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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선지자는 간만에 보는데도 외양이 달라진게 없었다. 수천 수만 년을 사는 고대종족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는 기이한 눈을 들어 나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 거래라고...?]
"그래. 우선은..."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무창(無窓)의 탑에 있는 무기를 빌려 줘!"
내 말에 선지자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 넌 전생자였군... 우리의 무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몰라.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거든. 다만 그게 어쩌면 [옛 지배자]한테도 먹힐지도 모르는 강대한 무기라는 건 알고 있다."
[ 어디에 쓰려 하는가...?]
나는 황궁에서 조만간 완성시키려 하는 [궁극의 초상기인]에 대해서 선지자에게 이야기했다. 선지자는 촉수를 일렁이며 꽤 흥미롭게 듣는 기색이었다. 나는 대충의 사정을 이야기한 후 말을 이었다.
"그 초상기인을 얻으려면 내 힘이 부족해. 백련교와 십이율, 황궁이 모두 얽혀있는 그 난마(亂魔)를 풀려면 무창의 탑에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
[ 그렇군... 너는 그 궁극의 초상기인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응?"
초상기인이 초상기인이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선지자는 다른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연금술 지식을 동원해서 말했다.
"그... 궁극의 초상기인은 동시에 궁극의 인공생명인 호문클루스라고 들었어. 서양에서 만들어진 원형을 동방의 팔괘로 완성시킨 거라고. 헤르메스 뭐시기라는 놈이 최초로 창안한 개념이고, 그 놈을 이용해서 신에게 궁극의 제물을 바치려 한다고."
[ 연금술 지식도 상당한가보군...]
중얼거리던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 이 일은 신의 공양물에 직접 손을 뻗는 일... 충분한 대가를 준다면 네게 무기의 권한을 일시적으로 양도할 순 있지만, 우리에게도 큰 위험부담이 따른다. 너는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줄 것이냐?]
"이걸 주겠다!!"
스윽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한 권의 마도서를 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선지자가 꽤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 호오... 이건... 나인성본전(螺湮城本傳).]
"그거라면 1회용 대여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는데?"
[ 흠... 기다려라...]
"뭐?"
갑자기 선지자가 머리 위에 시퍼런 원 같은 걸 띄웠다. 원은 치리링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동안 진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지자가 말했다.
[ 종족회의를 거쳤다... 그 결과 네게 무기의 사용권한을 대여해주기로 결정했다.]
"그 원은?"
[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끼리 즉석에서 통신가능하게 해 준다... 설령 1억 광년(光年)의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광년은 또 뭐지? 아무튼 중요해보이는 기물이었으므로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말했다.
"그 원을 나한테 팔면 안 될까? 충분한 값을 치르겠어."
[ 이건 물체가 아닌 마법(魔法)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괴수의 뿔을 매개로 발동하는 능력이지... 우리 종족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 남에게 가르칠 순 없다...]
"쳇..."
나는 잠시 투덜거리다가 말했다.
"거래는 아직 안 끝났어."
[ 말해봐라...]
스윽
나는 선지자에게 흑요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서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과거에 너와 거래를 통해서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하는 술법을 얻었어."
[ 그랬던가... 그래서?]
"하지만 흑요석은 너무 담는 용량이 적은데다가 비효율적이야. 그래서 이 술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기억전송 효율이 좋은 외계의 금속의 연금식(練金式)을 가르쳐 줘!"
[ ......]
선지자가 눈알을 데굴거리더니 대꾸했다.
[ 어쩐지... 하는 요청마다 들어주기 어려운 것 뿐이군... 너는 나와 상당히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던 것 같구나...]
"꽤 오래 됐지."
[ 연금식을 가르쳐주면 지상의 금속으로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가 발해를 포함한 다른 고대유적에 꽤 많이 기억전송금속을 남겼다면서? 그걸 보면 외계에서 공수해온 게 아니라 이 대지의 광물을 조합해서 만들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 호오... 그건 네 생각이냐...?]
"그, 그런 셈이지."
정확히 말하면 이건 제갈사의 추측이었다. 제갈사는 발해의 유물인 은봉황 뿐만이 아니라 다른 전송금속도 존재하는 걸 문헌에서 발견했고, 그걸 토대로 지상의 연금술로도 주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선지자가 촉수를 일렁이며 말했다.
[ 그래...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수준에선... 어지간해선 못 만들테지... 그래도 얻고싶다면 가르쳐줄 수 있다.]
