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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전야(前夜), 망량과 제갈사가 앞에 앉아있고 나머지가 둘러싸듯 마주앉았다. 제갈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자회담에서 우리는 중재역으로 정천맹과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반천맹주인 망량 제갈현이 회담에 나간다. 그리고 그 호위로 이청운이 함께 갈 것이다."
"나머지는?"
"갈 필요 없어. 기껏 강호의 비밀세력으로 암약중인데 우리 얼굴과 정체를 일부러 가르쳐 줄 이유는 없잖아? 다만 이청운이 없으면 절대고수들 사이에서 현이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으니 보내는 거다. 만일의 경우 이청운이 뇌신지혼으로 현이가 비등을 쓸 틈을 벌어줄 수 있으니까."
"흐음."
그 때 극호가 손을 들었다.
"날 보내줘!"
"널 왜?"
"부탁이야."
그러자 제갈사가 차갑게 웃었다.
"개소리 마라. 보나마나 풍신류 호법사자나 백련교주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
"돌발상황은 허용할 수 없어.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순간 우리는 다 죽을지도 모르니까."
"큭."
극호는 분해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제갈사의 말이 옳았지만 나는 극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원수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없는 검마는 이미 무영문을 이끌면서 며칠째 회담을 준비 중이지. 사파의 대표로 나오는 검마가 은연중에 우리를 위해 편을 들어 준다면 회담을 좀 더 성사시키기 좋을 거다. 하지만 극호 너같은 무명지배가 반천맹주의 호위로 참여해봤자 위험하기만 할뿐 나아지는 게 없어. 네가 만일에 잡혀서 고문이라도 당하면 우리 정보가..."
"젠장! 그만 갈궈. 왜 안되는지 알았으니까."
극호가 버럭 소리를 치자 망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오. 곧 힘을 쓸 데가 생길 것이오."
망량이 말을 이었다.
"당초에는 내가 직접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소. 숙부의 이혼대법을 이용해서 적당한 꼭두각시를 내보낼까도 생각했소. 하지만 삼대세력의 수장쯤 되면 그런 수법으로는 속일 수 없을 게 분명하기에 맹주인 내가 직접 나가야 하오. 그리고 그 자리의 위험도는 극도로 높을 게 분명하니, 설령 초절정고수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리요."
"그러고보니 내일 회담의 목표는 뭐지?"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질문했다.
"지금까지 알아서 할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걸 안 말해줬잖아."
"백웅. 내일 우리의 목표는 삼대세력이 휴전협정을 맺게끔 하는 것이오. 동시에 백련교에는 중원진출을 중단하게끔 권유할 생각이오."
"... 좀, 어렵지 않겠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어려운 목표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중원무림을 지배할 자신감과 야망을 지닌 채 진출선언을 한 백련교주를 억제함과 동시에 삼대세력의 휴전을 이끌어내다니! 아무리 망량이라도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망량이 말했다.
"포석은 이미 깔려 있소. 진인사대천명이니, 내 모든 역량을 다해서 목표를 이뤄내고 말 것이오."
"으음!"
나는 문득 생각나서 제갈사를 쳐다보았다.
"제갈사 너는 내일 무슨 일을 하는데?"
"흐흐. 그건 말이다..."
제갈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자 나는 질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모르는 소리 마라. 이단 삼단으로 함정을 깔지 않으면 더 위험해지니까."
"음 뭐... 네 머리가 나보다 좋으니까."
내가 제갈사의 계책을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리라. 나는 시원스레 넘어가 버리고는 천우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천리안을 이용해서 나머지는 회담을 지켜보는 건가?"
"그래."
"......"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망량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망량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시오. 이청운 님이 날 보호해주실거고 사제가 이제 내게 술법으로 가호와 축복을 걸어줄 거요. 어지간해서는 내가 죽을 일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자들의 회담에 참여하는 것이니 걱정되는구려."
"후후! 설령 죽는다 해도 백웅 당신이 살아있으면 그만이오."
망량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는 의지가 강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말했다.
"백웅. 난 내일 반드시 그 자들의 입에서 중대한 단서를 알아내고 말겠소. 또한 반드시 살아돌아오겠소."
"... 부탁하오."
사실 진심은 부탁한다는 말이 아니다. 망량이 아니라 그냥 내가 대신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전생자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자들이 지혜와 용기를 짜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갈사가 말했다.
"자 그럼 각자 준비하고... 백웅 너는 나와 얘기 좀 하자."
