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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반천맹이 백련교인들과 합류한 후, 망량은 그 자리에서 술수를 써서 촉수조각을 웬 조그마한 병에 담았다. 망량이 볼 때는 촉수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듯 했다. 이윽고 일행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용비천이 외쳤다.
"헛!"
그가 경직되어 멈춰서더니 굳은 얼굴로 교주를 쳐다보았다. 교주는 그의 전음을 들은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 이 앞은 마역(魔域)이다.]
망량이 그 말에 대꾸했다.
"마(魔)가 서린 이계가 통째로 소환되어 있단 말씀이십니까?"
[ 아주 잘 알아듣는군...]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없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군요."
[ 그렇지... [옛 지배자]의 사악한 힘에 타락하거나 몸이 변이해버릴 것이다.]
망량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저희 반천맹은 대비책이 있습니다."
[ 어떤 대비책인가?]
"술법으로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올리고 결계를 칠 생각입니다. 저 내부에서 싸울 때도 전력약화를 막을 수 있겠지요."
[ 훌륭하군... 그대의 실력이면 우리쪽에도 술수를 걸어줄 수 있겠지?]
그 말에 망량은 백련교인들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원로원 분들은 그냥 돌려보내시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의 일로(一老)와 삼로(三老)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표출했다. 일로는 무려 반로환동한 초절정고수였고 삼로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이었다.
"애송이가 감히 우리가 누군줄 알고..."
"마(魔)란 우리가 익힌 무공으로 함부로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희 반천맹의 맹원들은 제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지만 원로원 분들은 그렇지 않잖습니까?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술수의 행로(行路)를 따라 위험을 피해야만 타락하는 걸 피할 수 있습니다."
"......"
"제 명령에 따르실 수 있다면 술수를 걸어드리겠습니다."
"으으윽."
망량의 말을 개소리라고 생각한 듯 일로의 좌장(左掌)에 흉흉한 강기가 모여들었다. 원래 그의 성격이라면 지금 즉시 망량을 공격해서 쳐죽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백련교주의 말은 냉엄했다.
[ 아주 일리있는 소리군.]
"교주님!!"
[ 원로원은 여기서 즉시 본교로 귀환하라. 대군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옥체 보중하시길..."
원로원 고수들은 어쩔 수 없이 미궁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절진은 한번 파훼되면 더 이상 못 쓰기 때문에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45만 대군의 포위진을 뚫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들 하나하나가 초절정고수였으니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리라.
백련교주가 팔짱을 끼고 망량을 쳐다보았다.
[ 반천맹주... 그대는 술수와 마법에도 아주 박식한 것으로 보이는군. 어떤 마도사에게 사사했는가?]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 그대는 원로원의 취약한 정신저항력을 지적했으나 우리 수신류 고수에겐 지적하지 않았지... 무엇을 알고 있지?]
물론 망량은 백련교 수신류 또한 해신의 일족과 교섭해서 마(魔)를 몸안에 받아들였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망량은 대충 말을 돌려버렸다.
"흐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런 교주께서도 상당히 마도에 익숙해 보이시는군요."
[ 그건 주작도 마찬가지겠지...]
슬그머니 말을 돌린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 여기서 일백 장 앞으로 가면 광기(狂氣)가 소용돌이치는 마역이 나올 것이다. 광기에 먹힌 자는 죽일 수밖에 없으니 유념하라. 타락한 자의 말로는 극히 비참할지니 목숨을 끊어주는 게 자비일 것이다.]
백련교주의 말에 오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도대체 어떤 지옥이 있을 거란 말인가?
크오오오
약 오십여 장을 가자 서서히 맞은 편에 시뻘겋게 타오르는 대지가 보였다. 다만 그 붉은 빛은 화염이 아니라 피빛에 훨씬 가까웠다. 망량은 뭔가를 느낀 듯 반천맹의 동료들에게 즉시 주술을 걸었다.
"오도일이관지!!"
푸른 빛이 아군을 감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검마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방금 정신이 멍했는데 머릿속이 깨끗해졌소."
"조심하십시오. 백련교주님의 경고는 허튼소리가 아닙니다. 여기는 [옛 지배자]의 지배영역을 현세로 고스란히 소환한 장소이니 사악한 기운이 창궐해 있습니다."
"그런 것 같군..."
"이 안에서 오래 버텨도 반 시진입니다. 반 시진이 지나면 제 주술로는 버틸 수 없으니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알겠소."
저벅
저벅
"......!!"
화아악
마침내 마역에 모두가 발을 디딘 순간, 사방이 끔찍한 피빛으로 화했다. 땅바닥은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물컹거리는 듯 했으며 혈관과 피가죽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뻗쳐 있는 눈알은 끔찍할 정도로 부릅뜨고 있었다.
