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57화 (55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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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이 일대가 신이 내린 식토(息土)라고?

망량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마 이 곳에는 전욱이 하사한 최초의 식토가 대홍수를 제어하는데 쓰인 후에 남아서 유적을 감싸는 동산처럼 변했을 것이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식토가 보유한 신력(神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변의 지력(地力)을 끌어들였고, 본디 평탄했던 지형이 산악(山岳)으로 변해갔지. 그리고 황산(黃山)이라고 하는 지형이 새로이 만들어지며 수요의 유적은 황산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된 것이라 짐작하오."

"아니... 다 좋은데..."

나는 망량의 설명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다가 반문했다.

"이 분지나 황산 일대가 식토라는 근거가 없잖소."

"그럴 줄 알고, 나는 숙부의 연락을 받자마자 문헌을 뒤져서 식토라는 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 왔소. 그리고 반천맹의 기인에게서 적절한 주문을 배워왔지."

"기인?"

"전우치(田禹治)라는 고려의 기인이 내게 술수를 가르쳐 줬소."

망량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년설삼이 묻혀있던 근처의 흙을 한움큼 퍼 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

우우우

주문이 끝나는 순간, 흙이 환하게 초록빛을 뿜어내며 발광했다. 초록빛이 워낙 강하게 뿜어져서 눈이 부실 정도였지만 사악함은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성스러운 힘 같았다. 내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이 주문의 효과는 사물이 품고 있는 신력(神力)을 측정하여 드러내거나 요괴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오. 이외에도 장풍이나 축지법 기타등등 편하게 돌려쓸 수 있는 범용주문이지."

"오, 편리하군."

"잘 보시오. 영력이 하나도 없으면 원래 검은빛을 내게 되어 있으나 녹광이오. 이 술법으로 측정하는 영력의 단계는 총 5단계로 흑황주백녹(黑黃朱白綠)의 순서요."

나는 망량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대꾸했다.

"최고단계인 녹색이군! 그렇다면 최고의 영력을 품고 있다는 건가."

"바로 그렇소. 그리고 웬만한 영산의 흙이라 해도 주광(朱光)이나 백광(白光)을 넘어서는 일은 거의 없소."

망량이 흙을 바닥에 흩뿌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곳을 다 뒤져보면 확실해지겠지만 이 흑백련과 천년설삼이 자생하던 주변의 흙은 확실히 엄청난 영력을 보유한 고토(古土). 이런 건 신화시대에 왕이 하사받은 신토인 식토(息土)밖에 없소."

"으음. 그 말은..."

나는 팔짱을 낀 채 머리를 굴리다가 추측을 말했다.

"식토가 불어났기 때문에, 그 영력을 양분삼아서 천고의 영물인 흑백련과 천년설삼이 자라났다는 이야기요?"

"맞소.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오."

망량은 훗하고 웃었다.

"식토는 알아서 불어나고 생장하는 '살아있는' 흙. 수천 년에 걸쳐서 황산을 이룰 정도로 몸집을 불리면서도 신화시대의 신력을 잃지 않았던 거요. 이 황산은 그 자체로 축복받은 고토라고 할 수 있소!"

"......!!"

"천년설삼처럼 비현실적일 정도의 영약이 자랄 수 있는 배경이 가능했던 이유지. 천 년이나 영력을 응축하게 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어디 흔하겠소? 저 연못 밑도 아마 식토일 것이오."

"과연...!!"

나는 감탄했다.

전생한지 20여회를 훨씬 넘은 지금, 이제야 수요의 유적에 대한 대부분의 의문이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어서 망량에게 말했다.

"... 알아낸 건 좋은데 이제 어떻게 해야하오? 식토를 어디에 써먹을 수 있소."

"음..."

망량은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쓸 곳이야 무궁무진하오. 그렇지 않겠소?"

"잘 모르겠..."

