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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577화 (57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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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내 말에 백발의 초상기인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반응은 놈만이 아닌지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라면 괜찮겠지. "

하지만 잠시 후 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내 이름을 지어 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유신(有信)이다."

"유신?"

"인간을 지키고 믿음을 주는 녀석이라는 뜻이다."

"헤에..."

초상기인은 기뻐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멋지다. 내 이름은 지금부터 유신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백련교주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 너무 이름을 대충 짓는군...]

"누구든 이름대로만 살면 가장 좋지 않습니까?"

[ 그렇긴 하지만.]

나는 유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신. 너는 앞으로 인간을 함부로 깔보지 말고 지켜줘라."

그러자 유신이 잘 이해가 안간다는 듯 말했다.

"내가 왜? [부름]께서는 내게 인간을 부려먹고 노예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안 돼. 그건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잖아."

"선택...?"

나는 팔짱을 낀 채 혼란스러워하는 유신에게 말했다.

"네가 인간을 학살해도 알 바는 아냐. 그런 짓을 하면 몇 번이라도 내가 막을테니. 하지만 네 의지가 아닌 것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그건 용납할 수가 없다."

"자유의지? [부름]이 바로 나의 의지야."

"아니! 전혀 다르다는 걸 너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냐? 네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잖아."

"......"

"네가 타고난 거대한 힘을 휘둘러서 없애기에는 인간은 너무 약하다. 가능하면 인간을 도와주고 지켜 줘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부름]의 뜻과는 반대되는데."

유신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녀석에게 강하게 외쳤다.

"저항하면 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유신의 눈빛은 갑자기 크게 탁해지더니 음울하게 변했다. 마치 탁한 기름이 낀 것처럼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유신이 크게 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제멋대로 해 주셨군... 설마 이런 식으로 내 작품을 망칠 줄은..."

뭐지?

나는 갑자기 급변해버린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유신의 인격이 아닌 '다른 것'이 빙의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랜 세월동안 배교의 이혼대법을 익혀왔기 때문이다.

"주작인가."

아마도 미리 빙의할 수 있는 술법을 걸어놓고 자신의 영혼을 초상기인 내에 수신한 것이리라. 그리고 나중에는 이 방법으로 초상기인의 가공할 능력이 자신이 쓸 셈이었으리라.

내 말을 침묵으로 긍정하듯, 유신의 몸을 차지한 주작이 음울하게 웃더니 말했다.

"하... 하하... 이름을 짓는다는 건... 존재의 실존을 규정하는 것... 과연 기가 막힌 한 수지만... 원래부터 흉신을 위해 예비된 존재에게 그게 얼마나 통할까?"

"확실히 통했지."

나는 주작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통하지 않았다면 네놈이 여기까지 기어나올 리가 없잖느냐."

"... 하하..."

"슬슬 포기해! 네가 믿고 있던 황궁세력이 망했는데 더 해볼 생각이냐?"

"난 포기하지 않는다..."

유신의 몸을 차지한 주작이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 뜻대로 천상을 파멸시키고... 내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전까지는 절대...!!"

우우우웅!!

그 순간이었다. 그 주변에 수천 개나 되는 부적이 한꺼번에 떠오르더니 좌중을 감쌌다. 찬연하게 나풀거리는 부적들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흘렀는데, 나는 그 공격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경악했다.

"낙혼별부!"

파바밧

낙혼별부의 부신술 결계가 펼쳐지자 엄청난 속도로 부적이 사방으로 내려꽂히며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술사들은 재빨리 방어막을 치며 낙혼별부를 막았고, 무인들 또한 강기막을 소환해서 공격을 막았다. 백련교주가 화가 났는지 심천무량을 돋우며 나직이 말했다.

[ 끝까지 해 보자는 거군...]

쿠콰쾅

백련교주가 날린 섬광이 유신의 몸뚱이에 날아가서 적중되자 그는 크게 뒤로 날아갔다. 물론 다시 몸이 회복되었으나 고통은 느끼는 듯 했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사가 내게 순어구로 말했다.

[ 백웅. 지금이 기회다. 놈은 크게 약해져 있다.]

[ 왜?]

