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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공공은 달아나려는 듯 자신의 팔을 허우적대며 공간을 찢어서 '문'을 만들어냈지만, 여와가 한번 노려보자 그 문은 곧장 닫히고 말았다. 공공이 깜짝 놀랐다.
[ 아니?!]
퍼벙
[ 크악...]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 이미 공공은 여와에게 학살당하는 처지였다. 힘의 격차도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장소의 이점도 저쪽에 있었다. 공공은 결국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내 몸에서 영체를 빼서 날아갔다. 사도인 나를 버리고 본체만 살아남기로 작정한 것이다.
파밧
공공의 영체가 어디론가 사라지자, 나는 내가 만신창이가 된 채 허공에 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의 통제권은 되돌아왔으나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에 나는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여와가 진언을 한 마디만 외우면 나는 속절없이 터져죽으리라.
[ 도망쳐 봤자지. 공공...]
비웃듯 허공을 쳐다보던 여와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인간. 너는 영원히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영겁토록 업화에 불타게 되리라.]
담담하게 선고하는 말에서는 별다른 증오나 적의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당연하게 앞으로의 내 신세가 참혹하기 그지없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와는 내가 알고 있는 걸 모조리 다 뽑아낸 후에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차마 따라잡을 수도 없는 가혹한 신벌을 내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각오했던 바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 이미 제갈사, 망량과 다 얘기해뒀던 것이다. 나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끼면서 손을 들었다.
"여와여. 한 가지만 여쭈고싶은 게 있습니다."
여와는 내 질문에 흥미가 생긴 듯 대꾸했다.
[ 무엇이냐?]
"인간은 결국 구원받지 못합니까? 위대한 옛 존재가 회귀하는, 계시의 그 날 인간종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
의외로 핵심을 찌른 질문이었는지 여와는 멈칫거렸다. 여와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선별해서 구원하도록 되어 있지. 그것이 바로 우리 삼황오제가 너희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다.]
"어떻게 선별해서 구원한다는 겁니까?"
[ 명계(冥界)가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건가.]
뭔가 중얼거리던 여와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 더 이상 대화할 이유는 없다. 그럼 잘 가거라.]
나는 이제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대화할 이유가 없다고 여와가 선언한 이상, 말로 할 때는 지난 것이다. 이렇게 또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어쨌든 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 제기랄...'
할 수만 있다면 좀 느긋하게 수련하면서 스스로를 다잡고 싶었는데 갑작스럽게 무수한 일이 산사태처럼 덮쳐온 느낌이다. 나는 속으로 푸념하면서 외쳤다.
"멸망의 때에 흐르는 성좌(星座)여! 나, 그대의 힘을 빌리노니, 다가올 천년의 때를 경배하노라!"
흉신의 주문!
하지만 나는 주문을 외우면서 주문의 힘을 상대에게 발사하지 않았다. 이건 제갈사가 내게 가르쳐 준 마도의 기법으로, 주문을 영창해서 그 힘을 해방하기 전에 술사가 임의로 힘을 가둬두는 방법이었다.
' 일단 멈추고.'
배교비기(拜敎秘技)
정주일경(定呪一境)
이 배교비기를 쓰는 이유는 보통 술법의 응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유파는 다르지만 배교 외에 다른 술법유파에도 비슷한 응용기술이 있었다. 다만 내가 주문의 해방을 도중에 멈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대상은... 나다!!'
내 손이 내 심장을 거세게 쳤다.
콰과과과곽
다음 순간, 본디 흉신의 힘을 강림해서 적을 공격하거나 봉인하는 필살의 주문이 내게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여와는 내가 스스로 흉신의 권능을 뒤집어쓰자 황당한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온 몸이 혼돈에 녹아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양 손을 내뻗는다. 그리고 내 몸에 끼얹어진 유황같은 뜨거움을 이용해서 힘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제갈사의 말이 생각났다.
