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4 암천향(暗天鄕)
나는 망량과 함께 어두운 폐허의 중심으로 향했다. 폐허는 갈수록 어두워졌고 깊어졌다. 그리고 그 암굴을 빠져나오자 탁 트인 장소가 출현했고, 그 복도를 걷는 동안에 갈수록 거대한 소리가 났다.
콰앙!
콰치칭!!
아주 크고 요란한 소리였고 폭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옛 발해의 양식으로 장식된 복도를 걸으면서 그 소리의 본질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 뭔가를 치고 있군!"
"그렇소."
조금 더 앞으로 가자, 그 곳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퍼버버버벙
뇌광만천(雷光滿天)!
대번에 그 말을 떠올릴 정도로 엄청난 번개가 뿜어져 나오며 쉴새없이 거대한 문을 타격하고 있었다. 수천 개의 번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제각각 창과 칼같은 형상을 띄며 공격하는 듯 했는데, 하나하나에 가공할 잠력이 담겨 있었다. 마치 공성철추가 때리듯 무수한 타격이 전방의 시야를 따갑게 만들었다.
콰과광
폭음은 잠시 후 멎었고, 우리 앞에 푸른 번개가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서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뇌신지혼을 발동해서 거대한 문을 때리고 있던 건 이청운이었고, 그는 나를 보자 반가운 듯 말했다.
"오, 백웅! 드디어 검뢰를 얻었는가?"
"한 눈에 알 수 있습니까?"
"자네는 수련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뛰쳐나올 사내가 아니니까."
이청운의 말에 나는 왠지 쑥쓰러워서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해후를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역시 문의 파괴는 힘들겠습니까?"
"으음, 안 돼. 저 문은 물리적으로 열리는 게 아닐세."
이청운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천령단을 보유한 내가 무한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뇌신지혼의 힘을 모조리 파괴력에 밀어넣고 무려 칠 일 밤낮을 때렸네. 내 뇌신지혼의 일격이면 거대한 성문을 한방에 고철덩어리로 만들 자신이 있는데, 저 정도면 수십만 관의 폭약을 갖고와도 부서지지 않을 걸세."
"......"
나는 질린 눈으로 전방에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저 문은 둥그런 공간을 마치 감싸듯이 일체화되어 건조되어 있었는데, 문을 열지 않으면 내부공간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듯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문 바깥쪽을 파내는 건 어떻습니까? 지하로 땅굴을 판다던가..."
스윽
이청운은 그 말에 검지손가락으로 한 공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땅굴도 있었고 절벽을 파낸 듯한 흔적도 있었다. 이청운이 말했다.
"보이는 것만이 결계가 아닌 듯 싶네. 다른 방향을 시도해 보아도 마치 공간 그 자체가 이동하듯이 막히고 말더군."
"으음!"
망량이 말했다.
"백웅. 어찌된 일인지 설명하겠소. 우리는 이 폐허에 와서 발해의 서적을 꽤 수집했고 연구했지만, 가장 중요한 발해왕실의 비밀은 저 왕실(王室)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그래서 칠주야 전부터 왕실의 문을 열기 위해 도전하고 있으나 안되는 거요."
"왕실이라."
나는 거대한 철문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저건 엄청난 술법으로 봉인된 결계인가 보군."
"우리 생각도 같소. 저건 발해 왕실의 마지막 힘을 다해서 쳐둔 결계가 분명하오. 혹시나 해서 여태껏 개문을 시도해보긴 했으나, 이청운님이 뚫을 수 없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물리력으로는 뚫을 수 없을거요."
"그렇다면 천우진을 불러오는 수밖에 없겠소?"
"그 수밖에는..."
이청운이 옆에서 말했다.
"백웅. 또 하나의 방법이 있긴 하네. 그건 바로 정공법 - 저 문의 열쇠를 손에 얻는 것일세."
"열쇠?"
저벅
나는 이청운을 따라서 앞으로 걸어갔다. 철문의 바로 앞까지 온 이청운은 품속에서 은빛 봉황조각을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문의 음각(陰刻)에 그 봉황조각이 딱 맞게 들어갔다. 하지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왼쪽에만 들어가는군요."
"그래. 그 말대로일세. 이 봉황조각은 아마 이 왕실의 문을 여는 열쇠가 분명하지만... 열쇠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오른쪽과 왼쪽의 음각에 2개의 봉황조각이 모두 끼워져야 열리는 구조라고 생각되네."
"으음!"