[ 초상기인의 본래 인격이라면 시간의 소용돌이를 움직여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겠지만 제갈유룡은 빙의해도 그 능력을 쓸 수 없는 거다. 지금이라면 저건 그저 불사신이 된 제갈유룡에 불과해.]

[ 어떻게 할까?]

[ 천우진을 호위해서 놈에게 접근시켜라. 천우진이라면 놈의 영혼만 봉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알았어!]

파밧

나는 순식간에 천우진 옆으로 이동했고, 천우진은 단번에 내가 하려는 걸 알아챈 듯 자신의 기를 손가락 끝에 모은 자세로 말했다.

"원래도 낙혼별부는 스치기만 해도 탈혼(奪魂)해 버리는 강력한 술법인데 초상기인의 막대한 잠재력 때문에 강화되어 있다. 맞으면 누구든 즉사할테니 조심해라."

"걱정 붙들어 매. 봉인할 수 있겠지?"

"날 뭘로 보는 거냐?"

"가자!"

나는 천우진보다 앞서서 낙혼별부의 결계를 돌파했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수천 개의 부적들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었는데, 나는 그 공세를 빠르게 확인한 후 삼보절기를 이용해서 제자리에서 수십 번이나 몸을 날려서 피했다. 그리고 적당히 부신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자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마치 소몰이를 하듯이 결계를 약화시켰다.

타닷

그 사이에 천우진은 축지법을 써서 보다 수월하게 주작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주작은 천우진이 다가오자 두 손을 모아서 저주를 날렸으나, 천우진은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 주문을 외칠 뿐이었다.

"급급여율령!"

저주는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분해되었고 천우진은 주작의 일 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작은 유신의 몸을 움직여서 허공에 무공술을 써서 날아갔지만 천우진은 재차 두 손가락을 모으며 나직이 외쳤다.

"급급여율령."

츄와악

[ 크아악.]

그러자 유신의 몸은 가만히 있는데 정수리를 통해서 주작의 영체(靈體)가 뽑혀나오는 게 보였다. 직접 접촉하지도 않았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신기했지만, 자세히 보니 지금 영체를 뽑고 있는 건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 나찰(羅刹)이었다.

[ 크오오오오.]

"저항하지 마라! 영체가 직접 뽑히는 고통은 산 채로 살갗을 벗기는 것과 같으니."

천우진이 두 손가락을 모은 채 준엄하게 호통을 쳤지만 주작은 끝까지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천우진이 한층 더 힘을 모아서 강제로 주작의 영혼을 뽑아내자 그제서야 비명이 잦아들었다. 천우진은 주작의 영혼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나 천우진, 대죄인을 천계로 보내리라."

스스스

빛이 천공에서 내려오더니 주작의 영혼을 비추었고, 거대한 투명한 손이 천천히 내려와서 그 영혼을 가져가려는 듯 잡았다. 이제야 이번 생에서 주작 토벌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천우진이 얌전히 주작의 영혼을 그 손에게 인도하려는 순간이었다.

촤악

"아니!!"

뜬금없이 천계로 소환하는 거수(巨手)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거수의 손목이 잘려나감과 동시에 무거운 기운이 장내를 휘감았다. 방금 전까지 주작이나 유신이 내뿜고 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고, 거수의 손목을 자른 날카로운 기운은 마치 촉수처럼 일렁거리며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다.

' 크윽.'

나는 이를 악물고 재빨리 이혼대법을 시전해서 허공에 부유하는 제갈유룡의 영혼을 내 쪽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갈유룡의 영혼은 어디론가 날아가려 했기에 그 자리에 붙잡아두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갈사에게 순어구로 외쳤다.

[ 제갈사! 이혼대법을 도와줘.]

[ 알았다.]

이혼대법 최대 시전!

쿠구궁

마치 나와 제갈사 둘이서 거대한 수레를 끙끙대며 끌어오듯 제갈유룡의 영혼을 가져오려 했지만, 조금씩 이쪽으로 오는 듯 하더니만 결국 튕겨지듯 하늘 너머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내가 허망해서 지평선을 쳐다보고 있자 제갈사가 말했다.

[ 보통 일이 아니군. 나는 이혼대법의 대가이자 현 배교교주이고, 네 녀석도 이혼대법을 육 성 넘게 익혔는데 우리 둘이서 영혼 하나를 끌어오지 못했다니...]

