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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알았어."
나는 선지자에게서 무창의 탑의 무기사용권을 받은 바 있다. 제갈사의 말은 그 힘을 사용해서 미리 낙양을 초토화시키고, 최대한 유리한 상태에서 진입하자는 것이었다. 안에 있는 인간들이 피해를 입을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저 생지옥에서는 살아있는게 더 괴로울 것이리라.
우웅
내가 무기를 사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진언을 나직이 읊자, 잠시 후 내 정신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에 내가 떠올라 있었다.
이 곳은 정신공간 같았지만, 전면부에는 시꺼멓게 변해있는 흑암의 하늘과 수천만 개의 별무리가 그득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이 것이 바깥의 우주(宇宙)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눈 앞에 보이는 푸른 별이 내가 사는 장소라는 걸 알고 있었다.
[ 사용자 인식 확인.]
뭔가 인간미없는 소리와 함께 철컥거리며 공간 저편에서 이상하게 생긴 게 튀어나왔다. 눈이 동그랗게 뜨여 있고 마치 표범처럼 생긴 동물이었는데 이마에는 세 번째 눈이 박혀 있었다. 그 괴이한 짐승은 나를 향해서 말했다.
[ 목표 확인. 목표를 입력해 주십시오.]
"낙양성 일대와 거기에 있는 나인교주, 나인교 주교를 특히 쓸어버리고 싶어."
[ 목표 입력 중... 실행수준에 맞는지 재확인하겠습니다. 목표는 지상문명의 소멸입니까?]
"아니. 낙양만... 그리고 주변에 피해가 가면 안 돼. 인간은 가능하면 살려 줘."
[ 기다려 주십시오.]
표범처럼 생긴 삼안의 짐승은 눈에 마치 빙글대면서 푸른 폭풍같은 게 감돌고 있었다. 한참동안 앉아 있던 짐승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 목표. 준 [지배자]급으로 확인. 16등급 이하의 광선 폭탄류 무기와 원자폭탄, 궤도폭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해당 목표를 사멸하기 위한 피해량은 1.98 로탈으로 측정. 차원역착필드가 해당존재의 혼돈보유량이 문명수준을 현저하게 뛰어넘음을 확인했습니다. 추정치 1297년... 해당 목표를 사멸하기 위한 최소무기예상등급 18등급으로 측정.]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삼안의 표범이 내게 연속으로 말했다.
[ 18등급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왕족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18등급 무기 해방은 종족의 위기상황임을 사용자분께서 재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왕족의 승인을 받아야 저 나인교주를 해치울 수 있는 18등급 무기를 쓸 수 있다는 소리인가?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왕족의 승인을 어떻게 받지? 아니 난 이미 왕의 허가를 받고 여기에 온 거 아닌가?"
[ 해당 사례가 없어서 분석중입니다. 왕족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 왕족과 통신을 연결하는 방법을 추천드립니다.]
"해 줘."
뚜 뚜 뚜
[ 왕과 통신연결이 허가되었습니다.]
반복음이 잠시 들리더니 표범의 눈 앞에 웬 화상이 떠올랐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그 영상 앞에는 놀랍게도 선지자가 서 있었다!
"선지자!!"
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풍경 속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알 수 없는 머나먼 은하의 이계(異界)로 진작에 도망쳤던 모양이다.
[ 신의 계략에... 휘말렸군... 크흐흐...]
선지자는 뭔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더니 말했다.
[ 백웅이여... 미안하지만 네게 18등급의 무기는 승인해줄 수 없다... 그건 [옛 지배자] 격퇴용이니까... 인과율의 역풍을 맞을 수가 있다...]
"......!!"
[ 대신 그 바로 아랫단계인 17등급을 허가해 주마...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부담임을 알도록...]
나는 급히 놈에게 물었다.
"아니 잠깐 너 설마 창힐한테 내 정보를 판거..."
[ 앗... 바쁜 일이 생긴것같다...]
파밧
선지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자 표범이 말했다.
[ 왕의 권한으로 17등급의 무기가 해금되었습니다.]
"썩을 놈!!"
