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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579화 (57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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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전시안을 발동하자 끝없는 암흑의 바다 한복판에서 한줄기 빛을 찾듯 내 감각이 거대한 범위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전국옥새의 정령은 나와 동조해서 머나먼 대지로 내 감각을 옮겼고, 나는 머지않아 낙양 전체의 전경을 수백 리 상공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뇌운이 낙양 위에 흐르며, 일순간 기괴한 그림자가 낙양 전체에 암운을 드리우는 걸 느꼈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

마치 문어와 용과 인간의 모습이 뒤섞인 듯한 - 무언가.

방금 전 구름의 잔영에 비쳤던 어둠의 존재가 낙양의 바로 위까지 도달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 감각을 공유하고 싶어서 잠시 전시안을 유지한 채 흑요석에 손을 뻗었는데, 옆에 있던 제갈사가 내 손을 치고는 기겁을 하며 말렸다.

"그만둬."

"왜? 지금 내가 보는 걸 흑요석으로 너희에게 중계..."

"크크크! 동료들을 전부 다 미쳐버리게 만들 생각이냐."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제갈사의 표정은 당혹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 아!'

그러자 나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갈사는 현재 낙양의 상공에 나타난 [옛 지배자]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존재의 본질을 보통 인간이 목격하는 순간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쳐버릴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이할 정도의 정신방어력 덕분에 전시안으로 직시해도 멀쩡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절대지경이나 환신지경의 초고수들조차 직시만으로 광기를 일으킬 정도의 존재라는 말인가?

"... 저건 뭐지?"

"난 지금 네가 뭘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 네 여행의 종착지일지도 모르는 존재."

제갈사가 공포와 광기로 눈동자를 떨며 말을 이었다.

"부디... 조심해라."

전시안으로 엿보는 것만으로도 횡액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을 하는 동안 낙양의 상황이 시시각각 달라지기 시작했다.

뇌운이 잠시 붉게 물들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하강한다.

' 언어...?'

뇌운에서 서서히 신비한 언어가 포자구름처럼 내려간다. 언어라고 하는 무형(無形)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말도 안될지도 모르지만,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옛 지배자]의 의지가 구현화되어서 전달되는 게 내게는 느껴졌다.

이것이 전국옥새 전시안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본디 인간이나 필멸자의 영역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옛 지배자]나 위대한 존재들의 언어를 해석시켜 주는 것! 아마 전국옥새를 만들어낸 소호금천 또한 그들과 동렬에 있었기에 전시안의 번역능력을 신급으로 향상시킨 것이리라.

쿠르르르르

직접 귀로 들을 때는 그저 뇌운이 일렁이며 기분나쁜 소리를 흘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낙양에 살고 있는 보통 인간들은 뇌운을 쳐다보며 저마다 소리지르거나 공포스러워할 뿐이었다. 이 언어를 알아듣는 존재는 현재 없어 보인다.

그러나 - 내게는 뇌운에서 하강한 언어가 번역되어 들린다.

[ 내 것 이 여 기 있 다 ]

투박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의지가 내게 들려왔다. 동시에 낙양의 시내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 불길은 인간이 지른 것이었다. 곳곳에서 광소와 파괴, 살육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각은 타오르고 피빛이 길가를 물들이며 어둠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비명소리와 함께 처참한 살인이 수십 수백 건이나 일어난다. 인륜은 파괴되고 치안은 소멸되었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걸 보면서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 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상위존재의 의지가 단지 전파되었을 뿐인데, 인간의 뇌는 그걸 받아들일만한 용량이 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광기로 자신을 뒤덮게 된다. 딱히 [옛 지배자]가 권능을 사역한 것도 아니라 말만 했을 뿐인데 수백만 명이 한 순간에 광기에 휩싸여서 대살육의 현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번쩍!

뇌운이 뭔가에 부딪히더니 섬광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섬광을 일으키던 뇌운은 잠시 후에 잠잠해졌는데, 아마도 낙양 안쪽으로 진입하려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 대결계!'

낙양에는 고대부터 대결계가 쳐져 있었고, 그건 아마 망량선사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낙양에 봉인되어 있는 거대한 마(魔)때문에 대결계가 세워졌기에, [옛 지배자]조차 막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결계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낙양의 황궁이 통째로 붕괴되며 지반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쿠구구구

황궁이 있던 자리에서 지하에서부터 개구리의 손 같은 게 튀어나왔다. 거인족처럼 거대한 그 손은 천천히 지상으로 뻗어나오더니 자신의 동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동체 전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꺼비모양의 머리와 짧은 털이 북실북실하게 난 몸뚱이의 괴물이었다.

