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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610화 (609/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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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24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 잘까."

나는 멍하니 외양간 천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실제로는 내공이 극치에 도달해서 일부러 수면을 할 필요도 없었지만 괜히 드는 생각이었다. 지난 생, 실제 체감으로는 방금 전까지 신격들의 아수라장을 겪다가 오니 정신적인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여기서 좀 쉰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개벽천지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는 이것저것 신경쓰지 않고 누워서 잠이나 푹 자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건 해놓고 쉬자."

내가 쉬려고 하면 한도끝도 없이 쉴 수 있다. 어찌되었든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인 비등과 전생수단인 천암비서만큼은 얻어둬야 안심할 수 있다. 나는 약해진 마음을 잠시 추스르고는 뛰어서 천암비서를 얻으러 갔다.

그리고 천암비서를 얻은 후에 바로 비등을 얻으려고 산동까지 달리려다가 멈칫했다.

체력을 좀 아끼는 게 좋지 않을까?

'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나는 50년 후의 망량이 전해준 상급술법 중 하나인 축지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축지법은 원래 상급 술수라서 내 술법수준으로는 시전할 수 없었지만 망량이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준 덕분에 불완전하게나마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천우진이나 상위술사들처럼 자연스럽게 쓸 수는 없었고 제약이 꽤 붙었다.

나는 수인(手印)과 주문을 외우며 고도의 집중을 시작했다. 그렇게 약 일 다경 정도 정신을 집중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사삿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풍경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땅을 접어서 이동하는 듯한 가공할 속도였으나 정작 내 몸은 물리적으로 달려서 이동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축지법을 썼고, 술력이 다 떨어질때 쯤 축지법을 해제했다.

"휴우."

이 정도면 대략 백오십 리를 이동한 걸까? 하지만 체력과 기력은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막대한 내공을 이용해서 무한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산동까지 달리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술법으로 체력을 아끼고 싶었다.

' 그리고 겸사겸사 술법 숙련도도 높이고 말이지...'

지금은 다소 편법으로 축지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원래의 축지법보다 훨씬 시전시간도 오래 걸리고 제약도 많고 이동거리도 짧다. 하루빨리 중위나 상위술법수준으로 올라가야 축지법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나는 축지법을 써서 한참동안 산동을 향했다. 신법으로 그냥 달리는 것보다 훨씬 느렸지만 술법의 수행이라고 생각하며 술법을 펼쳤다 쉬기를 몇십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만 하루동안 죽어라 이동하자 겨우 산동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산동성 내부로 들어와서 비등을 얻은 후 즉시 동영으로 이동해서 흑요석을 한주먹 캐서 중원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대뢰옥의 지하로 들어가서 달의 짐승과 전투를 벌여서 놈을 쓰러뜨렸다.

쿠궁

' 확실히 좀 강해진 건가?'

나는 달의 짐승을 쓰러뜨리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내 동작에서 자잘한 빈틈이나 낭비가 크게 사라진 걸 느꼈다. 역시 지난 생에 이청운에게서 미친듯이 뇌신류 무공을 사사한 효과가 나타난 듯 했다. 나는 대충 검을 집어넣으며 목갑, 나인성본전, 쌍검을 챙겨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황연 대장군을 포함한 포로들을 비등에 집어넣고는 이족화되어있는 자들을 잘 살펴보았다. [흉신의 축복]을 받아서 현재 몸이 완전히 새까맣게 변해있는 자들은 변태가 진행중이었는데 나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었다.

' ... 인신공양에 적절하다고 했지.'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제갈사가 내게 조언해주길, [흉신의 축복]을 받아서 이족으로 변화하기 전인 놈들은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자 제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신공양 의식에 바친다면 꽤 높은 값을 쳐주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부하로 삼지 않을거면 그냥 [옛 지배자]나 삼황오제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조언을 들었었다.

"......"

하지만 역시 눈 앞에 놔두고 봐도 영 내키지가 않는다. 어쨌든간에 이들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셈인데 이들을 죽여서 공양하는 게 옳은 걸까?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게 썩 좋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마저 비등에 집어넣었다.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들을 제물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음으로 혈도단이 있는 곳으로 향해서 놈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게 몇 번째 도살인지는 몰랐으나 아직까지는 악당을 벌하는 쾌감이 온전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조금 무감각하게 죽이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스걱!

스칵!

내 검강에 한꺼번에 목이 다섯 개씩 베여서 날아갔지만 내 얼굴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 으...'