그렇다면 또 하나의 봉황조각을 얻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나는 고민하던 중 말했다.
"하지만 내 과거 전생에서 반천맹을 운영하던 '망량'은 발해 왕실의 비밀과 토요에 대해서 일정부분 진실을 밝혀냈었소. 그건..."
"아마 그 때의 망량은 왕실의 열쇠인 2개의 봉황조각을 모두 얻어내서 문을 열었을 것이오. 내가 이 상경용천부의 유적에서 알아낸 자료도 꽤 많지만 그 때의 '망량'만큼의 정보는 얻지 못했소."
"으음."
"[문]을 열었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지."
망량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천운(天運)이었겠지. 그리고 그 때는 망량이 반천맹을 십 년 넘게 운영하며 그 일에 모든 인적자원과 금력을 투자했었던 것이오. 물론 지금의 우리 세력에 비하면 일천하긴 하지만 어쨌든 백련교와 손을 잡고 금의위를 견제할 정도면 반천맹도 나름대로 대세력이지 않았겠소?"
"그렇군..."
"그때와는 달리 우리는 이제야 왕실의 존재를 알아냈으니 적어도 십 년은 중원을 뒤져야 또 하나의 봉황조각을 발견할까 말까일 것이오."
"......"
나는 내심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 빌어먹을! 나는 왜 그때 그런 멍청한 짓을...'
그 때 비강장과 억지로 싸워이겨서 망량에게 내 무공을 보여주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었다면 진랑곡 근처에서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망량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다면, 망량에게서 좀 더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새삼 과거의 내 바보같은 짓이 한탄스러웠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무겁게 말했다.
"그럼 일단은 천우진을 불러와서 술법으로 발해왕실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
"그래야 할 것이오."
파앗!
나는 망량과 함께 천우진에게 갔다. 그리고 망량은 천우진을 만나자마자 그에게 대뜸 이야기했다.
"사제. 일 하나를 도와주게."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사제에게 무슨 일을 시켜서 굴려먹으려 하시오?"
"맨입은 아닐세. 선보수를 주겠네."
휘익
망량은 갑자기 품속에서 오화신염선을 꺼냈다. 천우진의 눈이 약간 커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천우진에게 오화신염선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 보패는 이제 사제 것일세. 그 대신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
타악
천우진은 오화신염선을 받아들고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알았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지. 어떤 일이오?"
"발해 왕실의 [문]을 여는 일일세."
"재밌을 것 같군."
파앗
우리는 천우진과 함께 다시 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천우진에게 은빛 봉황조각을 보여주며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는데, 설명을 다 들은 천우진은 미간을 약간 모으며 말했다.
"... 이거 골치아프구려."
그는 봉인된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이 결계는 대주술사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대가로 유지하고 있는 거요. 또한 그 영(靈)이 결계 자체에 녹아들어 있으니, 인세 최강의 결계라고도 할 수 있소."
"어느 정도란 말이오?"
휘익
천우진이 망량에게 도로 오화신염선을 던져주며 말을 이었다.
"수지가 안 맞단 말이지. 사형, 이번 의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그러자 망량은 황당해했다.
"무슨 말인가? 사제는 그 신열을 견디어내며 이미 대라신선... 혹은 그 이상의 술사가 되지 않았나? 그런 사제가 못 깬다면..."
"후우, 사형. 내 경지가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술법에는 인과관계라는 게 있소. 그리고 이것은 아주 강력한 원념과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진 결계이기에 결코 힘으로는 열 수 없게끔 되어있소. 자기희생은 저주에서 가장 강력한 봉인식이오."
천우진은 문을 퉁퉁 손으로 두들겼다.
"들어보시오. 이건 발해 왕가에 충성을 바치던 대술법사들이 떼죽음당한 소리요. 적어도 십수 명이 자기 목숨을 바쳐서 봉인되었고 윤회전생도 거부하고 결계의 일부가 되었소. 솔직히 이런 미친 결계는 내 생전에 처음 본단 말이오."
"......"
오오오오오오오
확실히 영기에 익숙한 내게는 그 소리가 조금씩 들려오는 것 같았다. 끔찍한 원한과 비명이 귓가에 스치는 듯 했다. 조금 더 영안을 떠서 보면 술법사들의 영혼도 보일 것 같았지만, 보나마나 끔찍한 몰골일테니 보고싶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혹시 발해 왕가의 정통한 계승자라면 열쇠없이도 열 수 있겠소?"
"흐음? 재밌는 의견이군."