바닥, 천정 모두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꿀럭거리며 피가 혈관을 타고 이동하는 맥동도 느껴진다.
그 모습을 훑어보던 극호가 툭 내뱉었다.
"마치 인간의 내장같군."
그랬다.
이 장소는 자연적인 게 아니라 마치 거대한 생물의 내장 속에 발을 디딘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 혈관 위에 발을 올리고 걷고 있는 듯한 찝찝한 기분이 사람들에게 감도는 듯 했다. 백련교주가 이 장소를 들여다보더니 중얼거렸다.
[ 혈영화(血影花)가 피어있군...]
교주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끔찍한 인면(人面)을 주렁주렁 달고 촉수를 굼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꽃이 있었다. 저런 걸 꽃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교주가 혈영화를 발견한 후 아군들에게 경고했다.
[ 감각을 돋우고 모든 주변상황을 경계해라. 특히 혈영화 근처에 가면 안되고 놈의 공격을 받으면 위험하다.]
"저게 무엇입니까?"
[ 지배자의 정원에 피어있는 잡초지만 인간을 아주 좋아하지.]
"조심해야겠군요..."
인간을 좋아한다는 건 물론 인육을 좋아한다는 뜻이리라. 그러자 옆에 있던 극호가 투덜거렸다.
"스무 걸음에 한 마리씩은 있는뎁쇼..."
극호의 말대로 혈영화나 수상쩍은 눈알, 혈관은 꽤 많았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함정이라고 치면 보통 실력으로는 돌파하지 못하리라. 극호의 말에 검마가 피식 웃었다.
"극호, 우는 소리 말게. 자네는 그 정도 실력은 되잖나."
"뭐 그렇습니다만."
"시험삼아서 먼저 돌파해 보게."
"으윽."
검마가 극호를 부추기자 극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비기를 시전했다.
멸혼보(滅魂步)
천광(天光)
파바밧
"......!!"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일순간에 섬광이 뻗어져 나가는 듯 하더니, 극호는 순식간에 백여 장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파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번개같은 신법이었으며 천광의 궤도에 있던 혈영화가 뒤늦게 반응해서 폭산(爆散)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극호가 가볍게 맞은 편에 착지하며 외쳤다.
"이것들 수상해! 호흡을 조심하쇼."
그 말에 용비천이 양 손을 내뻗으며 대기의 기류를 조절했다.
우우우웅
용비천의 바람의 힘에 공기 전체가 빨려들어가며 일시적으로 진공상태가 된 듯 했다. 이윽고 용비천이 질척한 내장같은 천정에 공기의 창을 박아버리자, 핏덩어리가 가득 터져나왔다.
퍼버벙
[ 숨을 쉬면 인간의 내장에 뿌리를 내리는 포자인가. 역시 듣던대로 혈영화는 극히 위험한 생물...]
백련교주가 중얼거리더니 원영신의 힘을 모아서 흉흉한 핏덩어리를 저 멀리로 치워버렸다. 백련교주 뿐만이 아니라 다른 호법사자들도 천천히 위험요소를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건 극호가 먼저 혈영화를 터뜨리며 안전한 길을 찾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일행 전체가 안전하게 맞은 편에 도착하자 망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어찌 이런 불길한 장소가..."
[ 강한 힘이 느껴지는군.]
백련교주가 힐끔 맞은편을 보았다. 그러자 내장같은 지역이 끝나고 무저갱같은 어둠이 재차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무저갱 너머에서 뭔가가 존재감을 뿜어내는 듯 했으나 그 힘을 명확히 잴 수 있는 건 백련교주 뿐인 듯, 그는 한참동안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백련교주가 말했다.
[ 가자.]
무저갱같은 어둠은 길게 뻗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알록달록한 무지개빛이 마치 길을 장식하듯 뿌려져 있었지만 그게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름답기는 커녕 자연적으로는 볼 수 없는 인위적인 색깔이 사람의 감정을 불쾌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길을 걷고 있던 진소청이 중얼거렸다.
"이 빛은 심성을 어지럽히는군..."
"이는 우주의 색채요."
"우주의 색채?"
"성좌(星座)의 황폐한 마력이 인간세상에 내려올 때 생기는 현상이라 들었소. 물론 당연히 인간에게는 해롭소."
저벅
무저갱의 어둠을 다 뚫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였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어둠 속에서 다시 병마총이 여기저기에 도열해 있었고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제단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또한 제단의 중간 계단에는 웬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맞은 편의 통로에서 십이율주 일행이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십이율주가 백련교주를 보더니 말했다.
"저 괴물이 마지막 난관인 모양인데?"
[ 그렇군... 어려운 적수일 것이다.]
"힘을 합쳐야겠지?"
