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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파앗
우리가 본토에 도착한 곳은 광동성 인근의 모처였다. 광동성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이 산야에는 반천맹의 비밀거점이 있었고, 생존자들을 다수 보호하고 있었다. 광동성은 얼마 전 나인교의 습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불탔는지 시가지가 파괴된 기색이 역력했다.
'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적어도 수만 명,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거나 인신공양당했으리라. 나는 그 참혹한 상황을 알고 있기에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비밀거점의 내부로 들어가자 한 삿갓을 쓴 인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삿갓을 쓴 자는 나를 보더니 크게 경동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 진짜 예전 모습 그대로군."
"......?"
그러더니 나를 향해 부복하며 포권했다.
"주군! 속하 연종휘가 주군을 뵙니다."
"헉!"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종휘라고?!
하지만 이내 그가 삿갓을 벗고 나이 든 장년인의 모습이 드러나자 나는 한층 더 놀라고 말았다. 세월의 흐름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연종휘의 예전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미남이었기 때문인지 나이를 들었어도 잘생겼다는 인상이 강했다.
연종휘는 눈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주군. 오십여 년... 길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임무? 무슨 말이오."
"저는 과거 제갈사 님에게 지령을 받았습니다. 그 지령은 바로 천하십대고수의 흔적을 찾아내라는 거였지요."
뭣?!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내가 제갈사를 홱하고 돌아보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시 연종휘는 직접 전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했고 그렇다고 놀려둘 수도 없었지. 그래서 얼굴이 잘 안알려졌다는 점을 무기로 삼아서 강호의 소식을 취득하는 밀정(密偵)으로 운용했다. 덤으로 천하십대고수의 정보를 캐내도록 시켰지."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준 거야?"
"네가 연종휘의 밀정활동을 알고 있다면 쓸데없이 걱정만 앞서지 않았겠냐? 연종휘가 위험에 처하기라도 하면 발벗고 나서서 달려가겠지. 보나마나 네 성격상 밀정에게는 방해가 될 게 뻔하기 때문에 나만 알고있기로 한 거다."
"......"
"연종휘는 아주 실력이 좋았어. 밀정의 무공실력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과 양이 차이나는데, 그는 50년간 거의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천하에서 연종휘보다 실력이 좋은 밀정은 무림에 없었을 거다."
제갈사의 말에 연종휘가 눈물을 훔치며 대꾸했다.
"칭찬에 감사합니다."
그랬던 건가.
나는 상황을 얼추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종휘에게 질문했다.
"천하십대고수의 정보라는 건 무슨 말이오?"
"그건... 주군께서 '첫 번째 삶'을 사셨을 때 천하십대고수의 정보를 말하는 겁니다."
"흠."
"제갈사 님은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간에 십대고수의 좌(座)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세월이 지나면서 두각을 드러낼 거라고 예측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제게 모든 무림정보를 모으면서 그들의 단서를 찾아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십 년 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에 대해서 알아냈습니다."
"......!!"
연종휘가 힐끔 제갈사를 쳐다보자 제갈사가 말해도 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연종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주로 권성(拳星), 천마(天魔), 독왕(毒王)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다른 7명은 주군께서 얼추 정체나 이름을 아는 반면 이 셋에 대해서는 명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소."
"그 결과 저는 그 셋의 이름과 출신문파를 어느 정도 알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말이오?!"
이건 정말로 큰 성과다!
내가 내심 흥분해 있자 연종휘의 말이 이어졌다.
"권성(拳聖)은 고려의 이혼(李琿)이라는 자였습니다."
"혹시 십이율 출신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고절한 권법의 경지를 깨친 것으로 보였고 현재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그의 실력은 확실히 속하보다 높았습니다. 절대지경인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으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반드시 기억해놔야 할 정보다.
"천마(天魔)라는 인물은 현재 홀로 나인교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고 짐작되고 있습니다."
"혼자서?"
내가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연종휘가 말했다.
"어찌된 일인지 나인교의 사술과 마법이 천마에게는 하나도 효과가 없습니다. 또한 도리어 나인교인을 죽일 때마다 그의 힘이 강대해진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교 한 명을 뜯어먹어서 패퇴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뜯어먹어서?"
