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56화 (555/1,615)

556====================

암천향(暗天鄕)

나는 천우진과 함께 근처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폭포 밑에서 천우진이 결계를 치고 영력을 도야하며 술수를 전개하기 시작하자, 심상치 않은 고대의 범어(梵語)가 시각화되어서 사방으로 뻗어나오는 게 보였다. 범어의 결계가 오 장 이상으로 펼쳐지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건?"

"만에 하나 음신지력이 세상에 뛰쳐나가서 새로운 요괴를 만들 확률이 있어서 결계를 친 거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냐?"

"음신지력이 뭐라 생각하는거냐? 신의 힘이다. 강대한 대요괴나 대라신선의 힘이 편린만으로도 요괴를 만드는 일은 세상에 허다하지. 하물며 음신지력쯤 되면 신종 대요괴를 만들어낼 확률도 충분해."

"음... 그렇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잠깐. 그럼 나도 다음 생부터 전욱의 동상에서 힘을 뽑아쓸 때는 이런 결계를 펼칠 줄 알아야 한다는 거냐?"

"결계 정도는 기문둔갑을 할 줄 알면 어렵지 않다. 그 정도는 가르쳐줄 테니 걱정 마라."

"흐음."

하긴 술력이 거의 없는 망량도 망운진 정도는 펼칠 수 있었다. 기문둔갑은 결계술의 뼈대가 되는 기술이니 충분히 준비를 하면 나도 결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기문둔갑을 기초정도는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잡담 그만하고 잘 봐라. 어떤 힘이 잠들어 있는지."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노갈성을 내질렀다.

"해(解)!"

쿠구구구

전욱의 동상이 꿈틀거리더니, 동상의 정수리에서부터 영기가 마치 시뻘건 용암처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단지 그 기세가 용오름처럼 거센 게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오는 것과 같았다. 다만 너무나 농후한 힘이 담겨 있어서인지 시뻘건 빛이 승화하며 광선을 만들어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힘의 해방을 지켜보던 천우진이 손을 움직여서 흐름을 제어했다. 이윽고 갇혀있던 힘이 서서히 정돈되어 움직임이 줄어들자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이 동상은 전욱의 가호를 직접 내려받았던 것 같군. 고대에 새겨진 힘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힘을 흡수하는 제석천(帝釋天)의 진언(眞言)을 알려주마."

나는 진언을 전해듣고는 고스란히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동상의 힘이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내 심장을 향해 뻗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물질이 아닌 것처럼 힘 그 자체가 내 몸을 통과해서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스스스스

몸이 뜨겁다. 하지만 뜨거운 느낌도 잠시, 마치 빙굴(氷窟)에 들어온 듯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몸의 혈맥을 뒤틀어버리는 듯 했다. 무시무시한 음한의 기운에 내가 잠시 숨이 막혀서 주저앉았다.

"허억."

"차갑지? 당연하다. 그건 태음(太陰)의 속성을 지닌 힘이니까."

얼음을 수십개씩 삼킨 듯한 격통이 폐와 장에서 끓어올랐다. 너무 차가워서 눈으로 얼음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뜨거운 걸 먹고싶어."

"무의미하다. 그 고통은 정신계에 직접 작용하는 거니까 물리적 고통이 아니야. 아무리 뜨겁고 매운걸 먹어봐야 지금의 한기가 가라앉을 일은 없을 거다."

천우진이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지금의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얼어죽었겠지. 그래도 네 녀석은 수요를 오랫동안 다뤄온 데다가 전욱의 사도였던 경험으로 음신지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어서 저항력이 높은가 보군."

"조... 좋은 거냐?"

"특이한 거지. 보통은 대술법사가 작정하고 저항력을 키우지 않으면 음신지력에 대한 저항력은 절대 얻을 수 없을 거다. 차라리 극빙(極氷)에 저항력을 가지는 게 현실성이 있지..."

그렇게 중얼거린 천우진이 말했다.

"조금만 참아. 네가 보유한 음신지력의 양으로 볼 때 고통이 오래 갈 리는 없으니까."

천우진의 말대로였다. 폐부가 얼어버리는 듯한 격통은 반 각이 지나자 씻은듯이 사라졌다. 나는 고통이 사라지자, 차라리 설삼과 흑백련을 먹었을 때가 더 아팠다는 식으로 냉정하게 비교가 가능해졌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천우진이 땅에 있던 동상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제 이 동상은 천계에 공양물로 바칠 수가 없다. 내장되어 있던 전욱의 기운을 지금 네가 다 빨아먹었으니까."

"내가 얼마나 강해진 거지?"

"흐음..."

천우진은 영안으로 내 영력을 살피더니 말했다.

"대략 20년치의 힘을 얻은 듯 싶군."

"......!!"

나는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

동상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20년치 수련을 줄였단 말인가? 말이 20년이지 20년동안 매일 3시진씩 절벽에서 명상수련을 하는 노력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외쳤다.

