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81화 (580/1,615)

581====================

암천향(暗天鄕)

다음날 우리는 월요가 있는 강화도 마니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흑요석을 공유하는 일행은 물론이고 반천맹의 고수들까지 함께 하는 길이었고, 난 출발하기 전에 미호를 만나러 동영에 가려고 했다. 미호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일을 미호에게 말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에 동영에 출발하기 직전, 검마가 난처한 듯 말했다.

"백웅. 미안하지만 나는 이번에 같이 갈 수 없겠네."

"무슨 일이십니까?"

"딸아이가 갑자기 아프네..."

딸아이라고 하면 그의 영애인 서문혜였다. 나는 약간 놀라서 말했다.

"아프다니요?"

"직접 보겠나?"

"네."

나는 서문혜의 거처로 향했다. 다두왕국에 세워진 커다란 건물에서도 안쪽에 서문혜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서문혜는 무영문의 시비들에게 간호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금 전에 발견했네. 시비들의 말로는 새벽내내 신음소리를 내며 아팠다는군..."

검마는 걱정스럽게 서문혜의 머리칼을 쓸었지만 그녀는 의식이 없는 듯 했다. 나는 그녀에게 일어난 특이현상을 알아챘다.

' 백발이... 더 선명해졌어.'

뿐만 아니라 그녀의 피부도 점차 새하얗게 되어서 마치 서양인을 연상케 했다. 원래도 하얀 피부이긴 했지만 지금은 창백하게까지 느껴졌다. 서문혜의 옆에는 하남제일의 강전길이 새벽잠을 깬 상태로 진맥중이었는데 그가 침음성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아직 뭐가 이상한지 갈피를 못 잡겠군..."

강전길의 의술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렇다면 내가 진맥해도 딱히 제대로 볼 수는 없으리라. 이건 명백한 이상현상이었기에 나는 검마에게 말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당장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출정하는 길을 붙잡기는..."

"칠요를 얻는게 하루이틀 늦어져도 괜찮습니다. 잠시 망량과 술법사들을 부르겠습니다."

"... 고맙네."

나는 망량과 술법사들을 일단 데려와서 보게 함과 동시에, 재빨리 비등을 써서 화서명을 데려오기로 했다. 왜냐하면 현재 가장 데려오기 쉬운 존재였고 의술 실력도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다.

' 의원이 본거지에 있는게 낫겠지.'

나는 즉시 광명신의 화서명에게 가서 흑백련과 금괴를 댓가로 빠르게 납치하듯 데려왔다. 화서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두왕국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그 때는 이미 망량을 포함한 반천맹의 술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문혜를 진찰중이었다.

반천맹의 술법사, 전우치가 말했다.

"이거 참... 난 모르겠네 맹주. 대체 그녀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이 강력한 기운은 뭐지?"

망량 또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 지식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술법사들은 이미 손을 든 건가?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제갈사를 눈으로 찾았는데, 제갈사 또한 멀뚱하게 서문혜를 내려다볼 뿐 딱히 소견이 있지는 않았다. 술법사들은 그녀의 상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원인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우진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청난 힘이 있는 건 사실인데, 처음 보는 힘이다."

"제갈사 너도 모르겠어?"

"모른다. 원인불명의 괴질이라 해도 좋겠다."

제갈사는 되려 흥미로운 듯 팔짱을 꼈다.

"네가 데려온 그 화서명이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한 순간에 광명신의 화서명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커험 하며 헛기침을 내더니 말했다.

"너무 기대하진 마시게."

스스스...

화서명이 시침을 하며 차분하게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의 의술 실력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것으로, 그보다 위라고 할 존재는 동방무결 뿐이었다. 그러나 동방무결은 현재 백련교 사람이니 접촉하기 힘들어서 현 시점에서는 화서명밖에 믿을 자가 없었다. 화타부터 이어진 명문의술가의 가주가 모르면 거의 희망이 없다.

한참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화서명은 뭔가 알아챈 듯 침을 하나둘씩 뽑으며 말했다.

"이건... 심기혈정을 넘어서서 혈도가 압착된 현상같소. 초현실적이군!"

"혈도가 압착되었다니?"