다만 개구리나 두꺼비라고 마냥 말할 수 없는게 다른 기이한 동물들의 특징이 한 몸에 들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기괴한 이족을 많이 보아 왔기에 저 정도는 흉악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나, 나는 잠시 후 눈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윽."

"백웅. 괜찮소?"

망량이 걱정스럽게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눈을 바늘로 찌르듯이 아프다!

왜 아픈 거지?!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신의 본체를 직시하지 마라. 아무리 전시안의 힘이 강해도 분노를 살 수 있다."

"알았어."

아무래도 [옛 지배자]를 직접 전시안으로 지켜보면 자연히 두르고 있는 저주의 힘 때문에 피해를 입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에서 신급 보패로 지켜볼 뿐인데도 실재하는 피해를 입다니 [옛 지배자]의 마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듯 했다.

동시에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 '두꺼비'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 은카이의 수면자!!'

황궁의 흑막, 강력한 [옛 지배자]의 1인, 동시에 고대부터 내려오는 마(魔)의 세력인 복마전(伏魔殿)의 중간관리자! 여태껏 그 압도적인 존재를 직접 세상에 드러낸 일은 한 번 밖에 없었으나 그 당시의 위용은 잊을 수가 없다.

두꺼비의 시선이 천천히 천상의 뇌운으로 향하더니 마주 '말'을 쏘아보냈다.

[ 너 의 영 겁 으 로 돌 아 가 라. 여 기 에 기 어 오 는 혼 돈 이 있 나 니 ]

키이이잉

기괴한 일이었다. 두꺼비의 말이 쏘아지자 지상에 창궐한 광기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인간들이 제정신을 찾은 듯 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믿지 못해서 아비규환이 되어서 들끓었으나, 현재 두 신격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은 일로 보였다.

그래, 전시안으로 멀리에서 보니 [옛 지배자]의 시선을 이해할 것 같다.

저들에게 인간은 정녕 벌레만도 못한 것이다.

오오오오오 -

그러자 뇌운이 점차 꿈틀거리더니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묵시의 용이 천공으로 손을 뻗었다.

영겁이 그의 손에 맴돌았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성좌가 고고하게 빛났고, 낮의 하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한다. 낮에서 밤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화악

"아, 아니?!"

뒤늦게 장령곡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낙양을 진원지로 해서 뇌운 속의 존재가 천지천상의 밤낮을 뒤바꾸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그 가공할 대이적(大異蹟)의 광경을 지켜보다가 황급히 천우진에게 물었다.

"천우진! 이건 태평요술의 극의같은..."

"으... 으윽..."

천우진은 평소에 자신감 넘치고 오만하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고, 굵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땀을 뻘뻘 흘리던 천우진이 무릎을 꿇더니 울부짖었다.

"틀렸어...!! 저런 게 나타나다니... 이 세상은 끝이야...!!"

천우진은 미친듯이 꿇어앉아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커헉!"

그러더니 심마가 도달했는지 잠시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술법의 극의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욱 더 지금 나타난 [옛 지배자]와의 격차를 쉽게 이해한 것일까? 현재 지상계 최고의 술법사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천우진은 이미 마음이 꺾여버린 모양이었다.

망량이 급히 천우진의 손을 잡고 진정시켰다.

"사제! 진정하게! 저 존재가 아직 우리를 공격하진..."

"무의미하오! 무의미하다고...!! 으흐흐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시오 사형?"

"나는 잘 모르겠네. 낮과 밤이 뒤바뀌었다고밖엔."

이어진 천우진의 말에 좌중이 모두 충격을 받았다.

"저 존재가... 성좌의 힘으로 이 세계의 물리적인 법칙을 바꿔버렸소! 지금 이미 세계의 지축(地軸)이 뒤집히고 음(陰)이 양(陽)을 집어삼켰단 말이오. 난 저런 게 가능하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저런 힘을 가진 존재와 싸운다고? 정말로?"

"......!!"

"태평요술? 웃기지마!! 그딴거랑 어떻게 비교를 해... 빌어먹을... 빌어먹을..."

천우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무릎꿇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일행 중에서 객관적인 전력이 가장 강력한 천우진이 제일 먼저 전의를 꺾일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기에 다들 침묵했다. 그 때 가장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던 것은 이청운이었는지, 그는 하늘의 어둠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 신이 법칙을 바꿨다면 이유가 있겠지. 백웅, 자네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흠..."

나는 머리를 굴렸다.

