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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쿠구구
지옥처럼 하늘이 불타오르고, 쉴새없이 강기의 폭발이 비산한다. 어느덧 봉우리는 섬광에 휩싸여, 흙덩어리가 튀겼다가 통째로 날아가기를 반복했다.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 한꺼번에 합공한다는 건 그 자체로 자연재해였으며 이미 봉우리의 높이는 절반 가량 낮아져 있었다. 심지어 공격을 받는 초상기인은 땅에 떨어지지도 못한 채 빛에 휩싸여 있었다.
' 아직도 전혀 다치지 않았어...'
마치 달기의 본체를 연상케 하는 방어력이었다. 나는 멀리서 동체시력으로 합공을 지켜보다가 침음성을 흘렸다. 인간이라면 결코 저 살벌한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텐데, 초상기인은 몸이 산산히 분해됐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만 달기가 엄청난 피부방어력을 자랑했다면 저 놈은 애초부터 타격이 무효화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망량에게 물었다.
"망량! 저 놈도 달기처럼 주술방어막을 두르고 있는건가?"
그러자 망량이 수인을 맺으며 영안(靈眼)의 술법을 시전했다. 그 술법으로 초상기인을 멀리서 관찰하던 망량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소. 맨몸뚱이가 확실하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지?"
쉬이익
그 때 우리 옆에 천우진이 공간이동해서 나타났다. 모종의 술법으로 장내에 나타난 천우진이 대뜸 말했다.
"틀렸어. 이대로는 천년 내내 공격해도 저 놈을 못 죽인다."
"천우진!"
"저건 시간회복(時間回復)이라는 초상능력이야."
시간회복?
생소한 단어에 장내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천우진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 판은 미쳤어... 인계에 나타날만한 능력이 결코 아닌데 저건 진짜 악마의 인형이군..."
"천우진.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설명해 줘."
"빌어먹을... 재촉하지 마. 나도 저 능력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천우진은 저 멀리에서 합공당하고 있는 초상기인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 놈의 시간축은 고정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공격을 하든 그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변화. 하지만 시간축이 고정되어 있는 이상 어떤 공격을 하든 튕겨지듯 과거의 상태로 환원할 뿐이다."
"......"
"쉽게 말하자면 저 놈의 몸뚱이는 [멀쩡한 상태]의 시간대로 계속 되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음, 이해는 하겠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질문했다.
"그럼 저걸 어떻게 깨는데?"
내 질문에 천우진은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뭘 깬다는 말이냐?"
"아니 그러니까 저 시간회복인지 하는 능력..."
"인간의 능력으로는 못 깨! 적어도 여기 있는 인원으로는."
"뭐?!"
그런 게 어딨어!
내 질문을 단호하게 부정한 천우진은 씹어뱉듯 말했다.
"저건 천계에서도 극히 일부의 최고위 대라신선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초상능력이다. 너도 과거에 신의 사도로써 시간의 힘을 다뤄봤으니까 알 거 아냐? [작은 굴레]에 간섭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운명의 인과율을 건드리는 거다. 일반적인 물리공격이나 술법으로는 죽어도 못 깨."
"......!!"
최고위 대라신선 전용 능력!
최고위 대라신선이라고 하면 서왕모나 삼청 등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들의 역량은 하위 [옛 지배자]에 버금간다고 알고 있었다.
' 그러고보니 영겁의 태아도 무사시의 공격을 받아서 찢어발겨졌지만 지금과 비슷한 방식으로 회복했던가...'
그렇다면 말 그대로 현재의 백발 초상기인의 몸뚱이는 신급 반열에 올라있다는 뜻이다. 상황을 정리한 나는 침착하게 전방의 파괴광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 천우진, 너도 깰 수단이 없다는 소리겠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즉석에서 깰만큼 만만한 건 아니고 적어도 수십 일 동안 준비를 해서 와도 될까말까겠지."
그렇게 대꾸한 천우진이 힐끔 망량, 전우치, 홍길동 등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여기 있는 술법사들도 상당한 실력이지만 시간회복능력을 깨기엔 역부족이야. 내가 합세해도 마찬가지니까 어서 퇴각하는 걸 추천한다."
"퇴각이라고?"
"지금 저 인형은 깨어난지 얼마 안되서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어. 그래서 맞고만 있지만, 이 틈에 도망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 거다."
옆에서 천우진의 말을 듣고 있던 제갈사가 비직하고 썩은 미소를 지었다.
"크크... 시간제어 능력을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경우를 말하는 거군."
"그래."
"무적의 창과 무적의 방패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의 인형인가..."
제갈사의 읊조림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의 공격은 시간회복 때문에 먹히지 않으니 무적상태.