"어지간해선 못 만든다고?"
[ 너희의 연금술 수준이 미천해서... 식을 가르쳐줘도 일백 년은 해석만 해야될테니 말이다...]
"으음, 그래도 좋아. 어차피 본성(本星)에서 직접 기억전송금속을 가져오는 건 금지라면서? 그러니까 연금식을 가르쳐 줘."
[ 좋다... 대가를 내놔라...]
나는 미리 준비해 왔던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그것은 달짐승의 가죽, 지주의 내단, 그리고 흑백련이었다.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선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슬아슬하게 충족하겠군... 알았다. 이걸 받아라.]
휙
선지자가 뭔가 둥근 구체를 던졌다. 나는 그 수정같은 구(球)를 허공에서 잡아챘는데 그 순간 수정구가 은빛으로 빛나면서 내게 기억을 전송했다.
파아앗
"......!!"
엄청나게 전송속도가 빠르다!
나는 그렇게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평소에 흑요석의 술법으로 기억을 전송하는 것과 비교하면 준마와 거북이 수준의 속도차이가 존재했다. 원래라면 용량이 부족해서 다 담지 못할 복잡한 기억조차도 한 순간에 이해된 것이다. 내 머릿속에 연금식이 다 들어오자 선지자가 말했다.
[ 더 이상 거래할 게 있나...?]
"잠깐. 이 수정구도 외계의 재질같은데 나한테 주는 거야?"
[ 그렇다... 간만의 좋은 손님이니까 인심써서 주는 것... 물론 일회용이니 알아서 써라...]
저 녀석이 웬일로 덤을 챙겨주지?
나는 순수하게 고마움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저 놈은 딱 받은만큼만 해주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었으므로 나는 계속 말했다.
"음... 무생노모의 법문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
분명히 제갈사가 내게 지시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설령 앞의 제안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이 질문만은 하고 오라는 게 제갈사의 지시였다.
흠칫!
선지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 전생자가 법문에 대해 궁금해한다... 이야기는 꽤 많이 진행되었나 보군.]
"무슨 소리야?"
[ 뭐가 궁금한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지상의 백련교주는 법문을 모으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어. 법문을 모으고 나면 진공가향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인데, 그 법문을 다 모으는 건 삼황오제조차 불가능한 일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고."
선지자는 가볍게 긍정했다.
[ ... 확실히 불가능하겠지. 삼황오제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법문이란 대체 뭐지? 뭐길래 다 모을수가 없는거고, 그게 다 모였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 ......]
선지자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 아주 거대한 굴레가 흐르는구나...]
탄식같은 말을 서두로 꺼낸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무생노모의 법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수많은 종말의 예정을 무(無)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다.]
"뭣!!"
나는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설마 진짜였단 말인가? 백련교주가 가약없이 추구하고 있던 진공가향이라는 게 실존하는 해결책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백련교주의 말이 허상이며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진공가향도 진짜로 [옛 지배자]가 사라지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든다는..."
[ 아니. 그렇게 편리한 개념이 아니다... 그건 틀림없는 곡해(曲解)다. 너희 인간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는 멍청하고 아둔한 생물이니까...]
선지자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뭔데?"
[ 현재 모든 [옛 지배자]는 그 법문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칠요신기의 해방보다 더욱 신경쓰고 있지... 그래서 만일 그 법문을 보유한 [옛 지배자]가 있을 경우, 그 법문은 결코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모든 [옛 지배자]가 법문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그리고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잠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선지자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
' 칠요는 [옛 지배자]와 거래해서 얻을 수도 있겠지만 법문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말이구나!'
그러면 정말로 엄청난 난이도다.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잠깐, 그럼 법문을 [옛 지배자]가 갖고 있더라도 그걸 얻으려면..."
[ [옛 지배자]와 정면대결해서 쓰러뜨려야지. 그것도 화신이 아닌 본체를 거주차원계에서 직접 쓰러뜨려야 하니 무시무시한 대결이 될 것이다.]
"......"
물론 나는 언젠가 [옛 지배자]를 정면으로 쓰러뜨리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법문을 얻는 난이도가 내 궁극의 이상과 동일하다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법문이란 어떤 물건이길래 신과 정면으로 싸워서 얻어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그 때였다. 선지자가 촉수를 일렁이며 말했다.
[ 예고편은 여기까지다...]
"응?"
[ 더 정보를 듣고 싶다면 대가를 바쳐라...]
으으...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는 대가를 내라는 거냐!