나는 내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난데없이 대답도 안하고 끊어버리는 걸 보면 너무나 수상했다. 창힐이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는게 너무나 수상했는데, 제갈사의 말에 따르면 그건 선지자가 내 정보를 팔았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궁하려 했는데 아예 무시해버린 것이다.
' 의리없는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정보상에게 그 이상을 바래도 무의미하지 않을까?
나는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표범에게 명령했다.
"알았어. 17등급 무기로 낙양일대의 나인교주와 나인교 놈들을 쓸어버려!"
[ 명령 승인되었습니다.]
위이이잉
이건 우주에 떠 있는 천체였던 걸까? 무미건조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포신(砲身)같은 게 둥그런 세계를 향해 조준되었다.
[ 목표지점 [낙양]에 시공압착진 설치 중... 준 사도체 6체 포획중... 혼돈분광장치 작동 개시... 반물질중입자뇌관이 부착되었습니다. 대우주 미래정보사념통합체연맹의 맹주께서 즐거운 사냥을! 이라는 격려의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영자포립차단막 진행중... [옛 지배자]의 사념파가 완전차단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초재생능력과 인과형 불사능력, 시공역전능력 차단중... 상위사도급 섬멸가능성 9할 9푼 확인. 성천위도에서 반물질장 포획 완료.]
"......"
[ 사용자에게 서은하부족동맹에서 항의외교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원시행성에서 적대적 [옛 지배자] 병기를 사용한 것이 평화에 위해가 될 수 있다며 강한 유감을 표한다는 첨부서신입니다. 5000년의 외교단절을 원하냐고 [왕]께 강한 실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당서신을 왕족에게 재전송하겠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튼 현재 내 지식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엄청난 무기인 게 틀림없었다.
[ 서은하력 3839827년 85주 7리,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제 17등급 대 [옛 지배자] 격멸준최종병기 반입자영뢰극락파동윤회포(反粒子靈雷極樂波動輪回砲)를 발사하겠습니다.]
피잇 -
쩌엉
조그마한 실선같은 게 포신에서 발사되는가 싶더니만, 그걸로 끝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별것없어보이는 연출이라서 나는 제대로 발사되었는지 의아했지만, 이윽고 표범이 꼬리를 살랑이며 말했다.
[ 착탄 완료. 사용자의 정신을 귀환시킵니다.]
파앗!
나는 다음 순간 새하얀 공간에서 빠져나와서 원래 내가 서 있던 장소로 와 있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새하얀 기둥!
소리없이 마치 하얀 기둥이 낙양성 전체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아니 - 사실은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낙양성 전체를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비비비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음이 진동처럼 울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게 공격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큰 변동이 없었는데, 잠시 후에 빛이 멎고 눈 앞에는 폐허만 남게 되었다.
"......"
"백웅...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어찌나 놀랐는지 제갈사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 정도일 줄은..."
완전한 폐허.
그것이 바로 결과물이었다. 낙양성이라고 불렸던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나인교주도 죽은 거 아닐까?"
"그랬으면 정말 좋겠군!"
다같이 내 말에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싸우지 않고 인류의 최대재앙을 해치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앞으로 걸어갔는데, 약 오 리를 걷는 동안에 살아있는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더러 땅 밑에서 불쑥불쑥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콜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인간으로 보였다.
"괜찮소?"
"헉... 헉... 무슨 일이..."
그들은 낙양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생존자였는데 난데없이 환한 빛과 함께 모든 게 사라지더니 엷은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말을 했다. 제갈사는 연종휘에게 말했다.
"자네는 생존자들을 구조하게. 우리는 나인교주와 대주교의 생사를 확인해야겠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뭔가를 느끼고는 말했다.
"마(魔)의 기운이 씻은듯이 사라졌어."
"아무래도 방금 그 광선에는 정화의 힘도 있었나 보군. 인간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파괴한 건가? 정말 대단해. 하지만..."
제갈사가 징그럽다는 시선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결계는 여전하다."
"......"
"저건 위대한 종족의 초문명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결계같군."
그럴지도 모른다. 흉신이 작정하고 강림해서 덤벼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결계라면 그런 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망량선사]는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나는 그 새까만 고양이가 새삼 대단한 존재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부그르르르...
"앗."