"음. 뭐라 해야할까. 당신들은 술법사 같은데 당신들 영역이 아닌건 확실하고.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화서명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기(氣)가 엄청난 밀도로 응축되고 응축되길 반복되다가, 생전 처음보는 변형을 일으키며 기경팔맥을 내리누르고 있소. 가장 농밀한 기가 눌러대는 탓에, 본래는 실재하지 않는 기경팔맥이 통째로 압력때문에 눌리는 거요. 하지만 이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가능할 줄은..."

"기가 응축되어서 변형되었다고? 그건 엄청난 내공 때문에 몸이 터진다는 걸 말하는 거요?"

"그건 좀 다르지. 내공때문에 몸이 터지는 것은 기경팔맥이 터지는 게 아니라 기가 심기혈정(心氣血精)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런거요. 기경팔맥 자체는 터지지 않소. 이건 극고의 고수들이 다루는 의념의 이론과 가까운 이야기."

화서명의 말이 이어졌다.

"쉽게 말하자면, 이 소저의 몸 속에는 천년내공이라 부를만한 엄청난 기가 꽉꽉 응축되어 있으나, 너무 응축된 탓에 우리가 '기'라고 느끼는 형태와 상이할 정도로 변이되어 있소. 그리고 변이된 기의 형질은 '개념'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본디 존재하지 않는 기경팔맥을 눌렀고, 눌린 기경팔맥은 소저의 뇌에 명령을 내리게 되었소. 혈도에 무형의 압력을 가하라고."

"......"

"응축된 기의 응축도는 무인들에게조차 상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변이했소. 허나 내가 아는 어떤 무공도 그렇게 기를 응축할 순 없소."

"어렵군..."

다들 잘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었다. 화서명이 좌중의 분위기를 느끼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도 내가 뭔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가문의 의술서에 전해져 오던 현상과 내 지식경험을 결부시켜서 하나의 가설을 내놨을 뿐이오. 소저의 몸에 가둬져 있는 이 기운은 도저히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구려."

옆에서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그건 호법사자가 쓰는 무한의 내공과도 다른 힘이군. 그녀의 몸 안에 갇혀있는 건 무한이 아니지 않소?"

그러자 화서명은 그제야 할 말이 생겼다는 듯 반색했다.

"오오! 뭔가 이해한 것 같군. 맞소. 무한이 갇힌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뿐."

"인간의 상상력을 내리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거력(巨力)이 갇혀있는 것이고."

진소청은 잠시 침묵하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백웅. 난 그녀의 상태를 대충 알 것 같소."

"정말이오?!"

나는 깜짝 놀랐다. 현재 서문혜의 상태는 사상초유의 사태에 가까워 보였는데 진소청만이 그 상태를 이해한 것이다. 화서명조차도 횡설수설하면서 그저 가설을 늘어놓았을 뿐인데 거기에서 진실을 알아냈단 말인가!

진소청이 말했다.

"현재 그녀의 몸에 있는 기운은... 풀려날 경우 호법사자에 못지 않은, 아니 응축률을 볼 때는 도리어 순간화력에서 호법사자를 압도할 정도의 힘일지도 모르겠소. 우리가 생각하는 기나 내공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우주의 기운일지도. 헌데 소저의 몸에 쉴새없이 쌓여서 압착된 그 힘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절대지경에 가까운 무인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음..."

나는 진소청의 말을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의념을 통제하는 정신능력을 말하는 것이오?"

"바로 그렇소. 우리가 의념을 다루며 상상력을 통제하는 그 힘이 있어야 그녀의 몸에 압착된 힘을 풀어내서 제대로 쓸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서문혜 소저는 본디 절정고수에 갓 진입한 수준이었고, 검마에게서 칠대절학을 전수받긴 했으나 초절정에 진입하진 못했던 걸로 알고 있소."

"으음."

"그녀를 낫게 하려면 백약이 무효하며 어떤 술법으로도 안될거라 생각하오. 그녀 스스로가 의념지경의 수준을 올려야 하오."

"......"

해결책은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의념지경의 통제력이 어디 쉬운 것인가? 나는 그걸 얻기 위해서 피나는 지옥훈련을 한 데다가, 초입에 이른 후에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수 년간 반복했다. 내가 아무리 둔재라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라도 의념지경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극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 예쁜 소저한테 왜 그런 엄청난 힘이 생겨난 거야?"

그건 정말로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가만히 있던 서문혜에게 왜 갑자기 이런 이변이 생겼단말인가? 그러자 장내의 혼란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사가 내게 말했다.