[ 서로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면 이길수도 있다.]
"흐흥."
그들의 시선은 흰 옷을 입은 여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은 고대의 복식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하나라 시대의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녀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는데 나는 왠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기시감이 들었다.
'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 그래! 미호랑 닮았어!!'
물론 미호의 변신했을 때 외모와 같지는 않지만 느낌이 많이 비슷했다. 굳이 따지자면 미호의 변신외모는 좀 더 장난스러운 매혹을 추구한다면, 저 여인의 얼굴은 인간미 따위는 한줌도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서 한 가지를 알아채고는 굳은 얼굴로 천리안을 바라보다가 천우진에게 말했다.
"모두가 위험해! 내가 저기에 가야..."
"흥. 눈치는 있나 보군. 하지만 안 돼."
"뭐?!"
천우진이 천리안의 술법을 유지하며 냉막하게 말했다.
"저게 네가 생각한 대로의 존재라면 현재의 네 녀석이라도 일격에 당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 무력화시킬수도 있..."
"그게 이번 일의 목적이냐? 그게 아닐 텐데."
"....."
"흉신의 주문은 딱 한번밖에 쓰지 못하고, 놈을 쓰러뜨리는 것도 목적이 아니야. 네 녀석이 진입할만한 순간은 내가 말해줄테니 가만히 좀 있어라."
"알았어."
어쩔 수 없이 내가 한발 물러섰을 때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백의의 여인이 서서히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혹적인 자태를 흘리며 장내에 말했다.
"미물(微物)들이여. 감히 악몽의 대좌(大座)까지 왔구나. 너희가 하는 일이 신께 대적하는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가?"
낭랑한 목소리였지만 적지 않은 마력이 뒤섞여 있는지 더러 비틀거리는 듯 했다. 가벼운 목소리에 이 정도의 힘을 담을 수 있다는 건 상대의 힘이 굉장하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백의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 할 수만 있다면 그 신조차 이 손으로 쥐어뜯고 싶구나.]
"우후후... 건방진 놈이군... 혼돈을 품고 있다 하여 네가 다른 벌레와 다른 줄 아는가?"
백의여인은 깔깔 웃더니 갑자기 몸뚱이가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부풀어오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눈의 착각으로, 실제로는 그녀의 변신이 풀리며 본질을 찾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변신은 일순간에 끝나버렸고 삽시간에 장내에는 거대한 태극이 일그러진 상태로 거대한 마물이 풀려나 있었다.
우두득
[ 아하하하하.]
쿠구구궁
그 마물은 일개 요괴라 부르기엔 너무나 컸다. 이 산의 공동조차 조그마하다는 듯 거대화한 마물이 잠시 기지개를 켜자 그에 맞춰서 공간이 함께 넓어지는 듯 했다. 그 변화를 지켜보던 망량이 기가 질려서 외쳤다.
"요력만으로 차원을 넓혔다고...!!"
마물의 모습이 완전히 소환되었을 때, 그 모습은 내가 익히 알던 크기와 대등해져 있었고 장내 또한 크게 공간이 넓어져 있었다. 은빛 털을 휘날리며 거대한 아홉 개의 꼬리가 천하를 감쌌으며 시뻘건 눈빛이 마(魔)의 한가운데에서 고고히 빛나고 있다.
[ 겁없는 벌레들아! 네놈들은 나, 달기(?己)의 한끼 식사가 될 것이다!]
신의 사도 달기가 현세에 강림한 것이다!
익히 예상한 일이긴 했으나 백련교주와 십이율주 또한 그 정체를 직접 듣게 되자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방어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달기의 첫 일격이 꼬리를 휘두르며 시작되었다.
콰콰콰쾅
단지 꼬리를 휘두른 것 뿐이었으나, 백련교주는 호법사자들과 함께 막았음에도 꽤 주춤거리며 밀려나는 기색이었다.
[ 으음!]
십이율주 쪽은 아예 정면으로 맞서는 걸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쪽도 무사하진 못한지 여기저기서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꼬리휘두르기 한 방이었을 뿐인데도 이쪽이 전멸당할 뻔한 위력이었다.
우우웅
[ 전력을 다해야겠다. 호법사자들은 나를 보조하라.]
백련교주가 심천무량의 인(印)을 띄우며 최대전력을 다할 태세를 갖추었다. 맞은 편에서 몸을 피한 십이율주가 월하정야갑과 은하구절편의 기운을 돋우는 것도 느껴졌다. 바야흐로 인세 최강세력들이 신의 사도 달기를 상대로 일대결전을 치르려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뒤편에서 지켜보던 망량이 반천맹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지금이오. 지금이 바로 당신이 나설 때이오."
망량이 소리질렀다.
"가시오 진소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