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553화 (552/1,615)

553====================

암천향(暗天鄕)

풍운(風雲)이 장내에 몰아치는 것 같다. 삼대세력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상황은 실로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해도 좋았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백련교주였다.

[ 반천맹주라 했던가?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망량은 백련교주에게 포권했다.

"존귀한 백련교주를 뵙니다."

[ 그대는 무슨 생각으로 삼자회담을 열려고 한 거지?]

"......"

아주 간단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한 마디! 백련교주 또한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있기는 마찬가지라서 쉽게 상대할만한 자가 아니었다. 백련교주 뿐만 아니라 십이율주나 제갈부 또한 망량을 주시하고 있었다. 망량은 그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천하만민을 위해서입니다."

[ 천하만민을 위해서...?]

"교주께서는 중원에 진출할 것을 천명하셨습니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는 그걸 좌시할 수 없는 세력이 2개나 있습니다. 설령 제가 오늘 불러모으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충돌했을 겁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충돌의 여파는 힘없는 민초들에게 미치게 되겠지요."

[ ... 민초라.]

백련교주는 의외라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 반천맹은 민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우리의 회담을 이끌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 후후... 특이한 자로군.]

그는 껄껄 웃는 기색이었다. 특이하다는 말에 어떤 어감이 숨어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십이율주 또한 한 마디를 했다.

"재밌는 일재(逸才)구나."

양대세력의 수장들은 망량에 대해서 꽤 높은 평가를 내린 듯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제갈부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반천맹주의 뜻은 알겠소. 그럼 반천맹주는 오늘 이 회담에서 어떤 결론이 나기를 바라시오?"

"그걸 제게 물으시는 까닭은?"

"드넓은 천하를 뒤져서 대세력의 수장을 모은 자는 바로 당신이오. 그러므로 당신의 뜻을 당연히 물어봐야 하지 않겠소?"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직접 의견을 꺼내기가 꺼려지기에 중립세력인 반천맹의 의견부터 듣고 나서 자신들의 방침을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좋소. 그럼 반천맹의 의견을 먼저 천하의 주인들께 말씀드리겠소."

망량은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황궁은 백련교에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의 3개 성과 관할지를 영구히 할양하여 독립하게끔 해 주시오. 또한 백련교주를 대명제국의 국사로 봉하여 향후 친선을 도모하시오. 그리고 그 대신에 백련교는 향후 이십 년간 중원진출이나 섣부른 쟁투를 포기하는 것이오. 당연히 중원무림 진출도 포기해야겠지."

"......!!"

제갈부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가 표정관리를 못 할 정도로 망량의 제안이 파격적이라는 뜻이었다. 놀란 건 제갈부 뿐만이 아닌지 십이율주 또한 흥미로운 듯 탁자에 턱을 괴었고, 백련교주 또한 턱에 얹은 손을 풀지 않았다.

제갈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긴 하오?"

"잘 알고 있소만."

"대명제국(大明帝國)의 영토를 분할하여 백련교에 주어 독립시키라니! 하물며 당신이 지금 말한 영토는 전 중원의 이할을 훨씬 넘어서오.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그 때 백련교주가 입을 열었다.

[ 적절한 제안이군.]

십이율주도 말했다.

"나는 긍정적이야. 백련교한테 그 정도 양보해서 앞으로 중원이 평화롭다면 남는 장사 아닌가?"

"......"

제갈부는 단숨에 2대세력의 주인들이 찬성의사를 보이자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삼자회담이라지만 힘의 균형이 즉시 과반수를 넘어가버리면 발언권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갈부 또한 만만한 인물은 아니기 때문인지 침착하게 망량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런 건 황제폐하의 윤허가 없으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또한 이 대명제국의 영토는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쌓아올린 결정체! 영토를 우리 마음대로 할양하는 건 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오."

그러자 망량이 깔보듯 말했다.

"얘기가 통하지 않는군. 당신은 똑똑해 보이는데 모르는척 하는거요,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요? 내 제안이 왜 적절한지를."

"뭣..."

"어차피 이대로 백련교가 발호하면 방금 내가 말했던 3개 성을 현 대명제국의 군사력으로 지켜내는 건 불가능하오. 이유야 잘 아실 것이고, 그 이후부터는 백련교의 초고수들과 대명제국 사이에 피터지는 전쟁이 일어나겠지. 굳이 악수(惡手)를 둬 봐야 수순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수인가?"

