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6 암천향(暗天鄕)
파앗
나는 먼저 흑마의 비밀장소로 향했다. 이 곳에는 흑야문의 비전절기와 비급이 숨겨져 있었기에 먼저 서책부터 챙겼다. 그리고 이 장소에 함께 보관되어 있던 흑마의 직인과 땅문서, 재산문서 따위를 모조리 얻어냈다.
' 이제 이걸로 대백전장을 찾아가서 돈을 찾으면 은자 수천냥은 되겠군. 대백전장만 그 정도고 다른 전장까지 합치면 엄청난 재산...'
하지만 가능하면 소리소문없이 해야 한다. 그리고 뒤에 흑마에게서 추적을 당할 여지가 없어야 한다. 나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장령곡으로 돌아온 후, 즉시 침구를 뽑아서 성형술을 시작했다.
' 예전에 화서명한테서 한번 더 배웠으니 이제 기초 수준이라면...'
제대로 된 전신성형술이라면 두 달 동안 신의(神醫)가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성형술이 필요 없다. 그저 얼굴의 형태만 조금 바꾸면 되는 것이므로, 나는 침착하게 침을 꽂으며 전신의 정경십이경을 따라서 경락의 힘을 돋우었다. 그리고 서서히 근골이 완화되는 걸 느끼면서 차분하게 새로 만들 얼굴의 형태를 머릿속에 그렸다.
' 좀 남자다운 얼굴... 그리고 원래 내 외모와는 완전히 다른 걸로.'
우드득 우드득
침을 꽂고 기를 끌어올린 채 약 한 시진이 지나자 서서히 뼈와 살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으므로 나는 륜비분운의 자세와 함께 마보를 취하며 기를 안정시켰다. 기를 안정시킨 작업이 끝나자 나는 꽂아놓은 침의 위치를 바꾸면서 섬세하게 내가 변용시킬 외모를 떠올렸다.
그렇게 약 세 시진이 지났을까?
드디어 내 얼굴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또한 상체의 근골도 다소 커다랗게 바꾸었기에, 나는 완전히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청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서 호법을 서 주고 있던 극호가 이죽거렸다.
"크크, 산적두목이 될 것 같구만."
"어차피 이 외모는 사흘밖에 못 가. 특징있는 외모일수록 원래 모습을 숨기는 데는 좋잖아."
"그래도 니 원래 얼굴보단 낫다."
"신경 꺼, 씨발!"
나는 툴툴거렸다. 전신성형술과 달리 임시로 펼친 성형이기 때문에 효력은 길어봐야 사흘이었다. 기과 침술의 힘으로 억지로 근골을 땡겨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성형이 풀리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극호가 궁금한듯 질문했다.
"야. 그런데 전신성형으로 절세미남이 된 다음에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는거냐? 애도 미남미녀가 되냐?"
"엉?! 어... 그게..."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기에 당황했다. 정말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화서명도 그런 경우는 설명해준 적이 없다! 내가 말문이 막히자 극호가 킬킬거렸다.
"모르겠으면 나중에 나한테 전신성형 좀 해줘~ 내가 예쁜 아가씨랑 시험해볼게."
"......"
파앗
나는 극호의 실없는 소리를 무시하고 대백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흑마의 직인을 보여주며 그가 대백전장에 남겨뒀던 재물들을 모조리 취했다. 또한 각지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흑마의 재산을 모두 털었고, 마지막으로 왕야의 정원을 처리하기로 했다. 망량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반천맹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매수자를 찾아보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오래 끌면 안되오. 흑마가 눈치채기 전에..."
"괜찮소. 하루면 될 것이오."
망량의 호언장담 대로였다. 하루는 커녕 반나절만에 사고싶다는 연락이 전서구를 통해서 날아온 것이다.
"흐흐흐, 정말로 정원을 제게 파시는 게 맞습니까?"
눈 앞에 서 있는 상인은 호남 성에서도 손꼽히는 거부라고 하며, 내가 정원을 판다는 이야기에 크게 들떠 있었다. 그 또한 왕야의 정원이 가지는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가격은 그쪽이 제시하시오."
그러자 상인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선제시라니 장사를 알고 계신 분이군요."
"불러보시오."
"황금 열 관."
"장난하시오?"
"음... 스무 관."
나는 버럭 소리를 쳤다.
"마지막 기회요! 잘 생각해서 말하시오. 당신 말고도 산다는 사람 많소."
그러자 상인은 두툼한 얼굴살에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생각보다 당황했는지 품속에 있던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그는, 힘겹게 말했다.
