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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삼청이 살해당했다니!
삼청은 천계에서 가장 높은 존재들으로써 심지어 옥황상제조차 그들에 비하면 한 수 접어주는 자들이었다. 도교의 위격에서 단연 최상위로써 실존한다기 보다는 상징성이 강하다고 여겨질 정도였으며, 민간에서는 너무 위계가 높은 나머지 제대로 그들을 섬기기보다는 그들과 도교의 이념을 동일시하여 연구할 정도였다.
또한 그런만큼 나도 그동안 천계는 옥황상제를 필두로 삼청이 대원로의 역할을 하며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선이나 도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살해당하다니?!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문해 버렸다.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상노군(太上老君), 영보천존(靈寶天尊)이 모두 서왕모의 손에 소멸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닌지 화룡진인도 다소 안색이 창백해져서 입을 열었다.
"확실한가? 이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군."
"......"
구천현녀는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제가 그 사실을 눈치챈 건 그렇게 오래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요."
"우연한 기회라면?"
"화룡진인께선 항우(項羽)가 12개나 되는 성좌의 힘을 지니고 사망하여 천계로 올라왔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으실 겁니다."
구천현녀의 말에 화룡진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큰 일이었지. 그 자는 성좌의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맨손으로 명계의 사자조차 찢어죽였으니, 스스로 죽음을 거부하였지."
"......"
나는 듣다가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괴물을 한고조 유방은 무슨 수로 죽인 걸까?
"항우가 무슨 생각을 지니고 천계로 왔는지는 그 당시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계에 큰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해서 옥황상제와 삼청께 보고를 올리러 갔습니다. 너무 급한 일인지라 그 때 서왕모께 먼저 들리는 일을 생략했었죠."
"그렇지. 그대는 본디 서왕모에게만 보고를 올리게 되어있고 그 이상의 일은 서왕모가 처리한다고 알고 있소. 그분들을 직접 알현하는 건 서왕모 뿐이라고 들었소."
"맞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분들께 직접 고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구천현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제께서 거하시는 제석궁에 들어갔을 때 저는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사어(四御)의 좌(座)가 모두 공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어라고 함은 삼청과 옥황상제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었다. 옥황상제가 삼청보다 약간 처지기는 하지만 대개는 동격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화룡진인의 얼굴이 안좋게 변했다.
"그럴수가! 사어의 좌가 비어있다면 천계가 멸망하오."
"그렇습니다. 천계라고 하는 거대한 세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삼청과 옥황상제의 권능 덕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정말로 사어의 좌가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저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바로 시해술을 펼쳐서 그분들의 행적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삼청이 서왕모께 살해당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제 사건이 터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들이 살해당한 인과율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화룡진인은 그 이상 놀랄 수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담컨대 내 전생과정에서 화룡진인의 저런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다. 화룡진인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옥황상제도 소멸했단 말인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진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상제만은 그 이후로도 종종 천계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건재함을 스스로 드러내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석궁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만 상제가 어떤 상태이든간에 천계에 존재하는 건 틀림이 없습니다."
"......"
화룡진인이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옥황상제 또한 살해당하고 가짜가 둔갑했거나... 혹은 그가 서왕모의 공범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전면에 나서서 밝히려 하는 거지요."
단호하게 선을 그은 구천현녀가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제천대성과 여동빈께 했을 때 모두 협력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힘을 합쳐서 반고의 주문을 깨고 천계를 구해야 합니다."
"음... 알았소. 기꺼이 힘을 합치겠소."
화룡진인은 결연한 표정을 지은 후 여동빈을 돌아보았다.
"여동빈. 혹여 너를 감시하는 투선급 존재의 시선을 느꼈느냐?"
화룡진인의 질문에 여동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느꼈습니다, 스승님. 그 자는 과거에 제가 구천현녀의 밀명을 받은 후 줄곧 제 주변을 따라다녔습니다."
"누구인지 알겠느냐?"
