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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일렁
내가 거인의 유적에 들어서자 내 모습이 마치 달무리처럼 깜박이는 걸 알 수 있었다. 크게 물결치듯 내 몸이 몇 겹으로 일렁이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 저주에 걸렸는지 멈춰서 스스로를 살펴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
여긴 뭔가 이상한 공간이다.
나는 여기서 더 걸음을 옮기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억지로 더 나아갈지 잠시 망량 제갈사에게 조언을 구할지를 고민했는데, 바로 그 때였다.
쉬이익
갑자기 내 앞에 뭔가가 순간이동해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내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것은 큰 적색 장포를 껴입은 자였는데, 나는 그의 복색과 외모를 보자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 축융족!'
과거 축융족들과 만나서 거래한 적이 있었기에 저들의 생김새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축융족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 자가 불쾌한 듯 말했다.
"생각이 읽히지 않아. 인간의 생각이 읽히지 않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정체를 밝혀라."
나는 축융족의 말에 대꾸했다.
"축융족이여. 내가 원하는 건 이 유적을 들쑤시는 게 아니라 당신들 일족의 수장인 위대한 마도왕을 만나려 함이오."
"......!!"
쉬쉬쉭
쉬쉬쉬쉭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적의를 입은 축융족이 두 명, 세 명, 다섯 명으로 차례로 늘어나더니 종래에는 수십여 명이 나를 둘러싼 형태가 되었다.
' 아무래도 처음부터 대기한 것 같지는 않고.'
유적에 침입한 자가 있을 경우 순간이동하여 불려나오게끔 되어있는 구조인 듯 했다. 이 거신의 유적은 축융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끝까지 손을 놓지는 않은 듯 했다.
수십 명의 축융족에 둘러싸인 느낌은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내 앞에 서 있던 축융족이 말했다.
"그대에 대한 정보를 방금 모성(母星)에서 전송받았다. 그대는 우리의 왕과 무기거래를 했던 자구나."
"알아봐 줬구려."
"하지만 우리의 왕께서는 현재 흉신때문에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손을 끊기를 원하신다. 우리 또한 만일을 위해서 이 유적을 지키고 있을 뿐 더 이상 이 곳에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이제 버릴 예정이니 부디 물러나길 바란다는 왕의 전언이다."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참 제멋대로군. 그래서 나는 축융족의 왕과 만날 수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격무에 시달리셔서 그대를 만나실 시간이 없다."
"그러면 썩 비키시오. 난 이 유적이라도 탐색해야겠소."
축융족이 팔짱을 끼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다. 이 곳은 우리가 지키는 장소다."
"그냥 꺼지라는 말이오?"
"그렇다."
그렇게 나온다는 거지? 나는 비직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당신들을 계속 귀찮게 할 수밖에 없겠군."
앞에 서 있던 축융족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뭐라고?"
"당신이 알런지 모르지만 선지자는 이미 나와의 의리를 한번 저버렸소.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거란 말이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들이 탈출하기도 힘들게끔 귀찮게 해 주겠소. 나는 충분히 그럴 자신이 있소."
"감히 인간 따위가 위대한 종족을 협박하는 건가?"
그가 노한 기색으로 이를 갈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서로 편한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요. 내가 제시하는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받아들인다면 두 번 다시 귀찮게 하지 않겠소."
"왕을 알현하거나 이 유적을 탐색하고싶다는 말이냐?"
"그렇소."
"......"
그 축융족은 머리를 들고 허공을 쳐다보는 기색이었다. 또한 주변에 몰려있는 다른 수십 명의 축융족 또한 그와 같은 자세라서, 어딘가와 정신력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참 후 축융족이 말했다.
"왕께서 말씀하시길, 그대에게 유적탐사의 권리를 주셨다."
"나와 만나지는 않겠다는 소리요?"
"왕께서는 바쁘시다. 조건 중 하나를 받아들여 준 것만으로 만족하라."
"흠, 알겠소."
어차피 저쪽에서 만나주려 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가 없는데다, 나도 선지자의 면상을 그리 보고싶지는 않다. 창힐에게 내 정보를 팔아넘긴 걸 생각하면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어질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난데없이 50년 후의 세계에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스스슥
잠시 후 수십 명의 축융족들이 사라지고 축융족이 한 명만 옆에 남았다. 그 축융족은 특이하게도 여인이었는데 한 줌의 감정도 없어보이는 얼굴의 차가운 미인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안내할테니 따라오라."
"당신도 인간은 아니겠지?"
"......"
"그 육체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된 거요?"
내가 그녀에게 질문하자 그녀가 대꾸했다.