"백웅. 그럼 월요의 수호자를 치는 건 조금 미루자. 너는 미호를 데려와라."

"데려올 생각이었어."

"그녀에게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을 거다. 미호를 만나봐야 이 상황을 확실히 규명할 수 있겠군."

파앗

나는 동영으로 향했다. 그런데 동영의 천황궁에 도착하자 내가 익히 알던 풍경과는 달리, 마치 요새같이 변이된 공간이 나타나 있었다. 사방이 방벽으로 둘러싸인 채 견고한 요새로 변모한 곳은 마치 내가 알던 천황궁이 아닌 것 같았다.

"미호!!"

슈슈슉

내가 미호를 부르자,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풍마닌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의 단검과 표창을 들며 적의를 보였는데, 나는 그들을 보자 배알이 꼴리는 걸 느꼈다.

' 내가 미호를 만나겠다는데 네놈들이 뭐라고...'

그 때였다.

"그만 둬."

미호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고, 저편에서 미호가 천천히 귀비의 외모로 걸어왔다. 미호는 전에 봤을 때와 달리 요염하기 보다는 기품이 있는 자태를 띄고 있었다. 동시에 나는 미호에게서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옴을 느꼈다.

우우우우

"......!!"

예전에 전욱의 음신지력을 받았을 때 정도는 아니지만 미호의 힘은 크게 강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대면하자마자 일반적인 대요괴의 힘을 크게 뛰어넘었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물끄러미 미호를 바라보자 그녀가 깔깔 웃었다.

"백웅. 보아하니 중원에 큰 난리가 난 모양이구나."

"말하자면 길지."

나는 그녀에게 흑요석을 건네주었다. 물론 흉신의 행적이 담겨 있는 기억은 그녀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니 일부러 뺐다. 한동안 흑요석을 통해서 기억을 읽은 미호가 두려운 듯 말했다.

"그랬구나... 세상의 음양이 바뀌고 큰 천재지변이 일어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흉신이 나타난 것이었구나!"

"그래서 우리 목표는 현재 칠요를 얻는 거야."

"흐음. 도와주겠다. 현재로서는 너희만이 필멸자들의 희망이겠구나."

"여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미호가 요새 바깥을 흘끔 쳐다보더니 내게 손짓했다.

"바깥을 보거라."

나는 성벽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

쿠어어어

바깥에는 인간의 시체가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었다. 정확히는 죽은 자가 비척거리며 성벽에 비척거리며 올라서려 했고, 그걸 쉴새없이 병사들이 화염통이나 화살 창 등으로 쫓아내고 있었다. 시체의 숫자는 수십만이나 되었고 여기저기에서 요괴로 보이는 놈들이 날뛰고 있었다.

' 바깥에 살아남은 자는 없어보이는군.'

동영은 이미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도시는 이미 파멸한 셈이다. 나는 말을 잃고 그 참상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동영은 모두 이렇게 된 거냐?"

"음양사들의 말로는 이미 에도를 비롯한 주요 도시는 멸망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곳도 풍마닌자단, 코우가 닌자, 음양사들의 지원을 받아서 버티고 있을 뿐 원래라면 내 몸 하나 건사해서 도망치기 급급했을 것이다."

"음양사..."

쉬쉬쉭

말이 끝나는 순간 삼 장 떨어진 곳에서 전이의 술법으로 얼굴이 새하얀 음양사가 한 명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중원 대명제국의 고명한 무인이여. 나는 아베노 쿠로츠치(安倍?土)라 합니다. 본래는 아오키가하라 수해를 관리하고 있었으나 급히 바깥세상을 지원하러 음양사 10인을 데리고 참전했습니다."

"수해는 어찌되었소? 그곳도 음의 기운이 강해서 봉인이 풀린 거요?"

내 질문에 아베노 쿠로츠치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저희의 수장이신 세이메이 님께서 봉인을 강화시켰습니다. 그쪽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대답하기 힘들다는 태도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 서방에 있던 금요의 수호자처럼 자기자신을 희생시켜서 봉인을 지키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동영 최강의 술법사 아베노 세이메이 또한 사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봉인이 풀려서 대요괴가 세상에 쏟아지는 상황은 막았지만 그 여파만으로도 이미 동영이라는 국가 자체가 멸망해버린 것이다.

' 이게 음의 힘이 양의 힘을 압도한 결과...'

