 망량을 돌아보았다.
"현아. 네 의견도 들어봐야겠지. 지금 이 놈의 생각이 어떻다고 판단하냐?"
"......"
망량은 턱을 괴고 크게 고민하는 듯 했다. 그 또한 내 흑요석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다방면으로 연구 분석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구려, 백웅."
"응?"
"당신이 이번 생에 미호 님을 다시 마주치면 어떻게 대할지를..."
"... 음."
나는 탄식을 흘렸다. 역시나 망량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 답게 내가 어물쩡 넘어가려던 핵심을 단번에 찔러버린 것이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서문혜의 일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여와의 화신체일지도 모르는 미호 님에 대한 건 더더욱 중요한 일이오. 장차 천계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비장의 한 수... 하지만 백웅 당신이 보여준 흑요석에 묻어있는 감정은 아직 혼란스러워서, 미호 님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생각해두지 않았소."
나는 아픈 곳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제갈사가 팔짱을 꼈다.
"확실히 현이 말대로군. 그걸 확실히 하지 못하면 또 시간낭비가 발생하겠지. 그래서 백웅 너는 미호를 어떻게 하고 싶은거냐?"
"그건..."
"우리한테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아도 돼. 결국 당사자간의 일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네가 어떻게 하고싶다는 방향성 정도는 책사로써 알고 싶은 거다."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서문혜와 같아. 나는 지금의 미호가 그 모든 정보를 듣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일단은 감춰두시겠다?"
"...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미호가 내 기억을 보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그저 천계가 구리다는 정도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번에 얻은 정보는 서왕모가 여와임과 동시에 미호가 그녀에게 이용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진실이다. 서왕모를 어머니보다 더한 존재로 공경하고 사랑해왔던 미호에게는 천지가 부숴지는 충격일 것이다.
그리고 설령 미호가 그 정신적 충격을 이겨낸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 미호의 힘을 크게 증폭시켜줄 수단이 현재로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해결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그녀에게 절망만을 들이대는 짓은 그저 괴롭힘밖에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을 유추한 듯 망량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후! 백웅...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응?"
"보통 사람이라면 24회의 전생에서 이미 감정이 마모되고도 남았을텐데 아직도 그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감성이라니... 당신이 미호 님보다 몇 배는 불쌍하다는 걸 모르는 거요?"
"......"
"그렇다면 우리 역할은 장차 미호 님도 성장시킬 방법을 연구하는 거겠구려."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소."
미호에 대한 이야기가 얼추 끝나자 제갈사가 말을 꺼냈다.
"암천향에 가는 방법은 현재 세 가지가 존재하지. 하나는 꿈의 세계를 통해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문지기의 시험을 극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접 차원문을 통과하는건데 이건 [옛 지배자]와 직접 충돌해야하지. 마지막 하나는 네가 가진 비등을 이용해서 정해진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나도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사가 말했다.
"암천향에 가기 위해서는 첫 번째 방법이 가장 무난하고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방법으로 도전할 생각이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 번째 방법을 먼저 쓸 거야."
"왜?"
"한 번쯤은 이 비등의 소유주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끌어들였는지 알고 싶어."
지금까지 전생을 하면서 책사들은 내가 가진 비등을 수상하다고 여겼다. 너무 강력한 성능에 비해서 제약이 적은지라, 사실은 이게 소유주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악랄한 마도구가 아닌지 의심한 것이다. 그 의심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기에 지금까지 나는 비등이 보여주는 장소로 향하는 제안을 모조리 거절해왔다.
하지만 이미 죽기로 각오한 이상 일부러 함정에 걸리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함정 속에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그러자 제갈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굳이 우리를 찾아올 필요도 없었잖아. 산동에서 비등을 얻은 시점에서 바로 시험해봤으면 됐을 텐데 뭐하러 온 거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서문혜의 일에 대해서 검마와 얘기해봐야 했기 때문에..."
"크크. 어차피 치우에 대해서 조사하다보면 시간이 남을거라 생각해서 그 남는 시간을 우리한테 의논하러 온 거란 말인가? 참 별의별 일에 신경을 쏟는군."