"원래 주인의 이름은 마르길. 그녀는 무사하다."
"당신이 몸을 강탈한 건 아니고?"
"우리가 원주민과 어떻게 정신을 공유하는지 모르나 보군. 우리는 일정기간 동안 원주민의 육체를 대여하고 대신에 원주민의 정신을 우리의 고향으로 보낸다. 그들은 우리의 법으로 존중받도록 되어 있다."
저벅
나는 걸어가며 그 설명을 듣다가 괴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이 외계로 가 버렸다는 소리인가?"
"대여기간이 끝나면 그들과 자리를 교체한다. 그들은 우리가 몸을 빌리는 동안 늙지 않으며 교체된 후에도 강한 정신능력을 얻게 되지. 우리 종족은 은하윤리교범에 저촉될 일은 하지 않는다."
"......"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괴이한 정신교체방식에 침음성을 흘렸다. 그 말대로라면 위대한 종족과 정신을 교체한 원주종족은 반강제로 다른 외계에서 수십 년간 지내게 되는 게 아닌가? 자기들 딴에는 존중해준다고 하지만 그 자체로 두렵기 짝이 없는 재앙으로 보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미칠지도 모른다.
' 이런 놈들조차 선량한 온건파 이족에 속한다니.'
이 세상은 정말 무시무시한 혼돈과 힘의 법칙에 뒤틀려 있다. 내가 과연 [옛 지배자]를 쓰러뜨리고 이 미친 세상을 바꿀 수가 있을까?
내가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부활의 당(堂)이다."
부활의 당이라고 불린 장소는 탁 트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공간이 엄청나게 넓을 뿐이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장치들이 가득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거대한 남색 유리통이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무려 십여 장이나 되었다.
또한 십여 장에 이르는 남색 유리통의 안에는 무언가 음영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저 거대한 통은 안쪽에 뭔가를 넣어놓은 듯 했다. 나는 '부활의 당'이라고 했던 명칭을 떠올리며 그 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게 봉인된 거인족인가?"
"그렇다."
나는 여기까지 오는데 그저 통로를 휘적휘적 걸어왔을 뿐이었다는 걸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단순한 구조인데 수천 년간 어떻게 봉인한 거지?"
"그대가 왕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편하게 들어온 것이다. 본래 이 곳에는 차원왜곡장과 괴리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그 누구도 들어올 수가 없다."
"으음..."
아무래도 차원 그 자체를 어찌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이 봉인지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할 듯 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초고도의 기술력이라면 내가 마도구 비등을 써서 진입하려 해봤자 튕겨나가기만 할 뿐일 것이다.
' 굳이 들어오려면 사불상을 써서 억지로 들어올 수밖에 없겠군...'
나는 이 곳에 자주 올 수 없다는 걸 상기하고 주변광경을 눈에 새기듯이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했다. 그리고 남색 유리통 근처로 가서 안쪽의 거인을 들여다 봤는데, 의외로 괴물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인간 그 자체로 보였다. 단지 인간의 몸뚱이가 커졌을 뿐으로 보였다.
"부활의 당이라고 했는데 이 거인들은 현재 죽어있다는 소리요?"
"가사상태지."
"왜 가사상태가 되어있는 것이오? 설마 오랜 세월동안 수명을 무시하고 버티기 위해서인가?"
"그렇지는 않다. 거인족은 너희같은 하등종족과 달리 딱히 수명이 정해져있지 않아 불로불사에 가깝다. 이들은 모두가 판천의 대전(大戰)에서 큰 부상을 입은 거인족의 상급전사들이다."
그렇게 대꾸한 그녀가 천천히 유리통의 외부를 손으로 쓸었다.
"그 격렬한 싸움에서 황제 공손헌원의 권능에 당하고도 살아남았으니 이들이야말로 거인족의 최정예들이었지."
그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황제...!! 이 자들이 삼황오제 황제와 싸웠었단 말이오?"
내 반문에 그녀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부활의 당은 이만하면 다 봤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리 대답하고싶지 않은 기색으로 보였다.
파앗!
다음 순간, 나는 아까와 달리 비취빛 보석이 영롱하게 박혀 있는 거대한 보석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이 곳은 말 그대로 보석천지인지 사방에 비취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이 곳은 다음으로 보여줄 곳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실이다. 이 곳에 우리 종족이 가진 자본의 3할이 투입되어 있으니, 이 곳을 봉신(封神)의 당(堂)이라고 한다. 은하에서 가장 귀한 동력석과 시설이 기동되고 있다."
"다음으로 보여줄 곳이 마지막이오?"
"그렇다."
