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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572화 (57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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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저벅

잔뜩 파괴된 제단의 중심부를 올라서 한참을 걷자, 제단을 걷던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낀 눈치였다. 한백령은 걸어올라온 제단의 하단부를 내려다보곤 말했다.

"... 2천여 계단. 굉장히 높군. 여산을 깎아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백련교주가 앞서서 걷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 이 제단 또한 준비된 마의 영역. 이 곳은 물질계처럼 보일 뿐 이계와 다름없이 법칙이 왜곡되어 있다.]

"교주. 우리는 지금 함정에 걸린 겁니까?"

[ 그렇지는 않다. 방금 전 달기가 요력으로 차원을 확장하면서 제단도 높아진 것 뿐.]

앞서서 걷고 있던 홍길동이 말했다.

"다 왔구만."

그의 말마따나 어둠의 제단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정상부가 보였다. 올라가던 자들은 섣불리 뛰쳐올라가지 않고 주변에 함정이나 매복이 있는지를 신중히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평평하고 넓은 정상부의 제단에 모두가 올라섰다.

쿠구구구...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고 암천(暗天)속에서 휘광이 별빛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다. 몽환적인 풍경이었으나 이 곳이 산을 깎아만든 곳이라는 걸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교주가 왜곡된 이계라고 말한 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제단의 어둠 한가운데에는 새파랗게 빛나는 광구 여덟 개, 그리고 광구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웬 인영(人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인영을 둘러싸서 지키듯이 용인과 마인들이 변신상태가 되어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 마도병사들에게 향해있지 않았다. 도리어 과거 제갈량공명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천문관의 복장과 제관을 하고 있는 한 중년인에게 향해 있었다. 청수하고 잘생긴 외모의 중년인은 감정이 없이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침입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백련교주가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 주작.]

교주의 부름에 주작은 자신의 부채를 잠시 허리 밑으로 내리며 대꾸했다.

"나는 여산에 그대들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호와 현무를 쓰러뜨릴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신의 사도 달기를 쓰러뜨릴 거라고는 별로 생각지 못했다. 가정은 해 두었으나 설마 그게 가능할 줄은."

[ 신의 사도라 해도 그 힘에는 한계가 있지. 상고시대의 마왕이라 해도 결집된 인간의 힘에는 쓰러지게 되어 있다.]

"내가 판단한 너희의 승률은 2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는 사도와의 전투에서 거의 전력에 피해를 입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내 상정을 벗어난 존재가 이 판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 ......]

백련교주는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주작의 말은 그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었다. 백련교주가 침묵하자 주작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으로써 사도를 쓰러뜨린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주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양보할 수 없는 철혈의 이상(理想)이 있으니,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 죽어줘야겠다."

파밧

그 순간 여기저기에서 용인과 마인들이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장내를 포위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수백 마리의 전력인 듯 했다. 저 놈들이 모조리 달려들면 꽤 힘들겠지만 이쪽의 현재 전력이면 해볼만 했기에 장내에 강한 전의가 감돌았다.

그 때 백련교주가 천천히 말했다.

[ 한가지, 궁금한 게 있군.]

주작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그대는 나처럼 마도를 접해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걸로 보이는군. 그렇다면 그대의 목적은 신의 휘하에 들어가서 인류를 종말 이후에도 존속시키는 것인가?]

"내가 대답할 이유는 없을텐데."

[ 어느 쪽이 이기든 이 전투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는 자신의 이상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소인배와 싸우고 있었던가.]

백련교주가 살짝 조롱하자 주작은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는 우선은 천계를 멸망시키고 옥황상제를 죽여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다음'에 있다..."

[ 다음이라.]

"대화는 끝이다. 죽어라."

파바바밧

주작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사방천지에서 용인과 마인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현 무림의 최정예들인지라 개개인의 역량이 마도생물에 뒤지는 자는 한 명도 없었지만, 숫자가 매우 많아서 일시적으로 움츠러드는 기색이었다.

백련교주가 외쳤다.

갈(喝)!

그러자 백여 마리의 용인들이 꽥꽥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멀리 튕겨서 날아갔다. 단지 기합일 뿐이었는데도 용인의 강인한 외피가 마치 종이처럼 뻥뻥 뚫리는 걸 보자 오싹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호법사자들도 지지 않는다는 듯 무한의 내공을 끌어내서 사방으로 공격을 날렸다. 백련교주와 호법사자가 나서서 마도생물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침착하게 진형을 갖추고 적을 격퇴했다.