"으... 맞아."
제갈사는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 킬킬거리던 제갈사가 말했다.
"좋아. 그럼 검마가 서씨 가문을 조사하는데 대략 석 달 정도가 걸린다고 잡고 네 녀석은 그 때까지 가능한한 힘을 키워두는 게 좋겠군."
"알겠어."
"우리는 무영문을 돕겠다. 너는 그 당산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를 찾아가 봐. 현재 시점에서는 말 그대로 꼬맹이겠군."
파밧
나는 축지법을 써서 사천당문으로 향했다. 사천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기에 대략 사흘 정도는 꼬박 술법을 전개해야 했으며, 복잡한 축지법의 법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것 같기도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백 번씩 쓰다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사천당문의 근처에 도착해서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에 근처의 언덕에서 당문을 내려다보며 들어갈만한 틈새를 살폈다.
' ... 당산. 그 녀석은...'
당산의 말에 따르면 그 놈은 사천당문 전체에 어마어마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 원한은 내가 납득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가 전체를 학살한 행동은 결코 옳다고 볼 수 없다.
나는 당산의 설명에서 들었던 대로 사천당문의 분가와 외당식솔들이 거처하는 장소를 찾았다. 화려한 사천당문의 건물에서도 꽤 뒤쪽의 후미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허름한 건물들 투성이였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안에 흙탕물과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은신술을 써서 내부로 스며들면서 당산에게서 들었던 조그마한 움막을 찾았다. 산야쪽으로 향하는 오솔길 옆에 지어진 그 움막에는 나이 든 노파가 입을 오물거리며 방망이로 씨앗을 쳐서 골라내고 있었고, 웬 꼬마아이가 움막 안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노파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없이 움막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움막에 누워있던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당산(唐傘), 맞지?"
나이는 현재의 '나'와 겨우 서너 살 정도 차이날 법한 꼬맹이. 나보다 어리긴 했지만 어쨌든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건 사실이다. 내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자, 당산은 휙하고 내 쪽으로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넌 누구냐?"
"나는 백웅이다."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털썩 앉았다.
"이익."
당산은 그러자 품 속에서 연막탄을 꺼내서 급히 바깥으로 던졌지만, 나는 이미 내력을 이용해서 강기막을 쳐 둔 상태였으므로 연막탄은 힘없이 튕겨나왔다.
"이 안에서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아. 저 노파한테도."
"빌어먹을!! 날 죽일 셈이냐."
당산이 악에 받쳐서 외쳤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널 죽이는데 수고스럽게 이럴 필요가 있겠냐? 괜히 연기하지 말고 대화나 하자."
"......"
그러자 당산의 표정이 싹 바뀌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당황한 척 하던 게 마치 거짓말같았다.
"엄청난 고수같긴 하네. 내가 하독(下毒)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나는 만독불침이니까."
역시 방금 전에 당황한 척 하던 건 내 빈틈을 유도하고 미리 풀어둔 독이 효과를 발휘하는 때까지 시간을 벌려던 것이다. 당산 본인의 말대로 어린 나이인데도 무척 교활하고 영리한 놈이었으며, 이미 저 나이에 당문 중급무인 수준의 용독술을 터득한 듯 했다.
나는 당산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사천당문의 모든 놈들을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다는 걸 알고 있다. 네 나이 때 너는 사천당문 가주와 부인들 모두 사지를 찢어서 몸을 동앗줄로 꿰뚫어서 빙빙 차륜으로 돌린 다음에 젓갈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들었지. 덤으로 그 젓갈은 너와 동년배의 본가소생들에게 억지로 먹이고 싶다던가."
그러자 당산이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이야, 뭐야?! 너 독심술사?! 그 생각 평소에 많이 하는데."
"......"
참 내가 입으로 말하고도 민망할 정도로 끔찍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50년 후의 당산은 실제로 저 상상력을 실천으로 옮겼다. 실제로 사천당문은 멸문했고 핏줄들은 모두 당산의 손에 돼지먹이가 되었다. 아무리 원한이 크다고는 해도 무시무시하게 독랄한 놈이었다.
