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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601화 (60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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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제갈사가 내게 계책을 설명하려던 그 때였다.

"그녀가 깨어났소."

나와 제갈사에게 강전길이 소식을 알리러 찾아왔다. 나는 제갈사와 한 번 시선을 교환하고는 지체없이 강전길을 따라서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누워있던 침상 앞으로 갔을 때, 나는 황망한 표정의 서문혜가 침상에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서문혜는 예전과 달리 백발이 아니었다. 도리어 윤기나고 새까만 흑발이었으며 전신은 환골탈태한 것처럼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색깔이 바뀌었는데도 그녀의 미모는 전혀 쇠하지 않았고 도리어 전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50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현재 그녀의 표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앉아만 있을 뿐이었고, 그 앞에는 화서명이 다소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태를 진단하려고 질문을 하는데 서문혜가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였다.

"서문혜 소저."

내가 그녀를 부르자, 서문혜가 그제서야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눈물을 주륵 흘렸다.

"백웅 님..."

그녀는 이윽고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파악한 제갈사가 슬며시 손짓을 해서 안에 있던 천하오대의원들과 시비들을 밖으로 끌어냈고, 이윽고 방 안에는 나와 서문혜만 남게 되었다.

"진정하시오."

"흐흑..."

나는 울고 있는 서문혜를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거렸고, 서문혜는 한참 후에나 진정한 듯 했다. 그리고 서문혜는 자신의 눈가에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전 모든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닌 뭔가가 제 몸을 그 동안 조종했고, 저는 의식 한켠에서 그걸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당신 탓이 아니오."

흉신의 후예가 그녀의 육체를 빼앗아서 전횡을 저질렀던 일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무력감을 전생경험으로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계속해서 그녀를 다독여 줬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진정되자, 서문혜는 과거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50년 전, 당신께서 사라지고 본거지가 다두왕국으로 옮겨진 후 저는 아버님을 따라서 칠대절학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본토에서 '주교'라고 불리는 존재가 나타나서 아버님께서는 그 자와 악전고투를 하신 끝에 동귀어진하셨어요."

"그 이야기는 들었소."

사람들은 다들 그 일을 대단한 일로 여겼다. 그 때까지 주교는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는 불사신의 괴물과 같았는데 검마가 동귀어진으로 처치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 때 저는 아버님을 도우려다가 너무 큰 부상을 입어서 혼절했었는데, 그 때 적들이 저를 납치해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눈을 뜬 것은 나인교의 본부였는데 그 곳에서 주교들이 저를 둘러싸고 뭔가 의식준비를 했었죠... 그들은 저를 수십 년간 유폐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나 꺼냈던 것 같습니다."

"의식?"

서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식에서 저는 인간을 뛰어넘는 상위존재가 제 육체를 빼앗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저항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나인교주'가 되었고, 그 와중에 나인교주가 저질렀던 악행을 저는 하나부터 끝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지금 당장 자살하고싶어요. 도저히 그 악행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차마 인간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한... 악마의 소행... 어찌 그럴 수 있을까요..."

익히 짐작할 만 하다. 나인교주의 '정신'은 흉신의 후예로써 최고위 이족이며 잔인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인간을 벌레로 여기는 그 놈이 인신공양, 살인, 쇠꼬챙이형 등등 잔학한 짓을 즐겼으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다.

"... 당신이 한 게 아니라고 말했소. 당신은 그저 육체를 뺏기고 정신 속에 갇혀있었을 뿐이오."

"속죄할 수 있을까요."

서문혜가 울먹이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이 아닌 누구든지간에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당신 또한 피해자요."

"......"

"다만 궁금한 게 있구려. 나인교주로 빙의했던 그 이족은 틀림없이 당신의 정신을 말소시키고 싶어했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정신은 그대로 유지되었소. 본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최고위 이족의 정신능력은 막강할 것이다. 원래라면 서문혜는 정신을 빼앗겼던 그 순간에 영혼째로 살해당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족이 치명상을 입고 제천대성의 손에 봉인당하자마자 원래 육체를 되찾은 것이다. 내 질문에 서문혜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나인교주는 제게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왔어요. 일방적인 질문에 가까웠지만."

"말을 걸었다고?"

"치우(蚩尤)가 어딨느냐, 치우의 존재를 느끼느냐, 너와 같은 자를 본 적이 있느냐... 이 3가지의 질문만 수백 번이나 반복하며 저를 괴롭혔어요."