"... 오십 관!! 이걸로 어떻습니까? 이 이상은 불가입니다."
"흐음..."
"금 오십 관이면 조그마한 성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이상은 제 자금으로도 무리이니 부디..."
나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정원의 소유문서를 그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희희낙락하는 거부에게 질문했다.
"정원을 얻어서 뭐에 쓸 생각이오? 난 그건 좀 알아야겠소만... 솔직히 정원이라는 게 그렇게 실용적인 가치는 없잖소."
거부는 슬슬 눈치를 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흐흐. 다시 왕야한테 팔 겁니다."
"뭐?"
"안쪽 구조를 좀 더 개조하고 특별한 선물까지 담아서요... 흐흐."
"특별한 선물이라니?"
"뭐... 왕야의 취향에 맞는 여인들을 조금... 겸사겸사 황족에게 끈을 대는 것이죠."
"......"
나는 거부의 생각에 기가 막혔다. 이 놈은 왕야에게 여색(女色)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 아마도 시중에서 빚진 여염집 여자를 빚탕감이라는 미끼로 꼬셔서 기생으로 만드는 모양이군... 그걸 또 왕야한테 향응을 제공하려고.'
과거 표사로 일했던 사회의 흐름으로 대충 무슨 전말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타락한 놈의 생각이었지만 나는 굳이 이 놈을 내 손으로 제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음... 그러시던가."
어차피 저 놈은 내가 손대지 않아도 죽을 운명이다. 나는 돈을 챙겨서 빠질 테지만, 멀쩡한 흑마의 재산을 재구입한 저놈은 흑야문 소속의 살수들에게 고문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살해당하는 것밖에 없으리라. 쓰레기의 손으로 쓰레기를 심판하는 셈이니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나는 흑마의 재산을 다 털어먹은 결과를 망량 앞에 가져왔다. 그러자 망량이 흡족한 듯 말했다.
"과연! 이 정도면 교섭에 나설 수 있겠소."
"교섭에는 나도 같이 가겠소."
"그야 당연한 말. 단지 역용술을 또 한 번 펼쳐도 몸에 부담이 가지 않겠소?"
"근골을 땡겨서 형태를 임시로 고정하는 거니까 당연히 부담이 가지. 하지만 내 내공과 체력이면 큰 부담은 아니오."
"그럼 칠주야 후에 마테오 리치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겠소."
나는 망량 앞에서 물러나와서 다시 수련을 하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청운에게 가던 도중 제갈사가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백웅."
"제갈사."
"수련은 잘 되어가냐?"
나는 머리를 긁었다.
"아직 갈고닦는 단계라서."
"절대지경까지 50년 이내에 가능하겠냐?"
"... 모르겠어. 100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르고."
"역시..."
제갈사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미 이청운과는 이야기했다. 너는 오늘부터 무공을 닦으면서 나한테서 마도(魔道)를 좀 배워라."
"응?!"
"지금껏 수 년을 지켜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무공에만 전념해도 아무런 효율이 없단 말이다. 지금 벽에 부딪혔으니 틈틈히 마도에 관련된 지식과 술수를 배워두는 편이 좋을 거다."
나는 제갈사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초절정에서 절대지경까지 오르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게 뻔하므로 다음 생에 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마도의 지식을 전수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마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혼대법도 같이 수련하는 건가?"
"물론. 하루를 둘로 쪼개어서 낮에는 무공을, 밤에는 내게서 마도를 배우는 거다."
"알았어."
곧 밤이 되었다. 나는 제갈사의 음습한 연구실에 앉아서 엷은 불빛을 받으며 그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제갈사는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채 말했다.
"백웅. 너는 마도를 뭐라고 생각하냐?"
"음... [옛 지배자]의 힘을 빌리는 술법이지. 그리고 놈들에게 관한 지식이기도 하고."
"맞다. 본질적으로는 개미만도 못한 인간이 [옛 지배자]의 뒷구멍을 핥고 힘을 얻으려는 게 마도사지."
"......"
"하지만 오랜 수양과 자기단련이 필요한 술법과는 달리 마도는 굉장히 빨리 힘을 얻을 수가 있다. 왜인지 알고 있냐?"
나는 제갈사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어쨌든 [옛 지배자]가 힘을 빌려주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지."
"바로 그거야. 백웅 너는 오랫동안 전생하면서 마도와 상대해 와서 그 본질을 파악하고 있군, 크크."