이윽고 나는 제갈사가 부르는 밀실로 가서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이건 어제 새벽 급히 알아낸 정보인데 혹시 모르니 미리 이야기해 둬야겠다."
"황궁측의 정보냐?"
"그래. 네 녀석이 그동안 연금술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무익하기 짝이 없었을 극비정보지. 연금술을 못 알아듣는 놈한테 억지로 기억시키기도 고역이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뭔가 느껴졌다. 내가 제갈사를 응시하자 제갈사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최고급 초상기인을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재료는 바로 수은(水銀)이다."
"수은?"
"드디어 연금술사 놈이 정보를 뱉었다. 아무래도 놈도 초조해지니까 제갈부와 논의해서 빠르게 초상기인을 제작할 필요를 느낀 거겠지. 삼대세력의 회동은 놈에게 있어서도 큰 일이니까 말이야."
"제갈부한테 핵심정보를 공유한 거군. 그건 그렇고 수은이 핵심재료라..."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제갈사에게 말했다.
"수은은 그렇게 희귀한 금속이 아니잖아. 흔한 건 아니지만 주사를 녹이면 되는데다가 도금을 할 때 주로 쓰이는건데, 그런 게 핵심재료였다고?"
전이원소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상온에서 액체처럼 흐르는 성질이 있는 건 독특하지만 그것 뿐이다. 수은 자체는 희귀금속이라 볼 수 없었기에 신에게 바쳐지는 최상급 초상기인의 핵심재료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나도 의외라고 생각하지만 이유가 있더군. 수은은 이미 과거의 봉선의식에서 한 번 쓰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봉선의식?"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제갈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황제(始皇帝) 영정(?政)이 최초로 치렀던 봉선의식 말이다."
"......!!"
진시황제가 지금 왜 나온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무측천이 치렀던 2회째에만 집중했지만 연금술사 생 제르맹은 처음부터 그 최초의 봉선의식을 염두에 두고 동방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시황제 영정은 핵심재료인 수은을 대량으로 채굴하기 위해서 자신의 릉(陵)에 수많은 준비를 해 뒀다고 했어."
"릉이라면... 자신의 무덤인가?"
"굳이 이름붙이자면 진시황릉이 되겠군. 크크."
뭐가 웃긴지 킬킬대던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놈의 말에 따르면 그 수은을 특별한 공법으로 한번 더 성질을 변화시키면 달의 힘을 머금은 특별한 외계의 금속으로 화한다고 한다. 그 외계의 금속은 수은처럼 액체금속의 성질을 지니지만 유해성이나 유독성이 전무해서 반영구적으로 인체 내부에 보존이 가능해. 수은과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원소니까."
"인체 내부...?"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듣고 있다가 뭔가가 생각나서 깜짝 놀랐다.
"설마, 그 금속 자체를 피로 삼는다는 말이냐?"
"크으... 일 년 동안 가르치기를 잘 했군. 그 정도 눈치는 생겼나."
뭔가 감동한 표정이던 제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고의 초상기인은 수은을 변화시킨 외계금속을 피로 삼는다. 또한 그 금속은 반영구적으로 힘을 생산해내면서 달의 힘에 감응해서 증폭도 가능하지."
"......!!"
"그래서 놈들은 줄곧 진시황릉을 찾고 있었다. 진시황릉에는 그 금속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 아마 봉선의식에 쓰려 했겠지."
나는 제갈사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
"연금술사 생 제르맹은 수은을 외계금속으로 바꾸는 공식은 알고 있지만 만들기가 귀찮고 어려운 건가?"
"바로 그거다. 연비가 쓰레기였어. 놈은 수정석비의 힘을 이용해서 만들어보려 했던 것 같지만 들인 노력에 비해서 결과가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수천년 전, 진시황이 봉선의식에 쓰려고 미리 만들어뒀던 매장금속을 다시 캐려는 거야."
"으음..."
"그걸 다시 캐 낸다면 금세 만들 수 있겠지."
뭔가 이야기가 맞아들어간다. 그렇다면 황궁 측에서 최고급 초상기인의 초안을 만들어뒀는데도 쉽사리 완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이유가 설명되는 것이다. 이론은 다 되어 있지만 실제로 안에 채워넣을 재료가 부족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제갈사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진시황릉을 찾아내야 하겠군."
"아니. 이미 황궁측에서 찾아내 버렸다."
"뭐?"
"유적의 초입이긴 하지만 여산(驪山)에 있는 공동(空洞)을 찾아냈다고 한다. 연금술사 놈이 단독으로 움직였던 모양이야."