' 이 자식을 정말로 동료로 만들어도 좋을까?'
키우기만 하면 미래의 절대지경급 동료가 한 명 늘어나는 셈이지만 껄끄럽다.
그러나 눈 앞의 당산은 제갈사와는 다른 유형의 광인(狂人). 제갈사의 광기는 내 목적과 그럭저럭 합치하는 면이 있었기에 내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산의 광기는 핏줄을 향한 증오였으며 원한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응하는 성질이 있었기에 내가 통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다만 나는 50년 후의 당산에게 그를 동료로 받아주겠다고 약속해버린 상태였다. 이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당산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래. 일단 한 번 키워본 다음에 판단해도 되겠지.'
나는 망설임을 지우고 당산에게 말했다.
"나는 미래의 너에게 부탁을 받고 왔다. 너를 내 동료로 하기로."
당산은 냉소를 지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동료라니 꿈꾸는 소리 하는군. 날 죽이든가 꺼지든가 둘 중 하나만 하셔."
"이거나 받아."
나는 당산에게 흑요석을 던졌다. 당산은 경계하면서도 흑요석을 잡아챘고, 나는 그 순간 그에게 기억을 전송했다.
화아악
"......!!"
당산은 흠칫 놀라며 내 기억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란 듯 환희에 떨며 소리쳤다.
"흐하... 하하하... 정말 그런 건가?! 굉장한걸!"
"이제 납득했나?"
"크크크. 크크크크크."
그는 실성한 듯 괴소를 흘리다가 말했다.
"나한테 이 기억을 보여줬다는 건 당신도 사천당문의 멸망에 동의했다는 걸로 알아도 되겠지? 아주 좋아! 크하하."
"... 그래. 하지만 조건이 있어."
"뭐지?"
"넌 미래에 별다른 죄없는 무고한 사천당문의 무인도 모조리 학살했다.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방법으로."
나는 그를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네 원한과 직결되어 있는 주범만을 처치해라. 쓸데없는 학살을 일으키지 마. 그게 바로 너를 동료로 만드는 내 조건이다."
"... 뭐, 그렇겠군. 당신은 보기보다 의협(義俠)이니까."
당산은 눈빛에 광기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날 더러 뭐라고 할 자격이 있나? 없는 것 같은데!"
"뭐라고?"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복수했어. 뒷처리를 단순하게 끝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당신도 학대받은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줬단 말이지."
"......!!"
나는 흠칫했다. 당산의 말대로 나도 학대자들에게 복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을 자제하라고 해봤자 모순된 말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당산이 처음으로 편안하게 호감가는 미소를 지었다.
"뭐, 난 그래서 당신에게 호감이 가긴 하네. 동질감이 느껴져."
"그건..."
하지만 이건 내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지나간 전생 속에서 내가 소을촌의 촌장일가를 학살했던 과거는 무슨 수를 써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원죄가 드러나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고 당산이 말했다.
"백웅, 우리 솔직해 지자고. 나와 당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학대받고 약탈당하며 살아왔지."
"뭐..."
"나는 사천당문이 적이었고 당신은 소을촌 촌장일가가 적이었지. 나는 복수할만한 재능이 있었고 당신은 그럴 재능이 없었다는 것 뿐 아닌가? 당신에게 나와 같은 천재적 재능이 있었다면 언제고 같은 일을 했을거야. 실제로도 당신은 해 버렸고."
"......"
"난 당신이 마음에 들고 존경스러워. 입발린 소리 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잖아? 후후. 아주 통쾌해!"
나는 당산에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없다.
"백웅, 알다시피 난 당무극의 자식이 아니고 당문 핏줄도 아냐."
당산의 말이 이어졌다.
"내 아버지는 군소방파의 무인이었지만 당무극의 독에 살해당했고, 내 어머니는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독으로 죽어가는 앞에서 당무극에게 강간당했다. 그 후에 강제로 첩의 자식으로 당문에 들어와서 본가소생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지. 뭐 당신도 소똥에 강제로 얼굴을 비벼지는 고통을 겪어봤으니 내 마음고생을 이해할 거라고 믿어."
