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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578화 (57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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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파앗

나는 일행과 함께 황궁으로 왔다. 황궁에서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로 수정석비의 앞이었으나 그 곳에는 이미 수정석비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초상기인 제작의 방에도 들어가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제갈사가 씹어뱉듯 말했다.

"역시 연구성과와 수정석비를 갖고 도망쳤군."

"연금술사 놈은 황궁이 패배할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건 알 수 없군. 아무튼 빨리 움직이자."

제갈사는 묘하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전국옥새가 있는 결계로 향했고, 천우진의 강대한 술력 덕분에 한번에 결계를 파해하고 손쉽게 전국옥새를 손에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예전처럼 전국옥새에 손을 대자마자 계약의 정령과 만날 수가 있었다.

전국옥새의 계약을 마친 후 현실로 되돌아오자, 제갈사가 말했다.

"우린 그 연금술사의 진명(眞名)을 알고 있지. 놈이 도망쳤다 해도 전국옥새 전시안을 이용해서 찾을 수 있다."

"당장 찾아 볼게."

우우웅

"전국옥새여. 전시안으로 연금술사 생 제르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라!"

[ 네, 알겠습니다.]

잠시동안 옥새가 진동했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정보를 모으고 있던 전국옥새가 말했다.

[ 생 제르맹의 검색결과는 총 2건입니다.]

"2건? 위치를 알려 줘."

[ 여기 있습니다.]

스스스...

허공에 화면같은 게 떠오르더니 동시에 두 개의 상황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나타냈다. 하나의 화면에는 낡은 방에서 손을 부들거리며 공부를 하는 서양의 노인이었고, 또 하나의 화면은 어두운 공방에서 수정석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연금술사였다. 나는 두 개의 화면을 보며 황당해서 말했다.

"두 놈 다 연금술사 생 제르맹이라는 건가?"

"한 놈은 우리가 지금 잡아야 할 그 놈이 맞고, 저 늙은이는 생 제르맹을 사칭한 삼류겠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국옥새에게 연금술사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잠시 후 전국옥새는 내 머릿속에 연금술사의 위치를 입력해 주었고, 나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즉시 알 수 있게 되었다.

' 서역의 초입이군.'

위치로 치면 아라사 제국의 서쪽 국경이 끝나고 본격적인 서양 열국의 영토가 시작되는 곳이다. 나는 저 놈이 그 짧은 시간이 저기까지 도망쳤다는 게 살짝 기가 막혔지만, 어쨌든 동료들에게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자 망량이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서쪽으로 도망친다는 건 역시 놈의 본거지가 서방에 있다는 뜻."

"지금 당장 잡는게 낫지 않겠소?"

"... 나는 반대요."

"응?"

"이렇게 된거, 놈이 어디까지 도망치나 한 번 지켜보는 것도 좋을 듯 싶소. 그래야 저 놈이 근거지로 삼는 장소나 세력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게 좋겠군."

어차피 지금 당장 수정석비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전시안을 써서 놈의 위치는 언제든 알아낼 수 있다. 마치 쥐를 놓아줘서 쥐굴을 찾아내듯 방치해두는 게 더 나은 것이다.

우리는 전국옥새를 얻고 난 다음 황궁의 태룡전으로 들어가서 황제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자 그 곳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아아악."

"폐하! 제발..."

크워어어

키가 이 장이나 되는 외눈박이 괴물이 거대한 손톱을 휘둘러서 시비와 내시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괴물의 몸 여기저기는 흉칙하게 썩어 있고 볼썽사나운 혈관과 촉수가 비져나와 있어서 비위를 상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괴력을 지니고 있는지 이미 수십 명의 시체가 황궁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그 참극을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저런 괴물이 된 건가?"

"진소청."

망량이 진소청을 크게 부르자, 진소청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전방으로 신형을 쏘아냈다. 그리고는 날뛰고 있는 괴물에게 다섯 번의 창섬을 먹였고, 괴물은 잠시 후 전신에 벌집처럼 구멍이 나서 쓰러졌다.

쿠구구궁

쓰러진 외눈박이 괴물은 한참동안 초록색 피를 바닥에 질질 흘리다가 점차 그 몸뚱이가 줄어들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형태가 변화하며 축소되던 그 괴물은 약 반 각의 시간이 지나자 알몸의 중년사내로 변했다. 물론 그 모습은 기절해있는 현 대명제국의 황제의 모습이었다.

극호가 황제의 뒷목을 잡고 잠시 맥을 짚어보다가 말했다.

"죽었어."

"당연하지. 마도의 비술이 폭주해서 괴물이 되었다가 변화가 풀렸으면 인간의 영혼과 생명력으로는 버틸 수 없다."