그리고 시간능력을 공격으로 전환하면 얼마나 압도적인지는 [영겁의 태아]와 무사시가 싸울 때 한번 본 적이 있다. 절대지경의 무사시가 그대로 흔적도 없이 모래가 되어 소멸해 버렸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한다면 아무리 백련교주라고 해도 당해낼 수 없으리라!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저 백발의 초상기인은 과거에도 부활한 적 있었지만 그때는 저렇게 강한 놈이 아니었어."
"과거에는 제대로 부활의식을 거치지 않은 반쪽짜리였겠지. 급한대로 뼈대만 맞춰놓은 상급 초상기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산에 있던 신혈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불완전하게나마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미완성품이다.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건 역대 최강의 초상기인이라고 봐야 한다."
"큭..."
역시 초상기인의 성능을 좌우하는 건 신혈의 각성 유무란 말인가?
나는 지금이 바로 선택을 해야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놈의 빈틈을 만들어 보겠어. 지금 저 놈을 견제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감당이 안 될 거야."
"백웅!!"
망량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너무 무모하오. 설마 그 힘을..."
"맞소. 지금 저 놈을 멈출 수 있는건 아마 나 뿐일 거요."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소? 스승님이 말했던 흉사(凶事)의 예언을 잊은 것이오?"
"......"
망량의 말 뜻이 뭔지는 알고 있다.
망량선사의 예언.
[ 흉(凶)이 느껴지는군. 너무 자만하다가 반격당하지 말도록...]
애초에 이 항산에 백련교주 등을 함께 데려온 것도 그 흉사를 신경써서였다. 과거에 나는 십이율 삼사가 말했던 흉을 무시했다가 어이없게 죽은 적이 있었기에, [예언]이란게 굉장한 결정력이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하물며 신급 존재인 망량선사의 예언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망량은 현재 내가 초상기인을 멈춰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만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망량의 걱정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이게 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는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오. 운명이란 만만치 않아서 쉬운 길을 택하려 할수록 결국 망하게끔 되어있지 않소?"
"으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뽑아서 단단히 오른손에 붙잡으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왠지 뭘 해도 실패할 것 같지 않소. 느낌이 좋아."
내 감이 말해주고 있다.
이건 죽음의 길이 아니다.
내 말에 천우진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신들렸다는 건 딱 저걸 보고 하는 소리군."
망량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백웅. 당신을 믿겠소. 부디 저 인형이 참극을 일으키지 않게 막아 주시오!"
"알았소!"
파밧
나는 파괴현장으로 달려들었다. 아직도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은 무한의 내공으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초상기인은 파괴될 기색이 없었다. 나는 일시적으로 내공을 크게 일으켜서 허공답보를 시전해서 백련교주에게 날아갔다.
"교주!!"
[ 백웅인가.]
"내가 저 놈에게 한 칼을 먹이겠소. 잠시 내가 들어갈 틈을 만들어 주시오."
[ 알았다.]
이윽고 교주가 호법사자들에게 전음을 보냈는지, 호법사자들의 공세가 잠시 멈추었다. 나는 그 틈에 허공에 떠 있는 초상기인에게로 쇄도해서 온 힘을 집중해서 베었다.
' 받아라!'
뇌룡신검(雷龍神劍)
일섬(一殲)!
내 검극이 찰나지간에 뇌력을 띄고 초상기인의 목에 닿이려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온갖 공격을 맞이해서도 멍하니 맞고만 있던 초상기인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놈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팔을 움직여서 내 검극으로 손을 뻗었다.
촤악
내 검예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초상기인은 공수입백인을 시도하려다가 손바닥이 크게 베여서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목이 베이는 건 확실히 피했기에 놈의 방어는 성공한 셈이었다.
위잉
백발의 초상기인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떴다. 자연스럽게 무공술(舞空術)을 사용하는 것이다. 놈은 자신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게 시선을 옮겼다.
"넌 누구지... 어떻게 나를 죽일 힘을 갖고 있는거지?"
저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다. 백발의 초상기인을 직접 마주친 적은 거의 없지만, 항우를 통해서 들어본 일이 있다. 성별은 잘 알 수 없으나 여성스럽고 높은 목소리였다. 나는 검을 들어서 놈을 견제하는 상태로 말했다.
"난 백웅. 네 이름은 뭐냐?"
"......"