나는 안절부절못해서 목갑을 뒤졌다. 그러자 많은 보물이 보였지만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움이 뒤엉켰다.
' 이 보물들이 있어야 여산에서 일어날 전투에서 유리할텐데.'
당장 보물을 바치면 큰 단서를 얻겠지만 여산의 전투에서 불리해진다. 왜냐하면 남은 보물들은 하나같이 실용성이 있고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장비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도 무라마사나 백우선, 쌍고검, 삼황내문 등등은 쉽게 내어줄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삼황내문을 장비한 망량이나 무라마사를 쓰는 검마, 백우선을 쓰는 천우진의 위력을 생각하자 고민되었다. 뛰어난 실력자가 뛰어난 장비를 쓰면 매우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명제사서는 제갈사의 힘을 크게 증폭시켜주는 최상급 마도서이니 빼낼수가 없다.
내가 크게 망설이자 선지자가 한층 크게 촉수를 일렁였다.
[ 질러라...]
"뭣?"
휘리릭 휘리릭
[ 질러라... 지르란 말이다... 어디 가서 이런 고급정보를 듣겠는가...]
"......!!"
[ 나같으면... 지를 것이다...]
"비, 빌어먹을!!"
나는 큰 고민에 휩싸였다. 저 놈이 설마 나를 부추기다니!
나는 슬며시 이 자리를 벗어나서 상담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어쩐지 저 놈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실로 호구를 등쳐먹기 위해서 온 기력을 집중하는 게 현재의 선지자였다.
' 저 새끼는 세계가 멸망하든말든 관심없고 나한테 하나라도 더 뜯어내려고 하는구나...!'
어쩔 수 없다. 나는 품속에 있던 순어구를 집어서 제갈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제갈사에게 지금까지의 거래상황을 전달했다.
제갈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고민할 필요도 없군. 다 줘버려.]
[ 뭣?]
[ 법문의 정보는 어차피 언젠가는 얻어야 하는 정보다. 그게 지금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또한 지금의 전력만으로도 보물없이 3대세력을 상대로 생존할 정도는 되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줘 버려라.]
[ 으윽... 알았어.]
나는 크게 아까운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요도 무라마사와 백우선을 꺼내서 선지자에게 내밀었다.
"자."
[ 부족하다...]
"젠장. 여기 쌍고검 추가..."
[ 부족하다...]
"... 삼황내문."
[ 조금... 부족한데...]
나는 열받아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무 욕심부리는 거 아냐?! 삼황내문하고 백우선은 보패라고!"
[ 법문의 정보에는 그 정도 값어치가 있다...]
"이런 제기랄! 단골인데 조금 깎아주면 안되냐고!"
[ 너 스스로는 단골이겠지만... 나는 오늘 네 녀석을 처음 본다... 단골이라고 우기지 마라...]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 흠... 그래도 조금 봐줄까... 좋다... 이걸로 하지.]
"......"
엄청나게 봐준 듯 하지만 나는 지금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보물을 거의 다 털린 셈이었다. 이걸로 나는 달랑 미해방 수요 하나밖에 가진거나 다름이 없었다. 참혹한 기분이 들어서 손을 덜덜 떨고 있자 선지자가 법문의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 법문이란... 천문학적인 우연 끝에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이다.]
"기적의 산물?"
[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 법문은 본디 하나의 마도서(魔道書)였다고 한다... 그리고 법문은 총 6조각으로 찢겨서 천상천하의 곳곳에 흩어졌다... 그게 바로 천 년 전에 벌어졌던 대사건이다.]
나는 놈의 말을 듣다가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법문이 다 모이면 마도서가 된다는 말이지? 그 마도서의 이름이 뭔데?"
[ 그건 모른다... 아마 신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걸 아는 건 그 법문을 하사받은 존재인 달마 뿐이지...]
달마.
백련교의 교조이자, 미쳐버린 마도사.
내가 그 자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뇌일 때 선지자가 말했다.
[ 법문을 찢어버린 것은 바로 [옛 지배자]들이었다... 그 법문이 완성상태로 지상계에 1초라도 더 현현하는 게 이 세상 전체에 재앙을 불러오기에... 그 작업에는 삼황오제도 함께 참여했지...]
"뭐?"
선지자가 히죽 웃었다.
[ 그래... 천 년 전... 백련교주 달마는... 모든 [옛 지배자]의 의지로 살해당했다는 말이다. 나도 옆에서 구경했지만... 실로 장관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