"모든 종류의 마(魔)가 그에게 효과가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자는 도대체 뭐하는 인물이지?"
"속하가 그의 정체를 캐 보았으나 확실한 것은 그의 성이 공손씨(公孫氏)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
"그의 실력은... 확실한 절대지경입니다.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만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천마.
들으면 들을수록 수수께끼의 존재였다. 나중에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독왕(毒王) 당산(唐傘). 이 자는 현재 오십대 중후반입니다만 가공할 실력자입니다. 천마처럼 혼자서 활동하고 있어서 현재 행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오십대 중후반이라면 내 전생시점 근처에는 어린아이였거나 갓 태어났다는 걸까?
연종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는 사천당문(四川唐門) 사상 최고의 천재입니다. 전설의 당문비기인 만천화우(滿天花雨)를 대성했으며 무형지독(無形之毒)을 자유자재로 부려 독왕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독왕 당산은 사천에서 나인교의 광신도 1만명을 무형지독으로 몰살시킨 전적이 있습니다."
"헉...!!"
무지막지한 전적을 듣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인교 광신도 1만명이라니!
생사를 돌보지 않는 괴력의 광신도를 1만명씩이나 상대하려면 정규군이 몇 배나 있어도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직접 광신도의 힘을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숫자단위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무형지독이라니...'
과거 사천당문의 가주인 당무극(唐無極)에게 찾아갔을 때 동방무결의 정보를 캐내던 중에 무형지독의 정보를 들은 일이 있다.
[ 통상적인 독으로는 불가능하겠지. 저주독은 다른 독과는 달리 물질적인 매개체나 병원(病原)이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독성이 강해도 원래는 불가능해. 그러나 술법의 인과(因果)조차 끊어버릴 수 있는 독이 딱 하나 존재한다네.]
[ 무형지독(無形之毒)! 이론상 존재하는 최강의 독일세.]
[ 어디까지나 그런게 있다, 정도일세. 우리 사천당문은 물론 만독문(萬毒門)이나 망혼곡(忘魂谷)에서도 역사상 무형지독을 만들어낸 일은 없네. 그저 궁극의 경지로 삼고 나아갈 뿐이지.]
[ 무형지독의 원리는 만물에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고리를 자유자재로 해체한다는 점에 있네. 당연한 말이지만 물질에서 비롯된 독은 또다른 물질으로 막을 수 있는 법. 그러나 물질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독이 존재한다면, 그 독은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해독제나 방어법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겠는가?]
[ 흐흐. 그래서 독술을 연마하다보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든다네. 보통의 무림인들이 무공의 극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지.]
"......"
당무극의 말에 따르면 역사상 그 누구도 무형지독을 이룬 자는 없다. 왜냐하면 무형지독은 이론상 물리적인 고리를 초월해버린 독이므로 '개념' 그 자체를 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원래 인간의 힘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 독왕 당산이라는 미래의 십대고수는 그 한계를 초월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 후 연종휘에게서 다른 십대고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자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었고, 정파삼대기인의 경우 신승을 제외한 나머지는 잠적했다고 했다. 걸선은 팔부신중이며 태산노옹은 제갈유룡이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천마와 독왕은 반드시 만나봐야겠군."
"크크. 네 녀석이 칠 주야만 일찍 나타났어도 그걸 권했을 거다."
제갈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헌데 지금은 나인교 대주교가 흉신 강림의식을 치를때까지 이틀도 안 남은 게 분명한데 그럴 여유가 어딨느냐?"
"빌어먹을..."
내가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다른 자는 몰라도 독왕 당산은 내가 불러낼 수 있소."
"음?!"
"과거 나인교와 싸울 때 그에게 은혜를 입힌 적이 있소. 표식을 쓴다면 반나절이면 그를 불러낼 수 있소."
"흐음... 그럼 해볼만 하군."
파앗
나는 곧장 진소청을 데리고 사천성 인근으로 이동해서 그가 말하는 장소로 빠르게 경공으로 이동했다. 한적한 산야에 도착한 진소청이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에 표식같은 걸 새겼고, 약 두 시진 뒤에 다시 그 장소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무 밑에 서 있었다.