"그럼 이런 식으로 13번만 더 흡수하면...!!"

"아마 음신지력을 대성할 수 있겠지. 그때부터는 끓어넘치는 영력을 이용해서 태평요술에도 도전할 수 있을 거고."

그렇게 대꾸한 천우진이 히죽 웃었다.

"근데 13번... 언제 죽게?"

"......"

"뭐, 먹고죽고 먹고죽고를 반복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말이 13번이지 결코 쉬운 횟수가 아니다. 그리고 음신지력 하나 얻으려고 먹을 때마다 자살을 하는 것도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죽든간에 굉장히 아프고 괴롭기 때문이다. 못할 짓은 아니지만 만만한 일도 아니다.

나는 중얼거렸다.

"계속 수련은 해야한다는 소리군."

"그래. 그리고 음신지력이 좀 더 쌓인만큼 영력이 쌓이는 효율도 조금 늘어났을 확률이 크다. 왜냐하면 큰 힘을 굴릴수록 더 많은 수련치가 적립되거든."

"휴우."

가능하면 이번에 40년이나 50년치의 음신지력을 얻고 싶었는데 동상에 남겨진 힘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오랜 세월동안 수요의 유적에 방치되어 있었으니 그동안 새어나간 힘도 꽤 되었을 것이리라.

파직!

후두둑

갑자기 동상이 무너지는 듯 하더니, 제관을 쓴 전욱의 형상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거인의 형상이 생겨났다. 내가 놀라서 동상을 쳐다보았다.

"아니! 갑자기 무슨..."

"흠, 그렇군. 그래서 음신지력이 있었던 거군."

"이건 전욱의 본체를 묘사한 거잖아."

"맞아. 처음부터 힘을 다 쏟아내면 겉보기가 아니라 실제 모습을 드러내게끔 조각되어 있었던 거다."

"......"

거신(巨神)의 형상은 익히 본 적이 있다. 천지를 뒤엎어버릴듯한 파멸을 뿜어내는 거대한 암흑의 거인! 그것이 바로 내가 봤던 전욱의 본체였다. 내가 천우진을 보자 그가 담담하게 추측을 피로했다.

"그 동상은 누군가가 인세에 직접 강림한 전욱을 목격하고 새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조각품을 전욱에게 보여주자 기특하게 여겨져서 음신지력의 가호를 내려받았다. 그것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뜻밖의 말에 나는 기겁했다.

"뭐? 그건... 미친 짓이야."

"당연히 미친 짓이지. 전욱은 [옛 지배자]에 못지 않은 힘을 지닌 강대한 신격이니 본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필멸자는 죽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상을 제작한 놈이 있었던 거다. [겉]과 [속]을 모두 표현했으니 전욱의 양면을 모두 목격한 적이 있었겠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 않나?"

천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건 인간일 경우다."

"어?"

"인간이 그 동상을 제작했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야."

"......"

오싹!

' 그... 그래.'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지만, 이 동상은 애초에 삼황오제와 [옛 지배자]가 날뛰던 고대의 기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신마(神魔)가 뒤엉켰으며 온갖 혼돈의 혈족이 활보하던 시기였으므로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도 지상에 있었으리라. 적어도 전욱의 본체를 목격해도 멀쩡할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바로 이 조각의 제작자이리라.

동상의 제작자는 틀림없이 대라신선급 힘을 지닌 인외(人外)!

나는 의혹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누가 이걸 만든 거지?"

"그건 사형이나 제갈사한테 물어봐라. 여기서부터는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기에 내 영역이 아니니까."

"알았어."

나는 장령곡으로 돌아와서 제갈사에게 동상에 대한 정보와 의혹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제갈사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백웅. 천우진을 불러라. 같이 수요의 유적으로 다시 가 보자."

"알았어."

파앗!

우리 셋은 수요의 유적 심처로 갔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동상을 꺼냈던 장소에 도착하자 제갈사는 그 장소를 신중하게 들여다보는 기색이었고, 천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갈사가 천우진에게 물었다.

"천우진. 혹시 과거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술법을 쓸 수 있나?"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지만 무리야. 그 술법으로는 최대 500년 전후밖에 읽지 못해."

"우리는 지금까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듯 싶군."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동상갑골문의 해석을 썼다.

[ 아아, 북(北)에 있던 천지간의 통로가 무너졌나니.

신자(神子) 고양씨(高陽氏)가 황제(黃帝)의 부름을 받아 되돌아가노라.

인간의 호소에 치수(治水)의 비법을 세상에 남기었도다.

그리하여 막야(莫耶)를 징표로 남긴다. ]

차분하게 그 해석을 내려다보던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수요 막야에 집중해서 이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하지만 동상에 비밀이 있다는 걸 알아냈으니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

"무슨 해석?"

"치수(治水)의 비법."

제갈사의 눈이 번득였다.

