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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파앗
모두를 데리고 제갈사가 있는 항산으로 가자, 백련교와 십이율 고수들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백련교주가 주변의 풍광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 어둠의 기운이 가득하군. 방금 전 여산보다 더욱...]
"이 곳은 항산이오."
[ 여기엔 왜 온 거지? 설마...]
나는 백련교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곳에서 궁극의 초상기인이 만들어지고 있소."
[ 그렇군... 조금만 설명해 주게.]
"그럴 시간이 없소. 그리고 알아봤자 어차피 달라질 상황이 아니니, 일단은 주작을 처치하고 생각합시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십이율의 삼사 중 우사가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산 정상의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점차 용맥(龍脈)을 끌어내고 있으니 한 시진 내에 결판을 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망량이 질문했다.
"우사여. 용맥이라니? 산 위의 의식이 설마 용맥까지 조종한다는 말이오?"
"내가 느끼기로는 그렇다. 그것도 굉장한 범위의 힘을 빨아오고 있다. 적어도 천 이백리의 지력(地力)이 이 항산에 집결되어 있다."
"으음... 궁극의 초상기인이란 건 굉장하군. 설마 용맥을 통째로 끌어와서 신혈을 각성시킨다는 건가."
망량이 뭔가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 백웅. 무슨 일이냐? 왜 저놈들을 다 끌고 여기에 온 거지?]
순어구를 통해서 내게 제갈사의 통신이 들려왔다. 역시 제갈사는 이청운과 함께 이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백련교주와 십이율이 보이자 모습을 숨긴 것이다. 나는 제갈사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고, 제갈사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 그렇군. 네 감으로는 아직 주작에게 한 수가 남았을거라 느꼈다는 거지.]
[ 미안. 판단이 잘못됐으면 책임...]
제갈사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 그런 말은 할 필요 없다. 너는 우리의 왕. 네가 옳다고 판단했으면 나는 책사로써 최대한 도울 뿐이지.]
[ 음...]
[ 여긴 여산처럼 복잡한 음양쌍반의 진은 없으며 사도나 마왕 따위도 없다. 단지 정상의 제단을 보호하고 있는 어둠의 결계가 있으니 십이율의 삼사를 부려먹어라.]
[ 알았어.]
[ 나와 이청운은 기회를 봐서 참전하겠다.]
나는 작전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는 모두에게 외쳤다.
"날 따라오시오!!"
파바밧
대규모 인원이 항산의 산길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비등을 이용해서 한번에 항산의 천제단에 이동할 수 있었지만 보나마나 결계로 막아놨을 게 뻔하기 때문에 항산의 초입에 내려앉은 것이다. 항산은 상당히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절벽을 맨몸으로 등반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에 절벽등반을 어려워할 자는 없었기에 무난했다.
타닷
약 반 식경이 지났을까? 일행 모두가 정상에서 조금 남은 구름다리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백련교주가 구름다리 맞은 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강한 결계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사가 언질했던 결계가 나타났다. 나는 대비책을 들었기에 옆에 따라온 삼사에게 외쳤다.
"당신들이 깨 주시오!"
"알았다."
우우웅
삼사가 고도의 주문을 외웠고, 그 주문의 영창이 끝나자 허공에서 괴이한 글자가 튀어나오더니 어둠의 결계를 향해 날아갔다. 결계는 빠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리다가 한참 후에 소용돌이 같은 구멍을 만들어내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퍼버벙
십이율 삼사 중 운사(雲師)가 그 순간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힘이 빠진 듯 말했다.
"... 우린 여기서 대기하겠다."
[ 무슨 꿍꿍이지?]
백련교주의 물음에 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꿍꿍이고 뭐고 없다. 저 결계를 부수는데 힘을 다 써서 도움이 안될 게 뻔하니 쉬겠다는 말이다, 교주."
[ ......]
교주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삼사가 모두 힘이 빠져서 퍼져있는 이 상태는 십이율의 최대전력이 봉쇄되었다는 뜻이므로, 지금 교주가 십이율을 습격할 경우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십이율주도 사망한 상태에서 삼사까지 죽으면 십이율은 회복불능의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교주는 홱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용비천. 남아서 저 자들을 감시하게.]
