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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향(暗天鄕)
나는 종리권의 축복에 크게 실망했지만 이윽고 그 사실을 제갈사와 망량에게 이야기하자,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좋은 축복인데?"
제갈사가 말했다.
"왠지 이번 생에서 변수도 적고 무난하게 흐르는가 싶더니 축복이 작용한 거였군. 아주 축복을 잘 받았잖아."
"어... 난 재능이 늘어나서 빨리 강해지는 게 좋은데..."
"네가 얌전히 수련만 하도록 돕는게 이번 생에서 우리의 역할이지. 그걸 보조해줬으니 아주 좋은 축복 아니냐? 정 꼬우면 다음번 생에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걸 시도해 봐. 그건 그렇고..."
제갈사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내게 물었다.
"그 은봉황에는 발해 왕가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지. 네가 그 안에 새로운 기억을 저장해넣는 게 가능하겠냐?"
"잠깐 살펴볼게."
우웅
나는 은봉황을 들어서 안의 용량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용량은 많이 남아있어."
"어느 정도?"
"대략 3할 정도는..."
"그럼 한 번 해 봐."
"잠시만..."
나는 흑요석에 기억을 저장할 때처럼 술법을 시전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따끔한 느낌이 손부터 시작해서 전신에 퍼져나갔다.
파직!
"으읏."
나는 은봉황을 급히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제갈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돼. 여기에 기억을 저장할 수 없어."
"흐음... 왜 그렇지?"
"나도 모르겠어. 날 거부하는 것 같은데."
"......"
제갈사는 뭔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백웅. 당분간은 수련에 열중해야겠다. 그리고 연종휘를 좀 불러와."
"어? 왜?"
"시킬 게 있으니까."
나는 연종휘를 제갈사에게 불렀고, 제갈사는 뭔가 비밀스러운 지령을 그에게 내리는 듯 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내가 신경써 봤자 무의미했으므로 나는 수련을 하러 갔다.
수련은 길어졌다.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을 하루의 절반으로 잡고, 나머지 시간동안 마도의 지식을 축적했다. 그러다보니 그냥 무공만 수련할 때보다 더 지쳐서 며칠인가 쉬는 시간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략 석 달 정도를 공부했을까?
제갈사가 하루는 나를 가르치다가 말했다.
"이걸로 [옛 지배자] 중에 어떤 놈이 있는지 정도는 알게 된 것 같군."
"으음..."
"자세한 걸 몰라도 일단 다 외워. 그래야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테니까."
나는 그 동안 제갈사가 쉴새없이 쏟아내는 지식을 공부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암기력은 좋았지만 이해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몇십 번이고 타박을 받았다. 그래도 석 달 동안 용맹정진한 결과 기초지식을 이해한 것이다. 나는 의아해서 제갈사에게 물었다.
"적어도 수백 마리나 존재하는 것 같은데... 신적인 존재가 왜 그리 많지?"
이게 이상하다. 나는 [옛 지배자]라고 하면 극도로 강력한 몇몇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정작 제갈사가 알려준 [옛 지배자]의 명단은 수십 수백에 이르렀다. 인간의 언어로는 발음할 수 없는 언어라서 그저 문양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의문을 느끼자 제갈사가 말했다.
"일전에 [옛 지배자]는 물질계 출신과 신좌(神座) 출신, 두 가지로 나뉜다고 했지."
"음, 그랬지."
"성골이자 진정으로 우주를 도모할 정도로 강력한 신좌 출신의 [옛 지배자]는 드물고, 대개는 물질계 출신이다. 그래서 어떤 놈은 대라신선의 힘으로도 토벌할 정도로 약한 경우도 꽤 있지."
"그렇게 약한데도 [옛 지배자]라고 불린다고?"
대라신선을 약하다고 표현하는 게 건방질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내가 대적해 왔던 [옛 지배자]의 힘을 생각하면 의구스러운 일이었다.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를 일컬어서 [옛 지배자]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이다.
"[옛 지배자]라는 건 경외의 표현이다. '혼돈'에서 태어나서 신의 지위에 오른 자들을 통틀어서 지배자라고 하는 거지. 지금까지 배웠듯 놈들 사이에서도 격차가 많이 나고, 네가 지금껏 마주쳤던 놈들은 해신을 제외하고 모두 극한의 마신이라 할 수 있겠군. 네가 좀 특수한 경우라고 본다."
"흐음."
"현재 마왕급이나 사도급인 놈들도 수천 년 이상 생존해서 더 힘을 쌓는다면 [옛 지배자]라고 불릴지도 모르지. 어쨌든 [격]이 문제니까."
나는 문득 생각나서 질문했다.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라니, 그건 부모가 없다는 뜻이냐?"