"......?"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계속 모르겠다고 하니 어느 순간 그만뒀지만요."

치우?

여기서 치우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치우라고 한다면 분명히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거신족의 제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다만 그는 패배하기 전에 황제를 몇 번이나 때려눕혀서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고, 황제 또한 간신히 이겼다는 기록이 있었다. 현재는 축융족이 치우를 가둬서 봉인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 왜 지금 치우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뭐지? 치우와 서문혜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나는 일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서문혜가 준 이 정보는 굉장히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우연에 우연히 겹치지 않는다면, 내가 몇 번을 죽어도 얻을 수 없는 정보라는 게 확실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그 자가 완전히 물러난 것 같소?"

"네."

"무공은 쓸 수 있을 것 같소?"

"잘은 모르겠지만 예전과 달리 제 몸에는 힘이 넘칩니다. 무공도 높아졌을 것 같아요."

"다행이구려."

나는 서문혜와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약 한 식경 동안 좀 더 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가자 제갈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가 다시 들어가라는 듯 내 가슴팍을 밀쳤다.

"어딜 혼자 가? 이 멍청아."

"응?"

"시간 아까운 짓 하지 말고 서문혜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시험해볼 게 있으니까."

나는 제갈사의 말에 따라 서문혜와 함께 근처의 비경으로 향했다.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기암괴석이 가득한 천혜의 지형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제갈사는 서문혜를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서문혜. 지금 스스로의 내공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제갈사의 물음에 서문혜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고수일진대 왜 그걸 모르지?"

"방금 전 운기조식을 하고 기를 운용했는데 그릇의 경계가 사라져버려서..."

흠칫!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릇의 경계가?'

하지만 제갈사는 예상했다는 듯 히쭉 웃고는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당신 자신도 자신의 힘을 정확히 모르겠다는 거군. 원래 갖고있던 인간의 경락이나 기혈의 한계가 사라져 버려서. 기경팔맥도 사라졌지?"

"네..."

"그럼 시험해 봐야지."

제갈사가 턱을 까닥이며 절벽을 가리켰다.

"저 절벽에 모든 힘을 담아서 일격을 가해 봐."

"... 알겠습니다."

서문혜가 잠시 후 경공으로 천상제를 시전하며 몸을 띄웠고, 이내 무공술을 시연하며 빠른 속도로 절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윽고 서문혜의 팔과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콰콰콰쾅

수십 장의 절벽이 일격에 깡그리 뭉개지듯이 사라져 버렸고, 서문혜의 일섬에 담긴 충격파가 대지를 크게 가르며 전방으로 전진했다. 무려 수백 장이나 되는 범위를 파괴한 일섬은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것 같았고, 이윽고 지평선 근처에서 맹진을 멈췄다.

쿠르르릉...

얕은 지진이 일대에 울려퍼졌다.

"......!!"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이?!

도저히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위력이다!

대라신선의 전력을 다한 절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위력을 서문혜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지라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예상대로야. 진소청은 자신이 희생하면서 정말 많은 걸 남겨주었군. 나인교주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이런 건 결코 알 수 없었을거다."

"무슨 말이야?"

"서문혜는 특이체질 정도가 아니야. 그녀는 어쩌면 이 세계 신화의 비밀에 도달할 수 있는 거대한 단서일지도 몰라. 당연히 초상기인과도 연관되어 있을거고."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네가 전생한 다음에 해야할 일이 좀 더 늘어났다. 좀 있다 말해주마."

잠시 후 서문혜가 이쪽으로 되돌아오자, 서문혜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이 힘은."

제갈사가 그녀에게 대꾸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서문혜 당신은 육체능력만으로 호법사자와 호각을 겨룰만한 존재가 되었다. 그냥 내공없이 주먹과 발차기만 내질러도 호법사자의 강기막을 박살낼 수 있겠지. 그 육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보통 인간보다 수백 수천배는 강력해. 아마도 나인교주가 당신에게 빙의하면서 당신에게 존재하고 있던 잠재력을 끌어내 준 덕분이겠지."

"......!!"

"지금도 아직 전력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 이제야 막 힘을 쓴 것 뿐이니 익숙해질수록 더 강해질테지."

저게 전력이 아니라고?

내가 황당해하자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아까 속죄를 하고싶다고 했지?"

서문혜가 제갈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제갈사가 말했다.

"곧 큰 전투가 있을테니 백웅을 도와서 싸워. 그럼 다 용서된다."

"알겠습니다."