"......"

"나는 적절한 선에서 합의를 볼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오. 당신이 정말로 황궁의 책임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군."

제갈부는 침묵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자리를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군.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어쩔 생각이오?"

휘리릭!!

다음 순간, 제갈부 옆에 연기처럼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청수한 외모의 장년인이었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익히 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장년인은 장내에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실례하오. 지금부터 내황각주를 대신해서 황궁의 의사를 밝히게 될 주작(朱雀)이라 하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황궁의 뜻이라 봐도 좋소."

[ 흐음... 당신이었군. 아까부터 수상하게 맴돌고 있던 기척이.]

백련교주와 십이율주는 그가 은신한 기척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작 제갈유룡은 자리에 앉은 후 망량을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반천맹주 그대의 제안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고 있군. 준비를 많이 해 온 모양이야."

"공치사는 되었습니다.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분명히 말해서 거부하네."

주작의 단호한 말에 순간적으로 장내가 얼어붙었다. 자신의 말이 곧 황궁의 말이라고 천명한 주작이 저런 말을 하는 건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백련교주가 다소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 중재따윈 무시하고 전면전을 하자 이 말인가?]

"백련교주. 성급하게 굴지 마시오. 지금부터 차분하게 얘기할 테니까."

가볍게 백련교주의 살기를 받아넘긴 주작이 말을 이었다.

"그깟 3개성, 즉시 양도할 수 있네. 국사의 자리도 바로 줄 수 있고 신왕국의 지위도 인정할 수 있지.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백련교주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쪽에서 베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백련교주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증이 없지.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협정을 맺어봐야 무의미하다는 뜻일세."

그러자 망량이 난처한 듯 말했다.

"이토록 많은 세력이 보고 있는 가운데 약속을 했는데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소. 그 말씀은 백련교주님의 명예를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소. 이 회담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크크크..."

주작은 약간 음침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백련교주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지는 않군.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광신(狂信)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주작 또한 백련교주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다. 어쩐지 백련교주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뢰를 지속적으로 운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네놈...]

그러자 백련교주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십이율주가 끼어들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셋이 얽혀서 박터지게 싸워보잔 소린가?"

"물론 아니지. 반천맹주와는 다른 방식의 휴전(休戰)을 제안하고 싶소만."

제갈유룡은 차분하게 손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 법문(法文)을 찾는데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하지, 교주. 대신 우리와 10년간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이오."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무시무시한 살기가 주작을 덮친다.

시간이 삭제된 듯한 틈새가 지나자, 마치 주작의 목이 보이지 않는 마수(魔手)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틈엔가 백련교주가 뿜어낸 의형강기가 살인적인 기세로 주작의 목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주작의 목 뿐만 아니라 몸뚱이를 통째로 으스러뜨렸을지도 몰랐다.

"적당히 하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늘한 기운이 마수를 에워싸며 견제하고 있었다. 바로 십이율주가 의념절기를 발휘해서 백련교주의 공세를 제어한 것이다. 일순간에 절대지경의 고수들이 자신들의 힘을 발휘하자 상상할 수 없는 긴장감이 터질듯이 부풀어올랐다.

"......"

망량은 이미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백련교주든 십이율주든 절대지경에 도달한 자들이 장내의 기류를 제어하는지라 망량 정도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망량이 혼절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청운이 그 기세를 중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백련교주가 의형강기를 거두며 말했다.

[ 협조라... 생색뿐인 협조는 질색이다.]

"생색뿐일 리가."

주작은 방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었는데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는 무생노모의 법문의 실체를 알고 있소. 당신이 그걸 왜 모으려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신께서는 그 일에 충분히 협력해줄 의사가 있지. 원한다면 1년 내에 '또 다른' 법문의 조각이 어디있는지 알려주겠소."

[ 믿을 수 없다.]

"정말로 믿을 수 없다면 이미 자리를 파했겠지. 내가 신을 모시는 제사장이라는 건 이미알고 있으실텐데? 우리는 제안을 했으니 기다리겠소."

[ ......]

나는 백련교주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십이율주도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내심 주작의 말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 굉장하군... 저 둘을 상대로 순식간에 흐름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

교주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집어내서 되려 약점을 찔렀다.

엄청난 배짱과 심기!