방금 전의 대화상황으로 볼 때 용과 같은 [옛 지배자]는 낙양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원하며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고, 수면자는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 결과로 천우진의 말대로 세상의 법칙을 바꿔써서 지축음양을 역전시켜버린 것이다.

"실력행사를 하려는 것 같은데요..."

점점 어둠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고, 낙양의 지반은 쩍쩍 갈라지며 지진이 났다. 그 지진은 단지 낙양에서 끝나는 게 아닌지, 천공에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하게 지면이 융기되고 침하하기를 반복했다.

쿠구구구...

낙양성이 물리적으로 파괴되면서 뇌운에서 여러 줄기의 번개가 간헐적으로 내리쳤다. 그 번개 하나하나에는 '말'이 스며들어 있어서, 마치 수면자에게 강요하는 듯 했다. 세계를 뒤덮는 어둠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뇌운 속의 존재가 서서히 박쥐같은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달을 등지며 뇌운 속의 존재가 완연히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흉신(凶神)."

오백여 년 후 인간을 멸하고 [옛 지배자]를 부활시킬 존재!

흉신이 계속해서 엄청난 권능을 발휘하여 대결계를 압박하자, 대결계는 점차 쩍쩍대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황궁에 앉아 있던 두꺼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묵한 눈으로 천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 봉 인 은 연 결 되 어 있 다 힘 으 로 부 수 면 안 된 다 그 분 께 서 큰 상 처 를 입 는 다]

그러자 흉신이 마치 비웃듯 자신의 힘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고, 이윽고 전시안에는 중원 전역에서 화산(火山)이 분출하고 용맥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음양이 역전되었다는 게 거짓이 아닌지 대요괴들이 난데없이 수십 마리 씩이나 탄생했고 어둠의 존재들이 여기저기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흉신은 흉맹한 안광을 발하며 위협적으로 대꾸했다.

[ 봉 인 을 부 수 고 나 면 너 를 영 원 히 없 애 주 마 그 놈 도]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흉신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 미... 미친...'

흉신이 이 자리에 나타난 목적은 2가지였다.

한 가지는 초상기인의 인과율을 거머쥐고 있는 은카이의 수면자를 없애는 것.

또 한 가지는 그걸 위해서 낙양의 대결계를 부수고, 나아가서는 낙양에 봉인되어 있는 마(魔)조차도 없애버리는 것!

말 그대로 자신의 힘에 절대적인 자신을 지니고 있는 패도(覇道)의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 뭐지? 그렇다면 인과율을 수득한 것은 은카이의 수면자가 확실한데... 어떻게 흉신은 저렇게 날뛸 수 있는 거지?'

나는 재빨리 제갈사에게 말했다.

"제갈사!"

"흐흐. 얼른 기억을 전송해라."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기억 전체가 광기의 혼돈인 이상, 이미 광기에 잠식되어 있는 제갈사만이 이 기억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렇다 해도 보통 인간이라면 몇 번이고 자살할 만큼 암울한 절망이 느껴질테니 제갈사에게 미안했다.

파앗

제갈사는 흑요석으로 내가 본 광경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반으로 나뉜 거다..."

"반으로?"

"두 명의 옛 지배자가 초상기인을 반쪽으로 갈라먹은 것이다. 아마도 처음부터 계약이 그렇게 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건 주작이 의도한 바겠지."

"그렇다면 현재 둘 다 인과율을 반씩 획득한 상태란 말인가?"

제갈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두 놈 다 욕심쟁이다. 하지만 흉신이 좀 더 욕심이 강해서, 은카이의 수면자를 해치워버리고 나머지 절반도 얻어버리겠다는 심산이다. 덤으로 대결계까지 부수고..."

"그게 가능한가? 둘 다 [옛 지배자]이니 동렬이 아니냐."

내가 의문스러워서 제갈사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격차가 있지. 내가 볼 때 현재의 흉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옛 지배자]끼리 살육해서 없애버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야."

"저 자들은 혼돈의 혈육으로써 혈연관계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신에게 혈연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그건 인간의 관점일 뿐, 저 자들은 궁극의 자아와 이기심의 결정체라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

상황은 이제 이해되었다. 나는 다급하게 제갈사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흉신이 이기지 못하게 하려면 삼황오제를 끌어들여야 할텐데 가능할까?"

"... 해 봐야 알겠지만."

제갈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 전에 결판이 날 것 같다."

"앗!"

나는 갑자기 전시안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급변하자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쿠구구구구...

낙양성은 이미 완전히 붕괴되었고, 살아있는 인간은 1할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연속된 광기의 물결에 대지진, 화재까지 겹쳐지자 그 짧은 시간에 9할이나 되는 인간이 피떡이 되어 죽어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은카이의 수면자는 황궁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뭔가 주문을 외워서 허공에 있는 흉신을 공격했다.