"존명."
교주는 이 자리에서 십이율 고수들의 방해, 그리고 내 방해를 뚫고 억지로 삼사를 살상하는 건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래서 삼사가 허튼 수를 쓰지 못하도록 호법사자 하나를 놔두고 가는 것이다.
파바밧
곧 정상이 보였다. 그리고 정상에는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백발의 초상기인.
내가 전생하면서 몇 번이고 마주쳤지만 제대로 그 정체를 알지 못했던 수수께끼의 적이 -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막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고 그 옆에는 주작 제갈유룡이 서 있는 상태였다.
' 완성됐구나!'
역시 뺏기에는 늦어 있었던가?
주작의 계획을 읽어냈지만 놈의 호흡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주작 제갈유룡은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잘 됐군. 딱 좋은 시험상대야."
"......"
"신에 한없이 가까운 이 존재에게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최악이다. 궁극의 초상기인과 싸우게 됐...!!
' 어라?'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생각하려던 찰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아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직감으로서, 주작이 우리 앞에 서 있는 상황 자체가 묘한 위화감이 들고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딱 맞춰서 도착할 수가 있나?
주작의 성격상 더 빨리 준비했으면 했을텐데?
그리고 주작은 왜 어둠의 결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가? 천문관이나 용인, 절진 등등을 배치하려면 더 할 수 있었을텐데?
"......"
아니다. 이 상황은 끝장난 상황이 아니다.
그동안 주작에게 뒤통수를 맞아왔던 경험으로 볼때, 이것조차도 기만의 일종일 것이리라.
나는 머릿속에서 주작의 의도를 빠르게 생각하다가 제갈사에게 순어구로 말했다.
[ 제갈사!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지? 저 제갈유룡은 진짜인가?]
[ 크크! 과연... 네 녀석 엄청난 직감이군. 나도 방금 전에 생각난 걸.]
제갈사는 뭔가 유쾌하게 웃더니 말했다.
[ 당연히 아니다.]
[ 좋았어!]
파바밧
나는 눈 앞에 보이는 주작에게 달려드려는 백련교 고수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하지 마시오!"
[ 무슨 소린가?]
"여기도 낚시요."
나는 힐끔 옆에 있던 망량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망량은 핫 하고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모든 술수의 힘을 집결시켜서 외쳤다.
"나 파환(破幻)의 눈동자를 염원하노라! 오도일이관지!"
위잉
잠시동안 공간 전체가 일렁였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전우치 또한 깨달았는지 마주 외쳤다. 두 사람의 상급 술사가 힘을 모으자 거대한 푸른 빛이 허공에 맺혔다.
"오도일이관지!"
그들로는 힘이 부족한 듯 파직거리며 번개가 튀었고, 두 사람의 이마에 구슬땀이 흘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홍길동이나 십이율의 술법사들이 동시에 주문을 영창하며 이 공간 전체에 압력을 주었다.
파앙!
갑자기 눈 앞의 풍경이 깨지듯이 사라지고, 이 곳에는 백골과 시체만이 남은 황량한 제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던 제갈유룡과 초상기인의 위치에는 웬 커다란 무덤같은 게 잔뜩 쌓여 있었다. 무덤이 어찌나 큰지 높이만 이 장은 될 법 했다.
아니, 무덤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 무더기의 실체를 본 십이율의 홍길동이 인상을 찌푸렸다.
"화약(火藥)이군."
"화약?!"
옆에 있던 극호가 경악하자 백련교주가 팔짱을 꼈다.
[ 우리가 강기로 공격했다면 몰살했겠군. 이 정도의 화약이라면 호법사자의 호신강기로도 무사하지 못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고도의 환영진으로 우리를 낚으려 한 것이오."
백련교주가 크게 감탄했다.
[ 굉장하군. 나는 어지간한 진을 원영신의 힘으로 모두 무시할 수 있는데 이 진은 대라신선급이다... 방금 전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백웅 그대는 어떻게 이게 가짜라는 걸 간파했는가?]
확실히 그렇다. 이건 아마 주작이 만든 최후의 함정일 것이고, 그런 만큼 예전 남화노선이나 대라신선이 펼쳤던 환영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이쪽의 상급술사가 온힘을 다해서 겨우파해할 정도이니 그 힘도 만만치 않다. 주작이 온 힘을 다한 게 분명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의도를 한번에 찍어맞춘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감이오."