제갈사는 낄낄거리다가 말했다.
"백웅 너도 알다시피 [옛 지배자]의 권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이 아무리 술법을 수련해봤자 천우진이나 대라신선 정도가 한계이지만, 제대로 마도의 힘을 빌린 자는 가볍게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있다. 사도가 되거나 마왕이 되면 말이지."
"그렇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궁을 감당하기가 힘든 것이다. 당장 삼대세력 중에서 전력은 약하다고 할지라도 언제든 신에게 큰 공물을 바치고 거대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제물을 많이 모아서 인신공양을 팍팍 올리기만 하면 아주 쉽게 강해지겠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보물을 올리면 되겠지?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갈사'가 백웅 너한테 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던 이유가 뭐라 생각하냐?"
"음!"
"네가 갖고있는 보물을 귀찮게 천계나 삼황오제한테 바칠것도 없이 [옛 지배자]한테 공물로 주면 될텐데."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한참동안 팔짱을 끼며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뭔데...?"
"그건 말이다, 이 중원이 삼황오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야?"
"칠요가 삼황오제의 수호를 증거하고 삼황오제는 모든 마도의 발현을 억누르고 있다. 그 때문에 네가 한꺼번에 거대한 공물을 [옛 지배자]에게 바치려 할 경우 천계에서 즉시 감지하게 될 거고, 그 정보는 바로 삼황오제에게 들어가겠지. 그리고 삼황오제는 즉시 너를 개미 누르듯이 죽여버릴 수도 있다."
"... 하지만 죽는다고 해도 힘을 얻으면 다음 전생에 이어지니까 이득이잖아."
내가 반문을 하자 제갈사가 성질을 냈다.
"빌어먹을 빡대가리 새끼야, 말 못 알아들었냐? 네가 아무리 [옛 지배자]한테 거대한 공양을 하려 해도 미리 눈치채고 중간에 삼황오제가 차단을 할 수 있다고. 삼황오제쯤 되는 신격이 그걸 못 할 것 같냐?"
"아!"
신경질을 낸 제갈사가 말했다.
"다만 시험해볼만한 건 몇가지 있지. 그래서 나는 먼저 네게 그 방안을 알려주겠다."
그리고 대략 한 시진동안 제갈사가 내게 시험해볼만한 작전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했기에 나는 듣다가 황당해서 외쳤다.
"아니, 진짜 이걸 다 해 보라고?"
"그래. 가능하면 동료모으기를 하기 전에 대충 하고 죽어버려."
"아니 제기랄... 자기가 죽는거 아니라고 진짜..."
죽을 때 얼마나 아픈데!!
내가 짜증을 내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병신아. 나라면 너처럼 동료모으기같은거 안 해. 이것저것 편법과 괴법을 다 동원해서 수단방법 안가리고 힘을 모았겠지. 방해되는 놈들은 싸그리 몰아죽이고 주지육림을 누리기를 매번 반복했을 거다. 그리고 마왕급 이상으로 몸집을 불려서 싸웠을 텐데 네 녀석이 너무 정공법을 취하고 있는 거다."
제갈사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후... 하긴 어쩌면 궁극적으로는 네 녀석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
"그냥 혼잣말이다. 아무튼 전생하다가 성장치가 한계다 싶으면 방금 설명해준 것들을 다 해 보도록."
"알았어."
"그리고 지금부터는 마도의 기본지식과 기초술수, 그리고 [옛 지배자]에 대해서 가르쳐주마. 하는 김에 기초 연금술도."
나는 그로부터 칠 주야동안 하루에 거의 한 시진도 자지 못하고 낮에는 무공, 밤에는 마도지식을 배우는 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나는 제갈사가 '기본'이라고 표현한 지식들 대부분을 외우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 너무 양이 방대해!'
놈은 기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진짜로 양이 너무 많았다. 어디서 또 새로운 지식이 나오는지 칠 주야동안 제갈사가 풀어놓은 지식들 중에는 겹치거나 반복설명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식이 새발의 피라고 하니 실제로는 수십배나 외워야 할 게 많을 것이다.
제갈사는 마지막 날에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래? 이건 무공이나 술법에 비하면 아주 쉬운 거야."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벌써 설명한 게 책으로 치면 백 권치는 된다고."
"무공이나 술법은 암기력이 좋아봤자 타고난 감각과 오성이 없으면 결코 대성할 수 없지. 하지만 마도는 요령좋게 잘 외워서 공양물만 잘 마련하면 신의 후광을 업고 춤을 추는 직종이야. 막말로 십년 내내 외우면 이 정도를 못 외우겠냐?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마도가 쉬워질 거다."