역시 그렇다. 아무리 악당이라고 하지만 같은 놈의 목을 여러 번 베면 질리게 마련이다. 너무나 참혹한 생각이긴 하지만 내게는 현실이었으므로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공포에 떠는 해적들을 쳐다보았다.

"음... 너희 자살하지 않을래?"

"뭐... 뭐라고!!"

"할복은 안 해도 되고 손목의 동맥을 끊어서 출혈사 하는 게 어떨까? 그렇게 죽으면 그리 아프진 않을텐데..."

해적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 마라!! 죽여버려!!"

해적들은 역시나 실력차를 모르고 금세 도발당해서 나를 공격했다. 나는 해적들이 무식하고 겁없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검을 들어서 놈들을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실력이 있었다면 실력차를 깨닫고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했을테고 그건 꽤 꺼림칙한 느낌이었을 게 분명하다.

퍼버벅

나는 대충 죽이고는 서문혜와 일행들을 풀어주었고, 나머지 잔당의 처리를 서문혜에게 맡겼다. 예전과 달리 서문혜에게 꽤 많이 맡긴지라 학살이 끝난 후 서문혜는 꽤 지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녀에게 내공을 이용해서 운공요상을 시켰다.

우우웅

"가, 감사합니다 소협."

서문혜가 내게 포권했지만 나는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여태까지는 서문혜가 우리 전력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저 검마의 딸을 구출한다는 느낌으로 혈도단 토벌에 임했다. 하지만 서문혜는 미래에 나인교주의 빙의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며, 그녀에게 뭔가 엄청난 신화적 비밀이 숨어있다는 것도 알게 된 상태이다. 더 이상 그녀를 부외자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서문혜에게 흑요석을 줘야하겠지만...

' 과연 그게 맞는 일일까? 나조차 학을 뗄 정도로 가혹한 이 여정에 반강제로 동참시켜도 지금의 그녀가 납득할 수 있을까?'

23번째 생에서 나인교주의 빙의를 겪어봤던 서문혜는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고 뭘 속죄해야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수라의 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의 서문혜는 그저 무영문의 금지옥엽이자 소문주로써 그저 여자무림인에 불과하다. 무공의 높낮이를 떠나서 그녀가 과연 흑요석으로 드러나는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서문혜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서문혜의 진심을 여러차례 확인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부숴지는 게 우려되어서였다. 나는 결국 그녀에게 당장 흑요석을 건네주지 못하고 손을 꾹 말아쥐었다.

"... 아니오."

일단 검마와 이야기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는 혈도단의 토벌이 끝나고 전리품을 모두 챙긴 후 수요의 유적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요의 유적에서 얻을만한 걸 모두 얻고는 백련교의 성련재배지에서 성련을 몇 송이 따서 목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공동산의 삼황내문을 얻고 마지막으로 태경촌에서 은빛 봉황조각을 얻어냈다.

' 오륜서는 뭐, 나중에 얻을까.'

사사키 코지로 정도는 언제든 패줄 수 있으리라. 오륜서가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쪽에서 잠시 관심을 껐다.

그리고 망량이나 제갈사에게 찾아갈지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꿔서 검마에게로 갔다.

아무리 책사진의 의견이 좋아도 이 문제는 당사자와 먼저 얘기를 해야하는 게 도리에 맞다.

검마를 만나서 그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흑요석을 줘서 기억을 전송하자 검마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

검마는 말 그대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억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지 눈을 흡뜨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서문혜가 불안해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아버님?"

"......"

검마는 크게 고뇌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혜아야. 바깥으로 나가있거라."

"알겠습니다."

서문혜가 문을 닫고 바깥으로 완전히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 검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백웅... 고초가 많았군. 그리고 지난 생에 끝까지 내 딸을 돌봐줘서 고맙네."

"......"

나는 겸양이나 인사치레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 23번째 생은 막바지까지 험난하기 그지없는 모험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몇 마디 말로 그 감상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었기에 나는 입을 떼지 못했고, 검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망량, 제갈사를 거치지 않고 내게 먼저 와줘서 고맙네. 아버지로서의 내 입장을 이해해 준 거겠지."

"말하기 싫으시다면... 굳이 여쭙지 않겠습니다."

"아니. 당연히 자네는 알아야 하네. 자네야말로 전생자이며 모든 진실을 알아내어 신들을 파멸시킬 자이기에!"

