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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십이율주를 움직인다!
확실히 현재 상황에서 백련교주를 견제할만한 유일한 인물이 그 뿐이기는 했다. 주작에게 힘을 실어줘도 백련교주를 견제할 수는 있겠지만 놈은 마도에 물든 주적이니 주작과 손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의문이 생겼다.
"그 자를 어떻게 움직이려고...?"
여태껏 전생하면서 진짜 목적은 커녕 어느 정도의 잠력을 꿍쳐두었는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의뭉스러운 자가 바로 십이율주였다. 지략이든 무력이든 정점에 도달해있는 존재이기에 섣불리 이용하려 들다가는 큰일나는 것이다. 굉장한 위험부담이 있기에 내가 의문을 표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십이율주는 이미 중원 곳곳에 자신의 이목을 뿌려서 상황을 확인하고 있지. 모르긴 해도 백련교가 발호할거란 사실도 이 격문이 뿌려지기 전에 감지했을 것이고, 문제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의 목적은 불분명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궁이나 백련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있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이게 문제인 것이다. 황궁과 백련교는 서로가 [옛 지배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며, 배후의 신을 굉장히 신경쓰고 있었다. 최악의 적대관계에 가깝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둘의 관계와 달리 십이율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모호했다. 19번째 생에서도 십이율은 가장 마지막에 끼어들었을 정도로 행동이 소극적이었다.
제갈사가 말했다.
"목적을 몰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이야. 두 명이 대적하고 있으면 한쪽의 힘이 강해지는 순간 끝장이 나겠지만 힘의 축을 둘이 아닌 셋으로 만들어버리면 셋 모두가 움직이기 힘들어지니까."
"그러니까 무슨 수로?"
"정천맹을 움직일 생각이다."
"뭐?"
정천맹?
여기서 구파일방과 정파의 연합체인 정천맹이 왜 나온다는 말인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반천맹을 운영하면서 정천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소. 정천맹주 위지혼은 우리 반천맹을 동맹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지. 그렇기에 우리는 반천맹을 통해 정천맹주를 움직이고, 그가 십이율에 접촉하는 식으로 십이율주를 움직여 볼 것이오."
"정천맹과 십이율이 동맹을 맺는단 말이오?"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상으로는. 그 동안은 정천맹과 십이율이 관할하는 영역이 동떨어져 있어서 서로 소 닭보듯 하는 사이였으나, 지금은 백련교가 발호하여 무림이 위협받는 시기지. 그래서 위지혼은 우리 제안을 받아들여 십이율과 동맹을 맺으려 할 것이오. 난 이미 사자를 통해서 십이율의 위력과 이해관계를 충분히 그에게 설명해 줬소."
"으음."
"그리고 정천맹주를 내세움으로서 우리 세력이 십이율에게 직접 주시받는 걸 피할 수 있겠지. 이 판에 백웅 당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거요."
확실히 그렇게 하면 우리가 직접 나서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십이율주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 또한 정천맹주든 십이율주든 현재 백련교를 위험시하는 건 같으니 동맹이 이뤄질 확률도 높았다.
그 때 듣고 있던 검마가 말했다.
"다 좋지만 황궁의 전력은 어떤가? 마지막으로 황궁을 견제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으니 그들이 상당한 힘을 회복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얘기를 드리지 않았었군요."
망량은 부채를 접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간 숙부가 제갈부를 통해서 연금술사의 지식과 초상기인에 대해서 많은 걸 전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용인(龍人)과 마인(魔人)을 대량제작해 뒀으며 특수한 초상기인을 제작하는 과정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특수한 초상기인이라면...?"
"거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설명하지."
제갈사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초상기인은 본질적으로 신에게 바치는 고급 공양물이다. 그러나 제조하는 단가가 상당하고, 일정수준 이상의 소원을 빌 때는 별로 효과가 없다. 그래서 놈들은 시험삼아서 초상기인을 제작하다가 한 단계 위의 고급 초상기인을 제조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흐음..."
검마는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말은 즉... 신에게 공양할 별미(別味)를 만든다는 것인가?"
"후후! 딱 맞는 표현이야. 보통 초상기인이 일급숙수인 백천주사(白天廚師)의 요리라면 그 고급 초상기인은 최고의 숙수인 청천주사(靑天廚師)의 최고자신작 정도 될까? 아무튼 모든 기술을 동원할 생각으로 보이더군."
"음."
"맛있는 걸 바칠수록 신이 더 좋은 대가를 내려줄 건 자명하니까."
요리사에게는 사천주사라고 하여 청(靑)-홍(紅)-흑(黑)-백(白)의 4단계로 나뉘어져 있는 요리사의 자격 중에서도, 청천주사라는 건 황제 앞의 어전요리대회에서 공인받은 최고의 실력자를 의미했다.