[ 잘 들어. 네가 전생(轉生)했을 때 인과율은 이어질 지언정, 너와 이어진 신격은 어째서 그 관계가 설정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 그러니까... 만일에 서왕모가, 우리가 짐작한대로 그 정체가 여와라면, 적어도 그에 필적하는 신격을 어떻게든 불러와야 해. 불행히도 그런 놈은 [옛 지배자] 중에서도 매우 적지...]
[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역시 네가 무명제사서로 밀림의 지배자를 불러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 존재는 굉장히 교활하고 까다로워서 소환이 원래는 불가능한 존재야. 나는 마도수법의 대가라서 어떻게든 해냈지만 너같은 초심자는 못 할거다.]
[ 그럼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지. 너와 전생하며 인과율이 이어진 증거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느냐?]
제갈사는 말했다.
매 전생마다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흉신의 주문 -바로 이것 또한 전욱의 사도로서의 권능과 마찬가지로, 흉신(凶神)과 나 사이에 인과율이 이어져 있는 증거라고.
그렇다면 나는 그 이어진 끈을 따라서 '말'을 걸 뿐이다. 그래 - 마치 13번째 삶에서 그 존재가 나를 불렀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 쪽에서 말을 건다!
우우우우
' 뜨거워!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나는 전신의 피부가 녹아들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냥 비명을 지르려니 성대가 막혀버려서 되먹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어떤 존재와 연결이 통하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심연의 어둠.
가장 깊고 거대한 자.
마치 용과 두족류, 인간을 합친 듯한 그 거대한 심연의 존재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보통이라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쳐버리는 게 정상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를 똑바로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대 또한 그걸 깨달았는지 지긋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내서 그에게 외쳤다.
[ 흉신이여! 나 백웅, 당신에게 칠요 중 수요와 금요를 바치겠소. 그러니 이 자리에 강림해서 여와를 없애 주시오!]
이윽고 대답이 간명하게 들려왔다.
알 았 다
휘오오오
우주 저편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혼돈이 불어닥치며 내 몸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어두운 그림자 세계에서 다섯 줄기의 빛이 솟아오르더니 오망성을 만들었고, 그 오망성에서 천천히 흉신이 자신의 몸뚱이를 뻗어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세계가 뒤틀린다.
황천의 밑바닥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불길한 소리와 함께 - 흉신은 이 자리에 강림했다.
물길을 헤치듯 공간을 뚫고 나타난 흉신은 엄청나게 거대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었다. 흉신은 말없이 회색 달 앞에 떠 있는 여와를 쳐다보았는데, 여와는 흉신과 눈이 마주치자 살의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흉신이여. 설마 필멸자의 소환에 응하다니... 놀랍구나.]
흉신은 조용히 웃는 듯 했다.
마치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 여긴 듯 했다.
[ 네가 진정 묵시의 용이라 여기느냐? 계시의 석판을 가지고 있다 하여 지나치게 오만한 게 아닌가?]
흉신은 그 물음에 조용히 대꾸했다.
[ 짐 승 의 왕 좌 에 쏟 은 대 접 과 같 은 것 ... 그 대 운 명 을 받 아 들 이 라 ]
파아아앗
흉신이 옆에 끼고 있던 석판이 환한 빛을 발했다.
[ 으으...]
그 순간 여와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고, 감히 흉신을 먼저 공격하지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예전에 흉신이 황궁의 옛 지배자를 손쉽게 쳐죽였던 힘이 저 석판에서 비롯되는 거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 저건 대체 뭐지?'
여와는 이 아공간이 자신의 소유임에도 흉신을 어찌할 수 없어서 발만 구르는 기색이었고 흉신은 그런 여와를 어떻게 공격할지 수단을 고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문득 내 몸이 크게 다쳐서 이대로라면 생명활동이 끊길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 ... 빌어먹을, 그런 생각 할 때가 아니군. 조금이라도 더 살아야 해.'
나는 어차피 아수라장이 된 김에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흉신과 여와가 싸워서 누가 이기든간에 인간계는 멸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결정한 순간 전욱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우우우우
지금까지 감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던 전욱의 [시간제어] 권능이 발동되며 내 몸이 유황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상태였다가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와 동시에 정신의 머나먼 저편에서 거대한 외침이 들리는 걸 느꼈다.