내가 방금 저 놈에게 유효한 일격을 먹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저놈의 손바닥에 난 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음신지력(陰神之力) 때문이다. 내 몸에 음신지력을 일으키자 놈이 두르고 있는 시간회복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회복과 마찬가지로 음신지력 또한 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음신지력은 굉장히 빨리 소모된다. 앞으로 많아봐야 두세 번 쓰고 나면 고갈되어서 회복을 해야할 것이다. 놈이 발휘하는 능력이 그 이상이라면 이 자리가 내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백발의 초상기인은 갑자기 하늘을 홱하고 쳐다보았다. 놈의 손이 밤하늘의 별을 가리킨다. 열망을 띈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하늘의 별이 제자리를 찾는 때... 영겁의 벽을 넘어 내 이름을 지어줄 분이 내려올 거야."
"그 분이 누구지?"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잘 모르겠는데 그게 이름을 지어줄 거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는거냐?"
놈의 눈이 새까맣게 물들면서 차가운 광기를 흘렸다.
"그 분이 나를 지금도 보고 있으니까."
"......!!"
백발의 초상기인이 몸을 떨며 한숨을 토해냈다.
"넌 들리지 않나? 그 분의 부름이 들린다..."
나는 놈의 말 속에서 현재의 정신상태를 유추할 수 있었다.
' 이미 [옛 지배자]의 부름을 듣고 있다. 하지만 완전하진 않아.'
백우선은 백발의 초상기인이 향후 흉신을 모시는 나인교의 대주교로 각성한다고 예측했다. 그리고 나는 놈과 제대로 이야기해본 게 처음이지만, 이미 흉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부름.
그것은 내가 13번째 죽음에서 느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제갈부를 처치하며 초상기인을 완전상태로 각성시켰지만, 거기에 쓰인 성좌의 힘은 [옛 지배자]의 것이었다. 나는 그 부름에서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 검으로 내 목을 찔러 자살했었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눈 앞의 초상기인은 태어나자마자 그 부름을 계속 듣고 있는 듯 했다.
' 태어날 때부터 흉신을 따르기로 예정된 존재인 건가...'
아무래도 아직은 흉신이나 [옛 지배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 갓 태어난 아기같은 상태라서 인지를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만일에 우리가 항산을 습격하지 않았다면 주작 제갈유룡은 놈에게 사악한 지식을 전파하며 자기 입맛대로 사도로 각성시켰으리라.
어쩌면 이건 기회가 아닐까?
갓 태어난 아기새같은 놈이라면 아직까지 개선시킬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상하네."
백발의 초상기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놈의 얼굴은 마치 신기한 걸 찾은 고양이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놈은 내 쪽으로 한 걸음을 성큼 옮기며 말했다.
"넌 인간과 다른 느낌이 나. 그리고 아주 친숙하고... 위대한 존재가 서 있는 것 같은..."
"무슨 소리냐?"
중얼거리던 놈이 갑자기 활기차게 손뼉을 짝 치더니 말했다. 마치 공감을 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 형제! 넌 혹시 내 형제 아니야? 너도 [부름]을 듣고 있지?"
"난 인간이야."
나는 짤막하게 대꾸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인간이고."
"......?"
초상기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럴 리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 때 사방에서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 다가왔고, 나는 놈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일단 땅으로 내려가지."
타닷
땅에 내려서자 장내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격을 해봤자 소용없으니 백련교 측의 고수들은 모두 놈을 말없이 경계하고 있었고, 초상기인과 내가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하는 장에 가까웠다. 지금 놈은 내게 큰 적의가 없어보였지만 언제 돌변해서 전투를 할지 몰랐으므로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백발의 초상기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만 좀 때려. 아프니까."
"한 가지 물어보자. 너는 인간을 싫어하냐?"
그러자 백발의 초상기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맞아! 인간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해."
"왜?"
"그 분께서 원하시니까."
그 대답에 백련교주가 침중하게 말했다.
[ 이미 지배자의 권속이나 다름없군.]
백련교주는 마도사 답게 현재 백발의 초상기인이 어떤 상태인지 단번에 알아챈 듯 했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 백웅. 그 기이한 힘으로 단번에 놈의 목을 베어버려라. 저 괴물은 삭초제근할 수밖에 없다.]
"......"
[ 놈이 피하지 못하게 우리가 확실히 도와주겠다.]
확실히 가능하긴 할 것이다. 백발의 초상기인이 [작은 굴레]를 움직여서 시간회복을 한다 해도 고통은 남고 회복시간도 필요하다. 그 경직을 이용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놈에게 확실한 치명타를 먹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일까?
' 놈이 인간을 싫어하는 건 자기의 의지가 아냐. 강요된 의지이며 세뇌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길들이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옛 지배자]의 부름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위존재의 시선이 스며들어 있을 뿐이다. 초상기인 자체는 하얀 백지와도 같은 인격인 것이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게 정당한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나는 어째서인지 이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후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야, 너."
"응."
신들린 듯, 육감을 넘어선 칠감의 영역에 이르러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선택을.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