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84화 (583/1,615)

584====================

암천향(暗天鄕)

"어이 너희들!"

제천대성은 이진아시를 토벌한 후 우리 쪽으로 왔다. 그는 여의봉을 어깨에 걸친 채 진소청과 이청운을 한번씩 쳐다보았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칠요를 얻으려는 이유가 뭐야?"

"......"

아무래도 제천대성은 내가 아니라 진소청이나 이청운이 대장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진소청은 그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칠요라는 위대한 보물을 얻으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들었기에 뜻있는 자들과 함께 칠요를 얻으러 온 것입니다. 하실 말이 있다면 제게 해 주십시오."

진소청이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만일의 경우에라도 내 목숨부터 살리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호오. 뭐 예상했던 거군. 그리고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지?"

"천계의 유명인사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 쪽에는 고명한 술법사도 많으니."

"그렇구만."

제천대성이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하지만 안 돼. 사정은 이해하지만 월요는 내게 줘야겠어."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칠요를 구하면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이 혼란은 천계에서 해결할 거다. 그러니 걱정말고 칠요를 내놔."

그는 으름장을 놓듯 눈에 힘을 줬는데, 화안금정이 확하고 불꽃처럼 튀어올랐다.

"그건 종말의 열쇠! 너희가 갖고 있다가 마(魔)에게 강탈당하면 큰일난다고."

"......"

진소청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천대성께서도 제 부탁을 두 가지 들어주셔야겠습니다."

"뭐어?"

제천대성 미후왕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정신이 나갔냐? 인간 중에서 좀 실력이 된다고 해서 나랑 싸울 수 있는 줄 알아? 말해두지만 난 원래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놈이라서 이렇게 좋게좋게 말로 해결하는 일도 드물다고."

"별로 자랑은 아니신 듯 싶습니다만..."

"그러려니 해."

진소청이 입을 열었다.

"지금 무고한 인간이 [옛 지배자]의 변덕때문에 세상 곳곳에서 얼마나 죽고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칠요를 가져가시면서 그 정도 자비심을 베풀어주실 수 없단 말입니까?"

"으으."

진소청은 크게 고개를 숙였다.

"저흰 상황을 알아야 하고 남은 인간을 구해야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

제천대성은 우리를 둘러보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더니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낱 인간이 여기까지 와서 수호자와 싸울만한 용기라면 그 정도는 배려해 줄 수 있지. 뭐든 말해봐라."

어라?!

제천대성이 생각보다 순순히 진소청의 말을 받아들이자 나는 내심 놀랐다. 저 제천대성이 자신 스스로가 '말보다 주먹이 먼저'라고 칭한 건 헛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수틀리면 폭력을 행사하는데 아주 익숙한 존재인데도 진소청의 제안을 유하게 받아넘긴 것이다. 뜻밖의 면모를 발견해서 놀라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제천대성님의 목적과 현재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거 참 한방에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는 질문이군. 너 은근히 머리 잘 굴린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제천대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내 목적이라... 난 말했듯이 일하러 온 거다. 지금 삼황오제가 각지에 봉인해 둔 마왕의 힘이 강력해져서 봉인이 거진 다 깨져버렸어. 지금처럼 육체와 정신이 융합해서 [옛 존재]로 거듭날 확률도 높아졌지. 그래서 천계에서 가장 최고로 엄청나게 위대하게 쎈 멋진 사나이 제천대성 님께서 일일이 봉인하러 다니는 거지."

뭔가 수식어가 많았다.

"방금은 소멸시킨 게 아닙니까?"

그가 풋하고 웃었다.

"소멸은 무슨... 신의 혼은 불멸(不滅). 가만히 놔두면 이진아시도 몇천 년쯤 지나면 어딘가에서 쌩쌩하게 부활할 걸. 물론 그 전에 천계에서 알아서 봉인하겠지만."

"놈들을 봉인시키는 김에 칠요도 회수하고 말입니까?"

제천대성의 눈이 일순간 날카로워졌다.

"가능하면 말이지.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그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현재 상황을 조금만 더 가르쳐줄까. 흉신이 난데없이 인과율을 얻어서 세상의 음양지축을 반전시켜버리는 바람에 천하가 혼란스럽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래서 천계에서는 흉신의 계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곧 천제단을 내릴 생각이다."