"그런게 아냐. 빌어먹을, 네 녀석은 아직도 마도에서 혼돈이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잘 모르는군."
짜증을 내던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넌 왜 연금술을 이렇게 못 배우는 거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합식은 다 외우겠는데 응용하기가 좀..."
그랬다. 복잡해보이는 조합식이나 재료의 목록같은 건 뛰어난 암기력으로 어떻게든 석 달 동안 외웠지만, 정작 그걸 내 나름대로 배합하거나 '왜' 그렇게 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제갈사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제기랄. 이걸 못 배우면 마도의 기초적인 비술을 익히기도 힘들고, 나아가서 동방의 연단술을 익힐때도 상승효과가 없다. 일 년 내에 연금술을 기초까지 다 익히는 걸 목표로 하자."
"너무 타박하는 거 아냐? 서양 연금술사들은 도제로 들어가서 한사람 몫을 하는데 적어도 십 년이 든다고 하는데..."
나는 제갈사가 노골적으로 실망하자 불평했다. 석 달 동안 놀고먹은 것도 아니고 무공수련을 열심히 하고 나서 머리까지 혹사시켰는데 너무 박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제갈사가 말했다.
"내가 왜 연금술 획득을 서두르는줄 아냐? 네 녀석도 언젠가는 수정석비와 수요의 힘으로 초상기인을 제조해야하기 때문이고,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이번 생 내에 할 수 있어야겠지."
"어? 내가 초상기인을 만든다고?"
"그래야 전생한 다음에 시도할 전략이 늘어나잖아. 언제까지 나한테 의존할 거냐? 내가 없었으면 네 녀석은 한 10번 더 죽어야 초상기인을 써볼 수 있었겠지. 운도 좋은 새끼."
"......"
할 말이 없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새삼 예전에 제갈사를 영입하자고 제안했던 검마에게 고마움이 느껴진다.
그는 손에 깍지를 꼈다.
"초상기인을 제작하는 비술은 연금술에서도 숙련된 경지를 얻어야 하고 팔괘 기문둔갑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하며 인체의 공학적인 설계에 대해서도 능통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너는 이 3가지 분야에 기초는 되어 있지. 난이도가 높은 비술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얻을 수 있어."
"넌 얼마나 수련해서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데?"
"글쎄... 열심히 공부하니 1년 정도."
"......"
연금술, 팔괘 기문둔갑, 의술 모두를 달인 수준으로 익히는데 일 년이 걸렸단 말인가? 역시 제갈사 또한 제갈가문의 천재인 건 확실했다. 제갈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배교비술로 수련능력을 2배로 올려봤자 무의미할 정도로 재능이 뒤떨어져. 당분간은 무공수련을 접고 내 밑에서 연금술만 배워라."
"어?! 그래도 돼?"
"절대지경은 하루아침에 안 되는 거니까 당장 얻을 수 있는 것부터 빨리 얻자는 말이다."
"알았어."
그 날 이후로 나는 당분간 무공수련을 그만두고 연금술에 용맹정진하기로 했다. 이청운은 이야기를 듣자 자신의 창을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나도 다른 자들과 함께 무론(武論)을 토의하는데 참여하겠네."
"다른 사람들은 절대지경에 오를 것 같습니까?"
이청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말 나도 모르는 일일세. 그건 실력과 운이 모두 필요한 것이니... 어쩌면 그들 중 누구도 십 년 내에 얻지 못할지도 모르지."
"......"
"절대지경의 초입을 들여다보는 것과, 직접 그 단계에 발을 디딘 것은 천지차이일세. 중간단계에서 헤매는 게 길어져도 이상할 건 없는 걸세.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천재라도 말이지."
"저는 어떻겠습니까?"
"근래에 자네의 경지가 심후해졌으나 아직 묘역에 완전히 빠져들지 못했으니... 아무튼 연금술이란 걸 얻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세."
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 나는 언제 절대지경에 오를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달해야만 한다. 그래야 신(神)과 싸우기 위한 최소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실력만 해도 무림에서는 주름잡는 실력인데도 이면의 세계에서는 한숨이 나오는 실력이라는 게 답답했다.
그리고 나는 제갈사와 함께 폐관수련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연금술을 지도받기 시작했다. 제갈사는 온갖 광물이나 연금술 재료등을 가져와서 내게 직접 실험하고 공부하게끔 했고, 또한 쉴새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게 했다.
"으윽..."
나는 공부를 하다가 너무 머리가 아파서 손을 부르르 떨었다.
' 망량 밑에서 기초학문 공부할 때보다 몇 배는 힘들어...'
차라리 그냥 몸을 움직이는 육체수련이라면 마음을 비울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런 공부는 내 머릿속을 완전히 갉아먹듯이 힘들기 그지없었다. 연금술이라고 해도 하나의 공식에 수십 개의 원리가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좋지 않으면 제대로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약 일 년이 다시 흘렀다.