흉신이 가볍게 세상의 천칭을 바꾼 것만으로 하루나절만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죽은 자가 일어서서 날뛰는 상황도 음의 힘이 강해져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트러졌기 때문이리라.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호. 나와 함께 거점을 옮기자."

"뭔가 해결책이 있느냐?"

"지금으로서는 칠요를 모아야 한다고밖엔..."

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수밖에 없겠구나. 나도 힘이 나름대로 강해졌으니 네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그러자 아베노 쿠로츠치가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이 교토 성은 우리 음양사와 당신 미호의 힘으로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칠 셈입니까?"

미호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이 곳에서 수십만 마리의 시체와 요괴를 상대로 끝없이 수성전을 한다 해서 뭐가 남지? 이길 수도 없는 무의미한 싸움이다. 백웅은 우리 모두를 이동시켜줄 수단이 있으니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는 게 낫다."

"으윽. 하지만..."

그는 크게 망설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오사카 성으로 가지요."

파앗

음양사들은 이윽고 천황궁에서 사라졌다. 나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과 사람들, 그리고 닌자들을 모아서 모조리 목갑에 집어넣은 후 다두왕국으로 이동했다. 미호가 장내에 도착하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제갈사가 이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왔군."

미호는 흑요석을 통해서 서문혜의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성큼성큼 걸어와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의 힘을 요력으로 흡수해 보마."

그러더니 난데없이 서문혜의 심장에 손을 대더니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빛이 일어나면서 미호의 손을 타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동안 힘을 받으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는데, 나는 혹시나 미호가 죽지 않을지 조마조마해서 지켜보았다. 미호는 점점 인간형을 잃고 얼굴이 원래의 구미호처럼 변하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그러더니 한참 후 미호가 서문혜의 가슴에서 손을 뗐는데,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미호의 꼬리가 빛으로 화하면서 사미(四尾)를 내뿜었고, 일순간 그녀의 털 색깔이 금빛으로 물들어서 금모옥면을 연상케 했다. 한동안 발광하던 미호는 이윽고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오며 말했다.

"더... 더 이상은 흡수할 엄두가 나지 않는구나."

"미호. 어떻게 된 거야?"

미호는 약간 두려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녀 안에 회오리치는 혼돈의 힘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니라."

"무슨 말이야?"

"나는 그 힘을 요력으로 바꾸어서 일부를 내 것으로 만들었지만, 쌓여있는 힘 하나하나가 세상의 목소리를 흘려넣고 있느니라. 마치... 세계의 어둠과 소통하는 것처럼 엄청난 숫자의 의지가 그녀에게 연결되어 있다."

"......?"

"방금 전에 본녀가 조금만 실수했으면 어둠의 힘에 먹혀서 소멸되었을 것이다."

회오리치는 혼돈의 힘?

그렇다면 서문혜의 내부에 응축된 거대한 힘은 혼돈이란 말인가?

다행히도 서문혜는 미호가 힘을 흡수한 덕인지 열이 크게 가라앉고 고통이 사라진 기색으로 편안히 잠들기 시작했다. 제갈사가 서문혜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금은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군. 그녀의 몸속에 맴도는 힘이 혼돈의 성질을 갖고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

"제갈사. 역시 흉신이 음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서 서문혜가..."

"그럴 가능성이 높을 뿐이야."

단호하게 말한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어. 일단 준비부터 완전히 마쳐야겠다."

파앗!

나는 먼저 제갈사와 함께 낙양의 지하로 향했다. 그리고 상관혁을 찾았는데, 상관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없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기척을 살폈으나 역시 상관혁은 아예 없었다. 상관혁 뿐만 아니라 상관가에 속한 가솔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상관가 지하의 봉인을 보았지만 봉인 또한 잘 닫혀 있었다. 제갈사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봉인이 잘 막혀 있잖아. 뭐가 이상하단 거야?"

"봉인이 잘 막혀 있으니까 이상하다는 거다. 현재 음의 기운이 양의 기운보다 훨씬 강력하도록 세계의 법칙이 바뀌었는데 차원문이 멀쩡히 닫혀있을 리가 없잖냐."

"......!!"

"예전에 차원문의 봉인이 풀리고 암천향의 마물이 뛰쳐나왔어야 정상이다. 아무리 망량선사가 낙양을 수호한다 해도 이 봉인은 대결계와는 별개니까."