"가장 수준낮은 활용법이라면 식토를 퍼서 먹는 것이오. 배고플 때 이 식토를 파먹으면 딱히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고 되려 영력이 강해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오. 하지만 황산에 들어온 인간 중에서 일부러 흙을 파먹을 인간이 몇 명이나 있었겠소..."

"......"

"그리고 이 분지와 특정한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황산 내에서도 식토의 영력이 온전히 돌아가는 곳은 별로 없을 거요."

확실히 그건 그렇다.

가뭄이 극심하면 땅을 파먹는 경우도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흙을 먹는 건 인간의 식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도 찢어지게 가난하고 배고플 때는 흙과 나무뿌리를 먹은 적이 있지만 정말 죽고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식토를 물에 끓여서 연금술이나 연단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오. 영력덩어리 그 자체이므로 고급 재료가 될 수 있을 거요. 인위적인 영단의 제조를 가능하게 해 주겠지."

"오오!"

"다만 이건 상당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오. 이건 숙부의 전공분야이니 나중에 물어보는 게 좋겠소."

나는 들뜬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질문했다.

"또 다른 활용법은?"

"그건 여기에 농사를 짓는 것이오."

"노... 농사?"

내가 반문하자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장소에서는 천년설삼과 흑백련이라는 강대한 영물이 자생한 전적이 있소.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직도 식토의 영력이 비범할 정도로 많이 남아 있으니, 추가로 더 키워도 문제는 없을 것이오."

"설마 영약 농사를 짓자는 것이오?"

"바로 그거요."

망량은 싱긋 웃었다.

"백련교가 넓디넓은 감숙의 분지 중에서 영지(靈地)를 찾아내서 성련을 대량재배하는 것과 같은 원리지. 농사를 잘 지으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대량의 영약을 수확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오."

"......!!"

"반천맹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영약의 씨앗이나 파종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수집해 보겠소. 잘만 하면 우리도 백련교 못지 않은 고수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게 가능할 거요. 뿐만 아니라 천계에 바칠 공양물도 매우 넉넉해질 거요."

"오오!!"

굉장하다!

식토라는 걸 이용하면 희귀하기 짝이 없는 영약을 대량재배 가능하다는 말이 아닌가?

내가 뛸듯이 기뻐하자 망량이 턱을 괴며 말했다.

"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 식토가 바로 흑백련과 성련의 차이를 가르는 큰 요인이 아닐까 싶소."

"무슨 말이오?"

"성련이 흑백련에서 갈라져 나간 인위적인 모종이라는 건 확실하오. 다만 재배 초기에는 흑백련과 별로 다를바가 없었겠지만, 식토에서 무궁무진한 영력을 빨아서 흡수하지 못하게 되자 격(格)이 떨어진 셈이겠지. 수십 대를 거쳐왔으면 어쩔 수 없는 열화야."

"흐음... 하지만 성련도 내공을 올려주는 효능만은 흑백련과 큰 차이가 나지 않소. 그래서 백련교에는 수천 명의 절정일류급 성련인이 넘치오."

내 말에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감숙성에서 선별된 영지에서 키웠으니 본질적인 내공상승효과는 보호된 거겠지. 하지만 식토에서 키워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나는 듯 싶소. 바로 해로운 마(魔)의 저주나 주문을 정화(淨化)하는 효과요."

"그런가."

"그렇기에 흑백련은 신력(神力)으로 소교주의 괴질을 치유할 수 있으나 열화된 성련은 치유할 수 없는 거지."

담담하게 결론을 내린 망량이 말했다.

"그럼 이 황산의 백환봉으로 갑시다."

"백환봉은 왜?"

"백환봉의 백환사(白桓寺)에도 흑백련이 있소. 그 중 흑련만 키우고 있으나, 그곳 또한 황산의 근간이 되는 식토(息土)가 존재하는 건 틀림없소. 성련으로 열화되지 않고 흑색을 유지한다는 게 그 증거요."

"아!"