잠시 생각하던 천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정통한 피의 맹약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은 있지만, 어쨌든 이 결계는 파훼방법이 한 개밖에 없소. 두 개의 봉황조각을 음각에 꽂아넣는 거요. 그리고 발해가 멸망한게 언제인데 그 핏줄을 어떻게 찾겠단 거요?"
"봉황조각, 그 수밖에 없나..."
"그럼 나를 데려다 주시오."
천우진은 귀찮은 듯 말했다.
"밭을 덜 갈았단 말이오."
"......"
그러고보니 이 놈 농사 지었지...
나는 할 수 없이 천우진을 마을에 데려다준 후 다시 봉인지 앞에 복귀했다. 망량은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일단 백웅, 본거지로 돌아갑시다."
"알았소."
"지금은 방법이 없겠구려."
파앗
우리는 장령곡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제갈사는 망량과 함께 뭔가를 한참동안 쑥덕거리며 이야기했는데, 약 한 식경 후 이야기를 마치고 나를 불러서 말했다.
"백웅. 연종휘를 좀 불러와."
"왜?"
"그 녀석이 단서를 갖고 있을 것 같아."
나는 그의 말대로 연종휘를 데리고 왔다. 제갈사는 연종휘를 차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연종휘. 네 말대로 봉황조각은 두 개가 있어야 열리게끔 되어있었다. 너는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해 낸 거지?"
연종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런 도안을 어렸을 때 본 것 같았기 때문이오."
"어렸을 때?"
연종휘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연씨 왕가의 후예인 만큼 우리 집안에는 고서가 많이 쌓여 있었소. 어렸을 적에 그 책을 독파하던 중에 비슷하게 생긴 도안을 봤던 걸로 기억하오."
"너희 집에 그 책이 어디있는지 알고 있나?"
"그게..."
연종휘는 껄끄러운 듯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 나이 십육 세 시절에 도적떼가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 집이 몽땅 불타버렸소."
"거짓말은 아니겠지?"
"왜 거짓말을 하겠소? 우리의 대의에 도움된다면 난 이 묵린장궁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있소. 나는 백웅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소."
"그 도적들과 싸워서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되기는. 다 죽였소."
"......"
역시 그 때부터 활의 명수였다는 건가?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제갈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 그럼 다른 질문을 하지. 종남산에 가려고 했다고 말했는데 거기 뭐가 있지?"
"전에도 말했잖소. 부모님이 그 곳에 가면 내 핏줄의 근원을 알 수 있을거라 했소."
"하지만 막연하게 가보라고만 해서 가지는 않는 법이지. 인물이든 유적이든 뭔가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겠지?"
"으음..."
연종휘가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 솔직히 말하면, 사람을 찾으라 하셨소."
"그 사실을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숨겼지?"
"주군께서 무공수련을 하는데 다들 전심전력으로 돕는 분위기 아니오? 괜히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가 다들 신경쓸까봐 별거아닌 일은 묻어뒀던 거요."
제갈사가 코웃음 쳤다.
"그런건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앞으론 숨기지 마."
"알았소."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야?"
"음... 분명히 먼 친척으로, 연무린(燕茂璘)이라는 자를 찾으라 했소."
그러자 제갈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무린이라... 나이라든가 외모, 특징같은건 없나?"
"잘 모르겠소. 다만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연무린은 타고난 기재라서 손쉽게 찾아낼 수 있을거라 했소. 아버지의 종친되시는 분께서 그를 거뒀다 들었소."
"기재? 무림인인가?"
"그럴 것이오."
제갈사는 거기까지 듣다가 곰곰히 생각하며 말했다.
"나는 연무린이란 이름을 들은 적 없어. 무림에 명성을 날린 인물 중에는 적어도 그런 이름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포함해서 강호의 유력고수들을 웬만큼 알고 있다. 아니, 강호행만 수십 수백년째이므로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나도 연무린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은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망량이 말했다.
"하지만 숙부. 짐작가는 게 있잖습니까?"
"그래. 하지만 워낙 어처구니가 없는지라..."
제갈사는 턱을 괴더니 말했다.
"...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겠지. 백웅, 네가 직접 나서 줘."
"응? 내가?"
"그래. 왜냐하면 예측이 맞다면 너와 연종휘 둘만 가는게 제일 좋은 상황이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종남파의 장문인에게로 가."
파앗!!
나는 연종휘와 함께 비등을 타고 예전에 왔었던 호수 근처에 도착했다.