"아주 먼 고대, 대홍수(大洪水)가 있었다. 다들 알고 있지?"

천우진은 고개를 까닥였고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알아. 요 임금때 홍수가 일어났고 우 임금이 그걸 제어했지. 대우(大禹)는 하나라의 시조(始祖)였고 치수를 행한 군주잖아."

"그래. 그게 잘 알려진 역사지."

"뭔가 다른 게 있는 거란 말이냐?"

제갈사가 큭큭 웃었다.

"즉 순서가 이렇게 되는 거야. 전욱이 황제의 부름으로 인간계와 천계를 분리했다. 그 직후에 홍수가 범람했는데 전욱은 떠나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치수의 비법을 내려줬던 거지. 또한 그 징표로 수요를 내렸는데, 그 인신공양의 정황은 너도 알다시피 수요에 기록되어 있다."

"이 동상은 수요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군."

"내가 생각하기에 동상의 제작자는..."

뭔가 말하려던 제갈사가 갑자기 말을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우(禹)와 곤(?)이 행한 치수의 비법이다."

"응?"

내가 어리둥절해서 반문하자 천우진이 옆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식양(息壤)을 말하는 거군."

"그래. 식양이다."

"......?"

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당황했다.

"식양? 그게 뭐냐."

"식양이란 '메우는' 방법을 뜻한다. 식토(息土)란 저절로 불어나는 흙인데, 이 식토를 이용해 하역과 강역의 원류를 메워서 홍수를 막았던 거지."

"아!"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걸 단지 도수(導水)의 기법으로만 생각했다. 우공(禹貢)은 왕도(王道)를 설파하는 역사서라는 관점이었기에 실제로 받아들이진 않았지. 식양식토의 기법이란 게 워낙 허무맹랑하거든. 그냥 육부의 왕조를 형성하는 기본강령에 지나지 않는 게 수토지공(水土之工)이라 본 거다."

제갈사가 손깍지를 꼈다.

"하지만 만일에 우와 곤, 그리고 인간종족에게 치수의 비법을 가르쳐준 것이 전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져."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이지?"

"식토(息土)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있어."

나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뭐? 알아서 불어나는 흙이 실존했다고?"

"그래. 신이 인간에게 축복과 가호를 내린다는 건 그 정도는 되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당시의 인구와 노동력으로는 결코 그 어마어마한 대홍수를 다스릴 수가 없었어. 아마 삼황오제 전욱이 식토의 가호를 당시 인간군주들에게 내려줬을 것이다."

"......"

"하늘과 땅의 연결을 끊은 후에는 신이 직접 홍수를 막아줄 수 없으니까 미리 가호를 주고 간 거야. 알아서 불어나는 신의 흙이 하역(河域)을 막으면서 홍수의 피해를 크게 줄인 게 분명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그런 고대사에까지 삼황오제의 손길이 미치고 있었을 줄이야?

제갈사가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서, 혹시 이 장소에 식토에 관련된 단서가 있는지를 찾으러 온 거지. 만에 하나 식토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음... 장강이나 황하 일대를 식토로 막았을 거 아냐? 그쪽의 강바닥에 가라앉아있지 않을까?"

"그럴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큰건 수요가 봉인된 여기다. 식토가 일종의 주술적 촉매라고 가정하면 남겨뒀을 확률이 커."

"알았어. 그럼 찾아 보자."

나는 제갈사, 천우진과 함께 한동안 수요의 유적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역시 영력을 발휘하는 물건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잠정적으로 식토를 찾아내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간 후 제갈사가 말했다.

"이건 좀 더 연구해봐야겠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고대사 전문가한테 부탁해봐야지."

며칠 후.

"내가 알아보겠소."

"부탁하오!"

망량은 반천맹주로 일하다 말고 장령곡으로 찾아왔다. 아무리 제갈사나 천우진이 박식해도 지식의 양에서는 망량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망량을 데리고 다시 한 번 수요의 유적으로 향했다.

"올라갑시다."

망량이 한동안 수요의 유적을 살피다가, 갑자기 나선형 계단을 타고 연못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연못 위로 올라와서 주변을 돌아보던 중, 조그마한 동굴으로 향했다.

"아, 거긴..."

"천년설삼이 있던 장소지."

망량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주변의 땅을 차분하게 살폈다. 그리고 한참 후 눈덮인 설원에서 내게 말했다.

"백웅. 알아냈소."

"뭐가 말이오?"

"... 천년설삼, 흑백련같은 천고의 영물이 한 자리에서 자라는 게 이상하지 않았소?"

"응?"

망량이 허탈한 듯 웃었다.

"이 분지 일대... 아니 황산 전체가 식토라고 생각하오. 수천 년에 걸쳐서 야트막한 언덕이 산처럼 거대해진 이유는 바로 그거요. 신(神)이 직접 힘을 불어넣은 축복받은 대지이며, 삼황오제의 가호 때문에 이 천고의 비동이 만들어진 거였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