진소청도 내 기억을 받아서 천제단이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반문했다.

"천제단이 무엇입니까?"

"천계의 모든 신선들이 지상에 강림해서 치안을 유지하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적어도 십 년 정도는 지상계는 멀쩡히 버틸 수 있을 거야."

"천계에서 그런 일을 임의로 할 수 있습니까?"

"못할 건 또 뭐야? 삼황오제가 윗선에서 내린 명령이라서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되는 거지. 인과율 제약같은 건 그 위대한 존재들이 어떻게든 해줄 생각인 모양이야."

"......"

진소청이 턱을 괴곤 다시 물었다.

"흉신의 계략이란 건 또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제천대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 거 아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음의 기운이 날뛰게 되면 인간의 숫자와 문명이 퇴보하지. 그 틈을 타서 자신의 신도를 늘려서 이 땅에 흉신을 모시는 종교를 창궐시키려는 한 수. 인간은 생사의 위기에 놓이면 유불도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마교(魔敎)를 믿기 쉬워지거든."

"으음..."

"흉신의 종교가 창궐하면 말세가 빨리 다가온다. 그래서 천계가 지상에 직접 관여해서 너희 인간을 보호하는게 흉신을 견제하는 게 되는 것이다."

그가 휘리릭 여의봉을 휘두르며 멋진 자세를 잡았다.

"천계는 너희 편이니까 걱정 말라구!"

제천대성이 방금 한 말에는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 있었다. 나는 제천대성이 고급정보를 술술 이야기해 주는 걸 보자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저 놈은 인간에게 동정적이군.'

차갑고 냉혹한 남화노선같은 대라신선과는 달랐다. 도리어 여동빈이나 화룡진인, 장삼봉 등 인간에게 온정적인 쪽이었다. 단지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어서 오만하고 호전적일 뿐 본질적으로 제천대성 미후왕 손오공은 선(善)에 속하는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은 우리가 '불쌍한 인간'으로 자신을 포장하면 쉽게 이야기를 들어준다.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그럼 월요를 돌려드릴테니 저희를 딱 한 번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엥? 내가 왜..."

"위대하고 강력하신 제천대성의 가호로 이 위기를 헤쳐나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제천대성이 기분이 좋아진 듯 히죽히죽 웃었다.

"하하, 뭐 그렇다면야... 받아!"

파앗!

제천대성이 진소청에게 인(印)을 날리자, 그의 이마에 손(孫)이라는 글자가 잠시동안 빛나면서 새겨졌다. 새겨진 글자는 이내 흔적도 없이 녹아들어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소청이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자 제천대성이 말했다.

"위기일 때 딱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면 도와주러 오겠다."

"감사합니다."

진소청은 자연스럽게 내게서 월요를 받아서 제천대성에게 넘겨주었다. 제천대성은 월요를 확인하자 씩 웃더니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가라고~"

쉬이익

그는 순식간에 근두운을 타고 지평선 너머로 빛살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장내의 사람들이 제천대성의 압력에서 벗어나서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진소청을 쳐다봤는데, 특히 망량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진소청. 어찌 그리 교섭을 잘 하오?"

"백웅의 기억에서 봤던 제천대성을 떠올리며 그의 성격을 추측했을 뿐이오."

진소청이 약간 얼굴을 붉혔다.

"어울리지 않는 아부를 해서 부끄럽구려."

나는 진소청을 칭찬했다.

"아니오, 잘 했소."

진짜 진소청은 방금 잘 해냈다. 제천대성에게서 온갖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다 알아낸 것은 물론이고 1회 도움권까지 얻어냈기 때문이다. 저 강력한 제천대성을 한 번 불러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 역시 천재는 뭐든 잘 하는 건가?'

내심 약간 질투가 났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서둘러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무튼 일단은 되돌아갑시다."

파앗

우리는 서산대사와 유정을 데리고 다두 왕국의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다두왕국에는 큰 물난리가 나 있었고, 마테오 리치와 그 부하들은 수해를 통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보였다. 다행히 우리가 지내는 곳은 꽤 고지대였으므로 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제갈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진아시가 쓰러졌으니 가까워진 달의 궤도도 정상화될 것이다. 저 커다란 달도 조금씩 줄어들겠지."

