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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서문혜와 함께 제천대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제갈사와 망량은 뛰어난 술사였으나 지금부터 싸울 판에 끼어들기에는 힘이 부족했기에 둘만 가기로 한 것이다. 당산은 아직까지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본거지에 머물기로 했다. 제천대성은 다시 태산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태산의 천제단에 도착했다.
잠시 후 제천대성이 태산의 천제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다지 큰 준비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나름대로 준비했습니다."
제갈사, 망량과 모든 계책을 하루동안 준비하고 왔다.
사실은 암천향에서 공공이 토요를 회수할 때 같이 가고 싶었지만, 공공은 묘하게 우리측과 선을 긋는 태도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암천향을 뚫는데 귀찮게 나를 대동하기 싫다는 기세가 역력했던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공공을 구워삶아서 토요로 향하는 길을 알아냈겠지만 그게 되지 않는게 아쉬웠다.
' 너무 촉박해... 이번 생은...'
나는 곧 안좋은 생각을 털고는 이를 악물었다. 우는 소리나 할 때가 아니고 현재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신에 제천대성에게 질문했다.
"삼장법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응?"
"음... 가능하면 제천대성의 과거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 요괴왕에서 대선(大仙)이 되셨는지를."
"하아... 그딴 게 왜 알고싶은 거야?"
제천대성은 불편한 기색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놈한테 과거사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취미는 없어. 사실 나는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도 않거든."
"윽..."
제천대성은 붙임성이 좋아보였지만 생각보다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보였다. 잠시 정색하고 있던 제천대성이 피식 웃었다.
"... 뭐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 그럼 간단하게나마 말해줄까."
"부탁드립니다."
"난 과거에 한번 천계를 엎은 적이 있었어.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엄청 센 요괴... 아니다, 불세출의 요괴왕이었거든. 천계에 올라왔지만 거의 대부분 내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말을 꺼낸 제천대성이 자신의 어깨 뒤편에 여의봉을 걸쳤다.
"근데 갑자기 천계에 끼어든 정체모를 놈 때문에 제압당하고 말았지. 잘 나갈 때는 옥황상제한테도 안 꿇렸는데."
"정체모를 놈?"
"......"
제천대성은 별로 그 일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나는 당나라의 승려 한 놈과 서방세계에 있는 경전을 가지러 멀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내가 천계에 범한 죄를 용서받는 대가로 치르는 고행이었지. 그 때 나와 동행했던 게 삼장법사다."
"그 삼장법사가 팔부신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팔부신중 중에서 누구인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제천대성이 말했다.
"놈은 스스로를 천인(天人)이라 했고, 팔부신중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자라 말했지. 그리고 놈이 갖고 있는 힘도 만만치 않아서 나는 놈과 그럭저럭 재밌게 여행할 수 있었다."
"천인..."
천인 삼장법사.
나는 그 칭호를 머릿속에 외워두었다. 그리고 제천대성의 말이 이어졌다.
"천축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놈한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경전을 천계에 가지고 온 댓가로 과업이 풀렸지만, 지상에 다시 내려와서 요괴왕으로 군림하기보다는 천계에서 계속 투선으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왜입니까?"
그가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왜일까?"
"그럼 그 경전은 어떤 경전이었습니까?"
"맞춰보시지? 궁금한 게 참 많기도 하구만."
나를 놀리던 제천대성은 킬킬대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과거 얘기는 이걸로 끝! 이제 가자구."
"... 네."
뭔가 이야기를 많이 해준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듯 했다. 그는 정확하게 삼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줬을 뿐이었다. 제천대성이 일단은 나를 동료로 받아들였지만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팔부신중 중에서 한 명이 삼장법사라면, 그는 틀림없이 당나라 때의 문헌이나 기록에 모습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그 기록을 찾아보고 행적을 들여다보면 팔부신중 천인의 힘이나 능력, 비밀을 캐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백릉산에 도착하자 구천현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백릉산에 도착하자마자 여동빈과 화룡신검이 형태를 바꿔 인간형태로 현신했고, 순식간에 장내는 대라신선들의 모임이 되었다. 구천현녀가 내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나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출발하죠. 반드시 반고의 주문을 파괴해야 합니다."
구천현녀가 작전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연등도인의 삼십삼천영롱보탑은 내가 해제하겠습니다. 그리고 운중자의 화룡신화주는 여러분이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기까지 뚫고 나면 내가 투선들과 싸울 거야."
제천대성이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아무리 나라도 투선 떼거지와 싸워서 이기기는 힘들겠지. 그러니까 그 동안에 너희가 진을 확실히 깨 버리거나, 내가 포위를 빠져나가서 서왕모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해."
그런 작전이구나. 나는 제천대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진소청을 필요로 했던거군.'
제천대성이 요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투선급의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서 틈을 내는거지, 천계신선들의 엄밀한 포위진을 뚫고 틈을 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나는 저절로 긴장이 되는 게 느껴졌다.
화룡진인이 말했다.
"그럼 가지."
스스스
우리는 이윽고 거대하게 변한 근두운 위에 다같이 올라탔고, 구천현녀가 신묘한 안개를 뿌려서 우리 모습을 숨겼다. 백릉산을 떠나서 천계의 상공을 비행하는 도중에 더러 신선과 영수들이 보였으나 그들 중 누구도 우리 모습을 알아채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근두운이 약 3백여 리는 되는 거리를 날았을까? 한참 왔을 때 저만치 지평선 맞은편에 가공할 기운이 끓어오르며 천둥번개가 몰아치며 폭풍이 휘도는 거대한 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렇게 흉흉한 기상상태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내가 내심 놀라고 있자 구천현녀가 말했다.