까강

퍼버벅

콰광

온갖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일대격전이 펼쳐졌다. 십이율 문주들이 독문절기를 발휘하면서 용인들을 패대기치는가 하면 단의 일족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술법으로 마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반천맹의 동료들은 다시 한 번 망량을 중심으로 칠성진을 짜서 체계적으로 적을 격퇴하기 시작했다.

진(眞) 어검(御劍)!

검마가 일순간에 수백 개나 되는 강기를 흩날리며 의념절기를 시전했다. 어검의 궤적은 꽃잎처럼 흩날리더니 사방으로 달려들던 용인 세 마리의 목을 일거에 베어버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반천맹 고수가 괴물을 척살한 순간이었다.

극호도 뒤지지 않았다. 극호가 멸혼보를 써서 괴물들을 창날으로 패대기치고 헛손질하게 만들며 진형을 휘젓자 다른 사람들이 싸우기가 한결 편해졌다.

파밧

그러던 중 극호의 헛점을 노리고 마인 한 놈이 시꺼먼 강기를 발출했다. 마인이란 용인과 달리 인외형태로 개조되지 않는 대신 마도생물 자체를 몸 내부에 품고 있는 놈으로써 어둠의 힘을 직접 쓸 수 있는 놈이었다. 마인의 강기에 맞으면 극호의 호신기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오도일이관지."

파앙!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지만 주문이 외쳐지자 극호는 그 습격을 쉽게 피해낸 듯 했다. 푸른 빛에 감싸여 있던 극호는 곧장 창강을 휘둘러서 그 마인을 회쳐버렸는데, 극호가 자신을 도와준 도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고맙수!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나이는 갓 사십대일까? 흙묻은 옷을 입은 그 도인은 껄껄 웃었다.

"나는 지리산에서 이십 년간 도술을 수련한 전우치! 오늘 반천맹의 승리에 모든 힘을 쏟겠다."

카가강

극호는 용인들과 연속으로 창날을 부딪히며 신기한 듯 대꾸했다.

"형씨는 고려인인데 십이율에 가입 안하고 반천맹에 오셨네."

"반천맹주의 의(義)에 감동해서 말일세."

전우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반천맹주는 술력을 많이 소모했으니 쉬고 있게! 내가 동료들을 술법으로 보조하지."

"부탁드리오, 전우치."

아닌 게 아니라 망량은 방금 전 달기와의 전투에서 힘을 거의 다 소모한듯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반천맹에서 망량급의 술사는 현재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대타로 전우치가 나선 것이다. 또한 기인 전우치의 실력은 놀랍게도 삼황내문을 습득한 망량보다 훨씬 높았기에 충분히 망량을 대신하고도 남았다.

콰과광

한동안 격렬한 전투가 폭음과 함께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쿠오오오

한백령이 십이무극용왕참을 발휘해서 화염의 십문자를 허공에 그렸다. 그 거대한 공격에 한꺼번에 용인 십여 마리가 불타서 전소되었지만 한백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했다.

"끝이 없군.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지?"

그랬다.

싸운지 반 식경 동안에 벌써 칠십여 마리 이상의 적들이 쓰러졌지만 아직까지도 사방 곳곳에서 끝없이 마도생물이 튀어나왔다. 일전에 마주쳤던 전력보다 훨씬 많았으며 최소한 오백여 마리 이상으로 짐작되었다.

초절정고수에 맞먹는 신체능력을 지닌 괴물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것은 아군 전력과 관계없이 상당한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 이따금씩 큰 공격을 날려서 놈들을 쓸어버리고 있지만 그마저도 흐름을 바꿀 정도는 아닐 수준의 개떼였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진소청.]

퍼벅

"말씀하시오."

괴물 세 마리를 한꺼번에 창술으로 회치고 있던 진소청이 백련교주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들 두 명은 이 중에서도 별격으로 강해서인지 괴물들이 잘 접근하지 않아서 공백지대에 서 있는 듯 했다.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 더 이상 주작의 뜻대로 시간을 끌어줄 수는 없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놈을 없애라.]

"알겠소."

쿠구구구...

백련교주가 순수한 힘의 덩어리를 모아서 손바닥 위에 집적시켰다. 실전용이 아니라는 듯 느긋하게 원영신의 힘을 동원해서 모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호법사자들이 내뿜는 수십 장 크기의 공격보다 훨씬 거대한 '기' 그 자체가 엄청난 기세로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장내에서 기를 느낄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백련교주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괴물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백련교주에게서 멀어졌다.