"은신술법이 너무 뛰어나서 알 수 없었습니다."
"투선급 존재라고 추정하던데, 그 의문의 암살자가 얼마나 강한 것 같더냐?"
"......"
여동빈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어쩐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질적인 기운이라면 혹여 마기(魔氣)였느냐?"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곤륜이나 인계에서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힘이었습니다."
여동빈의 말을 들은 화룡진인이 팔짱을 꼈다.
"짐작가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네."
"나중에 그 놈을 만나면 반드시 토벌해버리거라."
"알겠습니다."
사제간의 대화가 끝나자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다.
"자자, 그럼 상황은 정리된 것 같고, 구체적인 계획을 논해보자구. 사실 상황이 지금 그렇게 여유로운 게 아니거든?"
모두의 시선이 제천대성에게 집중되었다. 제천대성이 말을 이었다.
"내 예상으로는 앞으로 칠 주야 이내에 반고의 주는 반드시 완성된다. 오늘내일 중으로 바로 끝날 정도는 아니지만 길어도 칠 주야라고 봐. 그러니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반고의 주문을 구성하는 결계를 부숴야 해."
"결계라면 어떤 결계입니까?"
내가 질문하자 제천대성이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제일 앞에 펼쳐져 있는 건 연등도인(燃燈道人)의 보패인 삽십삼천영롱보탑(三十三天玲瓏寶塔)이고 2차로 펼쳐져 있는 건 운중자(雲中子)의 보패 통천신화주(通天神火珠), 3차로는 투선이 모여서 직접 경호를 하고 있더군. 나도 원래는 3차 방어선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니까, 아마 천계 역사상 최강의 방어일걸."
"......"
연등도인이든 운중자든간에 그들은 은주시대부터 활동하던 대라신선으로 여동빈이나 장삼봉에 비교해서 까마득한 선배뻘이었다. 그런만큼 그들의 법력은 인간술법사와는 차원이 다를게 분명했으며, 하물며 그들의 전용보패로 펼친 결계라면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할 것이다.
' 구룡도의 사성, 봉래도주 이흥패(李興覇)가 반황주로 펼친 결계는 굉장했지...'
이흥패는 해신이 직접 침략한 봉래도에서 반황주로 결계를 펼치며 무려 수천 년이나 버텼다. 해신의 권속 중에서 그 누구도 이흥패가 목숨걸고 펼친 결계를 뚫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나도 이흥패가 스스로 결계를 물리게 하지 않았다면 뚫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기가 질려서 말했다.
"그런 걸 뚫을 수가 있습니까?"
"무리지.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못 뚫어. 그래서 작전을 잘 짜야하는거고."
여의봉을 어깨에 턱하고 얹은 제천대성이 말했다.
"우선 결계를 뚫고 나면 투선들을 너희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어야 해. 내가 도와주겠지만 거기서 너무 힘을 빼 버리면 힘들어질테니 너희가 잘 해줘야 해."
"으음..."
구천현녀, 화룡진인, 여동빈이 아군이라지만 천계에서 내로라하는 대선들과 투선이 잔뜩 모인 장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었지만 나는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제천대성에게 말했다.
"장삼봉 진인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안될까요?"
장삼봉이라면 틀림없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에 여동빈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안된다, 연자여."
"왜입니까? 장삼봉진인도 설명하면 협력해줄..."
"내가 선검술의 형태를 빌려 일부러 천계 밖으로 나갔던 이유는 천계 전체가 서왕모의 감시에 놓여있기 때문이었노라. 이 백릉산같은 극히 일부의 장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감시되고 있지. 장삼봉을 끌어들이는 순간 우리의 기습계획이 모두 노출될 것이다."
"......!!"
"기습계획이 노출되면 서왕모는 반고의 주를 일시중단하고 우리를 처단하려고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외에는 누구도 천계의 조력자가 될 수 없다."
"그럴수가..."