제갈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말했다.

"백웅. 확인할 게 있으니 천신경의 술법을 써라."

"황제의 넋을 부르면 되겠냐?"

"잘 아네."

파바밧

십지에서 불꽃이 일렁이더니, 나는 손쉽게 황제의 영혼을 초혼할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죽은 영문을 모르는 듯 몸을 벌벌 떨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 아악! 제, 제발 날 도와줘. 뭐든 하겠다. 절대 거기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인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질문하려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그 때였다.

[ 끄아아아악!! 안 돼!! 제발... 생지옥은 싫어!!]

"으윽."

갑자기 광풍이 불어닥치더니 황제의 영혼이 허공 어딘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신경의 술수를 유지하면서 이혼대법의 흡입력으로 최대한 버텼지만, 마치 찰떡을 길게 늘리듯 황제의 영체가 늘어날 뿐이었다. 이윽고 흡입력이 점차 강해지며 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옆에서 제갈사가 말했다.

"못 이기니까 놔 줘라."

"응."

파아아악

황제의 영혼은 내가 손을 놓자 어디론가 바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나는 손을 털고는 의아해서 제갈사에게 물었다.

"마치 아까 제갈유룡이 튕겨날 때와 같은 현상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황궁 소속의 모든 영혼들이 신의 의지로 회귀하고 있는 거다. 신이 직접 영혼을 수확하려 하는 거니까 너와 내가 아무리 이혼대법의 달인이라 해도 그걸 막을 순 없지."

"......!!"

"할려면 불쌍하게 죽은 시비들의 영혼이나 챙겨줘라. 저 놈들까지 생지옥에 말려들 이유는 없으니."

나는 흠칫 놀랐다.

신의 수확!

그렇다면 황궁을 지배하는 [옛 지배자]가 손수 그들의 영혼을 챙기고 있다는 소리인가? 나는 제갈사의 말을 이해하고 재빨리 이혼대법으로 주변에 부유하고 있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챙겼다. 이혼대법의 요결에 따라 그들의 영혼을 잠시 보관해 두자 검마가 제갈사에게 질문했다.

"제갈사. 신이 갑자기 영혼을 대대적으로 수확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제갈사."

"마도사의 지식으로 짐작가는 건 있어. 그래서 황궁에 와서 챙길 건 다 챙기러 온 거다."

제갈사는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다 챙겼으면 어서 도망치자. 여기는 곧 난장판이 될 거다."

"무슨 소리야? 제갈유룡도 죽고 황궁세력은 전멸했어. 신이 또 다시 사도를 내려보낸다는 소리인가?"

"아니. 더한 일이 벌어지겠지. 아무튼 빨리 도망치자."

파밧

우리는 장령곡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기나긴 사투가 끝난 하루인데도 누구도 섣불리 앉아서 쉬려고 하지 않았다. 결코 그 결말이 만족스럽게 난게 아니었을 뿐더러 제갈사가 앞으로 남은 고난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원형으로 둘러앉자 제갈사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이 장령곡이나 망량의 진랑곡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이곳은 수도 낙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초상기인... 유신의 말대로 좀 더 멀리 대피해있을 필요성이 있어."

검마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린가. 장령곡이나 진랑곡이라 해도 황궁에서 수백 수천리 가까이 떨어져 있는 곳인데 그래도 부족할 정도의 사건이 터진다는 말인가?"

"그래. 곧 터질거야."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뭔지 듣고 싶군."

제갈사는 손깍지를 꼈다. 그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초조하게 광기에 잠겨있는 눈빛이 흐르고 있었다.

"유신은 [옛 지배자]의 부름에 응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저 홀려서 [옛 지배자]의 광신도가 되는 것에서 끝나겠지만, 유신은 처음부터 흉신의 의지를 대행할 사도로써 만들어진 초상기인이라는 게 문제다."

"어떤 문제지?"

"사도가 자신의 모든 영혼과 존재를 신에게 바친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하자면 그 [옛 지배자]가 지상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인과율(因果律)을 수득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고 있나?"

옆에서 듣고 있던 망량이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삼황오제조차... 그 [옛 지배자]가 중원에서 난장판을 치는 걸 막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군요."

"그래. 삼황오제는 중원을 다스리는 집주인이지만, 정당한 권리행사를 인정받은 포쾌가 집 안을 수색하거나 뒤져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직접 강림도 가능하겠군요."

[옛 지배자]의 직접 강림!

지금까지의 23번에 이르는 전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제갈사가 자신의 영혼과 무명제사서를 매개로 밀림의 지배자를 소환한 적은 있었지만 그나마도 완전한 소환이 아니었다.