"재앙을 막은 건가."

"아니, 이제 시작이지."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월요는 어쩔 수 없이 뺏겼다지만 화요는 손에 넣어야 해. 문제는 그 제천대성이겠지만."

"......"

그렇다. 월요의 횡액을 막는데는 성공했으나 화요의 봉인을 풀러가게 되면 또다시 제천대성을 마주칠 확률이 컸다. 왜냐하면 놈은 지금 칠요도 겸사겸사 회수하고 있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한 것이다. 운 좋게 수요를 갖고 있다는 건 들키지 않았지만 머지 않아 제천대성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화요의 수호자는 거인족 공공. 공공은 거인족 신으로써 상고시대에는 원래 전욱과 힘을 겨룰 정도로 강대한 신적 존재였소. 만일 공공의 제약이 풀려서 원래 모습이 되었다면 그 또한 큰 재앙이 될 게 분명하오."

"뭐, 공공이 원래 힘을 되찾으면 우리 힘으로는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거지."

"문제는 또 있소. 지금 상황에서는 화요의 결계를 뚫을수도 없소."

제갈사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아주 개판이구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

순식간에 앞뒤가 다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화요를 얻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고, 나머지 목요, 금요, 토요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3개의 칠요는 도리어 화요보다 더욱 얻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자 이청운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칠요를 얻으러 몰려다니는 것보다는 아군을 늘려야할 듯 하군."

"호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제갈사는 흥미롭다는 듯 능글맞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근데 괜찮겠나? 네 입으로 꺼낼 이야기가 아닐텐데?"

"구원(舊怨)은 잊었다."

이청운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나는 그가 무슨 제안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말했다.

"백련교와 손을 잡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청운이 힘있게 말했다.

"자네가 흑백련을 줘서 교주에게 신뢰를 얻고 소교주까지 치료를 해 주게. 그렇게 함으로써 백련교를 잠재적인 아군으로 만듦과 동시에 새로운 동맹을 만들고, 더불어서 소교주에게 잠재되어 있는 [옛 지배자]가 지상에 강림하는 빌미를 차단하는 것일세."

"과연...!!"

좋은 계책이었다. 어디 흠잡을 데도 없을 만큼!

다만 백련교주가 음흉한 인물이라서 완전히 동맹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으나, 적어도 그는 문제상황을 직면했을 때 도와줄 줄 아는 인물이었다. 백련교의 도움을 얻는다면 앞으로 편해질 것이다.

나는 작전논의가 끝나자마자 백련교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 때 제갈사가 나를 멈춰세웠다.

"잠깐, 백웅."

"왜?"

"여동빈이 계속 너를 거부하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여동빈의 전력이 없으면 우리는 반쪽짜리만도 못한 신세야.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

"백련교에 갔다오기 전, 지금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고 가라. 어떤 의미에서는 백련교의 문제보다 더 급하다."

"불러도 안 오는데 어떻게 하라는 소리야?"

"공양의식을 마련하면 된다."

난 반쯤 붙잡히듯 술법사들이 마련해주는 제단에 앉아서 강신준비를 했다. 여동빈을 단순히 단말로 부르는 건 그가 자신의 의지로 무시할 수 있지만, 정식 소환의식을 거치면 의지와 상관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윽고 제단의 준비가 완료되었고, 무시무시하게 침울한 표정의 천우진이 조그맣게 소환을 시작했다.

"급급여율령..."

파앗

잠시 후 내 눈 앞에는 여동빈의 영체가 나타났다. 그는 전에 없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자신의 영검(靈劍)을 뽑으며 내게 겨누었다.

[ 연자여. 뽑아라.]

"네?"

[ 당장 칼을 뽑아라.]

여동빈이 진심어린 살의를 뿜어내며 말했다.

[ 나 여동빈, 그대를 패지 않고는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다.]

"......"

이유나 알고 맞고 싶었지만, 내가 손잡이에 손을 얹는 순간 엄청난 투기가 장내에 몰려들었다. 여동빈은 진심으로 나를 패고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쿠구구구

여동빈의 안광이 새파랗게 불타오르고 있다. 창노한 기운과 함께 영체의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엄청난 검기가 느껴진다.

나는 직감했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