파앗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봉신의 당에서 이동해서 회색빛 기류가 흐르는 수상쩍은 대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안개 때문에 사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멀리 지평선과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은 - 산인가?
아니다. 저건 거인이다.
마치 달기를 연상시키는 듯한 거대하기 짝이 없는 그 존재는 시꺼먼 혼돈에 둘러싸여서 굳어 있었다. 또한 그의 거대한 몸뚱이에는 수십만 개의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고 온갖 종류의 현란한 봉인장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 곳이 바로 천마(天魔)의 당(堂). 봉신의 당에서 생겨난 모든 동력이 천마의 당에 있는 수백만 개의 봉인장치를 보조해준다. 그 덕분에 겨우 저 자를 가두고 있지."
"......"
고작 하나의 거인을 가두기 위해서 가공할 기술력을 지닌 종족이 자본의 3할을 쏟아부으면서 수백만 개의 봉인을 해 두었다는 소리인가? 나는 눈 앞에 묶여있는 저 칠흑거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존재는 대체 무엇이오?"
"극비이니 말할 수가 없다."
가볍게 대꾸한 그녀가 손을 휘젓자, 나는 다시 천마의 당에서 빠져나와서 유적의 처음 진입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견학은 다 되었겠지. 이만 돌아가라."
"잠깐! 그럼 다시 왕에게 물어봐 주시오."
"무슨 말이냐?"
"당신들은 축융과 무슨 관계요? 그리고 당신들, 위대한 종족은 과거에 축융을 따라서 거인족을 배신했었던 것이오?"
"......"
"그리고 축융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말해줬으면 하오."
그녀는 갑자기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격렬하게 화를 냈다.
"배신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주제에 감히..."
"아니면 아닌 이유를 말해달란 말이오. 그게 그렇게 어렵소?"
"하등종족 따위가...!!"
그녀가 뭔가 정신능력을 발휘하려는듯 눈에서 섬찟한 빛을 내었다. 그러자 나는 점차 몸이 굳어가면서 혀가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눈 앞에 있는 존재는 위대한 종족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능력자인지 금세 내 정신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털었고, 정신제압은 씻은 듯 사라졌다.
"관두시오!"
"아... 아니?! 어떻게 인간이..."
"왕에게 내 질문이나 전달하시오."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꿈벅이다가 하는 수 없는 듯 통신을 연결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말했다.
"왕께서 그 정보를 말하는 걸 허가해 주셨다."
"그럼 대답해 주시오. 당신들은 거인족을 배신했던 것이오?"
"배신이 아니다. 절대로!"
"그럼?"
그녀는 냉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는 애초에 삼황오제와 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 우리는 본디 관찰자에 불과하며, [옛 지배자]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불상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황제와의 싸움터로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불상사가 뭐요?"
"... 돌연변이가 나타나 버렸던 거지."
왜인지 화가 난 듯 씹어뱉듯 말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린 삼황오제와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세상의 순리를 거부하는 거인족을 제압해서 전쟁을 끝낸 것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거인족을 최대한 살려서 거두었으니 우리는 도의적으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배신은 배신이잖소. 당신들 축융족 또한 거인족에 속하니..."
"거인족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우리가 축융족에 속한 건 우연일 뿐이었단 말이다."
짜증이 나는지 버럭 외친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겠다. 축융은 현재..."
쉬쉭
그녀는 축융의 행방을 다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와 조금이라도 얼굴 맞대고 있는 게 혐오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혐오반응을 신경쓸 새도 없이 방금 전에 들었던 축융의 행방을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만귀전의 려."
만귀전의 서열 2위이자, 전욱의 오른팔으로 불리는 존재인 려(黎)!
내가 알기로는 전욱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존재, 려가 사실은 - 거신(巨神) 축융이었던 것이다.
'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만귀전에 있었을 때 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려는 인간모습을 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엄청난 음기를 지닌 음신(陰神)이었고, 거인족의 형상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축융은 무시무시한 화력을 지닌 화염거인이니 도저히 려와는 맞물리지 않는 반대 모습인 것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일단 본거지로 되돌아가서 내가 얻은 정보를 제갈사와 망량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갈수록 일이 어려워지기만 하는군. 축융이 만귀전의 서열 2인자, 려가 되었다고 하면 실질적으로 그 혼돈의 불꽃을 해주할 방법은 없지."
"역시 그럴까?"
"만귀전의 서열 2인자라면 네게 사도의 권능을 가르친 오거천문의 관리자, 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다. 게다가 원래부터 거신 축융이었다면 이미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삼황오제 외에는 아무도 못 건드리는 수준이겠지."
"......"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공공의 저주를 해제할 방법은 있다. 편법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