' 여기도 오랜만에 오는군.'
종남산 한켠에 한적하게 마련된 이 장소는 구파일방 종남파의 장문인만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장소였다. 그리고 이 장소에는 장로조차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에 있는 오두막을 보자, 호수를 쳐다보고 있던 한 장년인이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칠십여 장.
보통 사람이라면 꽤 느긋하게 걸어서 올만한 거리였으나, 그 장년인은 마치 유령처럼 신법을 발휘하더니 숨 한번 쉴 사이에 이미 우리와 십 장 거리에 도달해 있었다. 가히 초절정의 신법이었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굉장한 고수로군. 이 연모와 검을 섞으러 오셨나?"
"......"
나는 난처함을 느꼈다. 물론 싸워서 질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다짜고짜 전투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연종휘가 그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잠깐! 저는 연종휘라 합니다. 혹시 그쪽은 종남파의 장문인이신 연정홍 님이 맞으십니까?"
흠칫
"여, 연종휘?"
그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연종휘의 등에 걸려 있는 묵린장궁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청년. 내게 용건이 있나?"
"혹시 연무린(燕茂璘)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침묵을 이기지 못한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그건 내 아명(兒名)이며, 지금은 버린 이름일세."
"그, 그렇다면 설마..."
그는 뭔가 포기한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 아버님의 성명이 혹여 연산세(燕霰貰), 맞는가?"
"그렇습니다."
"후우. 그럼 자네는 나의 팔촌(八寸)일세."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나를 찾아올 줄이야..."
"......"
천하에 명성높은 대문파인 구파일방 종남파의 장문인이자, 종남제일검(終南第一劍) 연정홍(演鄭鴻). 이광의 친우이며 구파일방에서 손꼽히는 초절정 검도고수인 그가, 사실 춘추전국시대 연씨 왕가의 후예이자 연종휘의 팔촌이었던 것이다.
연정홍과 마주앉게 되자, 그는 정좌한 채 고요히 운을 띄웠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역시 혈연을 찾기 위해서인가?"
"그렇습니다만..."
연정홍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저 자는 누구지?"
"제 주군인 백웅입니다."
"백웅... 처음 듣는 이름이군. 허나 굉장한 고수야."
그는 탄식성을 내더니 내게 질문했다.
"그대의 목적은 무엇이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패권을 쥐거나 섣불리 강호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소. 또한 종남파와도 볼일이 없는 과객일 뿐이오."
"말이라도 듣기 좋군. 그러면 여기에는 연종휘의 뜻에 따라 온 것이오?"
"그렇소."
듣고 있던 연종휘가 입을 열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주게."
연종휘는 자신이 태어난 후 지금껏 살아왔던 여정, 그리고 나를 만나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했다. 물론 장령곡이나 실제 우리의 목표같은건 전혀 이야기 하지 않았고 그저 강호를 방랑했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이야기를 듣던 중 연정홍이 말했다.
"연종휘. 연씨 왕가라지만 이젠 다 허명이고 무의미한 이야기... 자네가 나와 팔촌지간이긴 하지만 사실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지."
"......"
"하아! 나는 연씨 왕가로서의 지위나 책임같은 걸 인생에서 모두 버렸네. 그저 시간속에 묻혀가는 명가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고, 혹여나 그게 내 인생에 발목잡지 않을까 저어해서 아명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했네."
연종휘는 약간 화가 난 듯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이 너무하시군요. 저도 왕가의 핏줄이라는 게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어찌 자신의 근원마저 모두 부정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럼 연종휘, 자네는 왕가를 부흥시킬 생각인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연정홍은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다 무의미해. 나는 내가 원하는 이 삶을 선택했네."
연종휘가 대꾸했다.
"저도 딱히 왕가를 부흥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만나게 된 유일한 혈연이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알았네. 내가 말이 심했네. 앞으로는 조심하지."
연정홍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걸 보자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 그리 못돼먹은 자는 아니군.'
종남파 장문인이 현 무림에서 지니는 권위는 상당했다. 하물며 섬서무림에서 손꼽히는 초절정검객인 연정홍이라면 강호초출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연정홍은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연정홍은 옆에 있던 다기(茶器)를 끌어와서 차를 따라서 우리 둘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허면 내게 찾아온 건 그저 혈연을 확인하러 온게 전부인가?"
"그것도 있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연종휘가 자기의 품 속에서 은빛 봉황조각을 슥 꺼내서 연정홍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걸 혹시 본 적 있으십니까?"
"......"