백련교주는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둥그런 기를 손바닥에서 전방으로 방출했다.

스아앗

눈 앞이 새하얘진다. 모든 이의 시야를 메우는 섬광이 터져나오면서 소리조차 잦아들었고 전장에 일시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강대한 파괴력 때문에 전방에 있던 모든 괴물이 소멸되고, 덤으로 이 공간을 구성하던 결계가 파괴되어서 허공에 구멍이 뚫린 상황이었다.

밤하늘이 뻥 뚫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진소청이었다. 그는 멸혼보를 써서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쇄도했는데, 그 자리에는 어느 새 몸을 피해있던 주작 제갈유룡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주작은 진소청의 돌격에 자신의 검을 들어서 반격했다.

까강!

' 공손검법(公孫劍法)!'

나도 일찍이 상대해본 적 있던 천하일절의 검기(劍技)! 내가 칠대절학 중 굴공천축검의 묘용을 쓸 줄 몰랐다면 속절없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뛰어난 검술이었다. 공손검법의 달인인 주작은 정파 삼대기인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였다.

"약하군."

푸콱

"크헉...!!"

하지만 고작해야 2초를 부딪힌 순간, 진소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작의 심장을 창극으로 꿰뚫고 곧장 목을 베어내 버렸다. 아무리 초절정고수이며 삼대기인인 주작이라지만 현재의 진소청에게는 삼초지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파바밧

진소청은 땅에 유려하게 내려앉았다. 그 우아한 모습은 마치 여산대전의 종결을 알리는 듯 했다.

"헉... 헉..."

"어떻소? 망량."

진소청을 뒤늦게 따라온 망량이 숨을 헐떡였다. 그는 땀을 닦으며 주작의 머리통을 집어들었는데, 크게 실망한 듯 말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또 미끼였다니..."

"역시 그랬던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소."

"주작은 이 여산에서 의식을 치르는 척 하면서 초상기인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소. 의식은 다른 곳에서 치러지고 있을 것이오."

"여산의 모든 제단을 포기하고... 말인가. 여기 있는 황궁전력은 모두 진짜배기였는데."

"진짜배기니까 우리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이오. 주작은 여산의 이점을 모두 포기하고 반쪽짜리로라도 궁극의 초상기인을 완성하려는 것이오."

진소청은 한숨을 쉬었다.

"... 우리가 지금이라도 주작을 잡을 수 있겠소?"

"원래라면 무리요. 완전히 된통 당했지. 이 자리의 용인들을 다 잡아죽여도 무의미."

망량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소. 숙부와 이청운을 믿을 수밖에."

파앗

그 장면을 끝으로 화면이 잠시 꺼졌다. 천리안의 시전을 중단한 천우진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녀석이 나갈 때가 찾아왔군."

"진짜... 뭐 이런 전개가..."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설마 했는데 가능성 없어보이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제갈사의 계획을 들을 때도 긴가민가 했었는데 정말로 제갈유룡이 말도 안되는 수로 우리를 기만한 것이다.

천우진이 피식 웃었다.

"그 둘은 형제다.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는 게 제갈사의 자존심이란 거겠지."

"찾아냈을까?"

그 때 내가 갖고 있던 순어구를 통해서 제갈사의 말이 들려왔다.

[ 백웅. 내가 말하는 장소로 즉시 동료들을 데리고 찾아와라. 제갈유룡을 끝장낼 때가 왔다.]

[ 정말이야? 어딘데?]

[ 항산(恒山)의 천제단이다. 제갈유룡의 본체도 발견했다. 놈들이 열심히 초상기인을 완성시키는 중이니까 빨리 와.]

[ 알았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렇다.

제갈사는 처음부터 여산의 의식이 가짜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머지 전력을 모두 여산에 보내는 대신에 자신과 이청운을 한 조로 묶어서 '진짜' 의식장소를 찾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발상이었지만 정말로 제갈유룡은 여산의 제단을 미끼로 뒤통수를 쳤고, 제갈사는 하루 동안 전력을 다해서 진짜 의식장소를 찾아냈다.

제갈사는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제갈유룡의 계책을 따라잡은 것이다.

"가자!"

물론 이번에 데려가는 것은 반천맹의 동료들 뿐이다.

백련교나 십이율은 필요 없다.

내가 궁극의 초상기인을 탈취해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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