"... 음."
그 경험은 공유하고 있는 셈인가.
"내 어머니는 지금도 당무극 놈한테 심심하면 능욕당하는 중이고, 난 어제도 그새끼들한테 좀 얻어맞고 와서 삭신이 쑤셔서 누워있었다고. 크흐흐흐 쓰레기같은 인생 아닌가? 하필 복수할 놈이 오대세가 가주라서 복수하기도 힘들어."
"......"
"아마 내가 미래에 절대지경에 도달한 이유는 초절정고수인 그 놈을 쳐죽이기 위해서였겠지."
이죽거리던 당산이 자신의 두 팔을 들자 온 몸에 타박상이 있는 게 보였다. 나처럼 자라오면서 숱하게 얻어맞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당문소생에게 얻어맞으니 나보다 더 처절하게 괴롭힘당하고 있으리라. 게다가 부모의 원한까지 겹쳐있으니 수십 년동안 얼마나 처절한 살의를 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웅, 제발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 줘. 난 지금 굉장히 가슴이 뛴다고.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산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당산의 간절한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커다란 죄책감이 몰아닥쳤다.
' 난 대체 과거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새삼 내가 과거에 저지른 학살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태어나서 받아왔던 모든 괄시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미친듯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결국 금만재의 두 눈알을 뽑아버리기까지 했다.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지나고보니 그게 얼마나 참혹한 짓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빌어먹을...!! 내가 그런 짓을 했다니.'
너무 후회스럽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나? 정작 내 과거사는 당산만큼 처절한 원한도 아니었다. 그저 좀 촌장일가를 때려주고 혼내주면 그만일 일이었는데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해서 학살을 벌이고 말았던 것이다.
당사자들 앞에서 몇 번이고 자살하면서 사과하고 싶다. 금만재 앞에서 내 눈알을 뽑을 각오도 있다.
하지만 이제 속죄할 방법은 없다. 그 때의 전생은 이미 내가 천암비서로 반복하면서 덮어씌워졌고 내 기억에만 남아있다. 정작 학살당한 본인들도 지금은 멀쩡하게 소을촌에서 살고 있다. 천암비서의 전생능력이란 그런 것이다.
원죄의 기억은 오로지 내게만 전승된다.
그럼 나는 어떻게 이 후회와 죄책감을 속죄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나 혼자만 영겁토록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간단 말인가?
"......"
나는 순간적으로 천암비서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설령 이 천암비서가 직접 내게 파멸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해도, 전생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는 그 업(業)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지금보다 전생을 거듭하게 되면 더욱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겨날 것이고 나는 계속해서 마모되며 파멸하기 시작하리라.
' 그래서였구나...'
나는 제갈사가 가능하면 빨리 전생을 끝내야 한다고 했던 과거의 말을 떠올렸다. 왜 그 말을 했는지 당시에는 의아했었는데, 지금 당산과 이야기를 하며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 내 정신력은 결코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인과율이 쌓이며 내 정신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수백 회씩 전생하면 힘이 무한정 쌓이긴 하겠지만 결국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아직까지 인간인 상태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전생횟수를 줄이는 것만이 방법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죄를 피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절실하게 승리를 염원하게 된다.
만신을 파멸시키면서 이 전생을 끝내는 것 -그건 동시에 나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좋아."
나는 당산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 노파를 목갑 안에 집어넣은 후, 사천당문 내부로 침투했다. 또한 당산의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별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구해서 목갑에 집어넣었다.
당산과 그 가족들을 장령곡에 데려다주자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백웅. 이제 슬슬 현이와 함께 천계에 수기공양을 하러 가라. 축복을 받고 나서 천우진의 도움을 받아서 전욱의 동상에서 음신지력을 흡수하면 딱 적당할 거다."
"알았어. 그런데 어떤 축복을..."
"당연한 거 아니냐?"
제갈사가 씨익 웃었다.
"그 녀석의 축복을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