' 제갈사의 비유대로라면 굉장하군...'
말 그대로 최상 중의 최상을 제작하려 한다는 소리다. 검마의 눈이 번득였다.
"그 고급 초상기인이 아마 백발의 초상기인이겠군."
"십중팔구는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건 어디까지 제작되었지?"
"아마 초안단계인 걸로 보인다. 아직은 기초뼈대만 만들었을 뿐 영육도 불어넣지 않았지.
놈들끼리는 완성까지 약 오 년을 잡고 있더군."
"오 년이라..."
검마가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 예전에 마주쳤던 백발 놈은 미완성 상태였나 보군."
"그렇겠지. 완성된 놈을 보려면 지금부터 오 년은 기다려야 돼."
오 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극호가 듣던 중 말했다.
"황궁이 고급 초상기인을 완성시킬 때까지는, 황궁놈들이 백련교에게 당하면 안되는 거겠군!"
"그래, 맞아. 이번 생에서는 그 백발 초상기인이 대체 뭐하는 놈인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리고 놈들이 그걸 완성시키고 나면 통제권을 뺏아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지."
제갈사가 손을 쫙 펼쳤다.
"앞으로 오 년! 십이율주까지 끌어들인 이 판에서 평화를 최소한 오 년동안 지켜내는 게 이번의 우리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십이율주를 끌어들이는 것만으로 오 년을 버틴다기엔..."
나는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십이율이 들어오면 그냥 다같이 진흙탕싸움을 하게 될 수도 있잖아. 3개의 세력이 뒤엉키면 더 복잡해질수도 있어."
"일리있는 고민이군. 공부를 하다보니 조금은 대가리가 나아졌나?"
"......"
제갈사는 씨익 웃었다.
"다 생각해뒀던 바가 있어. 그러니까 요점은 한번은 터놓고 얘기할 기회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사흘 후.
망량이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망량은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십이율주가 정천맹주의 동맹제안을 받아들였소."
"잘 됐군."
"동시에 또 하나의 제안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모양이오. 아마 이후로는 십이율주가 직접 다른 세력과 의견을 조율할 것이오."
"그렇다면..."
들뜬 내 말에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삼자회담(三者會談)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이오."
삼자회담!
이것이 바로 망량과 제갈사의 계책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3개의 세력인 황궁, 백련교, 십이율의 수장들이 한곳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 셋 다 서로를 적대시하고 의심하는 상태이긴 하지만 십이율 또한 중원의 진흙탕에 발을 담그기로 했으니 할 수 없이 서로 견제에 나서게 될 것이리라. 그리고 삼자회담을 벌이게 된다면 그들 사이에 휴전약정이 맺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검마는 탄식했다.
"후우! 정말로 큰 판이 되는군. 삼자회담이라니... 3대세력 중 하나만 하더라도 엄청난데 그들 모두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어렵겠죠."
망량은 섭선을 팔락이며 말했다.
"애초에 그들 모두가 통제할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현 시대 무림의 지배자들이며 최강의 군주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최소한의 자제력을 가지도록 뒤에서 손을 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자제력이라!"
"그렇습니다. 자제력... 셋 중 누구라 해도 제멋대로 날뛰면 엄청난 희생을 불러올 테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의 힘을 알기 때문에 자중할 줄 압니다. 그리고 먼저 나서는 쪽이 피해를 입고 약해진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겠죠."
망량이 씨익 웃었다.
"반나절 후면 백련교나 황궁도 정천맹과 십이율의 동맹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검마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일부러 반천맹에서 정보를 흘렸나?"
"네. 그래야 백련교와 황궁이 십이율주를 의식하겠죠. 십이율주도 그 낌새를 눈치채면 지금까지처럼 의뭉스럽게 동방에 틀어박히기만 할 수는 없을겁니다."
그 때 극호가 듣고 있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이, 망량. 질문이 있는데."
"무엇이오?"
"네가 볼 때는 3대세력 중에서 누가 가장 강할 것 같아?"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모두의 이목이 망량에게 집중되자 망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련교. 정확히는 백련교주가 일인세력이오."
"빌어먹을."
"물론 확실하지는 않지만, 백련교주가 전면에 나섰다는 건 그만큼 거대한 자신감과 힘이 받쳐준다는 뜻이오. 모르긴 해도 백웅의 19번째 전생, 그 전성기에 못지 않겠지. 아마 대라신선 중에서도 투선에 필적하는 힘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
"알다시피 우리는 물론이고 천하를 통틀어도 그런 힘을 지닌 인간은 거의 없소. 그는 아마 [영겁의 태아]가 봉인되어 있는 소교주의 괴질을 더욱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중일테니, 인간을 반쯤 초월했을 거요."
망량은 침중하게 말했다.