검마는 탄식성을 흘리고는 차를 크게 들이켰다. 꽤 뜨거운 차였는데 현재 그의 속이 더 타들어가기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검마가 잠시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혜아의 모친... 내 아내 서미령(徐美玲)은 무척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이었네. 강호인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나와 함께 했으며, 나는 청년시절에 이미 그녀와 내가 서로를 좋아하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결혼했네."

"그랬군요."

"허나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어. 잦은 병치레 때문에 탕약을 수 차례 먹고 영약으로 기력을 보전했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네."

"......"

"그녀에게 무영문의 비전내공까지 전했는데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지..."

선천적으로 너무 기가 약한 자는 그 어떤 영약이나 내공을 취해도 그 상태가 호전되지 않게 마련이었다. 그런 자들을 치유하려면 내가 먹었던 천년설삼 정도는 먹어야 평범한 신체가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천년설삼정도 되는 절세의 영약은 결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사파의 지존으로 떠오른 무영문이라 해도 거기까지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나는 혜아를 강하게 키우기로 결심했네. 본디 무림세가의 여식에게는 진신무공을 물려주지 않고 뛰어난 데릴사위를 들여서 무가(武家)를 잇는 편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네. 혜아가 완전히 무영문의 후계자로 거듭날 수 있게끔 신경써서 혹독하게 무예를 가르쳤지. 어리광도 거의 받아주지 않았고 여인의 혼기 나이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 젊은 나이에 절정고수의 경지에 이른 거군요."

지금까지 내가 모험하면서 너무 엄청난 자들을 많이 봐 와서 실감하지 못했으나 서문혜의 나이에 절정고수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중원무림에서 찾기 힘들었다. 서문혜는 중원의 무수한 후기지수 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서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생각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무영문만을 계승하기엔 그걸로 충분했지. 허나 바로 그 때... 혜아가 난데없이 실종된 거였네. 나는 자네가 찾아오기 직전까지 마음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지."

나는 검마가 서문혜에게 지니고 있는 애정과 집착을 알 것 같았다. 외동딸이 무림에서 우뚝 서서 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할까? 내가 착잡한 심정으로 검마의 말을 듣고 있자 그가 말했다.

"허나 나는 자네의 기억을 알게 되니 의문이 생기는 것일세..."

"의문이요?"

"방금 말했듯, 내 아내 서미령은 무가의 여인이 아니었네. 하남성 고위관리의 귀한 딸이었긴 하지만 결코 핏줄상으로 특이한 점은 없었어. 그런데 어찌하여 내 딸이 치우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존재와 연관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으음."

역시 여기에서 막히는 건가.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검마에게 말했다.

"혹시 무영문의 무공이나 시조가 치우와 연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고 생각되진 않네... 자네가 원한다면 즉시 우리 무영문의 역사를 기록한 서책과 무공서를 모두 보여주지. 허나 무영문의 시조는 그저 강호의 안위를 염려한 정의로운 은거기인이었을 뿐 신화적 존재와는 관련 없다 생각하네."

"그렇습니까."

무영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종사인 검마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더 볼 필요도 없다. 무영문의 시조는 정말 치우와 관계 없는 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하지만 그럼 어째서?'

왜 하필이면 서문혜에게 백발이 나타나고, 나아가서는 치우와 관련되어 상위투선조차 몰아붙이는 무시무시한 육체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나는 고민했지만 역시 답이 나오지 않아서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하지만 이 답을 알지 못하면 그녀는 앞으로도 위험에 빠지게 될 겁니다."

"알고 있네."

검마가 무거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다가 말했다.

"백웅. 내게 시간을 주게. 처가인 서가(徐家)의 내력을 무영문의 전력을 다해서 조사하겠네. 그 선조 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두 알아보겠네."

"알겠습니다."

나는 검마에게서 물러나와서 곧장 망량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망량에게 기억을 전해주자 그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24번째라니... 당신은 언제 그렇게 많은 삶을 산 거요?"

"그것보다 망량. 제갈사를 설득하러 가려는데 같이 좀 가 주시오."

"알았소."

파앗

나는 망량을 데리고 제갈사가 있는 장령곡으로 향했다. 제갈사는 내가 망량과 함께 있는 걸 보자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전면으로 나왔고, 나는 제갈사를 설득해서 흑요석을 받게 만들었다.

제갈사는 흑요석으로 기억을 계승하자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젠 어쩔건데?"

"... 일단 검마가 서씨 가문에 대한 조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릴 거야. 조금이라도 서문혜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

"그 다음엔?"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암천향(暗天鄕)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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