나는 제갈사의 말에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 곳의 차원문은 원래도 아슬아슬하게 화룡신검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음의 기운이 강해졌으면 부숴졌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없이 잘 닫혀 있다.

제갈사가 말했다.

"전시안으로 살펴봐라. 현재 저 봉인을 유지하는게 무엇인지."

스으으...

나는 전시안으로 봉인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검의 형태를 잃고 파편화된 화룡신검의 조각이 먼저 보였고, 그보다 앞서서 뭔가 특이한 낫 같은 게 봉인에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

' 낫?'

나는 혹시나 해서 먼저 전시안의 힘을 발동해서 화룡신검의 파편을 모아서 원래대로 검의 형태로 만들며 봉인에서 꺼냈다. 투명한 화룡신검의 형상이 봉인에서 서서히 일어나자, 나는 천천히 검에 손을 뻗어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 지난번보다는 별로 안 뜨거워...'

예전에는 델 정도로 뜨거웠지만 이번엔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화룡신검을 끌어내자 봉인이 한순간 크게 요동쳤지만, 역시 봉인이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제갈사가 말했다.

"화룡신검을 만지고도 멀쩡한걸 보니 음신지력이 대신 저항해주나 보군."

"그런가."

이 상태라면 아직까지 화룡신검의 힘을 끌어내지는 못해도 보통 명검처럼 다루는 건 가능할 것이다.

"뭐가 저 봉인을 이루고 있지?"

"웬... 거대한 낫이야. 마치 사람의 목을 베는 듯한 거대한 흑색 기형 낫인데."

내가 전시안으로 본 유물의 형태를 이야기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확실해졌군. 누군가가 상관혁과 상관가 가솔들을 데려감과 동시에 결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강력한 보패급 유물을 박아두고 간 거다. 그 낫 또한 상위보패에 버금가는 물건일 게 틀림없다."

"누가 그렇게 한 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그 자의 실력이 최소한 대라신선급이란 거지. 안 그러면 결계의 보수같은 건 할 수 없어."

"......"

누가 그렇게 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 정체를 캘 시간이 없다.

파앗

우리는 다시 본거지에 돌아온 후 곧장 인원을 꾸려서 월요의 봉인이 있는 마니산으로 향했다. 일행의 최정예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피를 뿌리자, 이윽고 바닥이 터져나가면서 월요의 수호자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쿠오오오오 - !!

예전에 봤을 때와 같은 거대한 악몽같은 괴목(怪木)!

그 모습을 본 아군이 모두 긴장했다. 저 괴물놈은 괴이한 하급마물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괴광선을 쏘기도 하는 재앙급 마(魔)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 허공에 나타난 월요의 수호자를 본 극호가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어... 나만 이상하냐?"

천령단을 이끌어내서 첫 공격을 하려던 이청운이 힐끔 극호를 바라보았다. 극호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백웅 기억에서 봤던 것보다 더 커보이는데."

"......"

"그리고... 눈알도 더 크고."

그랬다.

내가 10회차 전생에서 보았던 월요의 수호자,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형태보다 두 배는 거대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월요의 제단은 아예 먹히다시피 했으며 산이 동강나 버렸다. 게다가 줄기가 구름을 꿰뚫은 데다가 줄기 중앙에 있는 거대한 눈알이 훨씬 거대해 보이는 것이다.

망량이 침중하게 말했다.

"음의 기운이 강해졌기 때문이오. 저 괴물은 본디 수호자로써 억눌려 있었지만 원래는 신화시대의 마왕이었는데, 지금은 그 마왕으로서의 격을 일부 되찾았다 볼 수 있소. 본래는 이청운 님 혼자서도 쓰러뜨릴 수 있겠소만..."

"어려운 말 하지 말고 쉽게 좀 말해 줘, 망량."

"쉽게 말하자면..."

그 순간 이자나기노미코토의 거대한 눈알이 우리 쪽을 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회색광선이 우리 쪽으로 쏘아졌다.

쿠콰콰콰콰쾅!!

그 회색광선의 위력은 예전에 해신이 쏘아대던 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찰나지간에 우리들은 그 광선을 피했으나 어마어마한 위력에 바닷물이 마르고 작은 섬이 사라진 걸 보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망량이 질린 듯 말했다.

"저 괴물은 쉽지 않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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