[ 네놈 필멸자! 감히 내 힘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다니...!!]
나는 그 외침이 전욱의 것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눈 앞에서 흉신과 여와가 격돌하려는 걸 보기 직전인지라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전욱이 윽박지르든 말든 뭐가 무섭겠는가? 게다가 이미 내겐 중요한 것도 거의 남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피식 웃으며 전욱에게 말했다.
[ 전욱이여. 칠요 중 화요를 바칠 테니 이 왕의 연회에 참석하시겠습니까?]
[ 뭐라고?]
[ 두 번 묻지 않겠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 ... 좋다.]
전욱은 마치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듯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흉신에게 바친 칠요는 2개였고 전욱에게는 화요를 바쳤다. 뒷일 생각치 않고 신격에게 칠요를 주었으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기도 싫다. 설령 이 자리에서 살아나간다 하더라도 삼황오제나 흉신 어느 쪽에게든 사지를 찢겨죽으리라.
파아앗
다음 순간 전욱의 형상과 함께 만귀전이 이 공간에 떠올랐다. 전욱은 소환되자마자 흉신과 여와의 모습을 발견했고,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는 제왕의 제관을 쓴 상태로 두 신격을 차례로 돌아보더니 말했다.
[ 여와여. 흉신을 상대하려 하시오?]
[ 두말할 필요가 있는가. 여(余)를 도우게.]
[ ......]
전욱이 잠시 침묵하다가 흉신에게 말했다.
[ 흉신이여. 궁금한 게 있노라.]
흉신의 시선이 전욱과 마주쳤다. 전욱은 시꺼먼 혼돈의 얼굴을 움직여 흉신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 설마 그대는 계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건가?]
흉신은 한동안 침묵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 재 생(再生) 의 책 이 모 든 걸 심 판 하 리 라 .]
[ 그건 마도서인가?]
[ 무 릇 그 대 들 이 혼 돈 에 서 태 어 났 음 에 도 그 어 버 이 되 시 는 만 왕 의 왕 께 서 지 닌 힘 을 잘 모 르 는 구 나...]
비웃듯 중얼거린 흉신이 말했다.
[ 종 말 과 심 판 . . . 다 음 으 로 넘 어 갈 권 리 를 얻 으 려 할 뿐 이 다.]
[ ......]
전욱과 여와조차 흉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명백했다. 흉신은 삼황오제조차 모르는 종말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욱이 화요를 손에 치켜들며 말했다.
[ 영겁 속에 이 전투의 기록이 남겠구나.]
다음 순간, 전욱과 여와가 거의 동시에 흉신에게 달려들었고 흉신 또한 석판을 빛내며 공격에 맞섰다. 삼황오제 중 둘과 흉신이 격돌하자 눈 앞은 금세 빛으로 물들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나는 차원이 부숴지며 어디론가 튕겨져 날아가는 걸 느꼈다.
퍼버벅
"크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위산에 처박혔다. 바위산에 처박힐 때 워낙 가공할 힘과 속도로 부딪혀서 호신강기로도 완전히 몸을 보호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림자 차원에서는 벗어났지만 또다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얌전히 죽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다시 전욱의 권능을 빌려서 몸을 회복했다.
당장 흉신과 싸우는 게 바쁠테니 내게는 큰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갔다.
' 이제 어떻게 하지?'
제갈사의 계책대로 흉신을 불러내고, 덤으로 전욱까지 진흙탕에 끌어들이는 계획이 완료되었다. 원래라면 무명제사서로 북극의 [옛 지배자]까지 불러내서 난장판을 만들었겠지만 서왕모의 일격에 소멸되었으므로 저 정도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게 미래는 없다. 저들 중 누가 이기든간에 나는 신에게 잡혀서 영겁토록 고문당하던가 찢겨죽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어여삐 봐줄 리 만무했고 내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려 할 것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당장의 죽음은 어떻게든 피해내고 있지만 결국 남는 건 파멸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되었든 인간을 구해낼 수는 없다. 여와든 흉신이든 지상의 인간따위는 발톱의 때만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때였다.