주작의 무력 자체는 삼대세력의 수장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하지만 틀림없이 그 또한 천하를 도모할만한 천재이자 호걸인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장 뒤로 빠져 있던 십이율주가 입을 열었다.

"백련교주한테는 그 법문이란 걸 준다 치고, 내겐 뭘 줄 거지? 나까지 가만히 있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데?"

"십이율주."

"아, 안 줘도 돼. 단지 너희 앞길에 상당한 지장이 있겠지."

강아지탈 뒤편의 표정은 보이지 않겠지만 아마도 음흉하게 웃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십이율주는 교묘하게 주작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작이 대답했다.

"당신의 목적은 나도 짐작할 수 없군. 원하는 걸 먼저 말해 보시오."

"선제시~ 그거 좋지."

십이율주는 유들유들하게 말하더니 팔짱을 꼈다.

"명제국이 고려에 상국(上國)으로 군림하던걸 멈추고 앞으로는 매년 고려에 금 500관에 상당하는 보물과 공물을 바쳐라. 그리고 산동성(山東城) 일대와 요동 전체를 고려의 영토로 넘겨주도록."

"......"

"아! 그리고 다두왕국도 우리 꺼야."

주작은 그 제안을 듣자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멈칫거렸다. 그리고 연회상에 있던 술잔을 크게 들이키고는 중얼거렸다.

"미쳤군."

"왜? 아주 양호한 제안 아니야?"

십이율주가 히죽거리며 웃는 듯 했다.

"싫으면 관둬. 난 너희랑 달라서 얼마든지 깽판을 칠 수 있거든."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백련교주가 흥미로운 듯 말했다.

[ 아주 재밌는 사람이군.]

"그런 소리 자주 들어."

주작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그러더니 십이율주에게 말했다.

"도대체 십이율 그대들은 뭘 믿고 까부는 거지?"

"응?"

"그대들의 뒤에는 신(神)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강하다 해도 인간의 세력일 뿐인 것을, 어찌 이리도 무도하게 구는 것인가? 뒤로 갈수록 그대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가?"

언뜻 광오한 말인 듯 했으나 주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십이율주가 절대고수이며 십이율 문주들이 강력하다고 해도 결국 신의 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천령단이나 원영신의 힘으로 간접적으로 신에게 닿아있는 백련교와는 달리 십이율이 신과 닿아있는 끈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자 십이율주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나를 믿고 까분다. 됐나?"

"......"

"그리고 하나 물어보자. 네 녀석이든 저기 백련교주든 아주 온 힘을 다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뭣하러 그렇게 힘을 빼고 있냐?"

십이율주의 말은 뭔가 미묘한 어감을 품고 있었다. 백련교주가 그 말에 더욱 크게 반응해서 대꾸했다.

[ 십이율주. 무슨 뜻이지?]

"아니 뭐... 별건 아니고, 이 시대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종언(終焉)을 피할 방법은 없잖아."

십이율주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 모두 나름대로는 인간의 미래라는 걸 생각하는 모양인데 헛수고 아니냐고."

[ ......]

"......"

다들 침묵했다.

백련교주가 한참 후 말했다.

[ 우리 모두가 인간에게 남겨진 종언의 때를 알고 있군. 재밌는 일이다.]

주작도 입을 열었다.

"십이율주 그대는 종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단 말인가?"

"후후... 생각? 무슨 생각?"

"[옛 지배자]가 일어서서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생자와 사자를 남기지 않고 혼돈 속에 매몰되는 그 생지옥을 예감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는 건가?"

주작의 말에는 약간의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백련교주는 의외라는 듯 주작을 힐끗 바라보는 듯 했다.

......

침묵이 감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광소(狂笑)였다.

"아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십이율주는 웃었다.

마치 이보다 우스운 소리는 없다는 듯이 웃어제꼈다.

그 웃음은 한없이 천진해 보였으나, 소름끼칠 정도의 광기(狂氣)를 머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참 후 십이율주가 웃음을 서서히 멈추며 말했다.

"너희 예측대로 성좌가 끓어오르는 밤하늘은 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광기속에 메마르는 절망의 그 날을... 나는 아주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지."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십이율주가 주의를 환기시키듯 천천히 말했다.

"자, 너희도 개소리 말고 서로 합의하지. 이런 곳에서 낭비할 기력은 내게 없으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