파앗

나는 이윽고 망량과 함께 백환사로 향했다. 나는 백환사의 승려들이 평범하게 하루일과를 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알 수 없는 감회에 젖었다.

' 그러고보니 정말로 여기 온 지도 오래되었구나.'

처음 전생을 시작했을 때 천년설삼의 소문을 듣고 어떻게든 영약을 먹고 무림고수가 되려고 황산 근처에서 몇 년을 살면서 지냈었다. 정말로 예전의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이윽고 나는 망량과 함께 검은 연꽃이 가득 피어있는 연못으로 향했고, 망량은 검은 연꽃을 한줄기 따서 관찰했다.

"흠... 흑련과 백련을 함께 섭취해야 극양지기가 발현되는데 여기에 흑련밖에 피지 않아서 아무런 효능이 없는 거군. 내공상승효과도 없어."

"이 근처의 땅도 식토가 확실하오?"

망량은 연못 근처의 땅을 한움큼 주워서 주문을 외웠고, 이내 녹색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소."

"과연..."

"내가 주지와 이야기해 보겠소."

망량은 이내 백환사의 주지에게 갔고, 주지에게 이 절의 부지를 이용할 수 있게끔 허락을 구했다.

"허허... 하필 전대 주지께서 돌아가신 후 찾아왔구려."

나는 새로운 백환사 주지가 상당히 젊은 중년승려라는 걸 알자 씁쓸해졌다.

' 그 노인네, 죽었군...'

예전에 봤을 때 이미 노환 때문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노인이었다. 전생하고 꽤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노환때문에 사망했으리라. 예전에 만났던 자가 죽었다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었다.

주지는 상황설명을 요구했고 망량은 비교적 솔직하게 부지를 얻으려는 이유를 말해줬다. 물론 영약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고 그저 연못 근처의 땅이 영험하다는 걸 언급했다. 또한 앞으로 백환사에 많은 금전적 지원을 해줄 것을 약속하며 금덩이를 두세 개 꺼내서 내밀었다.

그러자 주지가 못 이기는 척 받으며 말했다.

"알았소. 시주는 큰 재력가 같은데 이 근처에 새로운 절을 만들어주실 수 있소?"

"모두 내가 지원해 주겠소."

"조만간 절을 옮기리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식토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망량이 현재 보유한 세력과 자금력이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엄청나다는 걸 의미했다. 다만 승려들이 금전때문에 너무 쉽게 자리를 옮기는 걸 보자 약간 찝찝하기도 했다.

일련의 작업이 끝나자 망량이 말했다.

"돌아갑시다. 십 년 후가 기대되는구려."

나는 설원에서 멍하니 황산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겠소?"

하도 파리목숨처럼 죽어대서 이젠 자신이 없다.

내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망량이 내 어깨를 두들겨 줬다.

"그걸 가능하게 해야하는 게 바로 우리 책사의 임무요."

망량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백웅. 지금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대가 천암비서를 주운데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망량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오?"

"사실 나나 진소청, 혹은 숙부가 천암비서를 얻었다면 23회차를 지나는 동안 훨씬 더 [옛 지배자] 토벌을 위한 과정이 진전되었을지도 모르오. 그렇지 않소?"

"... 그렇긴 하지..."

늘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라 진소청이었다면?

내가 아니라 망량이었다면?

내가 아니라 제갈사였다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정신력이 갉히는 느낌이 들어서 결국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백웅. 우리 중 그 누구도 당신이 지닌 천암비서를 뺏으려 하지 않소. 왜라고 생각하시오?"

"나도 늘 궁금했소만..."

"그건 우리가 눈 앞의 이득만 좇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오."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소."

망량은 씁쓸하게 웃었다.

"... 하하. 천암비서와 그 배후의 제작자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오."

"......?"

"이미 배신을 논할 단계가 아니지."

망량의 말은 언뜻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망량은 휙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백웅. 기억하시오."

망량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왕으로서 의지를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당신에게 신명을 바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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