나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제갈사에게 물었다.

"그건... 과거 내 몸에 삼황오제 전욱이 강림했던 것과 같은 상황인 거냐?"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자유도는 이번 상황이 훨씬 더 높아. 너는 스스로 영혼을 내어주는데 동의하지 않아서 그저 전욱이 반강제로 몸을 뺏은 상황이었지만, 초상기인이 부름에 응함으로써 인과율의 자유도는 최고가 되었다."

제갈사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 문제는 그 초상기인이 '누구'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쳤는지다. 그걸 모르겠어."

"왜?"

"흉신을 위해 예비된 존재라고는 하지만 저 계약은 틀림없이 은카이의 수면자와도 관련되어 있다. 초상기인처럼 강력한 매개체를 신격이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지. 그래서 둘 중 누가 인과율의 자유를 획득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

나는 제갈사의 말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즉... 조만간 흉신이나 수면자 둘 중 한 놈은 중원에 강림한다는 거군."

"그렇다. 방금 전에 수면자가 황궁의 모든 영혼을 빨아들이려 한 건 그때 발생할 거대한 충돌을 대비하는 거겠지."

"삼황오제가 화를 내며 끼어들 가능성은 없을까?"

"있겠지만, 어지간해서는 지켜보고만 있을 가능성이 크다. 놈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심한지 알고 있지 않느냐?"

"......"

그렇긴 하다.

백만 명 정도 죽는 걸로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을수도 있다.

천우진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군!"

모두의 시선이 천우진에게로 향했다. 천우진이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제 우리가 뭘 하든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냐? 신들이 날뛰는 상황에서 본거지를 옮긴다 한들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

맞는 말이었다.

알아봤자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절대적인 절망이 내려앉는 듯한 분위기가 좌중에 감돌았다. 그러자 천우진에게 제갈사가 대꾸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겠지. 우린 아마 다 죽을 거다. 하지만 언제 죽느냐는 의미가 있어."

제갈사가 힐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백웅이 있기 때문이지."

"......"

"인류가 전멸해도 좋으니 백웅을 하루라도 더 살려두는 게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아직까지 포기하기엔 일러."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가능하면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좋겠지만 너무 떨어진 곳도 좋지않아. 추천할만한 장소 없나?"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다두 왕국이 어떨까 싶군요."

"마테오 리치의 도움을 받자는 건가?"

"중원에서 실제로 떨어져 있는 장소니까요. 그리고 물자를 보급하기도 쉽고."

우리는 잠시동안 회의를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후보지를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다두 왕국으로 일단 근거지를 옮긴 후 2차로 화요가 있는 남쪽 대륙을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남쪽 대륙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중원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갈사에게 물었다.

"그럼 칠요를 찾는 것도 재개할까?"

"당연하지. 어차피 이번 삶은 오래 살긴 글렀다. 당장 코 앞에 죽음이 닥쳐와 있으니 되려 칠요를 적극적으로 얻어야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월요나 화요부터 얻어야겠군."

"물론."

지금까지는 십이율주의 눈치가 보여서 가만히 놔두고만 있었으나, 월요는 얻기 가장 쉬운 칠요 중 하나였다. 해방은 다른 문제였으나 일단 미해방 월요를 얻는 것 자체는 쉬운 것이다. 수호자를 쓰러뜨리는 게 귀찮은 일이긴 했으나 그것도 그냥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화요 또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현재 봉선의식이나 천계와의 연결이 손쉬울지 의문이었으므로 월요보다는 훨씬 어려웠다.

' 그리고...'

십이율주가 뒈진 게 사실이라면 목요도 잘하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칠요를 얻을 계획을 짜기 위해서 내가 책사들과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모두가 놀라서 바깥으로 달려나가자, 서쪽 하늘이 마치 깨진 것처럼 부숴지며 거대한 뇌운이 엄청난 기세로 이동하고 있었다. 뇌운은 보통 크기가 아니었고 마치 하늘 전체를 시꺼멓게 물들이는 듯 했다.

어둠속에서 히끗거리며 거대한 뭔가가 날아가는 듯 하다. 번개 사이로 인간인지, 두족류인지 모를 '무언가'의 형상이 비쳤으나 마치 눈의 착시인 듯 곧 사라졌다. 그러나 저 구름에 엄청난 혼돈의 기운이 모여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늘은 물론 땅까지 공진(共振)하며 다가올 참극에 숨죽이는 듯 하다.

"전시안을 켜라, 백웅."

제갈사는 광기어린 미소를 히죽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쪽은 낙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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