[ 도대체 누가 가져간 거지?]

[ ... 심상치 않다. 이 공기는...]

그러고보니 제갈사의 말대로 아까부터 공기가 이상하다. 제갈유룡의 뒤틀린 광기가 뿜어내던 칙칙한 기운도 이상하긴 했지만 이건 뭔가 차원이 다르다. 원초적인 악의가 땅과 풀과 공기에 가득 맺혀서 인간을 광기로 몰아세우는 듯한 섬짓한 공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지 장내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을 열기만 하면 그대로 뭔가가 끝장내 버릴 것 같은 처참한 분위기였다. 그나마 저항력이 높은 것은 백련교주였는지 그가 크게 외침을 토해냈다.

[ 갈(喝)!]

그 외침에는 정신통일의 효과가 있었는지 분위기가 잠시 일신했다. 백련교주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 백웅이여. 뭔가가 나타날 것 같다.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군.]

"교주는 초상기인을 차지하려 하지 않으시는군."

[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라고 판단된다. 저 놈을 데려갈지 없앨지는 그대의 선택에 맡기겠다.]

나는 허공에 둥둥 떠서 눈을 감고 있는 유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지금이라면 내 음신지력의 힘을 검에 모아서 일격에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까는 자기보호본능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가사상태에 빠진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재앙이 될지 모를 유신을 척결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필수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유신에게 이름을 지어줬다. 녀석이 타고난 숙명에 지지 않고 인간을 도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믿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녀석을 베어버리는 건 배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지?

나는 크게 고민하다가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유신."

번쩍!

내 말이 들리자마자 유신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를 처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안... 백웅. 이상한 녀석이 내 몸을 뺏아버리길래 당황해서 [부름]에 응해버렸어."

"뭐? 무슨 말이야?"

"난... 이제 내가 아니야."

유신은 잠시 침묵했다.

"이 이름을 가지는 건 '그 분'께서 특별히 허락해 주셨지만 더 이상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셨어. 그리고, 그리고, 아주 무서운 것이... 성좌 너머에서 온다... 심연의 성좌에서 기어온다..."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유신이 말했다.

"그 분은 말씀하셨어... 자신의 것에 손을 댄 벌레부터 없애겠다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분이라는 놈이 우리를 죽인다는 거냐?"

"아니... 너희한테는 관심이 없으셔... 왜냐하면 네가... 있어서..."

부들부들

유신이 갑자기 격한 공포때문에 몸을 떨었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눈빛이 급격이 흔들린다. 그리고 넋이 나간 듯한 미소를 지으며 광기에 젖은 목소리를 흘렸다.

"감옥이 부숴져... 이 세상이 곧 뜯겨나갈 거야...!!"

"......?!"

"도망쳐... 아주 멀리."

슈르르륵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신의 몸이 빛으로 변해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아까부터 우리가 느끼고 있는 수상쩍은 정체불명의 광기와 공포가 이 땅을 계속해서 감싸고 있고, 우주의 색채가 서서히 땅에 점멸하며 내려앉기 시작했을 뿐이다.

백련교주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 우린 귀환하겠다.]

백련교인들은 그 후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백련교주의 인솔을 따라 항산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왠지 거대한 공포와 절망을 마주치기 싫어서 도망치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분명히 이 자리 자체에 뭔가가 존재하지는 않는데도 온누리에 퍼져있는 암흑을 대면하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것이리라.

십이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한마디 말 없이 조용히 후퇴했다. 여산에서부터 항산으로 이어진 대전(大戰)이 끝났다기엔 너무나 허무하고 음침한 결말이었다.

망량은 항산 곳곳에 깜박이는 우주의 색채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아무래도 궁극의 초상기인..."

"유신."

"그래. 유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원래 목적을 다한 것으로 보이오."

"......"

나는 침묵했다. 망량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유신은... 신에게 바쳐진 건가."

"그렇다고 생각하오."

"제길..."

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녀석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내심 자책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 경우에는 '누구에게' 바쳐졌나가 중요하겠지."

"제갈사."

"백웅. 이미 판은 깨졌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야."

제갈사는 전에 없이 견명하고 냉정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당장 황궁으로 가자. 그리고 다가올 절망에 대비해서 생존을 위한 모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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