"솔직히 흑백련이나 기타 괴질의 치료법이 딱히 백련교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바깥에 나선 이유를 모르겠소. 지금으로서는 백련교주가 억지로 힘을 더해서 괴질을 억누르고 나왔다는 게 가장 그럴듯하오."
"그런가. 교주는 대라신선을 초월했나..."
극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극호의 목적은 백련교 풍신류에 복수하는 것이었는데 백련교의 수장이 지나치게 강해졌기에 극호로서는 입맛이 씁쓸한 것이다. 게다가 풍신류 호법사자인 용비천 또한 교주에게 무공가르침을 받아서 강해졌을 확률이 높았다.
망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련교가 최강이라 해도 그리 앞서나가지는 못하지. 사실 전력으로 보면 3대세력 모두가 대동소이할 것이오. 일순간의 운으로 결정날 정도로 미세한 차이... 대등하다고 봐도 좋소."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진소청이 말했다.
"우리가 어느 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수도 있는 거군."
"바로 그거요! 우리는 힘의 균형을 바꿀 수 있는 제 4의 세력이오. 그래서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것이오."
망량이 눈을 빛냈다.
"셋 중 어느 하나가 승리자가 될 수 없도록, 그들끼리 힘을 소모하고 견제하도록 끝까지 계략을 꾸미는 것. 우리 반천맹은 무림 최후의 흑막(黑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오."
"......"
"백웅. 왜 그런 표정을 짓소?"
"아니... 그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 어째 악역같지 않나?"
"으음."
망량은 생각지 못했던 지적인지 흠칫하는 듯 했다. 옆에 있던 제갈사가 낄낄거렸다.
"크크크크. 맞구만. 끝까지 정체를 숨기면서 정파를 움직여서 계략을 꾸미고 다른 세력의 공멸(公滅)을 노리다니... 딱 소설 악역 아니냐?"
"......"
"정의의 백련교주가 흑막의 대장인 망량을 무찔러야 이기는 내용이 될 수도 있겠군."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만..."
제갈사가 이죽거리자 망량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아무튼 한 달 이내에 삼대세력이 한 자리에서 회담을 할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백웅, 당신도 움직여줘야 하오."
"내가 어떤 일을 하면 되오?"
"사제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주시오."
망량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오. 환신(幻神)인 사제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잘못하면 삼대세력에게 역습당해서 일순간에 전멸당할지도 모르오. 그러니 반드시 데려오시오."
"그 녀석은 굉장히 까칠한데..."
"이 방법을 써 보시오."
파앗
나는 망량의 작전을 새겨듣고는 망량선사의 마을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천암비서를 숨긴 후 마을에 진입했는데, 천우진이 이윽고 내 앞에 나타났다. 천우진은 아니나 다를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긴 또 웬 일이오?"
"의뢰를 하나 맡기고 싶어서 찾아왔소. 보수는 이 은봉황이오."
나는 은봉황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천우진은 대번에 가치를 알아본 듯 호기심어린 눈빛이 되었다.
"호오, 이건..."
나는 휙하고 은봉황을 천우진의 눈 앞에서 물렸다.
"내가 의뢰하고 싶은 건 당신이 아니오."
"응?"
나는 천우진을 무시하고 갑자기 안쪽의 사당으로 냅다 뛰었다. 천우진이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망량선사!! 이거 담보로 맡길테니 저 놈을 빌려줘!!"
스르르륵
그 순간 엄청난 수면욕구가 쏟아지며 잠들고 말았다.
[ 은봉황이라... 치우와 관련이 있는 유물이군.]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솔길 한가운데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검은 고양이, 망량선사는 내 쪽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얼마나 내 제자를 빌려갈 생각이냐?]
"한 50년만 빌려 줘."
[ 너무 길군.]
"음... 25년. 깔끔하게 쓰고 돌려줄게."
망량선사가 꼬리를 흔들었다.
[ 노예라도 얻을 생각이냐? 2년.]
"크윽... 알았어."
스르륵
망량선사가 은봉황을 앞발로 잡아서 어디론가 밀어넣자마자 은봉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신 특유의 술법으로 먹어치운 것이리라. 망량선사는 천천히 오솔길 너머로 사라지며 말했다.
[ 흉(凶)이 느껴지는군. 너무 자만하다가 반격당하지 말도록...]
내가 일어났을 때, 내 눈 앞에는 천우진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엄청난 노화를 느끼고 있는 듯 했으나 겨우 눌러참으며 말했다.
"... 앞으로 2년간 잘 부탁하오..."
"흐흐, 나야말로."
나는 천우진의 표정을 보자 고소해서 씨익 웃었다.
' 이게 망량의 작전.'
은봉황을 망량선사에게 담보로 맡기고 억지로 천우진을 영입한 것이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천우진과 기싸움을 일일이 하는 것보다 훨씬 확실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