"그 때문에 나는 형제처럼 믿고 아끼는 내 동료, 팔선(八仙) 중 누구도 이 일에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천계의 대라신선들도 이 사실을 말하면 협력해줄 자들이 꽤 있겠지만, 정작 그걸 이야기해 버리면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황망하게 서 있다가 말했다.
"그럼 기습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방해한다고 해도 어차피 서왕모가 있다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서왕모는 언제고 다시 반고의 주를 외울텐데..."
"지금 저 반고의 주라고 하는 황당한 초거대주문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서왕모 덕분이야. 서왕모가 인과율의 역풍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그래서 저 주문이 외워지는 동안에 그녀는 무방비나 다름없어."
제천대성이 히죽 웃었다.
"달리 말하자면 서왕모가 가장 약한 때는 바로 지금이란 거지."
"아!"
"아무리 나라도 서왕모를 죽이는 건 기대도 안 해. 하지만 지금 기습에 성공해서 진을 부수는 것만으로도 서왕모는 자신이 가진 힘을 상당히 잃어버리고 말 거다. 물론 상처입은 호랑이는 무서우니까 진을 부수고 나면 도망치는게 상책이지."
"칠 수 밖에 없는 거군요."
제천대성은 고개를 까닥했다.
"지금 바로 가는 게 어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
다들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빠를수록 좋다지만 과연 이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분위기였기에 곰곰히 생각했다.
'지금 가는 게 좋을까...?'
아직 시간여유는 있다. 다만 그 여유동안에 내가 뭘 준비한다고 한들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이쪽이 불리해진다는 걸 생각하면 쓸데없이 망설이는게 더 악수(惡手)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칠요가 생각났다.
'그래, 아직 모을만한 힘은 더 있어.'
성공확률은 높을수록 좋다. 나는 제천대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난번에 가져가신 월요를 사용해서 싸우실 생각입니까?"
"응? 내가 왜?"
제천대성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미해방 월요같은 것보다는 내 여의봉이 몇곱절은 강해!"
"그렇군요."
하긴 지금 칠요를 모아봤자 미해방 상태라면 최상급 보패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힘을 되찾은 화룡신검은 물론 제천대성의 여의봉보다 약하리라. 하지만 나는 왜인지 지금 바로 쳐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결정하고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구천현녀님. 하루이틀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지요?"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구천현녀는 선선히 승낙하는 듯 했고 제천대성은 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봐, 칠요를 모아보려는 생각이면 집어치워. 말했듯이 지금은 해방이 불가능하니까 무의미한 상황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헹... 알았다. 네 녀석은 진소청이 마지막 의지를 맡긴 인간이니 한 번 믿어보지."
번쩍!
잠시 후 나는 여동빈, 화룡진인과 함께 근두운을 타고 태산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를 내려 준 제천대성은 곧장 되돌아가 버렸고, 여동빈은 내게 말했다.
"연자여.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여동빈께선 이제 선검이 되실 필요가 없는 겁니까?"
"구천현녀께서 선검술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어 주셔서 필요할 때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다."
"그렇군요."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동료들과 얘기해보려 합니다."
파앗
나는 비등으로 본거지로 되돌아가서 망량과 제갈사에게 천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서왕모가 천계를 장악하고 있었다라... 흥미롭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싸울 준비를 해야지."
제갈사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백웅. 장담컨대 넌 이번에 반드시 죽을 거다."
"음?!"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넌 지금 천계 그 자체와 싸우려 하고 있다. 실감 나냐?"
"으음..."
"너무 압도적인 전력차인데 안 싸우면 어차피 죽으니까 싸우지 않을수도 없어. 그렇다고 비장의 수인 흉신의 언령도 딱히 판을 뒤집기 힘들다고. 안 죽을 수가 없잖아? 좀 있으면 늘 하던것처럼 소을촌 외양간 천장을 쳐다보고 있겠지."
"......"
이게 웬 흉악한 저주냐.
"그럼 도리어 속편해."
"뭐?"
제갈사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뒷일 생각 안하고 할 수 있는 준비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