"백웅. 오랜만이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을 부릅떴다.
"처... 천우진?!"
그랬다.
환신 천우진이 난데없이 내 등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는 남쪽 대륙의 그림자차원 근처인데다 지금까지 내 행적을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환신 천우진이 따라온단 말인가? 하물며 그는 천계에서 극형을 당했다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행적이 묘연했는데?!
천우진은 예전과 비슷한 복색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점이라면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었다.
내가 경악하고 있자 천우진이 말했다.
"놀랄 필요는 없다. 나는 진정한 환신(幻神)의 경지에 이르러 세계의 꿈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
"나는 천계의 눈을 속이고 108의 반고의 주에 들어가서 파괴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잘 해준 덕분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지."
"너..."
나는 한층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천우진의 환술은 천계의 모든 존재, 심지어 여와의 화신인 서왕모조차 속일 정도라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금세 나를 쫓아온 걸 보면 전 세계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된 듯 했다. 천우진 또한 술법의 초천재답게 50년동안 엄청난 경지에 이른 듯 했다.
천우진은 뒤편을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백웅. 역시 너답게 죽을 때가 되니 엄청난 짓을 저질렀군. 전생자니까 후환 생각 안하고 저질렀구나."
"......."
그렇게 말한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이제 곧 너는 도망칠 틈도 없이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 모두에게 쫓겨서 죽겠구나. 아직도 더 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느냐?"
"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더 하고싶은 일이 남아있느냐고?
당연히 많이 있다. 가능하면 계속 살아서 이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고, 칠요가 해방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종말이란 게 대체 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여유는 도저히 없을 게 분명했기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내 머릿속에 단 한가지가 떠올랐다.
"... 네게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그런가. 딱 적당하겠군."
스스스스
천우진의 몸이 빛에 휘감긴 안개처럼 변해서 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내 몸 또한 빛의 결정체처럼 변해서 휘날리기 시작했고, 나는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우진이 팔짱을 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역시 삼황오제가 강림하기 시작하는가."
쿠구구구
어두운 하늘에서 거대한 팔이 내려오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팔에는 무수한 수십만 개의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었고 장심에는 시뻘건 눈알이 달려있어서 괴기스러워 보였다.
"뭣!"
"저 손의 모양을 보아하니 제곡(帝?)이겠군. 이제 인과율이 엉망이 되어서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이거겠지. 널 잡으려 드는가보다."
빌어먹을!
삼황오제가 인과율을 무시하고 날 잡으려 들다니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수라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젠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스윽
하지만 천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고, 이윽고 우리는 그 팔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한 거냐?!"
내가 경악해서 외치자 천우진이 말했다.
"환신지경(幻神之境). 이 장소를 내 [꿈]의 세계로 치환했다. 꿈 속에서 꿈을 꾸는 연쇄의 구조를 깨지 않는 한 아무리 삼황오제라도 쉽게 내 술법을 깰 순 없다. 권능을 뻗어봤자 내 꿈에 삼켜질 뿐."
"......!!"
"술법의 창조자 태호 복희가 아닌 이상... 말이지."
도대체 이 놈은 무슨 경지에 이른 거지?!
내가 입만 벌리고 있자 천우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오래는 못 버텨. 이건 어디까지나 내 스승님의 권능을 빌린거라서 잠깐만 틈을 낼 뿐이야. 삼황오제가 진심이 되면 이 결계도 깨진다."
"그 말은... 네가 망량선사의 사도(使徒)가 되었단 소리냐?"
"눈치가 빨라졌군. 이야기하기가 쉽겠어..."
천우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내게도 앉으라는 듯 손짓했고, 내가 그와 마주앉자 천우진이 내게 술병을 던져 주었다. 내가 술병을 받아들고 냄새를 맡자 진한 매실주 냄새가 풍겼다.