[ ......]
백련교주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정녕 오늘의 그대와는 적이 되고싶지 않군.]
번쩍!!
그 때였다. 갑자기 약 일 리 떨어진 다른 봉우리의 정상에서 일순간 번개가 크게 내리쳤다. 한 번이 아니라 무려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거대한 번개가 튀기는 광경은 마치 번개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제갈사의 긴박한 말이 들려왔다.
[ 백웅!! 진짜를 발견했다. 어서 와라.]
[ 그래! 지금은 이청운이 제갈유룡과 싸우고 있...]
[ 아니! 제갈유룡이 아니다. 하지만 초상기인이 깨어났다.]
[ ......!!]
초상기인이라고?!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갑시다!"
파밧
우리가 다음 봉우리로 이동했을 때였다. 이청운은 뇌신지혼을 써서 '초상기인'과 싸우고 있었는데, 상황은 꽤 일방적이었다.
퍼버벙
뇌속 찌르기에 뇌속 강기!
섬광과도 같은 현란한 공격이 이어졌다. 이청운의 공격 하나하나는 일반 무림고수들이 필살기라고 부르는 절기 이상의 잠재력이 있었고, 그 위력은 독고준조차 일격에 잠재워버릴 정도였다. 그런 이청운이 연속공격을 했으니 보통은 못버텨내는 게 정상이리라.
하지만 그 압도적인 공세를 받아내는 건 바로 백발의 초상기인이었다. 놈은 다소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청운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니 저걸 막아내고 있다고 해야할까?
이청운의 공격은 백발의 초상기인에게 고스란히 적중해서 놈을 피떡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마치 환영인 것처럼 부상과 핏줄기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놈은 원상태가 되어 있었다.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맞고 있을 뿐인데 쓰러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 뭐야 저건?!'
초재생력으로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능력이었다. 초재생력은 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고수의 동체시력에 그 속도가 눈에 잡히기 마련이고, 의념의 감각에 확실히 들어왔다. 그래서 초재생력이라 하더라도 죽이기 좀 성가신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덜그럭
덜거걱
하지만 저 초상기인이 회복하는 방식은 이상했다. 마치 그런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덜걱거리면서 계속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저건 물리적인 회복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시간의 소용돌이가 놈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그 사실을 이청운도 깨달았는지 초상기인을 두들기다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내 쪽을 돌아보더니 모두에게 외쳤다.
"교주! 백웅! 최대전력으로 저 놈을 합공하자."
[ 역시 이청운 그대는 살아있었는가?]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
늘 여유있고 웃음기를 띄고 있던 이청운.
그는 현재 크게 긴장하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태껏 수백 수천대를 패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초상기인에게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청운이 이를 악물더니 외쳤다.
"저 놈의 힘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모두 깨어나면 감당할 수 없다. 그 전에 죽여야 해!!"
이청운의 외침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 뭐지?'
이청운은 대체 저 맞아터지고만 있는 백발의 초상기인에게서 뭘 느낀 걸까?
하지만 백련교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하게 명령했다.
[ 백련교 전원, 눈 앞의 저 초상기인을 말살하라.]
쿠콰콰쾅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 호법사자들과 수신류 고수들이 미친듯이 내공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한의 내공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봉우리가 통째로 무너졌다.
나는 진소청과 검마 등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백련교의 공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무리를..."
그러자 진소청이 불쑥 끼어들어서 말했다.
"백웅.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소."
"응?"
"불길한 느낌이 드오.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
사실 진소청이 말한 느낌은 나도 느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백련교의 합공에 끼어들어서 같이 패고 싶지만, 저 광범위 공격에 말려들면 되려 방해가 되니까 빠져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 네 직감에 의존해야겠군."
"음..."
"어쩌는 게 좋을 것 같냐? 더 이상 계책을 낼 국면은 아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저 놈이 저 공격에서 살아남는다면, 초상기인하고 얘기해 보겠어. 저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초상기인에게 인간성은 있는가.
그걸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내 전생 계획이 확실해질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