"저 곳이 바로 천계 곤륜산(崑崙山). 의식은 서왕모의 궁전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천계의 곤륜산은 하계에 있는 곤륜산과는 달랐다. 그 높이가 지상에서 보았던 그 어떤 산보다 높았으며 장중했고 인간이 등반하기에는 너무 까마득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산 전체에 뇌우가 휘몰아치고 있으니 제정신이라면 저 곳을 등반하지 못하리라.
제천대성은 근두운을 몰아서 곤륜산의 초입을 넘어서 금세 중턱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구름층을 두어 번 돌파한 높이에 도달했을 때 그는 갑자기 멈추면서 근두운을 해제했다.
타닷
제천대성이 골치아픈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성가신 놈이 있군."
"무슨 일입니까? 여기에 삼십삼천영롱보탑이..."
"아냐. 여기서 2백여 장은 더 올라가야 있어."
그렇게 대꾸한 제천대성이 말했다.
"천계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아저씨가 우리를 저격하려는 거 같아."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누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예(?)!"
후예(后?)라고도 불리는 전설의 궁수신이자 투선! 그는 상고시대에 상제 제준의 아들인 태양 10개를 쏘아 떨어뜨리기도 했으며 월궁항아의 남편이기도 한 존재였다. 게다가 내가 전생하면서 예한테 2번이나 맞아죽은 적이 있었기에 나는 그를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천계에서 가장 활을 잘 쏘며 제천대성조차 경계할만한 존재라고 하면 오로지 후예밖에 없는 것이다!
제천대성이 말했다.
"내가 잠깐 안 온 사이에 서왕모가 추가로 경비를 강화했는걸."
"당신이 예를 쓰러뜨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될 건 없는데, 저 아저씨가 몸을 빼면서 우리를 귀찮게 하면 굉장히 성가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예가 시간을 벌려고 하면 절대 단시간에 못 잡는다고."
"... 으음."
순수하게 무력으로 싸운다면 당연히 제천대성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예는 접근전이 전문이 아니라 궁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거리를 확보해서 견제한다면 그런 제천대성조차 쉽게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제천대성은 이윽고 별 수 없다는 듯 쩌렁쩌렁 외쳤다.
"예 아저씨! 거 잠깐 나와서 얘기 좀 해 봅시다."
스르륵
그러자 잠시 후 허공에 뜬 마차가 나타나고, 그 마차 위에서 거궁(巨弓)에 시위를 매기고 있는 예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는 싸늘한 눈빛으로 제천대성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왜 네 멋대로 진을 이탈해서 구천현녀와 다른 신선들을 데려온 거지? 서왕모께선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
"왜긴 왜겠소? 당연히 저 거지같은 반고의 주문을 부수기 위해서지."
"흥, 역시 그렇군."
예는 예상했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투전승불 미후왕. 네 녀석이 예전부터 천계에 복종하면서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나만의 의지가 아니오, 아저씨. 구천현녀께서 왜 서왕모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모르는 거요?"
그 말에 예가 힐끔 구천현녀를 바라보았다. 구천현녀는 예와 눈을 마주치며 차분하게 말했다.
"예 님. 서왕모야말로 천계 최대의 반역자이며 삼청을 소멸시킨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신선들을 잡아먹은 혐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제 명예를 걸고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길을 비켜 주십시오. 저희는 천계의 정의를 바로 세우러 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예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아!"
"......?"
"난 고대에 불로불사의 연단을 구하러 그녀의 궁전에 갔을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그래도 서왕모를 따르는 거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들 놀란 눈으로 예를 쳐다보았다. 예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서왕모는 모든 일이 끝나면 내게 항아를 되돌려 준다고 말했다. 절대 너희를 그냥 보내줄 순 없어."
"달에 유폐된 당신의 아내... 월궁항아 말입니까?"
"구천현녀. 당신이 정의라는 건 알고 있어. 당신 말대로 해야 천계도 인간계도 살 수 있겠지."
우우우웅
예의 활에 엄청난 기운이 모였다. 그는 거칠게 포효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내가 더 소중해!!"
투콰쾅
다음 순간, 엄청난 기세로 예의 화살이 쏘아지면서 날아들었다.
"이 망할 아저씨가!!"
제천대성은 여의봉으로 그 화살을 쳐내면서 동시에 예에게 달려들었는데,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제천대성의 신형과 예의 마차가 엄청난 속도로 광선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예가 껄껄 웃어대었다.
[와라 미후왕!! 너와는 진작 결판을 내고 싶었다.]
제천대성이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그렇게 처맞고 싶으셨어? 나이대접 해주니까 너무 나대는구만!]
그들은 이윽고 곤륜산 근처의 상공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겨루기 시작하는 듯 했다.
콰과과광
단숨에 곤륜산 서쪽의 하늘이 폭염으로 물들었다. 하늘이 불타는 광경을 보자 마치 예전에 교주와 여동빈이 겨루었던 그 때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들의 격전을 지켜보던 구천현녀가 탄식했다.
"큰일이군요. 두 분 모두 천계 투선중에서 내로라하는 자들...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겁니다."
"가세해야하지 않을까요?"
"... 아니요. 우선은 앞으로 가야합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연등도인의 삼십삼천영롱보탑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요."
파앗!
잠시 후 우리는 구천현녀의 이동술을 따라 천계 곤륜산의 상부로 향했다. 그러자 무지개빛 원이 수십 개나 겹쳐 있는 결계가 눈에 보였고, 그 결계의 주변에는 수십 개의 청색 보탑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