"마셔. 내가 직접 빚은 매실주다."
한 모금을 마시자 청량하면서도 알싸한 매실향이 뱃속에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 훌륭한 천하의 명주같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왠지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마음을 진정시키자 천우진이 말했다.
"요점만 말하자면, 내가 술법사 최종의 경지인 환신지경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세계의 기록]에 한순간이나마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환신의 경지를 깨달아서 스승님의 꿈을 엿보아 본질에 접촉했고, 스승님에게 인정받아 사도의 위계도 얻은 거지."
"... 세계의 기록?"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천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파천의 가호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그래. 여러 번 설명을 들었지."
"파천의 가호는 망량선사의 권능이지만 동시에 이 대우주(大宇宙)에 직접 작용하는 거대한 법칙이자 축인 [세계의 기록]에서 직접 뽑아오는 권능이야. 그래서 인과율과 거의 대등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옛 지배자]조차 족칠 수 있는 원리지."
파천의 가호는 [세계의 기록]에서 비롯된다는 말인가?
내가 천우진의 말에 집중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네가 만일에 전생하게 된다면 과거의 나에게 [세계의 기록]을 읽으라고 조언해 줘. 그 단서를 얻지 못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니까."
"무슨 소리야? 네 재능으로 환신지경에 도달한 게 아니냐?"
"... 스승님의 자비였다. 내 혼자 힘으로는 수천 년이 지나도 도달할 수 없었다."
천우진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도저히 흉신의 손아귀에서 못 버틸 것을 직감한 스승님이 나를 [수호자]로 만들고자 일부러 단서를 주셨지. 하지만 내가 환신지경에 도달한 건 고작해야 몇 년 전의 일이고, 그나마도 상황을 바꿀 정도의 힘은 없었어."
"......"
"빌어먹을."
천우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자기 몫의 매실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우리가 삼황오제 중 하나라도 쓰러뜨릴 힘을 가지려면 네 녀석은 적어도 스무 번은 죽어야 할텐데 정말 감당할 수 있겠냐?"
나는 매실주를 마주 벌컥 들이키며 대꾸했다.
"당연히! 일백 번 고쳐죽기로 맹세했는데 뭐가 두렵겠어?"
"... 크크크."
천우진은 허탈하게 웃더니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가능하면 미호에게 힘을 주어서 그녀의 힘을 향상시키는 게 좋을 거다. 결국 서왕모를 쓰러뜨리는 단서는 미호가 될 테니까."
"그런가..."
"그럼 여기까지군. 슬슬 죽어줘야겠다."
엥?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천우진을 바라보았지만 천우진의 눈은 진심이었다. 놈은 손 위에 영혼을 날려버리는 낙혼부를 한 개 소환해 놓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네가 살 방법은 없어. 널 지켜줄 자도 없고 도망칠 곳도 없지. 천하의 모든 신격이 너를 노리고 있어서 자살한다고 해도 명계까지 쫓아와서 널 붙잡아 고문하겠지. 그럴 바에야 너를 편하게 죽여주는 게 낫다."
"그... 그건 그런데."
나는 왠지 답답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너한테 죽는게 왠지 찝찝하다고!"
"훗... 널 죽이는 이 순간을 오십 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새끼야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천우진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고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고, 사실 너를 죽이면서 동시에 영혼을 봉인해 볼 생각이다."
"봉인한다고?"
"그래. 내가 봉인술을 써서 네 전생을 막을 수 있는지 한번쯤 시험해보고 싶으니."
과연.
괜히 날 죽이려는 게 아닌 듯 싶었다.
하지만 왠지 천우진의 사심이 담긴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어서 불안한 눈으로 낙혼부를 쳐다보자 천우진이 말했다.
"그럼 잘 가라."
피쉿!
낙혼부가 내 미간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눈 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는데, 어렴풋이 천우진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 봉인이 안 돼?! 역시... 백웅 네 전생능력은...]
잠이 온다.
그것이 내 23번째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