나무 밑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은 비직하고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신창(神槍) 진소청이 나를 찾다니 별일이군. 당신같은 투신(鬪神)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가 있는가?"
진소청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에게 말했다.
"독왕. 광동성이 나인교주에게 무너졌다."
"......"
"나인교주가 낙양에서 흉신 강림의 의식을 치르면 인간은 모두 끝장이다. 날 도와주게."
"그 말은 당신도 나인교주에게 졌다는 뜻인가?"
진소청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독왕 당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포기. 당신도 못 이긴 괴물을 내가 어떻게 이겨?"
"그 자는 의식을 치르는 동안에는 무방비 상태. 우리가 뚫어야 할 건 나인교의 주교들일세."
"크크크! 그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닌데... 어쨌든 불가능하잖아."
"자네의 힘이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걸세."
"......"
독왕 당산은 한참동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거기 있는 못생긴 놈은 뭐야?"
역시 나를 말하는 거겠지.
진소청은 독왕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했다.
"그는 내가 이렇게 강해지는데 큰 도움을 준 자일세. 만일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네도 내 수준에 오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푸하핫. 너무 대놓고 낚는 거 아니야?"
"난 허언을 하지 않네."
"끌... 알았어. 거기, 통성명이나 합시다."
독왕이 내게 시선을 향하자 나는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나는 백웅이라 하오."
"그래, 당신은 대체 반천맹이나 신창과 무슨 관계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함께 정진하는 관계지."
나는 내심 독왕 당산이 재수없다는 생각과 함께, 놈과 만난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품 속에서 흑요석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으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오."
"미안하지만 사양하지."
당산은 히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나인교가 나타나고 줄곧 사술(邪術)이 세상에 가득했는데 이런 수상쩍은 걸 내가 받을 것 같소?"
"음..."
그 때였다.
파밧!
"크윽."
순식간에 진소청이 나서더니 당산을 공격했고, 그는 진소청의 습격에 급히 대처했다. 당산의 손에서 당문의 절기가 의념절기로 빠르게 펼쳐지는 걸 보자, 그 또한 절대지경의 고수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지경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진소청은 당산을 빠르게 제압했다. 고작해야 십오 초 정도를 나누자 당산은 전신의 혈도를 제압당해서 그 자리에 무릎꿇려졌다.
쿠웅
"빌어먹을! 이게 무슨 짓이야."
당산이 버럭 소리를 쳤지만 진소청은 말없이 내 손에서 흑요석을 가져가서 그의 손에 올렸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 기억을 전송하시오."
"......"
당산은 저 젊은 나이로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제압하다니! 나는 오십 년 후의 진소청이 어떤 경지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가 이윽고 기억을 전송하자, 당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망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뭣... 전생자... 세상에 그런 일이..."
"이렇게 강제로 이야기를 전달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상황은 한시가 급하고, 당신은 필히 나를 도와주어야 하오."
나는 말을 이었다.
"그 무형지독(無形之毒)에 관한 정보를 내게 알려 주시오."
"후후..."
당산은 뭔가 진한 웃음을 짓는 듯 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좋아. 당신이 인간을 구원하려 한다면 내 힘을 빌려주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전생자라고 하면 내가 거부해봤자 무의미한 일이겠지. 하지만 무형지독을 가르쳐주는 조건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조건이오?"
"어린 시절의 나를 거둬서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가르쳐라. 그리고..."
나는 다음으로 들려온 조건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일수나찰(一手羅刹) 당무극(唐無極)과 그의 본처, 본처의 소생을 모조리 고통스럽게 죽여라. 그리고 내당(內當)의 당문 고수들을 다 죽여라. 그게 조건이다."
"......"
일수나찰 당무극이라면 전대 당문의 가주이자, 내가 전생했던 시점에는 오대세가의 가주로서 천하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초절정고수였다. 그와는 딱히 은원도 없었는데 난데없이 살해지령을 받다니?
게다가 내당 고수까지 죽이라는 건 실질적으로 사천당문을 멸망시키라는 소리다!
내가 황당한 제안에 어이없어하자 당산이 말했다.