파앙!

하지만 흉신이 두르고 있는 무형의 방어막은 아주 손쉽게 그 공격을 차단해 버렸다. 흉신이 손을 움켜잡는 자세를 취하더니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푸콰콱

[ 오 오 오 오 ...]

신의 비명소리!

마치 송장개구리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는 수면자는 큰 타격을 입은 듯 왼팔이 잘려나가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흉신의 권능이 대결계를 무시하고 [옛 지배자]를 상처입힌 것이다. 흉신이 잠시 박쥐날개를 팔락이더니 언령(言靈)을 허공에 내뿜었다.

[ 만 왕 의 왕 께 서 계 시 를 내 려 주 셨 노 라 ]

[ 헛 소 리 ....]

[ 태 고 의 서 명 이 내 손 에 있 으 니 너 는 내 적 이 될 수 없 다 ]

만왕의 왕?

태고의 서명?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언령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었는지, 갑작스럽게 허공의 대결계가 요동치더니 여기저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흉신이 자신의 힘을 퍼붓자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대결계가 파괴되려 하는 것이다.

대결계가 파괴되면 - 사상최악의 마(魔)가 풀려난다.

흉신은 그 존재조차 없애버릴 수 있다는 걸까?

내가 그 전개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스아아아 -

은빛이 갑작스럽게 대결계 근처를 감싸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옛 지배자]끼리의 가공할 전투에 끼어든 은빛은 갑자기 크게 번쩍이더니 놀라운 일을 벌였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휘리릭!

완전히 파괴되어서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멸절해버린 낙양 성. 그 참극의 대지는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 복원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현상이 아까 유신을 통해서 목격했던 '시간회복'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건 일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낙양 성 전체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생명이든 물질이든 모조리 저 존재의 의지대로인 듯 하다! 다만 신이 신에게 입힌 피해는 회복시켜줄 수 없는 듯 은카이의 수면자는 여전히 정신이 혼미한 듯 했다.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 은빛 너머로 검고 어두운 안개가 나타나서 얼굴같은 형상을 했다. 안구 없이 희멀건 그 어둠의 얼굴이 흉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 계 시 의 때 는 지 금 이 아 니 다 ]

저 존재는 누구일까?

그러자 흉신은 퍼붓던 공격을 멈추고 그 존재를 마주보았다.

[ 천 상 에 서 떨 어 진 존 재 여 나 를 막 지 말 라 ]

[ 막 을 것 이 다 ]

[ 누 가 그 대 에 게 벌 레 를 지 키 라 명 했 는 가 ?]

흉신은 반문하면서도 왠지 초조한 기색으로 보였다. 그러자 그 존재는 침묵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치상태가 잠시 계속되자 흉신이 주문을 외쳤다.

[ 죽 어 라 ]

푸콱

그와 동시에 지상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옛 지배자], 은카이의 수면자가 난데없이 사지분해당해서 처참하게 흩어졌다. 신의 힘으로도 막지 못하는 공격이었는지 그는 빠르게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수면자가 가지고 있던 인과율을 흡수한 흉신은 자신을 막아선 은빛 존재에게 말했다.

[ 그 대, 계 시 의 때 에 다 시 만 나 자 ]

스스스스...

흉신이 혼돈의 문을 열고 씻은듯이 사라져 버렸다. 뇌운도 사라져버렸고 은빛의 존재도 이윽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성좌의 마력은 풀리지 않았다. 흉신이 천지의 균형을 뒤집어버린 게 사실인지 여전히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낙양성의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미쳐있거나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제갈사의 말대로였다.

삼황오제가 끼어들 여지도 없이 순식간에 신격끼리의 결투가 결판이 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형태로!

나는 이제 상황이 일단 끝난 걸 알아채고 제갈사에게 다시 기억을 공유했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중원은 끝장났다. 화산도 폭발하고 요괴와 이족이 창궐할테니 다두 왕국으로 도망치자. 조만간 도처에 봉인된 마왕도 부활할테니 정말 최악이군."

"사람들을 도와줄 순 없을까?"

"음양과 지축을 바꿀 수 있으면 가능하겠군. 한 번 해봐라."

"......"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는 짐을 챙기면서 생각했다.

' 가봐야 해.'

다두왕국에 가기 전에 반드시 망량선사를 만나봐야 한다.

왜냐하면 방금 전 흉신을 가로막은 은빛 존재 - 그건 틀림없이 망량선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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