우리는 갑자기 허공 곳곳에서 거품이 끓어오르더니 뭔가가 재생성되는 걸 볼 수 있었다. 재생성된 것들은 잠시 후 새빨간 장포를 뒤집어쓴 괴인으로 변했는데, 그 괴인을 본 진소청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교군."
나인교의 주교!
놈들의 숫자는 총 여섯 명이었다. 나는 놈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더러 장포를 비집고 촉수가 흘러나오는 걸 봐서는 그리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닐 듯 싶었다. 이미 인간이 아니라 촉수와 동화한 괴인(怪人)인 것이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망량이 말했다.
"뭔가 상태가 이상하군. 원래 저놈들 하나하나는 호법사자도 버거워할 정도의 엄청난 힘을 자랑했는데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
독왕 당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광선을 맞고도 자기 몸을 회복시키는데는 성공했는데 힘이 다 떨어진 거겠지! 그럼 식은죽 먹기다."
스스스
의념절기(意念絶技)
무형지독(無形之毒)
주르륵
당산의 의지가 허공을 격하고 주교를 둘러쌌다. 그러자 주교들의 몸은 순식간에 허물어지듯 녹았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녹아서 핏물이 되는데는 숨을 두 번 쉴 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
뭐 저런 독이 다 있단 말인가? 아무리 강력한 독이라고 해도 저런 건 언어도단이다! 내가 봤던 최고의 절독조차도 인간의 피부를 용해시킬지언정 뼈와 살을 저렇게 순식간에 녹이지는 못했다. 나는 절대지경의 독술사가 펼치는 무형지독의 위력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저런 게 만일 내게 날아든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한두 번은 뇌령을 일으키며 저항력을 올려서 버티겠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중독되어서 죽고 말 것이다.
당산이 주교들을 몰살시키고도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뭐야 벌써 끝이야? 원래라면 무형지독 맞고 나서도 몸에서 촉수 뿜어내면서 되살아나던데? 한 놈 감당하기도 힘들었는데 뭐가 이리 약해졌어."
그 말에 진소청이 대꾸했다.
"아무래도 백웅이 쓴 무창의 탑의 무기가 놈들의 재생을 방해하고 불사를 없애버린 모양이군. 진정으로 기적적인 일."
"히야... 도대체 뭔 수를 쓴 거야? 너 참 대단하구만."
당산은 진짜 감탄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에서 주교라는 놈들이 사실은 호법사자보다 상위로 취급될 정도로 강력한 괴물이었고, 이렇게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절대지경 고수들이 아무리 회쳐도 무한재생에 무한불사를 하곤 했다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걸어갔을까?
폐허 한가운데에 한 검은 장포를 입은 자가 서 있었다. 그 존재는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존재를 보는 순간 진소청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또한 망량과 제갈사는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나인교주."
나인교주라 불린 존재는 주교와 달리 허공에서 되살아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처럼 고요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치 이 주변 공간은 저 자의 존재감에 먹혀버린 것처럼, 이 쪽에는 절대지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는데도 움츠러드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왠지 나인교주의 흑포 뒤편에 있는 얼굴이 뭔가 낯익다.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백웅, 불행 중 다행이군. 나인교주의 힘은 과거에는 상대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전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듯 싶소."
"이길 수 있다는 소리요?"
"... 모르겠소. 못 할지도."
"......"
진소청이 이렇게까지 약한 소리를 하는 상대가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힘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그 때였다.
나인교주가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살려주지."
"응?"
나는 그 말의 광오함은 이해했지만 무슨 저의인지 몰라서 당혹했다. 백련교의 절세고수들과 이청운 등을 혼자서 몰살시킨 초고수가 나인교주이며, 심지어 방금 무창의 무기를 맞고도 살아남은 존재다. 그런 존재가 광오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어째서 나를 살려주겠다는 건가?
그리고 지금 나인교주의 목소리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그것도 귀에 꽤 익은 목소리였기에 나는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넌..."
나인교주는 천천히 자신의 장포를 걷으며 머리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몸의 주인이 원하고 있으니."
"?!"
나는 그 순간 입을 딱 벌렸다.
저 백발의 여인 - 저 여인은 내가 틀림없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에 둔중한 충격을 받은 느낌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문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