"싫으면 말아라. 어차피 네가 하지 않아도 내가 이십 대 무렵에는 방금 말했던 걸 이루게 되니까."
당산의 말에 옆에 있던 연종휘가 경악했다.
"서... 설마... 삽십 년 전 사천당문의 고수들이 괴사당했던 그 사건은."
"그래. 내가 했다. 내가 사천당문 놈들의 명줄을 다 끊었지."
"......."
독왕으로 불리는 사천당문의 최고천재가 본가의 혈육에게 이토록 처절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니?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제갈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백웅. 그냥 부탁을 들어 줘라."
"뭐?!"
"사천당문을 멸망시키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냐? 무형지독에 비하면 별거 아니니까 들어 줘라. 지금 그런 거 신경쓸 때가 아니다."
이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나는 지금 무형지독의 힘을 얻는 게 너무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아챘다. '개념' 그 자체를 없앨 수 있는 절대독이라면 앞으로 굉장히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크흐흐.. 좋다."
잠시 후 당산은 진소청의 제압이 풀린 채 내게 무형지독의 정보와 요령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대략 한 시진 가량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듣고 기억했고, 당산은 설명이 끝나자 말했다.
"좋든 싫든 이제 마지막인가? 그럼 가 보자고."
나는 당산이 상황을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걸 보자 그 또한 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혈육상잔을 벌였든 어쨌든간에 그는 미래의 무림을 지배할 초고수인 것이다. 나는 내심 생각했다.
' 독왕의 말대로 다짜고짜 학살하는 건 안될 일이야.'
나중에 당무극과 사천당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아, 맞다."
나는 거사를 치르기에 앞서서 일단 선지자에게 가 보기로 했다.
파앗
"없군..."
선지자 또한 거점을 옮긴 걸까?
원래 있던 아스타나는 휑하니 비어있었고 눈바람이 칠 뿐이었다.
이윽고 내가 아스타나에서 귀환하자, 우리는 다같이 비등을 이용해서 낙양 근처로 이동했다.
파앗!
"으윽."
나는 낙양 근처의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피어오르는 강렬한 사기(邪氣)에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마물의 소굴 한가운데에 들어온 듯한 끈적한 혈영(血影)이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인간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질척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땅 곳곳에서는 식물처럼 생긴 마물이 살아서 생장하고 있었다.
마치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사해(死海)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그 말은 이 장소가 이미 마역(魔域)으로 화했다는 소리다. 살아있는 인간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곳곳에서 광기어린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주교의 탐지에 걸리지 않는 건 이 정도 쯤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 전시안을 써서 낙양 내부를 정탐해 봐라."
"알았어."
스스스 -
나는 전시안을 발동시켜서 내부를 관찰했다. 그러자 강력한 기운이 여섯 개 정도 떠돌고 있었고, 낙양의 중앙에는 마치 과거 백련교주가 쌓았던 것 같은 커다란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제단의 정상에는 신선들이 마치 꼬챙이처럼 꿰뚫려서 여기저기에 꽂혀 있어서 참혹한 광경이었고, 더러는 여신선들이 능욕당하는 광경마저 보였다.
또한 제단 아래쪽에서는 마물들이 인간을 구워먹거나 튀겨먹는 광경도 보였고 인간이 촉수에게 묶여서 알 같은 걸 낳는 광경도 있었다. 여러모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력이 동나버릴 것 같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참혹함보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제단 정상에 있는 존재였다.
검은 장포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지만 - 단연코 저 존재의 힘이야말로 가장 강력했다. 어쩌면 주교 전부를 합친것보다 더욱 강할 정도! 투선보다 훨씬 강해보이는 저 존재는 웬만한 사도나 마왕으로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인 게 분명했다.
' 저것이 나인교주.'
필멸자 중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엄청난 혼돈(混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자 저게 인간인지 신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는 눈이 점점 아파짐을 깨닫고 전시안으로 관찰하는 걸 멈췄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놈은 뭔가에 크게 집중하고 있어. 의식중이라는 건 맞는 말 같아."
"좋아. 그럼 공격해야겠군."
제갈사가 내게 주문했다.
"백웅. 지금이야말로 무창의 탑의 힘을 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