서문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되려 잘되었다는 기색이었기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막 사경을 헤매다가 일어난 사람한테 또다시 전투에 몸담으라고 강요한 셈인데 이렇게 쉽게 납득하다니.

제갈사가 말했다.

"그럼 바로 움직일까. 시간낭비할 때가 아니니."

"어디로?"

"신시(神市)로 간다."

그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십이율은 근 50년 동안 자신들의 영토를 지킬 뿐 거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잠잠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살아남기도 바빠서 신경을 못 썼지만 이제 네 생의 막바지가 다가오는 시점에서는 얘기가 달라. 직접 놈들의 본거지를 정탐하고 십이율의 상황을 알아내는 게 좋아."

"알았어."

파앗!

우리는 신시 근처로 비등을 써서 이동했다. 나는 아직까지 신시의 결계가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뭔가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크에에엑

키아악!!

"요괴인가."

이윽고 풀숲 여기저기에서 요괴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나는 놈들의 면면을 확인했는데 별로 강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서문혜가 주변의 요괴들에게 달려들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퍼버벅

"......"

서문혜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요괴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요괴들은 이내 학살당하는 게 싫은지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고 장내는 피칠갑과 고요가 남았다. 나는 아무리 센 요괴가 아니라지만 그 짧은 시간에 수백 마리의 요괴를 죽여버린 서문혜의 힘에 전율했다.

' 요괴의 초상능력이 아예 안 통하나...?'

요괴를 상대할 때는 요괴의 육체능력보다는 놈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 더 성가시다. 하지만 서문혜는 방금 전 그 어떠한 능력에도 방해받지 않고 다 때려잡은 것이다. 장내가 정리되자 제갈사가 말했다.

"결계는 있지만 여기도 정상은 아닌 것 같군. 본래라면 신시 근처에 요괴떼같은건 나타날 수 없으니."

"들어가 볼까?"

"위험을 감수할 만 해. 가자."

타닷

우리는 잠시 후 신시의 결계 근처로 왔고, 전시안을 이용해서 결계의 근간이 되는 부분을 뒤틀어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결계 안으로 진입하자 신시로 향하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하지만 그 구름다리 너머에는 다소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 신단수가 말랐어!!"

그랬다.

원래는 하늘 저편을 뚫을 것처럼 거대하게 치솟아 있던 세계수, 신단수가 예전의 위용을 잃고 크기가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그래도 웬만한 산맥보다는 커 보였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 줄기가 힘을 잃고 축 늘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제갈사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세계수라지만 흉신이 직접 인과율을 얻고 발호했는데 안 말라죽은 게 용하지."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여기에 왜 왔다고 생각하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십이율주는 예전에 뒈졌고 50년동안 세계수도 꾸준히 말라죽어온 거다. 이 정도로 십이율이 약해졌다면 눈치볼 필요 없어. 십이율주가 갖고 있던 목요를 찾아서 갖고 튀자고."

타다닷

우리가 구름다리를 건너서 안으로 들어갔지만 왜인지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사람이 없는 마을처럼 변한 듯 했다. 나는 예전 기억을 살려서 십이율주가 거처하던 집으로 향했는데 역시 누군가가 우리를 제재하러 오지는 않았다.

'왜 사람이 없지?'

수상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요기나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신시는 말 그대로 텅 빈 마을 같았다. 나는 제갈사를 돌아보았다.

"이런 상태일 거라고 예측한 거냐?"

"당연하지. 십이율이 평소에 마(魔)를 얼마나 견제하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거냐? 그런데 막상 흉신의 발호가 시작되니 이 오지랖쟁이들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지. 당연히 본거지인 신시도 멀쩡할 리가 없어."

"흠."

이윽고 우리는 십이율주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자,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차라리 적수로 삼사나 단의 일족이 튀어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공허였다.

"다 도망친 건가?"

"......"

제갈사는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게 주문했다.

"백웅. 여기까지 온 이상 할 수 없지. 전시안을 써서 목요의 위치를 찾아봐라."

"알았어."

"결계 바깥에서 칠요를 전시안으로 찾는 건 무리겠지만 안에서라면 가능할 거다."

우웅

전시안을 떠올려서 목요의 위치를 찾기 시작하자, 전시안은 머지않아 내게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목요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어디 있는데? 설마 저기 신단수에 있나?"

나는 들떠서 질문했지만 잠시 후 황당함을 느꼈다.

[목요는 현재 명계(冥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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