나는 그 날도 멍하니 연금술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 잠깐 그만두고 나와 봐라."
"응?"
"일이 생겨서 회의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어두운 골방에서 비척거리며 걸어나갔다. 이렇게 미친듯이 공부만 한 건 오랫만이었으며 정신이 분열될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거기에는 망량을 비롯한 모든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망량, 무슨 일이오?"
망량은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소."
"우려하던 일?"
"우리가 이청운 어르신을 영입할 때 당초에 가장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 버렸소."
"......"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련교주가 강해졌다는 거군."
"후우, 그렇소."
천령단을 지닌 호법사자의 무예는 고스란히 백련교주도 익힐 수 있게 된다!
이 법칙을 알아냈기에 그 동안 우리는 이청운을 살려내서 영입하는 걸 꺼려하고 있었다. 절대지경의 고수 이청운에게 무예를 배우고 동료로 만드는 건 분명 환영할 일이지만, 이청운이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배워서 강해질수록 백련교주도 그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해서 자리에 앉으며 질문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지금까지는, 황궁과 백련교가 길항상태를 유지했소. 원래부터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긴 했지만 황궁에서 크게 인신공양을 벌이려던 참에 우리가 한 번 억눌러줬기 때문이오."
"그랬었지."
얼마 전에 동창, 금의위, 태룡전을 비롯한 황궁 주요건물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갈유룡의 예비몸체가 장비되어 있던 비밀장소도 폭파시켰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망량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 때 이후로 쭈욱 반천맹을 암중에서 움직이며 황궁을 견제하면서 백련교와의 미묘한 힘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왔소. 하지만 그 균형을 맞추는 데 실패한 모양이오."
"백련교 쪽에서 나섰소?"
"그렇소. 이건 사흘 전에 백련교주가 천하무림에 포고한 격문(檄文)이오."
촤라락
비단으로 만들어진 격문지가 쫙 펼쳐졌다. 나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었다.
[ 나 초조(初祖) 달마의 후예이자 백련교 천년무류의 종주 독고운천이 천하에 고한다.
이 천하에 횡행하고 있는 강대한 마(魔)가 어디 한둘이던가?
나는 분하게도 힘이 부족하여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천상의 절예를 얻었으니 이제 곧 그대들의 종파를 대 백련교의 품안에 거둬들이려 하노라.
뜻있는 자는 본교에 투신하여 천년왕국의 기초를 다지는 반석이 되어라. 능력있는 자와 뜻있는 자를 거둬들여 후한 대접을 하겠다.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 만세누대(萬世累代)에 남는 진공가향(眞空家鄕)을 이룩하자.]
"......"
"또한 이 격문과 함께 백련교 가입을 원하는 종파는 보름 후까지 회신을 보내달라고 추신을 붙였소. 명백히 백련교가 중원무림을 접수하겠다는 포석이오."
나는 격문에 적혀 있는 단어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천상의 절예... 이건 칠대절학과 팔선신공을 교주가 얻었다는 뜻이군."
"그렇소."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 자신만의 경지를 한층 상승시켰을 것이 분명하오."
"... 그건."
나는 슬며시 이청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청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교주 또한 내가 살아있다는 걸 감지했겠지. 그리고 내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긴다는 확신이 있으니 이런 격문을 돌린 게 분명하네."
"지금의 교주는 얼마나 강할까요?"
"글쎄... 알 수가 없네. 하지만 교주를 이대로 놔두면 자네의 19번째 삶이 재현될 뿐일세."
이청운의 말대로였다. 교주가 이런 포고를 천하무림에 뿌린 이상, 그는 빠르든 늦든 무림을 자신의 손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의 힘을 손에 넣고 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황궁과 겨뤄서 황궁세력을 전멸시키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예전처럼 황궁의 [옛 지배자]와 거래해서 광기어린 인신공양 후 무생노모의 법문을 찾으려고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교주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전에 막아야겠군요."
"우리도 그 방법을 고심하고 있던 중일세."
옆에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막지 않는 방법도 있긴 해."
"뭐?"
"교주가 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고, 그 놈이 신의 힘을 빌려서 무생노모의 법문을 모두 모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거지."
"......"
"궁금하지 않냐?"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전생을 단축시켜주는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중원의 인간이 씨가 마를텐데 그걸 두고볼 순 없어."
"크크... 그런 대답 할 줄 알았다. 정말 재미가 없다니까..."
제갈사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다행히 우리는 교주의 진의를 알고 있으니 효과적인 견제방법을 쓸 수 있소.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미리 막아보는 게 어떨까 싶소."
"이이제이?"
"그렇소."
망량이 진중하게 말했다.
"십이율주를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