"......"
나는 황당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는 은인자중하면서 황궁을 견제하며 초상기인의 비밀을 확실히 캐기로 하지 않았는가? 망량과 제갈사가 미리 알고 있어도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이대로 놔두면 황궁은 몇 년 내에 초상기인을 완성할거다. 내가 지금 너를 부른 건, 어제 놈들의 대화에서 알아냈던 수은의 변화공식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알았어."
"일단 받아적고 미친듯이 외워. 절대 까먹으면 안 돼."
나는 제갈사가 부르는대로 연금술의 술식과 공식을 적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도저히 한 번에 외울만한 양이 아니었다. 내가 질린 눈으로 공식을 적은 종이를 내려다보자 제갈사가 말했다.
"놈들은 그 변환금속을 가리켜 신혈(神血)이라고 칭한다."
"신혈이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가서 쉬어. 내일부터 삼자회담이 시작될 테니까."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잠시 숙소에 가서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묘시가 되어서 동료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망량과 이청운은 이미 자리에서 떠난 듯 자리에 없었다. 회담 자체는 진시(辰時)인지라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천우진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기합을 넣었다.
"하압!"
우웅
그러자 눈 앞에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며 마치 걸어서 이동하는 듯한 모습이 허공에 나타났다. 천우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사형과 시야를 공유해서 천리안의 술법을 펼쳤소."
"지금 이 광경은 망량의 시야란 말인가?"
"그렇소."
확실히 이런 식이라면 수천 리 밖에 있어도 생생하게 삼자회담장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천리안 술법의 감응력이 강해졌는지 현지의 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망량은 두어 명을 옆에 거느린 채 이청운과 함께 걷고 있었다. 이청운은 내 역용술로 외모를 변화시킨 상태였고 망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한참동안 걸은 끝에 도착한 장소는 바로 낙양 외성에 존재하는 장군루(將軍樓)라는 곳이었다.
장군루는 보통의 기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명사(名師)나 고관만이 출입 가능한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고 조용한 분위기였으며 망량과 이청운은 말 없이 장군루의 최상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최상층에는 만찬요리가 가득 펼쳐져 있었고 상석에는 제갈부가 앉아 있었다. 제갈부는 망량이 찾아오자 일어서서 포권하며 맞이했다.
"반갑소, 반천맹주. 본인은 황궁 내황각주인 제갈부라 하오. 오늘은 내가 황궁의 뜻을 대신해 참여하게 되었소."
제갈부는 망량이 역용술로 모습을 바꿔서 알아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망량은 살짝 목례하며 그의 인사를 받은 후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십이율주와 백련교주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구려."
"곧 오실 것이오."
담담하게 대꾸한 제갈부가 말을 이었다.
"헌데 담이 크시구려. 이 중대한 자리에 고작 호위가 셋 뿐이라니..."
"이 자리에 평화롭게 마무리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오."
"하하하."
제갈부는 크게 웃더니 물을 들이켰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려."
그 때였다.
후우우웅
갑작스레 장군루의 최상층의 공기가 달라지더니,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네 명의 인영(人影)이 출몰한 것이다. 나는 천리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 공간전이(空間傳移)?!'
내가 아는 술법지식으로는 그것밖에 설명이 안 된다!
내가 놀라서 천리안을 들여다보고 있자, 갑작스레 나타난 괴인들 중 중앙에 서 있던 자가 무면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십이율주는 아직 오지 않았나?]
이 자리에 나타난 4인은 바로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었다. 백련교주는 예전처럼 무면탈을 쓰고 있었으며 호법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제각각 황금용, 여우, 흑호의 가면을 쓴 채로 나타난 상황이었다.
제갈부는 백련교주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천하에 명성높은 백련교주를 뵙니다. 십이율주께서는 곧 도착한다고..."
"나도 왔어."
"헉!"
뜬금없이 제갈부의 말을 끊고 한 마디의 목소리가 장내에 흘러들었다. 제갈부는 이번에야말로 놀랐는지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삼자회담을 시작할까?"
그리고 만찬석 상석의 제일 반대편에는 이미 십이율주가 앉아서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다른 세력과 달리 그는 따로 호위나 아군을 데려오지 않은 듯 싶었다. 흔적도 없이 스며드는 기술을 보면 그 또한 절대지경의 무예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십이율주의 모습을 보면서 이마를 짚었다.
' 저... 개새끼...'
그렇다.
이번에야말로 십이율주가 탈을 벗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저 놈은 이번에도 전신에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탈을 쓰고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