"어? 그런 거냐?"
"크크크. 나중에 실감할걸."
그가 손에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단, 기초수준을 넘어서 심대한 고대의 비밀을 다룰 때부터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옛 지배자]나 이족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니까."
"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약간 의문이 생겼다.
' 난 광기같은 거 느낀 적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무섭다는 걸까?
왜 무서운 거지?
마도서의 무섭게 생긴 [옛 지배자]의 삽화를 봐도 아무 생각도 안 든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선 칠 주야동안의 수련을 이걸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망량에게로 찾아가자, 그는 이청운과 극호를 대동한 채 출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진소청과 검마는 현재 좀 더 심득을 얻었기에 심화수련에 빠져서 같이 갈 수가 없었다.
"백웅. 갑시다."
오늘을 위해서 원래와는 다른 모습으로 성형했다.
파앗!
우리는 광동성의 항구로 향했다. 망량한테서 다두왕국의 마테오 리치와 교섭해야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리 광동성의 항구로 가서 비등으로 향할 장소를 찍어놓았기에 바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두왕국으로 직접 가는 게 아니라 그와 만날 장소도 내륙인 이 곳으로 정했다.
우리가 간 곳은 뜻밖에도 광동성의 내성(內城)이었다. 위사가 호위하는 마차에 타고 내성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명의 관리들이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고급스러운 전각의 2층으로 올라가자, 그 곳에는 색목인이 여러명 앉아 있었다.
' 마테오 리치!'
그리고 탁자의 정중앙에 앉아 있는건 예전에도 한번 본 기억이 있었던 서양의 수도사, 마테오 리치였다. 그는 우리를 보자 일어서서 만면에 미소를 띄며 인사했다.
"이런, 안녕하십니까! 반천맹주 일행을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주 능숙한 한어라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서양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어에 능통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망량이 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고명하신 수도사님과 위대한 광동성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흡족한 듯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허허, 반갑네."
이 자리에는 마테오리치 뿐만이 아니라 광동성주까지 동석한 것이다. 일개 성을 주무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로 굉장히 큰 회담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인사치레를 약간 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테오리치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빛 봉황조각의 가치는 굉장히 높습니다. 그래서 고국에 가지고 돌아갈 생각입니다만... 오늘 거래가 서로에게 득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물론입니다. 저희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유념하고 있습니다."
망량이 내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수레에 갖고왔던 금괴를 갖고오기 시작했다.
쿠궁
"......!!"
"허어!!"
이윽고 바닥에 금괴가 총 백오십 관이 쌓이자 장내의 모두가 놀랐다. 이 정도 돈은 가히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인이나 거부라면 이 정도 돈을 취급할 수도 있으나 고작해야 조각 하나 때문에 쓸만한 돈은 아니었다.
망량이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값이 아니겠습니까?"
옆에 있던 광동성주가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괴, 굉장하군. 저 정도면 선단을 몇 개나 건조할 수 있겠어. 이마두 그대도 받아들일만한 조건이 아니겠나!"
"......"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시선은 금괴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되려 그는 뭔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 응?'
마테오 리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의 거래에는 한 분이 더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 중 높은 가격을 부르는 분께 봉황조각을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성주께서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마테오 리치가 되려 이상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자 우리는 광동성주를 쳐다보았다. 광동성주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게...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지원해주던 자라서... 은빛 봉황조각 얘기에 흥미를 가져서... 어흠! 그래서 오늘 같이 물건을 보게 되었다네."
망량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성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일대일 거래인줄 알고 나왔거늘..."
심지어 거래정보가 성주를 통해서 새어나간 게 아닌가?
무슨 이런 막장상황이 다 있단 말인가?
"미안하네! 그런데 그 자한테도 물건을 볼 기회를 주게나. 내 부탁일세."
저벅
그 때 장내로 세 명의 인영이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돈을 가져왔군. 반천맹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나타난 자들 중 중앙에 서 있던 자는 힐끔 망량을 보며 말했다.
"반천맹주. 거지들도 이따금 좋은 걸 사고 싶다네."
"......"
망량은 굳어진 얼굴로 성주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광동성주가 민망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괴인을 소개했다.
"소개해겠네. 이쪽은 개방의 전대 방주이자... 천하 삼대기인(三大奇人) 중 한 사람인 걸선(乞仙)이라 하네. 내 오랜 지인이자 후원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